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눈 옴.



이스마엘.

당신을 이스마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한낱 일기장이라도 이름이 있는 게 좋을 테니까요.


오늘은 제가 성하의... 틋붕 교황님의 호위기사로 임명된 날이에요.

12살에 호위로 임명된 건 제가 처음이니 실상 최연소인 셈이죠. 에헴.


기쁜 일이지만 한편으로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교황의 호위쯤 되면 수행요원 역할도 겸하곤 하거든요.

즉, 혹시나 교황님께서 몸이 안 좋아지거나 하시면 그 원인을 제일 먼저 찾아내는 역할을 맡게 된단 거죠.


"여기 방문을 했을 때 먹었던 이 식품이 원인 같습니다."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건 저 뿐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일기를 적으려고 합니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틈틈히.


... 사실 어색해서도 있고요.

저는 원래 성기사 훈련 당시에도 아싸로 유명했단 말입니다.

제임스나 피터나 다들 사교성 좀 기르라고 야단이었죠.


심지어 상관을 상대로 어떻게 친해지는지 같은 건?

알 턱이 없죠.

아무리 같은 남성끼리라도 스스럼 없이 말 붙이는 방법 따윈 전 모릅니다.

제 생애 12년 동안 배운 건 신앙 뿐이었다고요.

... 검술하고.


하여튼 그러합니다.

내일부턴 교황님이 멀리 [몰루] 왕국을 향해 가본다고 하니까 일찍 자 둬야겠군요.

피곤한 여정이 될 것 같지만 교회 밖을 나간지 오래 된 터라 조금 기대되기도 하네요.



*



1월 7일. 눈.




춥네요.

[몰루] 왕국에는 잘 도착했습니다.

사실 도착한지는 꽤 됐어요.

도착하고 예상 못한 문제가 생겨서 그렇지.


문제라는 게... 좀 복잡하게 되었는데

일단, 몸이 다치거나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럼요. 기사가 몸을 다치면 안되죠.


다만 저나 교황님이나 황당한 일이 일어나서요.

아마 원인은 신성력을 너무 많이 써서 그런 게 아닐까 추측하고는 있는데

누군가의 저주일 수도 하고요.


알아요.

당신 입장에선 도대체 저희에게 발생했다는 그 문제가 뭔지 궁금할 거란 거.

하지만 지금의 문제에 대해서 무엇인지 밝힐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스마엘.

아마 1급 기밀 비스무리한 게 될 거 같기에.



*



1월 15일. 맑음 때때로 싸라기눈.




며칠 고민 했습니다.

인정할게요 이스마엘.

상황이 안 좋습니다.


교황님께서 여자가 되셨습니다.

20세 어른 여성 정도 외모로.


아, 알아요.

미쳤냐고 생각할 수 있죠.

하지만 어쩝니까 사실인 것을.


[몰루] 왕국에 도착하고 얼마 안 됐을 때 일입니다.

검술연마를 하다가 제가 손을 조금 베였습니다만

교황님께선 그것을 가여이 여기시고 신성력을 써주시더군요.

한데 신성력이 조금 나오다가 갑자기 여성이 되어버리신 겁니다.


... 그뿐이에요. 원인도 이유도 모르겠네요.


처음에는

'어쩌면 먹었던 음식이 원인이 아닐까?'

'잠자리가 원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지만

그건 아니리라 판단했습니다.


교황님이 드신 밥은 저도 전부 똑같이 먹었고

교황님이 주무신 여관에서 저도 잤으니까요.

만약에 그런 것이 문제였으면 제 몸에도 이상이 생겼겠죠.


아, 괜한 오해는 마시길.

여성이 되셨다곤 해도 교황님은 교황님.

예쁘다고 생각하거나 할 일은 없습니다.

무엇보다 외모상으로도 나이 차이 엄청 나는데 그럴 리가요.


여하간 이 사건에 대해

일단은 교회에도 알려야 하니

저희는 서둘러 돌아갈 준비를 마쳤습니다.

