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게이 맞지?”

“맞아. 근데 그건 왜?”

“그럼 왜 이렇게 침착해? 아. 이미 몇 번 겪어봐서 그런 건가?”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설마 고자라거나 그런 건 아니지? 아닌 건 알지만, 내가 들어왔던 너 하곤 좀 달라서.”

“아, 그거.. 다 사실이야. 대충 루트 이 할쯤은 과장이지만.”

“그럼 설명해 봐. 왜 이리 침착한데?”


 그러게. 왜 이리 침착할까. 고양이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되새겼다. 별로 고무적이진 않았다. 상대는 그의 하복부 위에 앉은 채로, 의문과 욕구가 섞인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고, 그는 이제 왜 그 욕구에 호응하지 않는지를 설명해야 했으니까. 사실 그가 이런 상황을 겪어본 적이 없진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가 조금 특이하게 태어나서인진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만나 본 사람들은 언제나 그의 위에 있길 원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적어도 지금 상대는 그를 존중하고 있었다. 자신의 욕망에 진솔하긴 하지만, 강압적으로 밀어붙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최소한의 이성은 있는 셈이었다.


“글쎄다. 나도 모르겠어. 왜 이리 침착할까.”

“아. 혹시 내가 싫은 거야? 난 내가 나름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자기애성 인격 장애라고 말해줄게. 그래도 너 멋진 남자 맞아. 내가 네게 애욕을 느낀다는 사실도 부정할 순 없고. 아, 애욕이 무슨 뜻인진 알지?”

“알지. 그래서 왜 이러는데?”


 그는 어째서 자신이 원초적인 욕구에 이토록 불성실한지, 그 이전에 왜 이런 일을 하는지 생각했다. 단순했다. 마음이 공허했기 때문이다. 그럼 왜 공허할까. 사랑을 잃어서이다. 왜 잃었는지는 떠올릴 이유가 없었다. 가장 중요한 건, 왜 심리의 공동을 몸으로 때우려 했을까. 다른 사랑을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못했을까. 그의 생각은 그 언저리에서 잠깐 맴돌았지만, 이내 그 이유를 찾아냈다. 마음은 그릇이다. 그리고 그는 금 간 그릇을 쥐고 있다. 감정이나 그런 것 따위는 그 안의 내용물이다. 충분한 설명이었다.


“그냥 내가 지나치게 이성적인 걸지도, 하기 싫다는 생각이 든 걸지도 모르지.”

“이성? 넌 그리 이성적이지 않아 보이는데.”

“네 말이 맞아. 난 별로 이성적이진 않아. 근데 감성적이지도 않아. 그래서 이런가 봐.”


 늑대는 고양이의 말에 짧게 의문을 표하고 그 위에서 내려와 곁에 앉았다. 고양이는 그가 내려오자 밀려있던 숨을 들이켰다. 다만 몸을 일으키진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누운 채로, 그는 늑대가 다시 말을 걸어오기 전까지 잠깐 죽어있었다.


“그럼 지금은 할 마음이 없다는 거지?”

“내려와 준 건 고마운데, 아무래도 그렇지?”

“그래? 좀 슬프네. 어떻게 해야 하나..”


 고양이는 크게 하품하곤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고양이같이 몸을 쭉 펴며 기지개를 켰다. 으스러지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곁에선 늑대가 진지하게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골머리를 앓는 듯한 신음을 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고양이는 별말 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진 않았다. 어쩌면 단순무식한 늑대다운 일이었다.


“있지. 나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뭔진 모르겠지만, 폭력적이지 않았으면 좋겠네.”

“아냐. 그런 건 아니고, 되게 좋은 생각인데 들어볼래?”

“응. 말해 봐.”


 고양이의 말에 옅게 키들거리며, 그러다가 끝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시원하게 터트리곤, 늑대는 웃음을 그친 후 보는 사람이 어이없을 만큼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 나랑 친구 하자.”

“친구? 내가 생각하는 게 틀리지 않았다면, 난 그런 거 안 받아.”

“아니. 네가 생각하는 친구 말고. 그냥 친구.”


 고양이는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약간 까닥거렸지만, 늑대는 해맑게 웃으며 그에게 손을 건넸다. 고양이는 한참 동안 그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다가, 그냥 친구. 라는 말에 대한 약간 고전적인 의미의 행위란 사실을 깨달았다. 광낸 말로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더 단순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남녀노소 가라지 않고 평등한, 악수라는 말로.

 고양이는 늑대의 손을 맞잡았다.


“그래. 친구 하자. 나쁘지 않은 생각이네.”

“좋아. 그럼 우리 오늘부터 친구다?”

“응. 친구..”


 웃음은 가장 진득한 전염병이라고 했던가. 전염률 높은 기적의 전염병이 옮았는지, 고양이는 늑대와 비슷하게 약간 키들거리다가, 끝내 입을 가린 채 키득거렸다. 이내 웃음을 털어내듯이 고개를 턴 그의 입가엔 실소를 닮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게 그 둘의 첫 만남이었다.


-


 고양이는 가만히 쭈그려 앉은 채 길고양이를 바라봤다. 치즈 색 털이 흰색 털과 섞여 있었다. 나름 잘 먹었는지, 다른 길고양이들과 다르게 조금 살이 붙어있었다. 어쩌면 다른 고양이를 먹은 건 아닐까. 그의 뇌리에 스친 생각이었다. 역사적으로, 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고양이 고기는 나름 고급 식재료였다. 맛이 섬세하다나 뭐다나.


 그럴 리는 없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원래 가던 길로 가기 위해 걸음을 돌리려던 찰나, 길고양이는 고개를 들고 그를 향해 먀아- 하며 작게 울었다. 고양이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고개를 내려 길고양이를 바라보며 냐아- 하고 응수했다. 틀리진 않았나 보다. 길고양이가 의문스럽다는 듯이 되물었다. 하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뒤에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 안녕?”


 손에 작은 캔을 쥔 늑대가 멋쩍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이에 늑대를 돌아본 고양이는 잠시 말을 잃었지만, 그의 뒤에 있던 길고양이가 반갑다는 듯이 울었다. 그러자 늑대는 고양이 곁으로 다가와, 캔을 따고는 길고양이의 앞에 놓았다.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왜 유독 이 길고양이만 건강했는지를. 그 이유는 눈앞의 상황이 설명하고 있었다.


“이 고양이, 네가 키우는 거야?”


 고양이의 질문에 늑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행위는 분명히 부정, 그 이상의 의미는 아니었지만 많은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래서일까. 한동안 길고양이가 캔을 비우는 소리만 흐르고, 배부름에 또다시 먀- 하는 울음을 뱉기 전까지, 그는 말을 잇지 않았다.


“한 번 쓰다듬어볼래?”


 늑대가 고양이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동안 쌓인 유대가 만만치 않다는 듯, 고양이는 포만감에 약하게 그릉거리기만 했다. 그만큼 믿는다는 뜻이 아닐까 싶었다. 


“아? 아니.. 굳이 그러고 싶진 않네.”


 늑대는 고양이가 단박에 거절했단 점에 조금 서운한 듯이 길고양이를 내려놓았지만, 고양이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길고양이는 온갖 병원균의 집합체다. 사실 그는 늑대가 아무런 주저도 없이 길고양이를 잡아들었다는 사실이 조금 놀라웠다. 물론 손을 잘 씻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그래도, 심리적인 거부감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참, 어디 가던 길이야?”

“그야.. 당연히 학교지. 아침이잖아. 그러는 넌?”

“나도 학교. 원래 이 시간에 얘한테 밥 주고 가.”

“되게 여유롭게 사네. 그럴 시간이 있어?”

“응. 나 너하고 같은 반이잖아. 우리 담임 알지?”


 우리 담임. 그 말을 듣자 고양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봤자 이 분, 아니면 삼 분 정도지만 늦어도 상관없다. 그들의 담임은 그런 사람이었다. 물론 딱히 중요하진 않았다. 어차피 저 둘은 평소보다 훨씬 더 일찍 나온 상태였다. 물론 늑대만 그랬다. 애초에 고양이는 원래 이 시간에 나오는 사람이었다.


“그래.. 근데 계속 그 고양이만 보고 있을 거야?”

“슬슬 가야지. 같이 가자.”


 골목으로 사라진 고양이를 두고, 걸음을 옮기는 둘의 옆으로 햇살이 심연을 비췄다. 마음에 난 구멍처럼, 대도시의 한 가운데에 난 그 큰 구멍은 보는 이에게 언제나 묘한 기분을 유발했다. 하지만 이젠 익숙해졌다. 심연으로 몸을 던진 사람의 뉴스는 매일같이 들려오지만, 저 싱크홀이 어떤 마력을 가진 건 아니다. 그저 사람이 심연을 바라볼 때, 심연도 그러할 뿐이었다.

 니체가 던진 말이었다. 생각 좀 하고 살라고 던졌으리라.


“심연 아래엔 뭐가 있을까?”


 아무 생각 없이 걷던 고양이의 귀에 늑대의 말이 꽂혔다. 심연 아래엔 뭐가 있을까. 수많은 사람이 생각한 난제였다. 공포를 이겨내면 그 뒤엔 호기심이 따르고, 심연 아래를 탐사하려던 시도는 오래전부터 제시됐다. 채 십 년도 가지 못한 시도였다.


“아마 맨틀이나.. 깊으면 외핵이겠지.”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고양이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도 진지하게 믿진 않았다. 다만 저 아래엔 생각지도 못한 것이 있을 거라고, 희망 겸 절망이 막대한 구덩이로 흘러 들어가기만 했다.


“거의 다 왔네.”

“어? 학교가 보여?”

“아니? 여기 모퉁이만 돌면 학교잖아. 길 몰라?”

“응. 나 지금까지 너만 따라왔는데?”


 고양이는 늑대가 계속 자신을 믿고 따라왔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무식함에 아연해야 할지 몰랐지만, 적어도 길을 잘못 들지는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모퉁이를 돌자 학교가 보였다. 약간 때가 탄 하얀 벽이 한결같았다.


“뭐 어쨌든, 늦진 않았네. 들어가자.”

“그래. 나중에 봐.”

“나중? 우리 같은 반 아냐?”

“미안, 할 게 있어서. 하교할 때 같이 가자.”

“어.. 알겠어. 이따가 봐.”


 늑대는 고양이의 인사를 받고는 어딘가로 뛰어갔다. 하늘이 붉은색에서 푸른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슬슬 교실에 들어가면, 조금 시간이 지난 후 다른 학생들이 교실을 가득 채우고 소란스러워질 것이다. 익숙하면서도 권태로운 일상에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쉰 후 걸음을 옮겼다.

 학교가 서서히 소란스러워졌다.


-


“아, 여기서 만나네. 이렇게 볼 줄은 몰랐는데. 어.. 안녕?”


 늑대의 말에 고양이는 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답할 말이 없었다. 그는 방금 싸우고 왔다는 증거를 온몸에, 특히 얼굴에 많이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굳이 섬세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러지 않아도 눈으로 확인 가능한 것은 물론이요, 보건실 단골인 고양이에게 웬만한 상처는 대충 짐작으로 처치할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까.

 고양이는 짧게 한숨을 내쉬곤 말했다.


“보건 선생님을 찾는 거면, 지금 안 계셔.”

“근데 그럼 넌 왜 여깄어?”

“내가 대신하고 있으니까. 점심 드시고 올 때까진 내가 여기 담당이야.”

“그래? 그럼 약 좀 찾아 줘.”

“됐고 앉아. 간단한 처치 정도는 해줄게.”


 고양이의 말에 늑대는 앞의 의자에 앉았다. 약이 담겨있는 통이 고양의 손길에 달각거렸다. 정말로 익숙해선지, 고양이는 약통을 돌아보지도 않고 필요한 약을 꺼냈다. 소위 말하는 빨간 약, 같은 전통적인 약은 없었지만 그리 냄새가 좋은 약도 없었다.


“너 약 하나 잘못 꺼냈어.”

“내가 약을.. 어? 고마워. 잘못 바를 뻔했네.”

“괜찮아. 내 몸인데 뭘.”


 고양이는 손에 든 약을 쭉 확인해보곤 한두 개 정도를 바꿨다. 이제 틀린 부분은 없었다. 그렇게 거즈를 꺼내 약을 바르려던 찰나, 그의 뇌리에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야 보건실을 자주 들르니까 그렇다지만, 늑대는 과연 어떻게 아는 걸까.


“그거 상처 난 데에 바르는 거 아냐.”

“그러고 보면 넌 어떻게 아는 거야? 나보다 약 잘 아는 사람은 처음 봤어.”

“나야.. 보건실은 많이 와 봤으니까.”


 고양이는 그가 많이 싸웠다는 뜻으로 알아듣고는 묵묵히 약을 발랐다. 이내 겉으로 드러난 부분의 상처엔 대부분 밴드가 붙어 있었다. 조금 장난스럽게, 고양이는 마치 소년 만화인 양 늑대의 코에 밴드를 하나 붙이곤 말했다.


“다른 데 더 아픈 곳 있어?”

“있긴 있는데.. 필요한 거 주면 내가 알아서 할게.”

“괜찮아. 내가 해줄게.”

“그래? 그럼..”


 붙은 밴드를 떼기 위해 코를 긁적이던 늑대는, 고양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툭, 툭. 하며 셔츠가 서서히 흘러내렸다. 이에 대한 고양이의 반응은 꽤 다양했다. 이게 무슨 짓이냐는 표정부터, 그 나름의 의미로 이해했다는 표정까지. 늑대가 단추를 전부 풀고 셔츠를 벗었을 때, 그는 깨달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게 하고 싶었어? 근데 지금 점심시간이..”

“아니, 그거 말고. 등에 멍든 거 같은데, 좀 봐 줘.”

“아.. 그래. 멍들었네. 파스라도 붙여줄까?”

“응. 많이는 말고, 심한 데만.”


 늑대는 말을 끝내곤 의자에 앉은 채 한 번 빙글 돌아 등을 보였다. 역시 여기저기 멍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고양이의 눈엔 잘 잡힌 근육만이 들어왔다. 소위 말하는 실전 압축형 근육.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군더더기 하나 없이 멋지게 짜여 있었다.


