잠깐 되짚어 생각해 보자. 물론 나 자신이 리돌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전혀 없는 것은 사실이다. 지금까지는 내가 리돌이 갖고 있는 권총도 그렇고, 말 할때의 행색이 전혀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잘 보살펴야 겠다는 동정심 때문에 그렇게 대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 알고 봤더니 내 의지 자체가 뿌리채 억제 당해서 그렇다고?!

 골몰히 생각하고 있던 중,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 나왔다.

 

 "증거를 보여 주세요."

 

 "네?"

 

 "아니, 성희 씨가 금성인이고, 그런 것에 대해서는 모두 다 믿을 수 있다 그겁니다. 그런데 내가 지금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는 말, 그거는 제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모르겠어요. 만약에 그렇다고 한다면, 제가 믿을 수 있게 증거를 보여 주시라 이겁니다. 그 방금 이야기하셨던 것 같은데. 파장이 집중되고 조종할 수 있다고요. 그걸로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 겁니까?"

 

 왠지 그런 게 있다. 나 자신이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내 행동에 이유를 붙이고 싶은데, 그게 안 되는 경우 '그냥 내가 하고 싶으니까' 라고 낙천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나 자신의 욕망에 의해서, 그리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그런데 이런 기본적인 욕구조차 내 뜻대로 진행이 되지 않는다고 하면, 그걸 당연한 듯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것은 리돌이 우리 집에 살게 된 경위와는 조금 다른 방향이다. 그 때는 당연히 '달나라 사람'이라는 존재를 의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하자면 지구인이 갖고 있는 인식의 한계에서 나오는, 말하자면 이질감 정도의 문제다. 하지만 지금 이 아가씨가 하는 말에서는 완벽하게 거부감이 느껴진다, 나 자신이 조종당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 누가 좋아하겠는가. 다시 말해서, 나는 내 의지가 조종당하는 부분에 있어서 화가 나려는 상태이고, 성희 씨의 말마따나 '금성인의 초능력이 그래요' 라고 말한 부분에서 당연히 아 그렇습니까 라고 수긍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무엇이라도, 나한테 납득이 가게 설명을 해 보라는 의미에서 능력을 보여 달라고 지금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성희 씨에게 방금 말한 '염력'을 써 보라고 말을 하자, 그녀는 갑자기 심하게 당황한 듯이 몸을 떨더니,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만류를 하듯이 내게 말했다. 

 

 "그, 그런데 그렇게 집중적으로 조종을 하게 되면, 이 파장의 흐름이 반대로 진행이 되게 되요. 파장을 조종하는 저부터 그렇게 변하고, 그 파장을 맞은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해야 되나... 방금 말한 것에서 반대상태가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반대상태고 뭐고 그걸 제가 보아야 납득이 될 것 같다니까요? 한번 해 보시죠. 어떻게 되나."

 

 "안돼요. 지금은, 진짜 안돼요."

 

 "돼요."

 

 내가 생각해도 지금 그냥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말을 하고 있긴 하다. 하지만, 분명히 나는 지금 내 몸의 변화에 대해서 알아야 될 권리가 있다. 그것이 이 아가씨가 내뿜는 모종의 기운 때문이라면, 그 다음에 따로 처리 방식을 생각해야 되니까.

 성희 씨는 내가 어거지를 부리자,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그러고서는 나에게 말했다.

 

 "좋아요. 지금 그럼 보여줄 테니까, 후회하지 마세요."

 

  그녀는 그렇게 말을 딱 끊고서, 눈을 감고 천장을 올려다 보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그녀의 주변으로 무언가 모이기 시작하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였다. 강하지는 않지만, 산들바람 먀냥 그녀를 향해서 어떤 알갱이 같은 것들이 움직이는, 그런 흐름이 느껴졌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 그 기운의 흐름은 멈췄다. 그리고 그녀의 주변에 분홍색의 어떤 오오라가 떠돌고 있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놀랄 준비를 좀 해 두긴 했다. 이번에도 리돌이 했던 것처럼 우르릉쾅쾅 하면 어쩌나 해서. 그런데 지금 보이는 것은, 사실 생각했던 것 보다는 좀 덜 놀랐다.

 

 "다... 된 건가요?"

 

 "가만히 있어.. 주세요."

 

 갑자기 성희 씨의 어조가 바뀌었다? 뭐랄까... 굉장히 끈적해 진 느낌. 그리고 어조만큼이나, 얼굴에서도 무언가를 잔뜩 갈구하는 표정이 한껏 우러나오고 있었다. 눈을 반쯤 게슴츠레하게 뜨고서는, 혓바닥으로 입술을 핥으면서... 잠깐.

 

 "증거를 보여 달라고 했죠...? 이게 그 증거에요..."

 

 바뀐 말투처럼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성희 씨는 손가락을 뻗어 내 다리 사이를 가리켰다. 그러자 그녀의 주위에 있던 그 분홍색의 기운이 무언가 내 쪽으로 내쏘아지는 것이 보였다. 그 기운은 지금 성희 씨 처럼, 느지막하게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남자들의 제일 중요한, 그곳에 기운이 닿게 되자...

 

 - 밀과 보리가 자란다. 밀과 보리가 자란다. 밀과 보리가 자라는 건 누구든지 알지요 - 

 

 "뭐, 뭐야!"