지금은 일단 떠나기 전에 배를 채우는 중이고요.



'이런 불미스런 일이 있었는데 밥이 넘어가냐!'

제 친구 제임스였다면 그렇게 말했을 거 같네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사람은 밥을 먹고 사는 동물인 것을.

배가 고프면 호위도 제대로 못하잖아요?


저는 그냥 맘 편히 위장에 휴식을 주기로 했습니다.

... 아니꼬우면 저 대신 호위일 좀 해주실래요?



*



2월 2일. 안개




오늘은 축일입니다.

저희 교단이 모시는 어느 선지자님과 관련이 있는 축일이죠.


정확히 어떤 관련이냐, 어느 선지자냐.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긴 하지만

어차피 당신은 관심이 없을테니까 생략하고 넘어가도록 하죠.


마을은 일시적 축제 상태 비스무리한 상황입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다들 웃고 떠들며 먹고 마시고 있죠.

소문으론 오늘만 판다는 먹거리도 많다는데

저도 축제나 나갈 걸 그랬다는 마음이 드네요.


못하지만요.

호위 일이라는게 그렇죠 뭐.


몇개 사먹으러 나가려다가 교황님한테 혼났답니다.

호위라는 사람이 그렇게 막 쏘다녀도 되냐면서.

쳇.



지저분한 사담은 이쯤하고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먼저, 교황님과 저는 아직 교회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오는 길에 문제가 있었거든요.


저희가 만났던 문제도 여러가지 있지만

제일 기억에 남는 건 도적떼 -라고 하더고요. 검은 옷을 입고 도둑처럼 생겼던데 여러 명 있었어요.- 입니다.

바로 오늘 있었던 따끈따끈한 뉴스죠.


"돈, 여자, 먹을 것."


그들이 저희에게 한 말입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짧고 굵었네요.


말한 그대로의 것을 그들은 저희에게 요구했고

저와 그들은 한차례 싸움을 했습니다.

물론 저 혼자만은 아니고, 저와 교황님이 마차를 빌려타고 있는 상단에서도 호위를 몇명 고용했으니 그 분들과 함께요.



전투 과정이야 워낙 기니까 생략하겠습니다만

전투 도중 손을 또 찔린 일이 있었습니다.


교황님께선 여자가 되신 이후 신성력을 쓰실 수 없는 상태이기에

아쉬운 대로 제 스스로 치유를 시도했는데


이게 또 이상한 게

제 신성력도 나오질 않더라고요.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의아하지만

일단은 몸도 으슬으슬하고 머리도 아픈게

하룻밤 자고 일어나 봐야겠어요.

무슨 말이냐고요?

12살 어린 성기사는 잠자리에 들 시간이라는 거죠.


말하다 말고 끊어서 미안하지만 졸린 것을 어쩌겠어요.

저희 때는 잘 자야 키가 큰다고 했으니까요.

추기경님 말씀은 잘 들어야죠.




*




2월 18일. 맑음




저번에 일기를 쓴 후로 바빴습니다.

잊지 않게 기록한다는 것을 깜빡 잊었네요.


다행히.

몸이 으슬으슬하고 머리가 아팠던 것은

단순한 몸살 감기였습니다.

혹여나 교황님처럼 저도 여자가 되어버리는 건가 했네요.



제가 몸살을 앓고 있는 동안

교황님께선 교회로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현재 저희의 상태와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 지에 대한 의논 같은 걸 적으셨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어제 답장이 왔습니다.


답장의 내용도 놀라운 것이었어요.

'잘 알았고 일단은 하던 대로 교회로 먼저 돌아오는 게 좋지 않겠냐'

... 는 말이 주를 이뤘는데,


교회 내의 다른 사람들도 신성력을 쓸 수 없는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는 내용도 있더라고요.

며칠 전까지 잘만 쓰던 신성력인데!



대성당에서 주님에게 직접 물어보려고 해도

"뭐야 틋붕이 없어? 걔 오면 불러라 나 바쁘다."