“여기. 끝났어.”

“근데 넌 어쩌다가 보건실에 와 있는 거야?”

“아, 그게.. 얻어갈 약이 있어서. 그러다가 선생님하고 알게 됐어.”

“너 의외로 되게 사람 잘 사귀는구나?”


 돌아온 늑대의 말에 고양이는 은근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가 말을 돌려줌과 동시에 몸을 돌렸기 때문이다. 사실 부끄러워할 이유는 없기에, 역시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그에 대한 반증으로 고양이는 반나체의 늑대를 곧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셔츠 입어. 더 아픈 곳은 없지?”

“응. 슬슬 점심시간 끝나가지?”

“잘 아네. 난 약 정리하고 갈 테니까, 먼저 반에 가 있어.”


 늑대는 고개를 한 번 작게 끄덕이곤, 보건실 밖으로 나갔다. 이제 혼자 남은 고양이는 얼마 남지 않은 점심시간을 쪼개가며, 썼던 약들과 나머지 쓰레기들을 정리했다.


-


 건물 뒤로 그림자를 내리는 햇살 아래, 길고양이는 잠깐의 낮잠에서 깨선 몸을 늘렸다. 고양이 방식의 기지개였다. 먀아- 하는 소리와 함께, 길고양이는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다른 길고양이들도 골목에서 나와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하지만 먹이를 찾아 나서는 다른 동료들과는 다르게, 길고양이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늑대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었다. 어쩌면 고양이가 늑대를 기다린다는 건 모순적인 일이었지만, 어쨌든 그랬다.


“ - ”

“ , - ”


 길고양이가 인간의 말을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익숙한 목소리 정돈 알아들을 순 있었다. 늑대였다. 길고양이는 그를 향해 뛰어갔다. 한결같이 반갑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또 한결같은 먹이였다. 맛만 조금 변할 뿐, 언제나 같은 최저가 참치. 인간이 먹으면 조금 비리다고 할 만한 맛이었지만, 길고양이에겐 그 무엇보다 좋은 먹이였다.


“먀아-”

“냐아-”


 길고양이가 포만감에 먀- 하고 만족스러워하자, 냐- 하는 말이 들려왔다. 다른 인간이다. 길고양이는 늑대의 곁에 있는 인간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단순하게 같이 울어서가 아니었다. 성격, 아니면 인상. 동물의 직감이 비슷하다고 얘기해주고 있었다. 


“먀아아.. 먕?”

“냐아. 냐냥.”


 그래서일까. 대화 아닌 대화가 오고 갔다. 길고양이는 먀- 하고 고양이는 냐- 했다. 한동안 동물과 동물의 대화가 이어졌다. 다만 길게는 아니었다. 늑대가 고양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그만 가자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길고양이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집에 가고 딱히 할 일이라도 있어?”

“아니. 오늘은 아마 집에서 쉴 것 같은데.”

“넌 공부 안 해? 곧 시험이잖아.”

“하지. 근데 그거 어차피 내신에 안 들어가.”

“그럼, 뭐..”


 말을 끊은 고양이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시선을 허공으로 돌렸다. 거대한 심연 언저리로 드문드문 사람이 보였다. 비록 심연이 이 대도시의 번화가를 흉물로 바꿔 버렸다고 하더라도, 살아갈 사람은 살아간다. 저건 그 증거였다.


“넌 심연에 가 봤어?”


 뜬금없이 늑대의 질문이 들려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 생각이 없던 고양이는 약간 흠칫, 하며 무념무상에서 깼다. 심연에 가 봤냐니. 애초에 심연 아래로 몸을 던졌다면 지금 이곳에 있을 리가 없고, 그렇다고 해도 돌아오는 게 불가능하다. 그는 질문을 던지고서야 자신의 어폐를 깨달았는지, 곧바로 말을 고쳤다. 


“내 말은, 저기 심연의 둘레 있잖아. 작은 마을 같은 곳.”

“저기? 저기야 꽤 가봤지. 안 멀잖아.”

“그럼, 저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을까? 바로 앞이 자살 명소인데.”

“죽으려 드는 사람들을 말리려다가 이미 달관하지 않았을까.”

“그럴 수도 있지. 근데 난 이렇게 생각해.”


 오후의 긴 햇빛이 심연 위로 드리웠다. 하지만 변한 점 하나 없었다. 여전히 입을 벌리고 빛을 포식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은 다들 소름 돋는다고 말하지만, 그들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봐왔기 때문이다. 그저 그 이유가 저 둘에겐 전부이지 싶었다.

 늑대는 말을 이었다.


“저 사람들은 누구보다 더 열심히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더 열심히? 저런 게 눈앞에 있는데?”

“그러니까. 항상 죽음을 생각하면서 살잖아. 매 순간순간이 소중하겠지.”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네.”

“역시 그렇지? 이렇게 보면 참 신기해. 사람 죽는 곳이 오히려 도움이 된다니.”


 그 말을 하는 늑대는, 평소처럼 사람 좋은 인상으로 맑게 웃고 있었다. 학교에서든, 아니면 이렇게 오고 가는 길 위든. 언제나 비슷했던 늑대의 미소가 조금 다르게 보였다. 그는 짧은 순간만큼은 현자처럼 보였다. 지혜롭단 뜻이 아니었다. 그건 마치 죽은 사람 같았다. 시체가 미소짓고 있다면,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당연히 노을의 극적인 명암이 일으킨 착시겠지만, 고양이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아, 너. 집 이쪽이구나? 여기서 갈리네.”

“그래? 그럼 내일 봐. 안녕.”


 한 갈림길. 고양이는 짧게 인사를 던지곤 자신의 집 쪽으로 향했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미련 하나 남지 않은 듯한 걸음이었다. 홀로 남겨진 늑대는 잠시 고양이가 걸어간 방향을 바라보다가, 자신은 그 반대편으로 향했다. 걸음에 미련이 가득했다.


-


 평범하디 평범한 주말. 이변 하나 없이 평화로운 탓에, 어쩌면 권태까지 느껴지는 날이었다. 그건 집에 틀어 박혀있는 고양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홍차 한 잔의 여유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그를 달래고 있더라도, 심심한 건 마찬가지였다.

 정확히는 그랬었다. 초인종 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


“안녕, 같이 공부할래?”


 고양이는 문을 열자마자 들려온 늑대의 말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에게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늑대도 엄연히 친구의 범주에 들어가긴 하지만, 이건 다른 이야기였다. 친구로서 그의 집을 찾아오는 경우가 방금까진 없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늑대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의도를 지니고 찾아오거나, 아니면 찾아오지도 않았다.


“어? 어.. 그래. 어서 들어와.”


 그래서일까. 고양이는 늑대를 환영했다. 마치 기쁘다는 듯이 짧은 시간만은 평소보다 맑은 미소를 지었다. 늑대가 종종걸음으로 현관을 통해 들어오며, 신발을 벗어 던지는 소리를 들은 그는 거실을 향해 몸을 돌렸다. 공부할 거리가 가득 이었다.


“참, 점심은 먹었어?”


 맞아. 점심. 고양이는 늑대의 말에 잊고 있던 허기를 느끼며 대답했다.


“아니. 아직 안 먹었는데, 넌 먹었어?”

“나도 아니. 간단하게 먹을 거 사 왔는데 같이 먹을래?”

“일단 뭔지 보고, 뭐 사 왔어?”


 고양이의 질문에 늑대는 대답 대신 한쪽 손에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건넸다. 그 안은 간식거리로 가득 차 있었다. 고양이는 그 안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 입에 물곤 말을 이었다. 


“그냥 내가 해 줄게. 딱히 가리는 음식은 없지?”

“그게.. 비린 거 못 먹어. 생선 같은 거.”

“괜찮아. 그건 나도 못 먹어. 그럼 뭘 할까..”


 고양이가 생선을 못 먹는다니. 일종의 말장난 같지만, 그에게 고양이는 엄연히 별명일 뿐이었다. 굳이 연연할 필요가 없었다. 늑대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늑대의 식성은 잘 알려진 동물 늑대를 닮아있었지만, 어쨌든 둘 다 자신의 별명을 어느 정도는 닮아있었다.


“볶음밥 좋아해? 떠오르는 게 그것밖에 없네.”

“난 좋아. 그럼 기다리고 있으면 돼?”

“응. 간식이나 좀 먹고 있어. 금방 해줄게.”


 그 말에 늑대는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고양이는 길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묶고, 앞치마를 두르며 요리를 준비했다. 재료를 손질하는 고양이의 손길은 익숙해 보였다. 마치 오랫동안 혼자 산 사람이 자연스럽게 요리를 취득하듯, 그런 느낌이 배어있었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어느새 늑대가 그의 뒤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양파나 당근 등등 비슷한 종류의 재료를 한 그릇에 담고, 고기를 잘게 다지기 위해 도마에 올려놓은 찰나. 고양이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공포나 그런 게 아니라, 조금 묘한 의미로.


“너 냄새 되게 좋다..”


 고양이의 목덜미. 아니면 그에 가까운 부위에 코를 대다시피 한 채, 늑대는 약간 킁킁거렸다. 딱히 의미가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고양이의 냄새가 좋다. 딱 그 정도. 그가 항상 쓰는 바디 워시의 향이 늑대의 취향에 맞을 뿐이었다.

 하지만 고양이는 이를 다른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요리를 잠시 멈추곤 몸을 돌렸다. 고개를 들은 늑대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늑대의 관점에선 정말로 의아해서 지은 표정이었겠지만, 고양이는 그걸 모른 채로 받아들이고 말했다.


“정말, 칼 들고 있는 사람한텐 그러는 거 아냐.”

“미안. 근데 물어볼 게 있는데..”

“그래서, 밥도 안 먹고 할 거야? 나야 괜찮지만 네가..”

“아니. 좀 들어 봐. 물어볼 거 있다니까.”


 이번엔 오히려 고양이의 표정에 의문이 퍼졌다. 마치 서로가 거울인 양, 의아하다는 표정이 계속 복제되다가 늑대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듯했다.


“너 바디 워시 뭐 써? 그런 향 찾고 있었는데, 네가 쓰는 거 같아서.”

“아, 그게. 어.. 일단, 일단 요리부터 끝내고 알려줄게. 잠시만..”


 고양이는 바로 고개를 돌리곤 다시 칼을 잡았다. 아무래도 새빨개진 얼굴을 보여주기 싫은 것 같았다. 단순무식한 늑대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지만, 둘 다 굳이 말을 꺼내진 않았다. 늑대의 경우엔 존중, 고양이의 경우엔 아마 부끄러움 때문이었으리라.

 한동안 기름 튀기는 소리가, 맛있는 소리가 대화를 대신해 분위기를 환기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완성된 볶음밥을 그릇에 덜어 내놓는 고양이의 얼굴엔 딱히 방금의 흔적이 남아있진 않았다. 그건 늑대도 마찬가지. 감사와 함께 식사를 시작할 뿐이었다.


“맛있네. 뭐로 만든 거야?”

“냉장고에 남아있던 채소 하고, 계란.. 냉동 차돌박이 정도?”

“나 요리 이렇게 잘 하는 사람 처음 봐. 많이 해봤어?”

“아마. 언제부터 했는진 모르겠어.”

“앞으로 몇 번 얻어먹으러 와도 돼?”

“응. 근데 많이는 말고. 되면 몇 번 해줄게.”


 그 말에 늑대는 정말 기쁘고 고맙다는 듯이 웃었다. 이럴 때면 그냥 덩치만 큰 어린애 같다고, 더 먹으라며 고양이는 자신의 몫을 그에게 나눠주며 생각했다. 


“그래서 바디 워시 뭐 써?”

“난 그.. 아흔 거 써. 이름이 뭐였나면..”


 물론 그 날 공부는 제대로 망쳤지만, 둘은 나름 즐거워 보였다. 


-봄


 고양이는 자신의 하복부 위에 올라탄 사람을 바라봤다. 기시감이라고 해야 할까. 익숙한 일이었지만, 기시감이 드는 건 다른 이유에서였다. 늑대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만났을 때와 같았다. 다만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늑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한결같이 맑은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고양이는 이게 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잠에서 깨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꾸는 자각몽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왜 이런 꿈을 꾸는지는 알 수 없었다. 누군가의 이론처럼, 꿈은 으레 개인의 욕망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언제나 그렇진 않지만, 통상적으로 맞는 말임은 반박하기 힘들다.


 당연히 고양이가 이 이론을 모를 리는 없었다. 그게 그가 조금 착잡해진 이유였다. 비록 첫 만남은 지금 상황처럼 이뤄지긴 했지만, 늑대는 엄연히 친구라는 이름표가 붙어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이 꿈은 여러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생각보다 대단치 않은 의미부터,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없는 해석까지. 하지만 고양이는 해석하길 거부했다.


 대신 고양이는 늑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마치 웃으라는 양, 늑대의 입가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송곳니가 드러났다. 마치 정말로 늑대라는 양, 날카롭게 돋아나선 반짝이고 있었다. 물론 현실이 아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현실에서도 저런 이빨을 가지고 있다면, 아마 평범하게 사는 것조차 불가능했으리라.


 고양이가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 늑대가 갑자기 고개를 확 내렸다. 서로 다른 각도에 있던 둘의 시야가 같은 곳에 놓였다. 아주 잠깐, 무한 같은 시간이 흐르고, 늑대는 조금 더 아래로, 서서히 더욱 고개를 내렸다. 마치 끝이 없을 것만 같은 동작이었지만, 어쨌든 끝은 있었다.


 늑대는 고양이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아픔이 느껴지진 않았다. 물렸다는 일말의 느낌도 없었다. 그저 이 모든 게 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듯, 이번엔 물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물린 채로 시간이 흘렀다. 


 다시 고개를 든 늑대의 입엔 붉은색이 가득했다. 또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은 묘하게 관능적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비록 본인은 인지하지 못했지만, 그가 그렇게 상상했으니까. 고양이는 늑대의 턱에서 흘러내린 피가 가슴팍을 적시는 걸 깨달았다.