 

  원래 이 세 번째 다리라는 것이, 남자의 이성과는 무관하게 움직이는 다른 생명체라는 설도 있기는 하지만, 이럴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 안에서부터 무언가 몸에 뜨거운 기운이 올라오는 게 느껴진다. 내 앞에 있는, 이 아가씨와 뭐라도 해야 될 것 같은 이런 기분이, 계속해서 닫혀가는 이성을 비집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 하고 있었다.

 내가 정신을 차리려 애쓰는 동안, 성희 씨는 무언가를 갈구하는 눈과 농밀한 어투로 상황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아까 말했었죠...? 반대 상황이 되어 버린다고...? 파장이 역류하게 되면, 이성을 원하게 되는 거에요...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말 의지가 내 안에서 없어지는 것 같다. 감기약을 먹었을 때 처럼 전신을 잠식해 오는 그 느낌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지금 문 밖에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이러면 안된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집중을 해 보자. 소, 소수를 세 보는건 어떨까? 2, 3, 5....

 안돼. 안되잖아. 계속해서 정신이 혼미해진다. 그냥 몸 가는대로 정신을 맡겨버리자는 충동이 나를 지배하려 하고 있다. 그 사이 어느샌가 성희 씨는 나와 그녀 사이에 있던 밥상을 저리 치워 버리고서는 내 앞으로, 네 발로 천천히 기어서 오기 시작했다.

 

 "왠지... 저번에도 이러고 싶었던 게 아닌가요...? 저를 처음 봤을 때 부터...?"

 

 "아, 아니에요!"

 

 그나마 남아 있는 이성은 마음에도 없는 부정을 한다. 물론 남자들이 예쁜 여자만 보면 무언가 망상이 폭주하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성희 씨가 지금까지 내가 봤던 사람 중에 제일 예쁜 사람인 것은 맞지만, 지금 이렇게 무언가 내 이성과 관계 없이 일어나는 일까지 고려한 건 아니라고!

 

  "아니긴요... 후후.. 입으로는 그렇게 말해도 몸은 정직한 걸요? 이렇게나... 물론 제가 이렇게 만들기는 했지만..."

 

  그녀가 가까이 올 수록, 향수 냄새가 내 후각을 자극한다. 마약을 태우는 연기의 향이 이것과 비슷할까. 맡으면 맡을 수록, 의식이 흐려진다. 내 손이 나의 의지와 상관 없이 그녀에게로 향한다. 아아, 더 이상 참을 수가...

 갑자기 그녀의 뒤에서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우리집 문이 부서져라 열리는 소리였고, 그리고 전광석화와 같이 무언가가 성희 씨의 뒤로 쇄도했다.

 

 "나는 다시 할 수 없습니다."

 

 급박한 움직임과는 엄청난 괴리감이 있는, 평이한 번역기의 말투가 흘러 나왔다. 리돌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에 든 후라이팬으로 성희 씨의 후두부를 강타했다.

 깡! 맑고 고운 소리. 나를 잡아 먹으려던 한 마리의 암사자는 오던 포즈 그대로, 내 앞에 고꾸라졌다. 숨을 몰아쉬며 프라이팬을 두 손으로 잡고 있는 하얀 소녀의 뒤로, 캐롤라인이 한숨을 쉬면서 등장했다.

 

 "결국 이렇게 되었군요. 제가 저번과 같은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얘기했건만."

 

 캐롤라인의 목소리가 들리자, 리돌은 후라이팬으로 성희 씨를 가리키며 갑자기 캐롤라인에게 무언가를 따지기 시작했다. 번역기를 껐는지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가 않는다. 캐롤라인은 안경테만을 올리면서 그녀의 말을 들어주고 있었고, 그리고 나는... 날아간 이성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잠시 방치된 상황에서 내 의지와 관계 없이 끓어오르던 욕망은 지금 배출구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누군가, 아무라도, 필요해! 누군가!

 

 "으워어어!!"

 

  영화에서 어떤 박사 아저씨가 녹색 괴물로 변해서 내지르는 그 괴성을 지르면서, 나는 리돌에게로 뛰쳐나갔다. 실끝같이 남아 있던 내 이성은 의식의 뒤편에서 그러면 안 된다고 내 몸뚱이에게 소리치고 있었지만, 그게 들어먹힐 일이었으면 아까도 참을 수 있었다. 그래, 성희 씨가 다 이렇게 만든 거야. 저 아가씨가 나한테 야한 짓을 해서 내가 이렇게 된 거야 라는 말도 안 되는 합리화를... 할 정신도 없었다. 그저 내 욕망만이 지금, 내 시야 안에서 해결의 분출구를 찾고 있을 뿐이었다.

 흡사 좀비와 같은 모양새로 달려드는 나의 모습을 본 리돌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고, 캐롤라인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며 리돌에게서 후라이팬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내 눈에 남아 있는 풍경은 거기까지였다.
 
 오른쪽 눈꺼풀이 내 의지와 관계 없이 위로 제껴진다.
 방 안의 형광등이 보인다.
 다시 감긴다.
 못 알아 듣는 말로 뭐라뭐라 떠들어 대는 소리가 들린다.
 잠시간의 침묵.
 그리고 다시 오른쪽 눈꺼풀이 들린다.
 무언가 굉장히 강렬한 빛이 내 눈동자 속에 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