라며 무시하셨다고 하시고.


결국 틋붕 교황님이 교회에 도착할 때까진 뾰족한 수가 없는 상태이니

빨랑 돌아오라는 내용이었어요.



신성력을 쓸 수 없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신성력이 없으면 퇴마도, 회복도 못 해주는데.


원인은 뭐길래 그러는 걸까요.

주님께서 토라지기라도 하신 걸까요?

아니면 다른 교단에서 저주라도 건 걸까요?

지금으로선 모르는 거 투성이네요.




*




3월 4일. 비




비가 내립니다.

정확힌 오다말다 하고 있네요.

교회의 혼란한 상황을 날씨가 대변하는 것 같아서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해지네요.


어제 도착했습니다.

교회에 말이에요.


어제 늦게 도착한 저희는 바로 짐을 풀고 대성당으로 향했습니다.

주님께 이번 두개의 사건, [신성력 소실 사태] 및 [교황 여성화 사태] 에 대해 여쭙기 위해서 였죠.


주님께선 틋붕 교황님과의 독대만을 허용하셨고

틋붕 교황님께선 지금 무릎 꿇고 허공을 향해 기도하시는 중이에요.

허공이란 건 저희 입장에서만 그리 보이는 거고

교황님께는 주님이 내려오신 것 처럼 보이실 테지만요.


여하간 아무리 주님의 뜻이라 해도

예상치 못한 습격이라도 있으면 안 되기 때문에

저는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 솔직히 말하자면 대기하는 게 지루해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구슬치기를 좀 했지만

그런 것은 혼나지 않겠지요.


어쨌든 언제 끝날지 모를 틋붕 교황님과 주님의 독대를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틋붕 교황님이 성을 내시면서 대성당 문을 박차고 나가시더라고요?


그때의 틋붕 교황님은... 저는 그분이 그렇게까지 화를 내시는 건 처음 봤습니다.

평소에도 화를 잘 내시지만 그렇게까지 내시는 건 처음이었다고요.

얼굴이 시뻘개져선 입에 담지 못할 상스러운 어휘를 마구 뱉어내시는데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미쳤다고 생각했을,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어리둥절해진 저는

"일어나세요. 다른 추기경들 만나러 갑시다."

하시는 말씀을 듣고 엉거주춤 일어났습니다.


틋붕교황님께 무슨 일이냐고 여쭤봐도

중대사항이라고만 하시며 안 알려주시더라고요.


추기경들이 다 모이시면 말씀해주신다는데

아쉽게도 순회 중이신 분들이 많아서 한동안은 모르는 채로 지내야 할 것 같아요.


기껏 수수께끼를 푸나 했더니

궁금증이 늘기만 했네요.

이게 뭔지 싶습니다.




*




4월 3일. 맑음




일기는 간만에 쓰네요.


추기경들이 다 모였습니다.

드디어 말이죠.

시급한 사안이니만큼 바로 회의에 들어가셨고

저는 호위이기에 동행해서 우연히 틋붕 교황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는데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원인은 모른다고 합니다.

틋붕 교황님이 여성이 되신 원인은 모른다고.


다만 교회 내 성직자들의 신성력이 사라진 원인은 알겠다 하셨는데

틋붕 교황님이 여자가 되어버리신게 원인이라고.


무슨 말인고 하니

원래 주님의 신성력은 인간의 것이 아닌, 신의 것이란 말이죠?


그것을 사람이 쓰게 하려면

주님에게서 신성력을 받아서 인간에게 전달하는, 중간 다리 역할이 필요했고

본래는 교황이 그 존재였단 말이에요.


교황님이 그 다리 역할을 해내셔야 신성력이 전달이 되는 것인데

틋붕 교황님의 몸에 문제가 생기신 지금은 제대로 다리 역할을 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사제들이 신성력을 쓸 수 없는 것이라고.



절망적인 소식이죠.