 문득 고양이는 또다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이번엔 늑대의 볼을 약간 쓰다듬었다. 그는 이게 꿈이란 걸 알기에, 오히려 선을 그어놓고 있었다. 하지만 꿈속의 늑대는 그러지 않았다. 고양이를 물은 것으론 만족하지 못했는지, 그 의도가 명백한 행위를 보였다.

 이에 고양이는 말했다.


“내려와. 무거워.”


 그의 말에 늑대는 몸을 움직여선 고양이의 곁에 앉았다. 한결같이 절제미란 없고 자유로운 자세와 함께, 조금은 매서운 시선이 그를 응시했다. 고양이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꿈이니까. 그냥 바닥을 짚고 앉은 채 고개를 뒤로 눕혔다.


“내가 싫어?”


 문득 늑대의 말이 들려왔다. 고양이는 모종의 더위를 느끼는지 손부채질을 하다가, 이게 자각몽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자각했다. 그러자 그의 손엔 부채가 들려있었다. 꿈을 인지할 때의 장점이었다.


“싫... 냐면, 그건 아냐. 덩치만 큰 어린애잖아.”

“어린애? 덩치도 크고 키도 크고, 일단 너보단 크잖아.”

“그건 큰 게 아니라 산만하다고 하는 거야.”

“어쨌든 널 좋아하잖아.”


 좋아한다고? 과연 그럴까? 고양이는 계속 자문했다. 늑대는 타인에 비해선 유독 친절했다. 그렇다고 다정하진 않았다. 분명 연정이란 이름을 붙일 만한 감정은 아니었다. 처음과 같았다. 욕망이 얽힌 묘연한 친우 관계, 다른 누구는 몰라도 늑대만큼은 항상 그랬다. 알 수 없는 이유로 헤실헤실 웃으며 자연스레 다가왔다. 그게 친구가 아니라면... 아.


 고양이의 독백이 멈췄다. 이게 애정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자신에게 어떠한 종류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는 건, 부정하기엔 너무 컸고 긍정하기엔 너무 아스라했다. 마치 신기루 같았다. 희미하고도 선명하다. 아무리 쫓아도 닿지 않는다.


“이제 알았어? 멍청이 같기는.”


 늑대라면 절대 쓰지 않을 시니컬한 말투, 태도. 분명 자신의 일부이다. 그저 늑대의 모습으로 나왔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손을 뻗어서 늑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강아지가 으레 그러듯 부드러운 그르렁거림이 들려왔다. 그리고 멈췄다. 그는 혼자 남았다.

 꿈에서 깰 때까지 그는 혼자였다.


-몽상 1


“그래서 시험은 잘 봤어?”

“어.. 그게..”


 시험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 늑대는 정곡을 찌르며 들어온 고양이의 말에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망쳤다는 단어론 표현할 수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고양이는 반대였다. 늑대보다 잘 봤다는 말이 아니라. 사실상 그의 반 안에선 제일 잘 본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점을 고양이가 모를 리가 없었기에, 늑대의 멋쩍은 웃음에 고양이도 조금 웃었다.


“괜찮아. 어차피 중요한 시험도 아닌데 뭘.”


 위로인지 아닌지 묘한 고양이의 말에, 그래도 늑대는 고맙다는 듯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중요한 시험은 아니었으니까. 그것보다 둘은 갈 곳을 잃은 상태였다. 학교는 일찍 끝났고, 봄의 끝물이자 여름의 초입인 날씨는 너무도 선선했다. 좋은 날씨였다. 그때가 주말이라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나들이를 가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둘은 사랑하는 사람도 아니고, 지금은 주말도 아니다. 고양이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늑대는 현실에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다. 그는 그 순간 고양이를 보고 있었다. 사실상 처음으로 보이는 가식 없이 해맑은 미소가, 해와 같이 빛나고 있었다.

 물론 오래지 않아 스러졌다. 늑대는 말했다.


“배고프지 않아?”

“당연히 고프지. 점심 안 먹었잖아.”

“그럼 같이 먹으러 갈래? 잘 아는 곳이 있어서.”

“그래. 근데 어디로 가게?”


 고양이는 평소의 의식적인 미소와 함께 물었다. 다만 늑대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선물을 숨기는 사람 같이, 생글생글 웃으며 따라오라는 듯이 걸음을 옮겼다. 나름의 유혹이었다. 그리고 고양이는 그 유혹을 거부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집으로 돌아간다 한들 할 일이 없고, 함께할 친구가 있다면 그것보다 기쁜 일은 없었다.

 그렇게 둘은 떠돌았다. 정확히는 고양이가 늑대를 따라간 것뿐이었지만, 어쨌든 그건 충분히 방랑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중간에 늑대가 길을 잃었으니까. 한동안 골목 사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둘은,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고양이는 피로에 색색거리며 말했다.


“그래서.. 으.. 다 왔어?”

“응. 그것보다 너 되게 저질 체력이구나.”

“어쩔 수 없어. 지금 체형을 유지해야 하니까.”

“너도 참 피곤하게 산다.”


 늑대의 말에 대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건 질문보단 그저 재미없는 농담이었으니까. 하지만 고양이는 그의 농담에 실소를 흘리곤 숨을 돌렸다. 늑대는 아무 말도 없이, 마저 걸음을 옮겼다. 한두 골목을 돌자 정말로 목적지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근처에 이런 데가 있었어?”

“어디인진 나중에 알려줄게. 일단 따라와.”


 아무래도 처음 보는 듯한 가게 안으로, 고양이는 늑대를 따라 들어갔다. 맛있는 냄새가 그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다만 조금 의문이었다. 향신료가 섞인, 적어도 동양풍은 아닌 음식을, 그는 적어도 근처에서 본 적이 없었다. 그의 행동반경 말이다. 비록 아주 넓은 편은 아니지만, 이 일대를 쭉 돌아봤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가 의문을 느낄 때, 늑대의 말이 들려왔다.


“스파게티 같은 거, 안 싫어하지?”

“응. 좋아하긴 하는데..”

“그럼 들어가자. 오늘 점심은 내가 살게.”


 양식이야 당연히 싫어하지 않는다. 그리고 호의는 거절하지 않는다. 이 두 신조에 따라, 고양이는 늑대를 따라서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사람은 꽤 많았다. 조금 붐비는 시간대의 식당 정도, 딱 그 정도였다. 시끄럽지만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공기에 녹아들어 있었다.

 늑대도 이곳이 굉장히 익숙한 듯했다.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보이자, 반갑게 인사하며 항상 먹던 것으로 달라고 말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그럴수록 고양이의 의문은 조금씩 증폭됐다. 이곳이 어딘가가 아닌, 늑대에 대해서.


“그래서, 여기가 어딘데?”


 같이 주문을 끝마친 고양이의 질문에, 늑대는 별말 없이 물을 홀짝였다. 마치 맞춰보라는 듯했다. 물론 고양이도 짐작이 가는 바는 있었다. 하지만 고양이는 내심 자신의 추측이 틀렸길 원했다. 만약 그의 생각이 맞았다면, 이곳은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고양이는 참다못해 내뱉었다.


“솔직히 말해 봐, 심연 근처지?”

“맞추긴 맞췄네. 근데 그건 왜?”

“심연은 그러니까..”


 그리고 고양이는 말을 잇지 못했다. 심연이 뭐 어떻기에? 비록 심연 근처라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활기차게 살아간다.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늑대는 보여주려 했다. 스스로 말했듯이, 죽음을 옆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더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약간 어안이 벙벙해져선, 고양이는 멋쩍게 물을 들이켰다. 그의 앞에서 늑대가 여전히 밝게 웃고 있었다. 속았다는 듯이, 라기보단 기뻐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말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음식은 오래지 않아 나왔다.


-


 물에 다리를 절반쯤 담근 채, 고양이는 자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 되새겼다. 정말, 정말로 오랜만에 오는 수영장. 절대 스스로 간 적이 없었던 곳에서,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을 여기까지 데려온 원흉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원흉은 익숙하게 헤엄치고 있었다. 물이 튀기는 소리가 가득했고, 고양이는 그 소리를 싫어할지언정 듣길 원하진 않았다.


어째서였을까. 같이 놀러 가자는 늑대의 부탁을 고양이는 거절하지 못했다. 물론 수영장에 올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거절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걸 알아도 오긴 왔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여전히 왜인진 알 수 없었다. 친구로서의 의리인가. 아니면 권태를 버티지 못한 자신의 작은 반항인가. 그는 턱을 괸 채 생각했다.


“넌 진짜 안 들어와?”

“응. 나 수영 못 해서.”


 늑대는 고양이의 말에 아쉽다는 듯이 그를 응시했다. 사실 그가 몸에 물이 닿는 걸 싫어한다거나, 아니면 그저 수영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즐기지 않을 뿐이다. 즐긴 적도 없었고, 즐길 일도 없으니까. 다만 나름 이를 즐기는 늑대를 가만히 보고 있는 건 그럭저럭 괜찮았다. 즐겁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심심하진 않았다.

 나약한 정적을 깨며, 늑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읏.. 차.”

“지쳤어? 잠깐 쉬게?”

“지친 건 아닌데, 잠깐 쉬려고. 몸이 차갑네.”

“그래? 그럼 저기 햇살 잘 비치는 데에 있다가 와. 난 여기 있을게,”

“괜찮아. 막 저체온증 수준은 아니라서. 그것보다..”


 그리고 늑대는 말을 잇지 않았다. 평소처럼 헤실헤실 웃으며, 고양이의 곁에 앉아서 같이 물에 다리를 담갔다. 그의 표정엔 약간 기대 비슷한 것도 어려 있었다. 마치 춥다는 말에, 고양이가 어떤 행동을 해 주길 원하는 것 같았다. 물론 고양이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늑대가 언제 다시 물에 들어갈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영 못한다고 했지?”


 슬슬 생각의 끝 마디를 놓으려는 찰나, 고양이는 툭 던지듯이 들어온 늑대의 질문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늑대는 조금 음흉하게 미소짓더니,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럼 내가 잡아줄게. 내려와 봐.”


 확신 그 이상에 찬 태도로, 늑대는 양팔을 벌리듯이 내밀며 말했다. 고양이는 멍하게 그를 바라보다가 작은 아,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저으려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 번 물에 들어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이번 기회에 아예 취미를 들여보는 건 어떨까. 늑대와 시선을 맞추며, 고양이는 생각했다.

 오래지 않아, 그가 입을 열었다.


“좋아. 대신 잘 잡아줘야 해?”

“알겠으니까 거기서 내려와. 꼭 잡아줄게.”


 그리고 물소리가 들렸다. 고양이가 물로 내려오는 소리였다. 또 첨벙거리는 소리가 났다. 고양이가 물속에서 균형을 잡지 못하고 발버둥 치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말했던 대로, 늑대가 그를 잡고 가라앉지 않게 받쳐주고 있었다.


“그래서 기분이 어때?”


 고양이는 잠깐은 늑대의 물음에 답하지 못했다. 약간 공황 상태에 빠지려는 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늑대의 물음은 그가 자신을 잃지 않게 해주었다. 그 대신 사실상 품에 안겨있는 모양새가 됐지만 뭐 어떠한가. 그는 말했다.


“나는.. 어.. 괜찮, 아니. 좋아. 시원해..”

“역시 그렇지? 날 믿어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응. 너 되게.. 안정적이야. 그것밖에 안 떠오르네.”

“그럼 이제 잠수해볼래? 잠겨 있으면 되게 묘한 기분이야.”

“잠수? 잠수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은 채 시간이 흐르고, 한참 동안 고민했던 고양이는 얕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면이 조금 흔들리고, 늑대는 천천히 몸을 뒤로 눕혔다. 물이 그를 하반신부터 삼켜 갔다. 고양이는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늑대를 믿었다. 나름 깊은 신뢰였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늑대가 절대 그에게 피해가 가게 하진 않을 거라고 믿었다.


“숨 참아.”


 늑대가 먼저 물속으로 가라앉고, 이어서 고양이도 잠겨 들었다. 서서히, 천천히 내려가던 둘은 어느새 풀의 바닥 언저리에서 만났다. 공기 방울이 위로 올라가다가 수면에서 터졌다. 물이 시야를 가려서 확실히 볼 순 없었지만, 둘은 아주 잠깐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 정도는 둘 다 알 수 있었다. 정적이 대답을 대신하듯, 귀로 흐르는 물소리가 말을 대신했다.


“..푸하!”


 먼저 튀어나온 건 고양이였다. 이어서 늑대가 수면 위로 머리를 드러내고 다시 숨을 폐에 채워 넣었다. 어느새 고양이는 자연스럽게 물에 떠 있었다. 비록 이를 그 자신이 깨달은 순간 다시 균형을 잃고 늑대에게 의지해야 했지만, 어쨌든 좋은 기억으로 남을 듯했다.

 무더운 한여름의 하루였다.


-


 볼펜이나 샤프가 눌리며 내는 작은 소리마저 거슬린다. 깊게 가라앉은 정적이 온 교실을 휩싸고 있다. 당연한 일이다. 시험을 보는 학생들은 소음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 미약한 방해가 한참 돌아가던 생각을 멈출 수도, 나아가 시험을 망칠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늑대는 괘념치 않았다. 고양이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다른 이유에서였다.


 시험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정답을 적어낸 종이가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내 곳곳에서 탄식 혹은 환호가 들려왔다. 시험을 망쳤다거나, 밀려 썼다거나, 아니면 평소보다 잘 봤다는 말들. 그 속에서 고양이는 시험지를 정리하고 있었다.


“이번엔 잘 봤어? 중요한 시험이잖아.”


 늑대가 다가오는 걸 알아차린 그는 먼저 말을 건넸다. 늑대는 뚱한 표정으로 별 대답 없이 머리를 살짝 긁적이기만 했다. 잘 못 봤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고양이는 딱히 위로나 그런 걸 건네지 않고, 집에 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집은 언제나 포근한 곳이었다.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고양이에겐 그랬다.