적대하는 교단이 이 소식을 들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도 가지 않아요.

어쩌면 큰 싸움이 벌어질지도 몰라요.


해결책을 강구하고는 있지만

몸을 바꾸는 포션 같은 것도 교황님에겐 왜인지 먹히지 않았고.

언제쯤 원래 몸으로 돌아오실지도 모르고.

틋붕 교황님은 해결책 얘기가 나올 때마다 뭔가 말하시려다가 입을 꾹 닫아버리시고.


덕분에 맑은 날씨와는 달리 교회 분위기는 우중충해져버렸습니다.

현재 틋붕 교황님의 상태는 교회 내에서만 알고 있는 비밀로 해두었지만

이게 바깥 세상에 밝혀질 날을 생각하면 걱정이네요.


... 이럴 줄 알았으면 성기사 말고 광전사나 할 걸 그랬나 싶기도 하고요.




*




6월 12일. 비.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광란의 교단 쪽에서 쳐들어왔어요.


저희 교단과는 예전부터 서로 안 좋던 사이니

알게 되면 반드시 공격해 올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결국 그대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소속 성기사들의 공격력 하나는 끝내준다던 광란의 교단이니만큼, 싸움은 너무나 힘겹습니다.


부상자가 제대로 치료를 못 받는다는 게 제일 크죠.

금전문제로 포션은 진작 바닥나버렸고.

신성력은 그 일 이후로 쓸 수가 없고.



보다못한 틋붕 교황님이

오늘 아침부터 주님과 독대 중이신데


안에선 틋붕 교황님이 길길히 날뛰며 분노하시는 소리만 들립니다.

"남자였는데 뭐라는 거야!"

"몸으로 직접 받으라고? 신성력을?"

같은.



교황님이 한층 차분해지신 건 오늘 낮부터셨죠.

녹는 듯한 열기를 뚫고 달려온 전령이

"에른토 지방 패전! 패전!"

이라더군요.


틋붕 교황님께 그 말씀을 전해드렸더니

고개를 푹 숙이시면서 가탈걸음으로 대성당에 돌아가시더라고요.


영문을 모르겠어서 슬쩍 엿들었는데...

'입으로만' 이 뭘까요?

그걸 하면 교단 내 사제와 성기사들의 신성력이 돌아오는 게 정말 맞냐고 거듭 물으시던데.



일단 그 이후로 신성력이 잠깐 돌아오긴 했는데 - 얼마 안 있어 다시 못 쓰게 되었지만요 -

영 마음에 걸립니다. 교황님께서 뭘 하셨길래 그렇게 씩씩거리셨는지.

일단 지금은 양치 중이시니 이따가 한번 물어봐야겠습니다.



ps.

교황님이 제게 입을 벌려보이시면서

"혹시 꽃향기 안 나지?" 라고 하십니다.

화전이라도 드신 걸까요.



*




7월. 맑음.




결국 '입으로만' 이 뭔지는 못 알아냈습니다.

교황님께 왕창 혼나기만 했네요.


그 이후로 교황님께선

싸움이 열세에 치닫을 때마다

종종 독대를 하시곤 합니다.

끝나면 신성력이 반짝 돌아오는 그 수상한 독대를요.


독대가 끝나시면 항상 양치를 세차게 하시면서

"나는 남자다 나는 남자다 나는 남자다"

하고 되뇌이시는데...


말도 안 해주실 거면

궁금하게나 하지 마시지.

이게 뭐라고 서운하네요.




*




8월 6일. 비... 왜 안 와.



바야흐로 8월입니다.

무더위가 마지막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는 때죠.


무더위를 따라 광란의 교단 측에서도 공세를 한층 올렸습니다.

이곳저곳에서 패전이 거듭되고 있어요.


그런 와중에

교황님께선 주님과 독대를 하셨습다.



아마 제 예상으론요.

교황님은 신성력을 되돌릴 방법을 알아내신 게 아닌가 싶어요.