“넌 미래에 뭐가 될 거야?”


 한결같지만 매일 다른, 집으로 돌아가는 길. 고양이는 문득 들려온 늑대의 질문에 고개를 돌렸다. 정작 그 질문을 던진 늑대의 표정엔 아무런 근심도 없었다. 맑거나 그런 게 아니었다. 그냥 생각이 없었다. 그 무상함에 고양이는 조금 웃곤 대답했다.


“난 아마 지금 그대로 살 것 같아.”

“지금 그대로? 네가 지금 하는 게..”

“응. 그거. 넌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름 돈 잘 벌려.”


 늑대는 그 말을 듣곤 조금 고개를 돌렸다. 그 일은 역시 대놓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고양이는 그렇게 말하며 절대 썩은 표정을 짓고 있진 않았다. 그저 조금 초연한 듯했다. 현실에 대해, 그리고 이렇게 태어난 자신에 대해.

 늑대의 질문이 또다시 들려왔다.


“그거 싫지 않아? 저번에 싫다고 한 적 있는 것 같은데.”“그건 별개야. 자본주의가 싫다고 공산주의를 택할 순 없잖아?”


 나름 적절하면서도 특이한 비유였다. 아는 사람만 알아듣는 비유라는 점에서도, 그리고 두 번 꼬인 부분에서도 그랬다. 이걸 늑대가 적절히 받아들였을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정작 늑대의 표정에선 딱히 알 길이 없었다. 묘한 무표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넌 뭐가 되고 싶은데?”


 늑대는 고양이의 질문에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고 대답했다.


“난 작가.. 정확히는 감독이 되고 싶어. 영화감독.”

“각본가, 아니면 연출가? 아무래도 그런 게 갈리잖아.”

“난 둘 다. 좋아하는 영화감독이 있어서. 그 사람처럼 되고 싶어.”


 참 안 어울린다. 고양이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정말 진지하게 빛나는 늑대의 눈빛을 보고 말하길 관뒀다. 하기야 저 정도 열정이면 뭔들 못하겠는가. 비록 내신 성적은 다른 문제이더라도, 꿈을 품은 그 두 눈은 원대하게만 보였다. 

 그는 꽤 오랜만에 웃었다. 곁에 있는 사람이 하도 해맑아서, 자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어서 웃었다. 하물며 생긴 것조차 거의 정반대로 다른데,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고양이의 생각이었다. 또 갑자기 든 의문이었다.


“넌 날 친구로 생각해?”


 아지랑이를 타고 들려온 말에, 늑대는 씩 웃기만 했다. 어찌 보면 바보 같기도, 단순무식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양이는 늑대가 조금 부러웠다. 저렇게 하염없이 웃을 수 있다는 점이,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이 부러웠다. 가식 웃음밖에 남지 않은 건 언제부터였을까.

 늑대는 웃음을 닦아내곤 말했다.


“곧 여름 방학이네. 넌 계획 같은 거 있어?”

“있지. 돈 좀 벌 생각이야. 방법은 묻지 말고.”

“그럼 방학 때 놀러 가도 될까?”

“응? 나야 상관없어. 근데 오기 전에 말해줘.”


 별거 아닌 승낙임에도, 늑대는 정말 기쁘다는 듯이 반응했다. 친구로서 기쁘다는 기색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 이상이었다. 어느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서, 앞 발자국이 반쯤 넘어온 것 같았다. 하지만 역시 그 이상은 거부했다. 친구였으니까.

 하루가 한결같이 흘러가고 있었다. 


-


 문득 늑대는 생각했다. 짝사랑하던 사람이 애인하고 노는 걸 눈앞에서 보면 어떤 기분일까. 여느 삼류 소설에 나올 법한 생각이었지만, 그의 감정을 말하기 위해선 저 표현이 가장 어울렸다. 한결같은 날. 오늘도 고양이를 기다리던 늑대는 고양이를 봤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사람들의 앞에서 보이는 모습, 그러니까 진짜 동물 고양이처럼 교태를 부리는 모습을 봤다. 그 모습이 어울리지 않은 건 아니었다. 고양이는 남자로 태어났지만 정작 그 체형이나 외견, 그런 건 여자라고 불러야 할 모습이 짙었으니까. 비단 늑대의 주관적인 의견뿐만이 아니라, 객관적인 관점에서도 그랬다. 그게 고양이의 매력이기도 했다.

 

 비록 가식이지만 맑게 웃었다. 사람에 따라 순수한 척을 하며 애교를 부리기도, 아니면 더없이 고혹적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그리고 그 중 어느 것도 늑대에겐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그가 이에 아쉬움을 느끼는 건, 조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둘은 친구였다.


 그래서 늑대는 걸음을 옮겼다. 친구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에, 정말 오랜만에 홀로 길을 나섰다. 어느새 때는 늦은 한여름. 한결같은 하교길은 더웠다. 따듯하기보단 뜨거운 햇살이 벽을 타고 흘러내리며, 나태한 작가처럼 바닥에 드러누웠다. 늑대도 그런 마음이었다. 어서 집에 돌아가서 선풍기나 켜고 누워 있고 싶다. 그런 생각이 늑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문득 아까 봤던 고양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치 물에 떨어진 물감처럼, 눈에 찍힌 장면은 그에게 금세 스며들었다. 그는 그 순간 무엇을 느꼈을까. 무언가의 감정이란 사실은 확실했지만, 단정하긴 어려웠다. 또 단정하길 거부했다. 새카만 잉크로 그어진 선이 종이에 진득하게 달라붙어 지울 수 없듯, 일단 선을 그어놓고 시작할 순 없었다.


 시종일관 우유부단한 태도로, 늑대는 마저 걸음을 옮겼다. 지평선이 태양을 애타게 부르짖고 있었다. 물론 늑대에겐 들리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자신 안에 깊숙이 빠져 있었다. 마음이 저 가까이 나 있는 심연 같았다. 색채가 아니라 깊이의 의미에서 그랬다. 하기야 한 개인이 가진 감정의 깊이는 누구나 심연과 같다. 다만 그 색이 없을 뿐이었다.


 무색이란 말은 개인에 따라 백색일 수도 흑색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늑대에겐 맑게 투명한 무언가였다. 그의 표정이었다. 낚시찌를 드리워도 고기 하나 낚이지 않는 호수였다. 그렇다면 그 바닥엔 무엇이 쌓여 있을까. 표류하는 생각이었다.


“네. 감사합니다..”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늑대는 가던 길로 마저 향했다. 지는 해 너머로 심연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 어두운 구덩이는 빛마저 삼키고 있었다. 마치 선이 그어진 듯했다. 그리고 그 선 너머로 넘어갈 수 있는 건, 설사 빛이라도 그럴 수 없다. 그저 시체가 되려 시도했던 사람들이 저 아래에 가득 쌓여 있겠지. 하는 말이 냉소와 함께 흘러나왔다.


 곁에 고양이가 없다는 이유 하나가 그의 미소를 앗아갔다. 고양이가 곁에서 말을 던져주지 않아서 웃음이 사라졌다. 이 정도면 굳이 자신이 아니더라도 그의 감정을 단정할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그는 이를 재단하길 거부했다. 멍청해야 했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게 언행 하는 게 그의 일이었다. 그리고 욕망에 감정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길을 걷던 와중, 먀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그 길고양이였다. 늑대는 고개를 돌렸다. 역시 그의 뒤엔 그림자 하나가, 그의 무릎에도 못 미치는 그림자가 있었다. 이를 본 늑대는 아예 뒤로 돌아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 길고양이를 쓰다듬었다. 기분이 좋아진 고양이는 더 쓰다듬어달라는 듯 울었지만, 늑대는 더 시간을 지체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느새 길의 끝이었다. 짧은 여정은 그렇게 끝났다. 집에 돌아온 늑대는 교복을 벗어서 스타일러에 넣어놓고 서서히 소파에 몸을 묻었다. 선풍기 들어가는 소리가 더없이 거슬렸다. 그렇다고 해서 끌 순 없었다. 누가 여름이 좋다고 했던가. 잠에 접어들려는 순간 귀를 에는 매미 소리, 바람 따위 불지 않는 나무 그늘. 그는 여름이 싫었다.


-


 어느새 끝나가는 여름 방학을 아쉬워하며, 고양이는 새까만 창밖을 바라봤다. 며칠 전부터 회색이던 하늘은 드디어 울고 있었다. 마치 정인을 잃었다는 듯, 천둥과 번개로 소리치며 울었다. 늦은 장마의 시작이었다. 아마 방학이 끝날 때쯤이면 저 비도 멈추겠다고, 생각보다 시기는 좋다고 고양이는 생각했다. 정말 단순하게, 그는 비를 싫어했다.

 정확히는 비를 맞는 걸 싫어했다. 오히려 비 오는 날은, 회백색 선이 가득 그어진 풍경은 좋아했다. 또 빗소리도 좋아했다. 소위 말하는 백색 소음을 싫어할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리고 딱 거기까지였다. 비가 내리면 불편한 점이 너무 많았다.


“좀 춥네..”


 고양이는 짧게 한숨을 내쉬곤 창을 닫았다. 어느새 밤은 늦었고 자러 갈 시간은 아니지만, 딱히 창을 열고 있을 생각도 없었다. 집 안에 찬 공기가 들어오는 거야 그렇다고 해도, 습기는 어쩔 수 없었다. 제습기를 돌려야 하니까.

 하지만 제습기는 없었고, 그는 대신 에어컨을 제습으로 켰다. 밤이 더 깊을 때까지 책이나 읽고 있을 생각이었다. 아니면 몸이나 가다듬거나. 어느 쪽이든 조금 권태로울 정도로 한결같은 일상이고, 이에 슬퍼할 시간은 오래전에 지나있었다.

 적어도 초인종이 울리기 전까진 그랬다.


“누구.. 너구나. 올 거면 말 좀 해주지.”

“미안. 까먹고 있었네. 그래도 들어가게 해 줄 거지?”

“들어오기 전에, 수건 갖다 줄게. 대충 닦고 들어와.”


 그 밤에 고양이를 찾아온 사람은, 어쩌면 예상대로였다. 하지만 그 모습은 예상외였다. 평소처럼 싱글벙글하기보단, 오히려 비 맞은 강아지 같은 느낌이었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늑대는 고양이의 집까지 오면서, 맞을 비는 다 맞고 왔으니까.

 고양이가 던져준 수건을 받고 대충 머리에 묻은 물만 털어내자, 어느새 늑대는 일상적인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하늘은 회색이지만 일상은 빛난다. 그도 그랬다. 비는 내리지만 맑게 웃고 있었다. 마치 그래도 행복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고양이는 그가 돌려준 수건을 빨래통에 넣곤 말했다.


“씻을 거야? 씻을 거면 옷 좀 빌려줄게.”

“응. 근데 사이즈 맞는 게 있어? 너하고 나하고 체격 차이 크잖아.”

“남은 거 있긴 해. 너한테 맞을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작은 것보단 낫겠지.”

“그럼 좀 쓸게. 고마워.”


 집으로 들어온 늑대는 딱히 주저 없이 옷을 벗었다. 고양이가 다른 방향을 보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내 욕실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려오고, 고양이는 늑대가 벗어놓은 옷을 주워서 대충 빨래통에 던져 넣었다. 

 물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올 때, 그제야 고양이는 깨달았다. 그는 정말 오랜만에 일상적으로 타인을 받아들였다. 그 이전까진 어땠는가. 비록 그의 일상이 조금 특이하긴 하더라도, 이렇게 다가와 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있더라도 오래 가지 못했다.

 아이러니케도, 가장 가까운 사람은 늑대였다.


“나 다 씻었는데, 옷 좀 줄래?”

“아, 미안. 갖다 줄게, 잠깐만 기다려.”


 생각에 잠겨있어서 옷을 찾는 것도 잊었다. 고양이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후줄근한 옷을 봤을 때를 짚어보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찾아냈다. 그의 아버지가 입던 옷이었다. 늑대에겐 맞을 것 같았다. 그의 체격이 그냥 큰 게 아니었으니까.


“어때, 나 잘 어울려?”


 자신이 건네준 옷을 걸치고 나온 늑대를 보며, 고양이는 어이없는 실소를 터트렸다. 아무리 봐도 한량 같았기 때문이다. 어깨에 반쯤 걸쳐서 흘러내리려 드는 티셔츠도 그렇고, 한쪽이 내려가서 상당히 아슬아슬하게 맞는 반바지도 그랬다. 

 하지만 동시에 잘 어울렸다.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바보 같은 모습이, 정말 의도치 않게 어울렸다. 조금 귀여웠다. 당연히 늑대에게 맞는 말은 아니었다. 그저 손을 뻗어서 아직 약간 축축한 그의 머리를 쓰다듬은 고양이의 생각이었다.

 고양이는 쓰다듬길 멈추곤 말했다.


“응. 근데 뭐하러 왔어?”

“그게.. 그냥. 곧 여름 방학도 끝나고 해서. 보고 싶었어.”

“그... 래. 근데 자고 갈 거야?”


 고양이가 약간의 당혹과 함께 말을 건네자, 늑대의 두 눈이 기다렸다는 듯이 빛났다. 그건 분명한 긍정이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감정이고 뭐고 전부 표정에 전부 드러나 있었다. 물론 고양이여서 알아보는 것도 있었지만, 늑대라서 보이는 것도 있었다.


“그래서, 그래서 말이야. 나 자고 가도 돼? 그럼 진짜 고마울 것 같은데.”

“어. 응.. 괜찮아. 어차피 나도 잘 생각이었어.”

“타이밍 좋네. 그럼 둘이 같이..”


 늑대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다가 어느 순간 끊었다.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고양이는 그가 말을 끊든지 말든지 상관없다며 침구를 펼치고 있었다. 그러자 이를 의아하게 생각한 늑대의 질문이 들려왔다.


“어? 너 거실에서 자?”

“여름이잖아. 에어컨 틀어놓고 자야지.”

“그럼.. 내가 소파에서 잘까?”