단순히 열악한 환경이라 주님께 기도하는 걸 수도 있지만

교황님이 주님과 독대만 했다하면 신성력이 돌아오니까

저로선 그렇게 의심할 수 밖에 없죠.



여하간 이번 독대는 조금 오래 걸렸습니다.

오래 걸린 만큼 신성력은 더 많이 돌아왔지만요.


예?

이번에 엿들은 내용이요?

어허 발칙하기는.

남의 기도문을 엿듣고 할 사람처럼 보이세요 제가?



... 맞아요 그런 사람.

전 죽으면 지옥에 떨어질 거에요 분명.

그래도 어쩌겠어요. 궁금한 걸.



주워 듣기론 크게 변한 건 없었어요.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다!"

이거랑

"입만 해주는 거니까! 그 이상은 안 되니ㄲ, 으으웁..."

이거랑

"신성력 안 돌아오기만 해봐라..."

이거랑.


도대체 안에서 무슨 일을 하시는 건지 궁금해 팔짝 뛸 지경인 건 마찬가지지죠.

아, 그래도 다른 거 하나는 있었어요.

교황님이 나오시면서 묘하게 옷매무새를 만지작 거리시더라고요.

평소에 비해선 많이 흐트러진 상태기도 하셨고요, 옷차림이.


어쨌든 이번에도

덕분에 전세가 조금 숨통이 뜨이게 되었으니

한동안은 괜찮지 않을까 싶어요.




*




9월 26일. 날씨 맑음.




옛 신학자 중 한분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신은 인간을 닮지 않았을 것이다."


복잡한 이론은 생략하고,

그 분의 말씀은 신학계에 혁명을 일으켰죠.


그 이후로 저희 교단을 포함한 많은 교단에서

주님의 모습에 대한 추측을 하기 시작했죠.


이스마엘,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주님은 어떤 모습을 하고 계실 거 같나요?


어제

틋붕교황님과도 이 비슷한 이야기를 나눠보았어요.

저는 다각형 이론에 근거해서 주님의 모습은 삼각형이 아닐까요 라고 물었죠.


그야 삼각형은 완벽하잖아요.

가장 완벽한 도형인 걸요.



한데 틋붕 교황님께선 쉬어버린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말이야..."

제가 황당해서 다시 물어봐도 결과는 똑같았어요.

"말이라고. 말처럼 생겼어... 엄청 컸고, 엄청 컸어..."



독대 이후에는 항상 그렇긴 하지만

어쩐지 교황님의 걸음이 그날따라 힘 없어 보였습니다.



아, 독대 얘기를 안 드렸군요.

독대도 했습니다.


이번에 엿들은 얘기로는

"입으로는 그렇게 많이 못 준다고?"

이것과

"앞은 안돼! 제발 뒤! 뒤로마아아안!"

이것과

"내가 남자한테... 미쳤지 미쳤어."

이것.



어째선지 이번에는

독대 중에 뭘 때리는 소리나

교황님의 비명 소리 같은 것도 들렸는데



여전히 정체는 모르겠습니다.

조금 더 지나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 아니, 알아내고야 말겠습니다.

성기사의 명예를 걸고!




*



10월 20일. 맑음.




알겠습니다.

교황님이 주님과 단둘이서

뭘 하시는 건지 알 것 같아요.


그럼요.

저도 반년을 엿들었는데.

모를 수가 있나요?


들어보세요 이스마엘.

교황님이 하시는 건 제가 보기엔

틀림없이

많이 먹기 대결 비스무리한 것일 거에요!


못 믿으시겠다고요?

독대를 마치시고 오실 때마다 보이는 모습을 정리해볼까요?


1.전신에 땀이 맺히신다.

이건 매운 음식을 먹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어요.

저도 매운 거 먹으면 땀이 많이 나거든요.


2.입가에 침인지 뭔지를 묻히시는 것하며 끝나자마자 입에서 냄새나겠다며 양치를 하신다.

몇몇 향신료는 냄새가 오래도록 입안에 남거든요.