“아니. 뭘 굳이. 그냥 같이 티비나 보다가 자.. 기엔 너무 늦었네. 이불 다 깔면 자자.”


 혼자가 아닌 둘이기에, 고양이는 침실에서 마저 나머지를 꺼내와 거실에 늘어놓았다. 완전히 펼친 이불은 대충 두 명 정도는 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늑대 두 명도 말이다.


“먼저 누워, 내가 불 끌게.”

“알겠어. 누울 때 나 밟지 않게 조심하고.”

“내가 왜 널 밟아? 미운 것도 아닌데.”


 늑대가 먼저 이불 위로 눕자 고양이는 불을 껐다. 창문에 가득 쳐진 커튼 때문에 가로등 빛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고양이는 아슬아슬하게 그를 밟지 않을 수 있었다. 한두 걸음만 비꼈어도 몸 한군데는 성하지 않았겠지만, 어쨌든 고양이는 그의 곁에 누웠다.

 그리고 정적. 생물이라면 어떻게 할 수 없는 숨소리, 에어컨에서 흘러나오는 바람 소리를 제외하면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물며 둘 다 뒤척이지조차 않았다. 서로를 신경 쓰는 걸까, 아니면 그저 일찍 잠든 것일까.

 정답은 전자였다.


“자?”


 고양이의 물음에 약간 뒤척이는 소리가 나다가 답이 들려왔다.


“아니. 아직. 잠이 안 오네.”

“그러면.. 이런 질문 하는 게 이상하긴 한데, 너는 날 어떻게 생각해?”

“그야 당연히 친구지. 가장 친한 친구.”

“그거 말고, 그..”


 말이 이어지지 않자 늑대는 의문을 느꼈지만, 이내 그 의문은 해소됐다. 고양이가 굉장히 가까지 다가왔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 어둠에 적응하지 못한 눈은 새카만 밤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 그 앞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감각이 늑대를 속이려 들고 있었다. 하지만 늑대의 볼에 무언가 닿았다. 작고 부드러운, 고양이의 손이었다.


“다시 물을게. 이번엔 확실히 대답해줘. 날 어떻게 생각해?”


 늑대는 손을 들어 고양이의 손을 만졌다. 이젠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고양이의 얼굴을 응시하려 들었지만, 그는 고개를 내리듯이 눈을 감았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그는 자신의 볼에서 고양이의 손을 떼서, 살포시 이불 위로 내려놓을 뿐이었다. 그 순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너저분하게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고양이가 몸을 돌렸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반 시간이 한 번 하고도 반. 그래 봤자 사십 오 분. 슬슬 둘 다 잠들 시간이었을 때, 고양이는 여전히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대답을 받지 못한다면, 다시는 받을 수 없다는 예감이 들었다. 기묘한 일이었다. 그는 예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불신은 그를 잠들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모순적인 일인가.

 그래서 그는 한 번 더 뒤척였다. 잠들지 않았다면 들릴 정도로, 이게 웬 비이성적인 일이냐고 자문하며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반응은 없었다. 조금 허탈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당연한 일이었다는 듯이, 그는 약간 몸을 웅크렸다. 체념에는 익숙했다. 체념이 아닌 허무에도 더없이 익숙했다. 그렇기에 마지막 시도의 실패는 더 무겁게 다가왔다.

 아니, 따스하게 다가왔다. 아주 따스하게.


“너..”


 고양이는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늑대가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달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건 그저 덧없을 정도로 가벼운 포옹이었다. 포옹이라기보단 팔을 상대의 몸에 얹는 수준이었다. 상관없었다. 늑대는 그를 안았다. 그거면 됐다.

 고양이가 늑대의 팔을 잡고 살짝 밀어내자, 그는 미안하다는 듯이 황급히 팔을 떼려 했다. 하지만 고양이가 의도한 바는 그게 아니었다. 또다시 옷의 직물과 이불의 천이 마찰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늑대의 두 눈은 어느새 고양이의 두 눈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양이는 늑대에게 안겼다. 서로를 마주 보다가 스스로 늑대의 품에 안겼다. 언젠가, 여느 때와 같았다. 말은 필요 없었다. 행동이 그들의 언어를 대신했다. 심장이 뛰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거의 비슷한 박동 수, 거의 비슷한 체온.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둘은 천천히 잠들어 갔다. 어쩌면 다음 날 아침 형언하기 힘든 부끄러움과 함께 할 수도 있겠지만, 어느새 완전히 잠든 둘은 마냥 편해 보이기만 했다.


-여름


 사실 예상은 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는 술에 약했으니까. 웬일로 술을 두 병 넘게 들이킨 순간부터 예정된 일인 셈이다. 그러나 두통은 한결같았다. 메스꺼운 감각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혼자가 아니라는 현실이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곁에 있는 사람이 절대 나쁜 사람이 아니란 확신이 있어서, 그래도 지금까지 겪어온 것보단 나아서.


 그나마 나쁜 점이 있다면 움직이기 힘들단 정도였다. 늑대가 그를 뒤에서 꽉 껴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춥지는 않았다. 체격 차이 덕에 자연스레 팔베개를 베기도 했고, 누가 본다면 정답다는 말까지 할 수준으로 가까웠으니까. 오랜만에 느끼는 온기다운 온기였다. 적어도 이불보단 따스하잖은가. 마침 둘 다 이불 안에 있기도 하고.


 하지만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순 없었다. 창문으로 솔솔 불어오는 초가을 바람도 그렇고, 일견 훑어본 시계는 정오라는 시간을 내보였다. 다만 늑대가 깰 기미는 아예 보이지 않았다. 술에 강한 편이었던 걸까. 아니면 너무 약해서 깊게 곯아떨어진 걸까. 어느 쪽이든 무관하다. 고양이는 작게 한숨을 뱉은 후 하루의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숙제를 한 후 다시 잠든다. 언제나 같진 않다. 곁에 늑대가 있다. 그러니까 2인분의 음식을 준비하고, 늑대의 숙제를 도와주는 김에 자신의 과제도 마치고, 어쩌면 오늘처럼 같이 잠들지도 모른다. 물론 오늘은 조금 예외였다. 어느 날 대뜸 찾아와서 같이 술이나 마시지 않겠냐고 묻는 게, 어쨌든 고등학생으로서 당연한 일은 아니잖은가.


 마침 늑대가 깼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고양이를 밀치려다 약간 흠칫하며 부드럽게 물러났다. 그가 싫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그냥 간혹 동침할 때면 항상 그랬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꼭 껴안은 채로 잠들었다가 아침에 일어나면 부끄럽다는 듯이 밀쳐냈다. 그리고선 말했다.


“...무슨 일 없었어?”


 라고, 주로 얼굴을 붉히며 물을 때면,


“응. 그런 것 같네.”


 고양이는 그렇게 답했다. 흐트러진 머리를 가다듬으며, 늑대의 볼이나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둘 다 옆으로 누워서 서로를 마주 본 채였다. 역시 묘한 기류가 흘렀다. 환절기의 공기 같았다. 서늘하지도 따스하지도 않았다.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도 마찬가지였다.


“근데 오늘은 내가 먼저 잠들지 않았어? 난 술에 약한데.”


 몸을 일으켜 침대에 무릎 꿇고 앉은 고양이가 늑대에게 말을 걸어왔다. 입가에 조금의 미소까지 걸린 채였다. 아무래도 막 안심하고 있던 늑대의 허를 찔러서, 조금은 즐거운 듯했다. 고양이만 그렇게 표현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그런 그의 모습은 꽤 귀여웠다. 조금의 간극이라고 해야 할까. 갑자기 당황해선 덩치에 안 맞게 풀 죽은 강아지처럼 두려워하는 건, 고양이의 기준에선 충분히 귀여운 모습이었다.


“어... 그... 나도 기억이 뚜렷하지가 않은데, 진짜로 무슨 일 있었어?”

“글쎄. 내가 어떻게 알아. 난 어제 두 병 마시고 뻗었잖아.”

“그러니까.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게... 음...”

“뭔데. 혹시 말하기 힘든 거야?”

“솔직하게 말해도 화 안 낼 거지?”

“당연하지. 일단 말해 줘.”

“말로는 못 하겠고...”


 말로는 못 하겠다니. 늑대의 답에 고양이는 의문을 표했다. 이에 그는 조금 쭈뼛거리다 고양이에게 다가왔다. 당황일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의 감정일까. 늑대에게 직접 물어보더라도 확답을 받기는 힘들 것이다. 그의 심장은, 지금 고양이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거세게 뛰었으니까. 본래 그러하다. 감정이 격렬할수록 설명하긴 힘들어진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늑대는 고양이의 턱을 끌어당겼다. 서로의 숨결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아직 약간은 술 냄새가 나는, 지독한 온기에 데워진, 따스하게도 바랜 공기가 흘렀다. 딱 거기까지였다. 모호한 분위기 속에서, 늑대는 고양이에게 입을 맞추진 않았다. 그저 수많은 감각으로 바라봤다. 이에 고양이는 말했다.


“...이게 마지막 기억이야?”

“일단은. 딱 다음부터 필름이 끊겼어.”

“그래? 그럼...”


 하지만 짧게, 정말 짧게, 곱고 작은 손이 늑대의 뒤통수를 내리눌렀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채 인지하기도 힘든 짧은 시간이지만, 느릿하게 머리를 뗀 늑대는 아무 말도 없이 고양이를 응시했다. 그는 작게 미소짓고 있었다. 길 잃은 표정을 짓고 있는 늑대를 바라보며, 장난스레 웃고 있었다. 언제나 한결같았다. 가식 섞인 표정으로 늑대를 마주하는 것도,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듯이 웃는 것도, 늑대에겐 모든 게 사랑스러웠다.


“점심이나 먹자. 뭐 해줄까?”

“나는... 나는 아무거나 괜찮아. 근데 너 방금...”

“괜찮아. 그냥 장난이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었어.”

“나보다 먼저 뻗었다며. 그건 어떻게 알아?”

“알려주긴 힘든 방법. 그래도 사실이니까 안심해.”

“...네가 그렇다면야 뭐.”


 고양이는 먼저 방 밖으로 나왔다. 그 뒤로 옷을 추스르는 늑대가 따랐다. 초가을 특유의 서늘하게 말라가는 공기가 둘을 마주했다. 하지만 오래 가진 않았다. 고양이가 불을 올리고 요리를 시작했으니까. 이내 맛있는 냄새가 온 집에 퍼졌다.


-환절기


"있지. 넌 내가 좋아?"


 고양이가 말을 걸어온다. 머리에 붙은 낙엽을 애써 털어내고 있다. 보다 못한 늑대가 마른 나뭇잎을 떼어주려 손을 뻗는다. 하지만 정체 모를 이파리는 여러 조각으로 바스러져 사라진다. 그가 당황한다. 고양이는 그렇지 않다. 그저 눈앞에 색바랜 갈색 조각이 떨어지는 걸 보고 머리를 거칠게 턴다. 아직 조금은 남아있다. 아무래도 괜찮다며 고양이는 부드럽게 웃는다. 그러다가 대답을 요구하는 듯 늑대를 약간 끌어당긴다.


"...응. 좋아."


 그가 마지못해 대답한다. 그러자 고양이는 그의 손을 잡고 자신의 손과 포개다가 상의에 덮인 가슴팍 위로 가져다 댄다. 분명 장난이다. 그가 자주 그랬듯 늑대가 당황하는 걸 보기 위한 술수였다. 어쩌면 복수이기도 했다. 늑대가 자신을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니까, 그 반대로도 해주고 싶단 생각이다. 하지만 그는 이 작은 장난에 걸려들지 않는다. 역으로 고양이를 확 끌어당겨선 눈을 마주친다. 반대도 성립한다. 고양이도 늑대에게 넘어가지 않는다. 단순히 그의 어깨에 가볍게 턱을 얹곤 말을 잇는다.


"어디가 좋은데?"

"그러게. 넌 어디가 좋았으면 좋겠어?"

"여러 가지. 근데 지금 떠오르는 걸 말해줘."

"그럼... 이런 건 어때?"


 늑대가 고양이를 작게 밀어낸다. 그리고선 그의 볼을 살짝 쓰다듬다가 천천히 손을 내린다. 고양이는 왠지 간지럽다는 표정이다. 하기야 그럴 만도 하다. 그가 고양이의 배를 만지작거렸으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론 끝나지 않는다. 고양이의 눈에 묘한 기대가 비친다. 어느새 두 손이 그의 얇은 허리에 닿는다. 그러다가 멈춘다. 이게 아니다. 맞더라도 이런 방식은 아니어야 한다. 늑대가 뒤로 물러나지만, 고양이는 용납하지 않는다. 역으로 늑대를 밀어붙인다. 어느새 그의 몸무게에 늑대가 깔린다. 첫 만남과 정반대의 구도다. 이에 늑대는 눈을 감는다. 모든 게 어둠 뒤로 사라진다. 바람 소리만 남는다.


 그리고 늑대는 눈을 떴다. 유독 천장이 가까워 보였다. 다만 그 색이 요상했다. 바닥에 쓰일 법한 갈색이라고 해야 할까.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갑자기 방이 팍 낮아지거나 한 게 아니었다. 침대에서 굴러떨어져서 짧은 순간 착각했을 뿐이다. 다행스럽게도 아픈 부분은 없었다. 허기를 고통이라고 간주한다면 없다곤 못하겠지만 말이다.


 그는 몸을 일으키곤 폰을 확인했다. 딱히 연락은 없었다. 해봤자 학교 공지사항이나 광고 정도. 하지만 그의 눈이 이틀 전에 온 한 마디의 메시지에 멈췄다. 고양이였다. 항상 그랬듯이 딱히 정다운 말투는 아니지만, 일요일에 나들이나 같이 가자고 데리러 와달라는 내용이다. 그리고 같이 시간이나 보내지 않겠냐는 말들.


오늘이 일요일이다. 또 약속 시간 언저리다. 평소라면 주말이 끝나는 것에 무력해질 법하지만, 늑대는 가을 특유의 선선한 공기를 느끼며 활기차게 기상했다.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도 완벽했다. 초가을 특유의 쨍하지 않게 밝은 햇살이 들어섰다. 마치 오늘 하루는 여느 때보다 멋진 날이 될 거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큰 기지개에 티셔츠가 살짝 들렸다. 아직 남아있던 뻐근함이 대번에 풀렸는지, 늑대는 길게 하품했다. 차갑게 맑은 기가 그의 폐를 채웠다가 빠져나갔다. 그제야 식탁에 놓인 어머니의 메모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은 약속이 있어 일찍 나가니, 아침은 알아서 먹으라는 내용이었다. 해봤자 라면 정도지만 말이다.


 식사를 마친 그의 손이 소파에 놓인 스웨터를 잡으려다가 멈췄다. 시선이 곁에 있는 셔츠로 향했다. 가을 하늘보단 옅지만, 그래도 구름보단 푸른 옷이 그를 마주했다. 갑자기 맘에 들었다. 정확히는 언젠가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가 셔츠 단추를 잘못 채우고 왔을 때, 고양이가 단추를 대신 정리해주었던 묘한 추억.


 그것과 함께 모종의 오한이 척추를 타고 올랐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마침 단추도 중간에 하나를 잘못 채웠다. 다행히도 아주 아랫단추는 아니다. 두 개 정도만 풀어도 정정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늑대는 이를 그냥 내버려 둔 채 후드를 걸쳤다. 끝까지 올라간 지퍼가 내재된 오류를 숨겼다.


 그리고 십 분 정도 늦게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고양지는 자리에 없었다. 늦을 것 같다는 연락도 없었다. 하지만 늑대는 그러려니라는 듯, 근처 벤치에 앉아 고개를 뒤로 누였다. 구름 한 점 없이 유독 새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더 눈부셨다. 이에 늑대는 후드를 뒤집어썼다. 잿빛 천 뒤로 해가 기울어갔다.


 시간이 지나고, 지평선에 걸친 해가 마지막으로 일광을 발하고 사라질 때까지, 고양이는 오지 않았다. 대신 몇몇 사람이 늑대를 노숙자 보듯이 지나쳤을 뿐이다. 이에 늑대는 몸을 일으키곤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 그의 표정엔 실망과 닮은 묘한 감정이 잇따랐다. 그래도 내일 학교는 올 테니까. 그때 말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늑대는 저녁을 준비했다.


 그리고 다음 날 들려온 건 교통사고 소식이었다.


-


 2038년, 만능 물질 개발.

 2039년, 방주 운동 발발.

 2041년, 만능 물질 비사용 조약 체결.

 2042년, 방주 운동 절멸.

 2043년, 무슨 일이 있었지..


 늑대는 역사책에 나온 연표를 저도 모르게 읊고 있었다. 비록 부진한 공부의 탓으로 중간에 끊기긴 했지만, 그는 아는 사건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짚었다. 그건 어쩌면 습관적인 일이었다. 무언가 문제가 생겼을 때, 역사를 반추하면 도움이 되곤 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2050년의 연표에서 멈췄다. 무려 2050년대. 공상 과학에서나 볼 법한 기술의 발달, 점점 나아지는 인간의 삶. 그런 건 방주 운동이 모조리 멈춰버렸다. 생각해 보면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2017년에, 자신들의 대통령을 스스로 끌어내린 사람들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대체 어느 세대가 그들을 이었기에, 반지성주의 운동이 터질 수 있었는가.

 어쩌면 그들은 그렇게 해서 더 많은 사람이 살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론 틀렸다. 그들은 십 년 후 사람 하나를 죽였다. 어쨌든 늑대의 관점에선 뇌사도 죽음이었다. 일어날 가망이 희박하다 못해 없다시피 하니까.

 따라서 고양이는 죽었다. 그게 현실이다.


“2043년, 심연 발생..”


 잊었던 부분을 다시 기억해냈건만. 늑대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특유의 병원 냄새가 불쾌하게만 느껴졌다. 아니, 정확히는 그렇게 느끼는 것이리라. 정작 늑대가 앉아있는 곳은 아무런 향취도 없었다. 공기가 지나치게 투명해서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 스스로에 집중하긴 편한 환경이었다. 하지만 정작 늑대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기억은 되새겨진다. 특히 얼마 지나지 않은 뜨거운 기억은 인두처럼 흉터를 새긴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분명히 처음은 나름 행복한 시작이었다. 가을 날씨가 너무 좋아서 주말을 겸해 나들이를 나왔을 뿐이다. 그게 전부였다. 다른 게 있었다면, 조금 더 가까워진 관계를 증명하고 싶어서, 말이 아닌 행동으로 증명하고 싶어서, 그 정도였을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면 나오지 않는 건데,


“2044년, 4가 두 번 겹쳤네..”


 의자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 늑대는 무미건조하게 웅얼거렸다. 아마 병실 안에서 고양이의 보호자가 의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을 것이다. 과연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을까. 자연스럽게 그런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고양이는 이미 죽었다고, 장기 기증을 택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래도 살 가망이 있다고, 부디 아들을 살려달라고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그들의 선택이다. 하지만 늑대의 생각은 달랐다. 부모로서 고양이의 목숨을 완전히 끊는다면, 늑대는 절대 그들을 존중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 봤자 생각이다. 그뿐이었다.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해?


 이미 들어 버린 말은 심장에 정곡으로 꽂혔다. 마치 촉이 쐐기처럼 생긴 화살처럼, 뽑으려 시도해도 상처만 더욱 커질 뿐이었다. 또 어떻게든 뽑더라도 그 이후엔 되돌릴 수 없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젠 상처가 되어버린 추억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도 대답을 어떻게든 건넸다는 것에 행복해야 할까. 아니면 더 확실히 대답할 순 없었냐고 자학하고 있어야 할까. 늑대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새하얗게 표백된 벽이 눈에 들어왔다. 그건 마치 캔버스 같았다. 무엇을 비추는진 말하지 않아도 당연했다.

 늑대는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시침은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의 그 무엇도 움직이지 않았다. 뇌와 목까지 포함한 말이었다. 한동안 시선은 시계에 고정되어 있었다가, 일 분 정도가 지나자 다시 아래로 처졌다. 하지만 여전히 생각은 돌아가지 않았다. 무언가의 포화였다. 그것도 여백 하나 없는 포화였다.

 누군가의 말이 들려왔다.


“그 애는 우리가 잘 돌볼 테니, 그만 돌아가렴. 너도 학생이잖니.”


 고양이의 보호자가 말했다. 감정이 서린 목소리, 아직 물기를 덜 닦아낸 목소리였다. 억지로 무미건조하게 말하려 노력하지만, 그럴 수 없을 때나 나오는 목소리였다. 늑대는 그 절절한 건조함에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내일을 위해,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늑대는 몸을 일으켰다. 나들이에 쓰일 것들이 가득 들어있는 가방을 짊어지고, 그는 가야 할 곳으로 갔다. 처음엔 천천히 병원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문밖으로 나갔을 때, 그는 달음박질쳤다. 그건 도피였다. 저 너머를 향한 도주였다.

 늑대는 도망쳤다.


-


 사람들이 죽는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던 시절은 있었다. 이젠 아니다. 그럴 수 없다. 죽음은 단순한 현상이라고 말하기 힘들다. 그저 몸이 죽는 것뿐이라고 하기엔 너무 무겁다. 마치 영혼의 무게라도 있다는 양, 삶의 냉소를 짊어진 두 어깨는 늘어진다. 노을에 늘어지는 그림자는 미적거리며 걸음을 옮기길 주저한다. 집에 돌아가도 혼자니까. 안아줄 사람, 식은 밥이라도 내어 줄 사람 하나 없으니까. 그래서 늑대는 떠돌았다.


 누군가와 같이 걷던 길. 길 위를 떠돌던 말소리는 멈췄고, 악취 가득한 정적이 공기를 채웠다. 늑대의 코가 약간 킁킁거렸다. 기분 탓이 아니었다. 무언가의 시체 썩는 내가, 몇 번은 맡아본 끔찍한 향취가 후각을 자극했다. 그는 그 진원지로 걸음을 옮겼다. 머리가 아파 왔다. 구역질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도망치고 싶지만, 발길은 여전했다.


 한두 번은 걸었던 골목길 너머, 하염없이 떠돌았던 공터 저편. 늑대의 고개가 병적으로 꺾였다. 조금 벌어진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박명했다. 철저하게 벼려진 노을이 그의 그림자를 무참히 살해했다. 그의 시선이 마지막 골목을 스쳤다. 순수하게 검었다. 빛이 들지 않는 골목은, 어쨌든 최소한의 반사광으로 무언가 보이긴 했다. 그저 보기 싫었을 뿐이다.


 늑대는 두 손으로 길고양이의 사체를 들어 올렸다. 익숙하지 않은 무게감이 느껴졌다. 끔찍한 냄새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굳은 피가 손에 질척하게 늘어졌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금방이라도 놓고 싶겠지만, 그는 가만히 그것을 들고 있었다.


 썩은 고깃덩이엔 여기저기 칼에 찔린 자국, 아니면 맞은 자국이 있었다. 사람이 한 짓이겠지.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럼 복수해야 할까? 누가 이런 일을 벌였는지 찾아내서, 똑같이 해 줘야 할까? 틀린 생각이다. 윤리나 도덕의 관점이 아니다. 늑대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항상 기분 좋게 웃고 있고, 정의를 사랑하며 악을 부수기 좋아한다. 단순하고도 무식하지만 그래도 밝게 산다. 낙천주의가 말로에 들어선다면, 아마 그일 것이다.


 말로. 일순간 자신의 의미가 단 한 단어에 집중됐다. 늑대는 한 손으로 죽은 길고양이를 안아 들고, 지나쳐 온 공터로 향했다. 삽이 없었으므로 손으로 땅을 팠다. 모래와 피가 섞여 양손에 달라붙었다. 그의 피였다. 손톱이 뒤틀리고, 비틀리며 흘린 눈물이 가득했다. 괘념치 않았다. 무관했다. 그저 작은 몸덩이 하나를 놓을 깊이만 파면 된다. 오래 걸리지 않는다.


 오후에 시작했던 땅파기는 짙은 밤까지 계속됐다. 그제야 늑대는 작은 기억을 묻고 두 손을 털었다. 마치 방금 누구를 죽이기라도 한 듯했다. 따지자면 맞는 말이다. 그는 결국 누군가를 죽였다. 방금 이곳에 묻힌 건 길고양이 하나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사실을 몰랐다. 나태해진 감정이 움직이려던 순간 다시 쓰러졌다. 이미 여러 번 겪은 일이니까, 아프지 않으리라고 믿었다. 이는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믿음으로서 이런저런 상처를 막고, 이번에도 한 번 더 꿰맸다. 언제까지나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은 잘 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걸까. 그렇게 해서 이렇게 잘 살아왔는데.


 늑대는 다시 제 갈 길을 갔다. 학원을 몇 개나 빼먹었는진 모르겠지만, 확실한 점은 이미 늦었다는 현실이다. 마침 피곤하기도 해서, 그는 집으로 향했다. 공기가 차가웠다. 나지막이 조소를 던지는 바람과 아스라이 흩어지는 낙엽 냄새. 가을이었다.


-


 난 어쩌자고 여기 온 걸까.


 병문안을 오지 않겠다는 생각은 여러 번 했다. 자신의 추억을 스스로 부관참시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하기야 자신의 친구가 식물인간처럼 병상에 누워있는 모습을 어느 누가 바라겠는가. 특히 친구가 아닌 모호한 관계였다면 더욱이 그랬다. 늑대는 순순히 시인했다. 감정이 있었다. 애정은 아니다. 아마 그렇게 되기 직전에 멈췄다. 어쩌면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사고가 난 날 자신이 무얼 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고양이를 친 차주의 얼굴은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어느 쪽이든 유쾌하진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삶이 싫으면 싫다고 외치면 되고, 이는 다른 것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는 말을 관뒀다. 시체와 같은 몸에 말을 건네는 건 멍청한 짓이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던 시절은 있었다.


“있지. 나 이번 모의고사 꽤 많이 틀렸어. 그러니까 저번보단 적게 틀렸다고.”


 혼잣말 같은 서두가 병실을 떠돌다가 제 주인에게 다시 돌아갔다. 열어둔 창문에서 흘러들어온 바람이 늑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위로가 아니었다. 삭풍은 그의 주위를 떠돌다가 귀에 냉소 몇 마디를 속삭여 주곤 사라졌다. 몸이 조금 차가워졌다. 웃긴 일이었다. 차디찬 삭풍에 싸늘한 냉소라니. 그는 고개를 숙이곤 조금 쿡쿡거린 후 말을 이었다.


“상대적인 표현이야. 엄청 많이 틀린 것과 꽤 많이 틀린 건 아무래도 다르잖아?”


 농담이다. 어차피 틀린 비율은 비슷했다. 그저 한두 문제 덜 틀렸다고 기뻐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자랑하고 싶었다. 고양이라면 언제나처럼 가식적으로 밝은 미소를 보이며, 늑대의 볼을 만지려다가 주저할 게 확실해서. 그러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일어나서 욕이라도 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틀린 말이다. 고양이가 지금이라도 일어나서 폭언을 내뱉는다면, 그는 아마 바로 울음을 터트릴 것이다. 그 증거로, 물기 섞인 어투가 튀어나왔다.


“아, 그리고.. 그 식당 닫았더라. 같이 갔던 이탈리아 식당. 참 맛있었는데.”


 금방이라도 투명해질 것만 같은 축축한 말은 금세 말라 버렸다. 당연하게도 늑대는 울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그 무엇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라지만, 고양이 앞에선 웃고 싶었다. 억지스러운 미소도, 어이없는 농담도 전부 자신을 향했다. 지금 던진 실소와도 같았다.


“근데 왜 닫았는지 알아? 사장님이 한식으로 돌아오겠대. 그게 가능한진 묻지 마. 나도 지금 좀 의심스럽거든. 그분이 요리를 잘하시긴 하지만, 그래도 완전 다른 분야니까.”