강황 같은 게 대표적이죠.


3.다리를 후들거리신다.

너무 많이 먹으면 걷는 것도 힘들 때가 있어요.


4.바닥에 무언가 물을 흘리신다.

스프 계열은 급하게 먹으면 옷에 묻기도 하거든요.

다 먹은 후에 옷에 묻었던 게 떨어지는 건 자주 있는 일이죠.



어때요? 그럴 듯하지 않나요?



ps.딱히 신경쓰이는 이야기는 없네요. 전선은 고착화 상태고. 교황님도 전이랑 다를 바 없고.

굳이 따지자면 친구인 제임스가 기르는 고양이가 새끼를 뱄다 정도.




*




11월 2일. 비.




"앞"

며칠 전 주님과의 독대에서

틋붕 교황님이 하신 말씀이세요.

"앞이면... 더 효과가 좋은 거야?"


"아니야... 역시 뒤만 해..."

라며 첨언하셨지만

앞이라?


조금 의문이 생겨요.

많이 먹기 대회에서 앞이고 뒤고를 따질 필요가 있을까요?

선공 후공도 아닐 테고.


친구인 제임스에게 넌지시 물어봤을 때도

웃기만 하다가

"넌 계속 순수한 상태로 있어다오."

라며 머릴 쓰다듬더라고요.

저랑은 3살인가 밖에 나이차이가 안 나면서.

가끔 보면 제임스는 지나치게 어른인 척 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하여튼 제 가설이 틀린 거 같진 않은데...

많이 먹기 대회가 맞는 것 같은데...

그럼 도대체 "앞" 과 "뒤" 는 뭐인 걸까요.



ps.

어제 전쟁이 끝났습니다.

광란의 교단 본거지를 다른 교단이 습격했다고 하더라고요.

결국 광란의 교단 쪽에선 입맛을 다시면서 전면철수했습니다.




*




12월 30일. 눈




12월입니다.

교회 내에서는 연말을 축하하는 사람들과 골머리를 싸매고 있는 사람들,

두 부류로 나뉘어졌습니다.


골머릴 싸매는 이유는... 알겠죠?

교황님이나 신성력이나 상태가 영 아니올시다여서 그래요.

교단 내에서는 새로운 교황을 세워야 하는 게 아니냐는 얘기도 나오고 있어요.


하지만 지금 마땅히 교황님을 대신할 사람이 없는 것도 문제죠.

추기경님들 중에 성품이 훌륭하신 분은 많지만

다른 사제들과 주님 사이에서 신성력을 전달하는 역할을 할 정도로

신성력의 그릇이 크신 분은 없으시니까요.



결국

추기경이 아닌, 일반인 중에 새로운 교황을 찾아내 세우거나,

아니면 사제들이 신성력을 별로 못 쓰게 되는 교황을 세우거나.

둘 중 하나가 되는데

둘 다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에요.



그런 와중 틋붕 교황님이 '또' 독대를 하셨습니다.

해봤자 임시방편이 아니냐는 제 말에

"적어도 열달 동안은 안 사라질 방법이 있으니까..."

라며 중얼거리시더라고요.



이번에는 엿듣지는 않았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니 다른 사람의 기도문을 엿듣는 것이 옳은 것인가 싶더라고요.


다만

교황님이 고래고래 소릴 지르셔서 안 들을래야 안 들을 수가 없었네요.



이번에도 결국 뜻 모를 얘기들 뿐이었지만...

언젠가는 밝혀낼 겁니다.


그러니 이스마엘.

내년에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ps.

교황님이 뱉으셨던 뜻 모를 비명들.


"아파! 천처, 천천히잇...!!"

"쉬었다가 하자. 응? 나 너무 힘들... 하으으읏!"

"너무 크다고! 제발 얕게 좀 하아아앙으읏!"



*


틋챈 대회에 올렸던 거 일단 여기다가도 기록해 놓음.
이거 19금 걸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