 거짓말이다. 사장님이 죽었다. 왜 죽었냐면, 심연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과정이 어떻게 됐는진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결과만 남았다. 사적으로 나름 친했던 사람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건 없다. 모든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 그럼 왜 지금 죽을 순 없는 거지.


“애들이 널 그리워하고 있어. 넌 친구도 많았잖아. 아, 나도 친구고. 그래서, 무슨 말이냐면..”


 늑대는 말을 멈췄다. 말하려 했다. 늦으면 되돌릴 수 없으니까, 이르더라도 말하려 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늦었다. 끊겼다. 선을 그어놓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어느새 저 선을 넘지 말아야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이미 선은 튕겨 끊어져 버렸다. 차라리 그때 그랬다면, 고양이가 조심히 감정을 건넬 때 조금 더 달려들었다면, 지금 와서 가정은 의미 없다.


“네가, 네가.. 글쎄. 모르겠어. 아무래도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데.”


 늑대의 입가에 저녁놀을 닮은 미소가 걸렸다. 그는 고양이를 뒤로하고 병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발길이 생의 변두리에 걸쳐졌다. 어딜 갈지는 이미 정했다. 그저 마지막 주저일 뿐이다. 추억 없는 공터를 지나서, 추억이 새겨진 길을 지나서. 잊고 싶던 길가에 앉았다. 기억에 아로새겨진 사람은 여기서 죽었다. 그의 마음에 처음으로 금을 남긴 사람의 유언이 아직도 공기를 떠돌았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미안했을 거야. 아마도. 정말로.”


 첫 번째 걸음은 심연의 테두리에 걸쳤다. 이어서 두 번째 걸음은 허공을 걸으려 시도했다. 일상적인 일이라는 듯, 늑대의 눈은 심연을 응시했다. 그것도 한순간.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한 아이가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삼킨 구덩이에 몸을 던졌다. 일상적인 일이었다.


-가을


 반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겨울바람에 누군가 몸을 일으켰다. 딱히 춥지는 않은 듯했다. 다만 멍하게 창문 바깥을 바라보다가, 몸을 늘여서 기지개를 켰다. 그는 그제야 주위를 인식했다. 팔에 꽂힌 링거와 백색조의 황량한 방, 그리고 옷. 자신이 병상에 누워있었단 사실은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알 수 있으리라.


 하지만 왜 여기 누워있었는진 알 수 없었다.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는 양 몸이 멀쩡했기 때문이다. 물론 뻐근함은 존재했다. 오랫동안 한 자세로 있어서 그런지, 움직이기 힘들단 감각도 느껴졌다. 그게 전부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앙상한 나뭇가지들을 관찰하며, 그는 조용히 의사가 오길 기다렸다.


 퇴원 절차는 그리 길지 않았다. 누가 어떻게 일어났냐 묻지도 않았고, 그저 병원비를 계산하고서 끝났다. 이후 집으로 돌아온 고양이는 편히 침대에 누웠다. 무언가 공허했다. 마구 뒹군다면 모르겠지만, 집의 침상은 홀로 있기엔 너무도 넓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조금 덩치가 큰, 안기면 포근한, 자리가 남지 않는 그런 사람.


 일단 내일 학교가 기다렸기에, 고양이는 굳이 늑대에게 연락하진 않았다. 어차피 교실 안에서 볼 테니까. 그럼 걱정하는 표정으로 그동안 어디 있었냐고 물어볼지도 모르고, 그대로 포옹하려다가 멈출지도 모른다. 적어도 공공장소에서 그러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번에야말로 무언갈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꽤 긴 시간 동안 만나지 못했잖은가.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고양이를 껴안고, 나긋한 미소를 지은 채 바라보며, 정작 거기서 끝날 수도 있다. 그러면 자신은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볼을 만져주어야 할까. 아니면 진심 어린 장난을 쳐야 할까. 분명 어느 쪽이든 그는 가만히 있을 것이다. 상대가 고양이라면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고양이는 몸을 일으켜 전신거울 앞에 섰다. 조금 수척해진 것 빼고는 마찬가지였다. 달라진 게 없는 체형, 체격, 흉터 하나 없는 몸, 귀엽다는 표현이 어울릴 외관, 또 가늘고 얕은 미성의 목소리까지. 완벽하게 사랑스러웠다. 분명 부러움을 살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이다지도 혐오스러운 걸까.


 그는 셔츠를 벗었다. 이어서 작게 떨리는 손으로 살결을 가리고 있던 옷가지들을 곁으로 치웠다. 이걸 늑대가 본다면 무슨 반응을 보일까, 하는 생각에 작은 웃음이 입가부터 뻗어 나갔지만, 금세 일그러졌다. 직물처럼 고운 볼 위로 눈물이 흘렀다. 그마저도 아름다웠다. 그렇기에 그를 달래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이렇게 태어나 버렸으니까. 


 유리 방울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이 흩어졌다. 그는 무릎을 꿇고 거울 앞에 앉았다. 생각해 보면 고양이란 별명은 참 잘도 어울렸다. 둥지를 찾지 못하고 떠도는 귀엽고 예쁜 부랑자 고양이. 얼마나 알맞은가. 애정을 바랐지만 돌아오는 건 단편적인 욕망뿐. 하지만 그마저도 사막에 내리는 이슬비와 같아서, 원하지 않는 모습을 하고 싫어하는 사람에게 교태를 부렸다.


 그런데 늑대는 항상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니. 정확히는 스스로 억눌렀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에겐 매 순간이 기회였다. 곁엔 고양이가 있었고, 부탁만이 그가 해야 하는 일 전부였으니까. 그럼 고양이는, 늑대도 결국 똑같은 사람이란 것에 실망하면서도, 자신을 바라봐주는 게 기뻐서, 분명 혐오감을 느끼면서도 늑대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사실 그것조차 아니다. 늑대라는 별명에 걸맞게 강제로 힘을 써서 밀어붙이더라도 그는 거절하지 않았으리라.


 그래서 고양이는 사랑했다. 늑대를, 그와 함께했던 시간을, 아슬하지만 안온한 감정들을, 그 순간에야 그는 긍정했다. 늑대를 원한다. 또 욕망한다. 지금까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담하다. 동시에 따스하게 웃는 얼굴로 그를 마주한다. 그 지독한 괴리에 고양이는 목으론 울면서도 입과 눈으론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선 나직이 말했다. 정말로 사랑한다고. 만나는 게 기대된다고.


-


 고양이는 이른 아침부터 깼다. 평소완 달랐다. 마치 꿈에서 깨기 싫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늑대가 등장하는 꿈을 꿨으니까. 그것도 얼굴을 붉히지 않고선 타인에게 설명할 수 없는 꿈을, 마침 딱 절정에 다다르려는 순간 기상했다. 그렇지만 아주 아쉽진 않았다.


 학교에 가면 자초지종을 묻는 늑대를 일단 꼭 껴안을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방과 후에 그를 집에 불러 마저 잇고, 그게 끝나면 고백할 생각이었다. 받아주지 않을지도 모른단 가정은 하지 않았다. 늑대도 자신과 같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상냥하게 대해줘서 마음이 떨렸어, 같은 흔한 얘기지만 상대가 늑대였으니까.


 고양이의 머릿속에 그의 자리가 떠올랐다. 앞으로 세 자리, 왼쪽으로 두 자리, 앞으로 한 자리. 딱 그 정도의 거리였다. 이젠 아니다. 계속 함께할 것이다. 오랜만의 행복한 생각에 등교 준비가 지루하지 않았다. 물론 수업을 듣는 건 여전히 지루하겠지만, 그래도 나직하게나마 말할 수 있었다. 늑대가 있으면 아주 따분하진 않을 거라고.


 그리고 공백. 학교에 도착한 고양이는 늑대의 공백을 인지했다. 무던하면 곧잘 등교하던 그가 무슨 일로 오늘은 오지 않았다. 그냥 아파서 못 온 거겠지, 같은 추측은 떠오르지 않았다. 뭔가의 불안함이 감돌았다. 교실은 똑같은 모습이었다. 시끌시끌하게 정돈되지 않고,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는 듯이, 어딘가 부족한 공기.


 그는 책상에 머리를 눕혔다. 아마 내일이면 달라질 거라고 믿었다. 늑대가 단 하루면 모든 걸 딛고 다시 일어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버려졌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모종의 일이 있을 거라고 여겼다. 엄청나게 중요해서 학교도 못 나오는 그런 일 말이다.

 그렇게 일주일하고도 하루였다.


“...안에 있어?”


 가끔 늑대가 그를 데리러 올 때면, 가볍게 문을 두드리며 저렇게 말했다. 항상 조심스러웠다. 잠자는 고양이를 깨우고 싶지 않은 걸까. 사자가 고양이과란 사실을 생각해도 꽤 억지스러운 말장난이지만, 정작 고양이 본인은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늑대가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문을 몇 번 두드리다가, 어깨로 단번에 들이받았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저 소란에 나온 이웃이 처량하게 주저앉은 고양이를 보곤 다시 들어갔을 뿐이다.


 그는 자신의 어깨를 감쌌다. 패딩 덕분에 멍이 들거나 하진 않았다. 하지만 입가가 떨렸다. 파렴치한 추위와 기분, 추억이라 부르기 힘든 기억들이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 모든 게 유의미한 일이냐고. 당연케도 그는 대답할 수 없었다. 늑대에게 기대를 걸었고, 이제 늑대는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이럴 거면 차라리 다가오지 말아야 했어, 라고 그는 웅얼거렸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실질적으로 사랑이라 부를 만한 부분도 모자랐다. 해봤자 농담 수준인 입맞춤, 행동들, 그 정도였다. 이게 긍정하기엔 너무 아스라하고 부정하기엔 너무 선명하다고 했나? 그렇지 않다. 장난스레 다가갔지만, 자신도 모르는 새에 복잡미묘한 감정들이 깊이 뿌리내렸다. 처음으로 누군가 보고 싶었다. 오랜만에 타인이 그리도 그리웠다.


 그래서, 설명할 수 없었다. 스스로도 처음 겪는 감정의 격류가, 누군가를 상대로 애정을 느낀단 현실이, 참혹하지만 밝게도 다가왔다. 하지만 무엇보다 비극적인 일은 그래도 늑대를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한번 안아주길 바랐다. 장난에 넘어가는 모습을 마주하고 싶었다. 물론 늑대는 그곳에 없었다. 고양이는 무릎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그런 그를 포옹하듯이, 백색으로 뿌연 겨울 하늘은 눈조차 내려주지 않았다.


-


 기말고사가 훌쩍 다가왔다.


 그 전까지 고양이는 교과서를 펼쳐보고 있었다. 책 위주로 문제를 내겠단 선언도 있었고, 문제집은 진작에 종장까지 풀어버렸으니까. 하지만 계속 시야가 흐려졌다. 흔적들 때문이었다. 군데군데 늑대가 낙서한 흔적과 특유의 시니컬한 필체가 보였다. 분명 당시엔 즐거웠을 것이다. 공부는 망치더라도, 이렇게 힘들어하지 않아도 됐으니까.


 그래서 원망스러운가? 원수와도 같은 관계인가? 그럴 리가. 분명 그가 미운 건 맞다. 어린 마음에 가깝게, 증오스럽기보단 미움에 가까운 한없이 단순한 감정이었다. 동시에 애증이었다. 보고 느끼고 싶으면서도 정작 만나면 한 대 갈겨주고 싶다. 분명 모순이지만, 그런 상황을 비웃던 고양이지만, 이젠 이해했다.


 혹여나 시험 날에 오지 않을까 기대하면서도, 그런 자신을 계속 부정한다. 아예 사라졌다고 여기지만, 계속 언젠가는 돌아오리라고 믿는다. 당연히 마음이 저며 온다. 만약 돌아온다면, 언제나처럼 바보같이 웃는 얼굴로 마주한다면, 과연 울음을 참을 수 있을까. 또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지는 걸 숨길 수 있을까.


 첫날이 시작했다.


 볼펜이 딸각거리는 소리, 사인펜이 마찰하는 소리, 어려운 문제에 고뇌하는 신음 사이로, 고양이는 무너진 채였다. 이미 답은 찾았다. 늑대는 오지 않았다. 필기구를 잡은 손이 갈 길을 잃고 시험지 위를 방황했다. 한 자리의 공백에 계속 시선이 갔다. 눈이 아팠다. 히터에 데워진 교실 안의 후텁지근한 공기가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첫날이 끝났다.


 가장 자신 있는 과목을 망쳤다. 아니. 애초에 마킹을 제대로 하긴 했나. 겨울 고유의 낮은 일조량에 그림자와 빛의 경계가 희미했다. 온갖 생각이 들었다. 물론 가장 짙게 느껴진 건, 역시 설명하기 힘들었다. 무언가 꼬였다. 그게 뭘까. 고양이는 잠시 그 자리에 멈췄다.


 둘째 날이 시작했다.


 그냥, 그저 그랬다. 마음을 다잡았다는 마냥 차분하게 펜촉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의 심정을 대변하듯이, 난잡하게 그려진 수많은 낙서가 시험지를 찢었다. 고양이는 그저 그렇게 있었다. 어차피 자신 없는 과목이다. 그렇다고 버리는 패는 아니지만, 이미 포기했다. 조금 피곤하게 보이는 눈이 아래로 떨어졌다.


 둘째 날이 끝났다.


 그렇게 정했다. 일찍 시험이 끝나서, 남는 시간에 집 한구석에 틀어박혀서 스스로 생각을 강요했다. 떨쳐내야 한다고. 이미 없는 사람이라고. 적막한 방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결정을 촉구했다. 사실 무의미한 일이었다. 언젠가 길거리에서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비슷한 사람을 보기라도 한다면, 옷깃을 잡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러니 어떻게든 잊어야 한다.


 마지막 날이 시작했다.


 그리고 늑대가 돌아왔다. 언제나 그랬듯이 바보같이 웃으며 선생님에게 짧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자리에 앉은 채 필기구를 꺼냈다. 그 와중에 고양이에겐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가 두렵다는 듯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려다가 흠칫하며 앞을 바라봤다. 그것도 시험이 시작하기 전까지였다.


 그 순간마다, 고양이는 늑대를 붙잡고 온갖 말을 내뱉고 싶은 충동을 참아야만 했다. 그래도 시험 시간이니까. 시험이 끝나면 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몰랐다. 마침 잿빛의 창문 밖으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히터가 꺼졌다. 교실의 공기가 미약하게 서늘해졌다. 묘한 감상이 등골을 타고 올랐다.


 마지막 날이 끝났다.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웃는다. 하지만 유독 복잡한 표정을 짓는 사람이 있다면, 분명 고양이일 것이다. 그의 표정은 정말로 복잡했다. 한 사람이 느낄 법한 모든 감정을 느낀다면 아마 그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 정도로, 그저 그랬다. 그건 늑대도 마찬가지였다. 어딘가 공허해 보이지만, 곁눈질로 고양이를 살짝 보고는 평소답지 않게 무언가 위축된 표정을 지었다.


 반 안은 시끄럽고도 고요했다. 몇 개를 맞고 틀렸다며 담소를 나누는 학생들과, 주위를 일견 신경 쓰지도 않고 뭔가를 정리하는 학생들이 혼재했으니까. 물론 고양이는 후자였다. 늑대는 전자였다. 그것만으로도 반이 둘로 갈린 것 같았다. 하나는 시끌벅적하고 활기찬, 하나는 조용하고 차가운, 두 개의 서로 다른 세상 같았다.


 학교에서 할 모든 일이 끝났을 때, 늑대는 수다를 단숨에 끊어 버리곤 먼저 교실을 나갔다. 그 뒤로 고양이가 밖으로 나왔다. 아무 말도 없이, 둘은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현관까지 나왔다. 여전히 눈이 내렸다. 그리고 둘 다 우산을 챙겨오진 않았다. 하지만 늑대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현관 한편에 앉아 하늘을 바라봤다.


 조금 늦게 끝난 학생들이 곁을 지나갔다. 그렇게 반 시간이 지나갔다. 어느새 눈이 그쳤다. 늑대가 몸을 일으켰다. 큰 체구에 맞지 않게 가벼운 가방과 작은 체구에 맞지 않게 무거운 가방이 덜컥거렸다. 둘의 거리가 줄어들었다. 여전히 말은 없었다. 어느 쪽도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어찌 보면 연인과도 닮았다. 서로 말 한마디 없이도 이해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우리 말 좀 해.”


 어느 순간 고양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심연 곁으로 놓인 길 위였다. 그리 멋들어진 추억도 없고, 그저 매일 지나다니는 길일 뿐이지만, 그는 더 참지 못하고 늑대를 불러 세웠다. 구도만 보면 흔한 드라마였다. 죽은 줄 알았던 인물이 살아 돌아와서 이전의 연인이 대화를 요구하는 건 흔한 전개니까. 다른 점도 별로 없었다. 돌아온 사람은 잠깐 멈춰섰다가 슬프게 미소지으며 뒤돌고, 기다렸던 사람은 막 울 것만 같은 표정으로 그를 마주한다. 하지만 조금의 차이점은 있다. 고양이는 무표정이었다. 늑대도 마찬가지였다.


 자주 짓는 표정이지만 지독하게 무감하다. 한때 나눴던 모든 것들이 환상이라는 양, 선뜻 다가가서 위로의 말을 건네지도 않는다. 남남이라고 보기도 힘들 정도로 매정하다. 다시 눈이 내린다. 둘 사이가 하얀 장막으로 가로막힌다. 고양이의 표정이 흐려진다. 늑대가 약간 눈을 찌푸린다. 수없이 많은 솜이 흩날린다. 그 뒤로 고양이가 말한다.


“그동안 어디에 있었어?”


 어떻게든 침착하려 노력하지만, 말에서 묻어나는 물기까지 숨길 순 없었다. 떨림도 같았다. 목은 애상을 토해내지만, 강제로 말을 이루려 할 때, 그럴 때 나오는 울음 섞인 말이 끊겼다. 대답을 기다리고 있지 않다. 그러지 않을 게 너무 확실했으니까. 그저 거세게 흔들리는 심정을 다잡기 위한 작은 행동이었다.


“묻잖아. 그동안 어딨었냐고,”


 늑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고양이의 말을 듣겠다는 듯, 한 걸음 정도 앞으로 다가왔다.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다. 고양이는 아니었다. 억지로라도 웃으려는 듯 입가를 올리려다가, 역으로 눈으로는 슬픈 표정을 지어 버리고, 이런 모순에 스스로 웃는다. 그러다가 멈춘다. 얼굴이 일그러진다.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늑대 때문인지, 화를 내는 듯하면서도, 우는 듯하면서도, 결국엔 울고야 만다. 그러면서 외친다.


“너는, 넌 항상 왜 이런 거야?”


 분노와 비슷한 감정에 목소리가 떨린다. 늑대의 가슴팍을 치고 싶다는 것처럼, 고양이의 팔이 공중을 가르곤 아래로 축 늘어진다. 이어서 몸이 축을 잃고 쓰러지려다가 다시 균형을 되찾는다. 고양이는 가슴팍을 부여잡는다. 감정 어린 말이 다시 들려온다.


“나는, 나는 그러니까, 기다렸는데.”


 그는 나직이 절규한다. 절망이 가득하진 않다. 오히려 애절하다. 그럼에도 늑대는 움직이지 않는다. 오롯이 고양이를 바라본다. 그의 표정에 묘한 씁쓸함이 서린다. 고양이는 그를 보지 못한다. 거센 눈발에 눈을 뜨기가 힘들다. 하지만 입은 열 수 있다.


“하고 싶으면 그냥 말을 하지 그랬어. 그냥, 네 몸이 좋다고, 다른 건 모르겠고 그거만 좋다고. 근데, 근데 그거 알아? 넌 항상 그랬어. 멍청하게 웃으면서 날 껴안았잖아. 그래서 있지. 나는, 나는... 너에게... 너를...”


 눈물 흐르던 입가가 올라간다. 분명 웃음이다. 자주 보여줬던 거짓 웃음조차 아닌 진심으로 짓는 웃음이다. 긍정적인 뜻은 아니다. 이제는 감정을 정리했단 의미니까. 분명 하고 싶은 말은 더 많았을 것이다. 원망이나 애착, 집착, 그 외에도 수많은 감정이 뒤섞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고양이는 단 하나만을 느꼈다. 사랑이었다. 다른 무언가가 섞여도 단 하나만은 홀로 우뚝 서 있다. 그래서 결정을 내렸다. 할 말은 다 했으니 이제 잊어버리자고. 삶에서 떠나보내자고. 그렇게 고양이는 말했다.


“...그래. 잘 있어. 사랑해.”


 차갑게 얼어붙은 손이 눈가를 훑었다. 감정의 자국이 사라졌다. 고양이는 뒤로 돌아섰다. 매서운 바람 소리에 세계가 다시 이명으로 돌아갔다. 자신의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미 죽어버린 듯 숨소리도 희미했다. 어쩌면 가장 어울리는 결말이었다. 이렇게 태어나 버렸으니까. 진짜 사랑을 건네주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앞으로 나아가길 거부하는 발을 강제로 이끌며, 고양이는 아무렇지 않은 척 걸음을 옮겼다.


 -여야만 했다. 고양이의 귀에 에던 바람이 멎었다. 대신 심장 두근대는 소리가 주변을 채웠다. 누군가 뒤에서 그를 안았다. 당연하게도 늑대였다. 하지만 큰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그의 포옹은 정말 얕았다. 가고 싶으면 가도 괜찮다는 듯했다. 너를 존중하니까, 네가 좋으니까, 그래서 오히려 놓아주겠다는 태도였다. 방금도 그랬으니까.


“있지. 진짜로 미안해.”


 그러나 고양이가 서서히, 이어서 목놓아 울기 시작했을 때, 늑대는 위로하듯이 말했다. 그런 그는 언제나 그랬듯 순수하게 웃고 있진 않았다. 대신 조금 애틋하게 웃었다. 비록 고양이는 볼 수 없었지만, 분명히 애정이 담긴 미소였다.


“있지. 무슨 일이 있었는진 나중에 설명해 줄게. 그것 때문에 조금 많이 고민했거든. 너를... 잡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근데 그거 하나만은 확실해. 나도 너 사랑해. 그것도 엄청.”


 고양이는 흐느꼈다. 늑대의 품에 안긴 채 천천히 잦아들어 갔다. 늑대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저 이젠 놓치기 싫다는 것처럼, 유년기로 돌아간 듯 앳되게 흐느끼는 고양이를 더욱 강하게 포옹했다. 그리곤 눈을 감았다. 주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온전히 고양이만을 보겠다는 것처럼, 그는 양 눈을 꼭 내린 채 한참 동안 있었다.


“다 울었어?”

“응... 이젠 괜찮아.”

“다행이네.”

“...있지. 넌 내가 좋아?”

“당연하지. 그래서 이렇게 했잖아.”

“그래. 나도 좋아. 그러니까...”


 어느새 싸늘하게 몰아치던 눈이 나긋하게 사그라들었다. 고양이는 늑대의 포옹을 풀고는 그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평소와 같았다. 고양이는 무표정에 가까운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고, 늑대는 해맑게도 웃고 있다. 하지만 고양이가 까치발을 들자, 늑대는 고개를 숙였다. 둘의 시선이 비슷한 곳에 놓였다. 그리고 교차했다. 수많은 사람은 말한다. 첫 입맞춤은 항상 두근거렸다고. 하지만 둘에게, 적어도 늑대에게 있어서, 처음 해본 진지한 키스는 겨울의 마지막 눈의 맛으로 기억될 듯했다.


-겨울


 바람 소리마저 그친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양, 심장 소리와 숨 쉬는 소리만이 남는다. 그마저도 자신의 착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적막하다. 또 어둡다. 두 눈은 멍하니 뜨인 채 허공을 주시한다. 눈을 찌르는 고통에 흘러나온 눈물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심연이란 이름답게 모든 걸 삼켜 버린다. 왜 이곳으로 몸을 던졌는지는 진작에 잊었다. 엄청나게 오랜 시간 동안 추락했지만 끝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서서히 희미해져 간다. 아름다운 추억도, 잊고 싶은 절망도, 끝없는 구덩이 속으로 파묻혀 간다. 하지만 어느 순간 정신이 깬다. 누군가의 외침에 텅 빈 세상이 다시 차오르기 시작한다. 그는 의식한다. 늑대는 인지한다.


“...이. 자네는 어쩌다가 여기 왔나?”


 근처에서 말이 들려온다. 왠지 익숙했다. 중년과 청년의 중간쯤에 놓인 사람이 낼 법한, 걸걸하면서도 젊은 목소리였다. 다만 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의 신체 일부조차 보기 힘들 정도의 어둠 속에서 타인을 볼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말이 이어졌다.


“안 들리나? 가까운 줄 알았는데...”

“아뇨. 들려요.”

“다행이군. 그래서 자네는 어쩌다가 여기로 떨어졌나?”

“그건 왜요? 어차피 죽으려고 왔는데.”

“어차피 저승 길동무잖나. 이야기 좀 해주게. 나도 해 줄 테니.”

“먼저 하세요. 저는... 뭐, 언젠가 죽겠죠.”


 평소와 다른 냉소적인 말투, 어휘 선택, 늑대는 자신의 상태를 정의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체념, 복잡하게는 죽음인 셈이다. 어차피 심연으로 떨어진 이상 돌아갈 수 있을 리는 없다. 그 사람도 마찬가지다. 차에 치여 병상에 놓인 채 죽여 달라고 말 뱉지도 못하겠지. 그의 몸이 균형을 잃고 기울었다. 그러다가 다시 무게 중심을 잡았다. 누군가의 말이 들려왔다.


“그러지 말고 말해주게. 난 먼저 시작할 수가 없어.”

“그럼 그냥 관둬요.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정말 너무하는군. 이 늙은이에게 말해주기가 그렇게 싫었나?”

“네. 어차피 늙은이도 아니잖아요. 목소리가 영 아닌데.”

“자네 말이 맞아. 난 늙었다기보단 낡았지. 그래서 안 해 줄 건가?”

“그만 해요. 어차피 그리 재밌는 얘기도 아니에요.”

“사랑 얘기는 언제나 재밌는 법이지. 해 보게.”

“뭐 말할 것도 없는...”


 귀찮은 투로 대답하던 늑대의 말이 멈췄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의 얘기를 알고 있는 걸까. 그것도 다른 사람에게 일절 말한 적 없는 기억을. 이에 늑대는 무어라 말하려 노력했지만, 이내 단 하나로 결론이 났다. 앞? 혹은 뒤, 옆의 존재가 무엇인진 몰라도 스스로 서두를 꺼내야만 했다.


“정답일세. 그럼 이제 얘기를 시작해 볼까?”

“당신은... 당신은 혹시 신 비슷한 건가요?”

“말했잖나. 난 자네보다 먼저 할 수 없다고. 그럼 말해보게.”

“이미 알지 않나요? 방금도 그랬잖아요.”

“나야 잘 알지. 중요한 건 자네야. 그래서 왜 사랑했나?”

“그게...”


 왜 사랑했냐니. 다들 감정엔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늑대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이끌려서, 굳이 설명을 덧대자면 가장 이상형에 가까워서, 먼저 다가갔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냥 좋았다고, 사랑스럽다고, 애정을 주고 싶은 사람이었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그게 전부인가? 아닐 텐데.”

“전부에요. 이미 말했잖아요. 재밌는 얘기는 아니라고.”

“아니. 그래.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그럼 맞는 거겠죠.”


 늑대는 공중에 몸을 눕혔다. 바람과 비슷한 감촉이 등을 떠밀었다. 생각을 그만두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여기서 끝낼 순 없다는 듯, 시야를 가득 채운 흑색 필름 위로 몇 가지 장면들이 그려졌다. 소위 말하는 추억이었다.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생에 처음으로 사람을 싫어한, 좋아한 경험. 또 수많은 순간의 모습이, 반쪽짜리 영상으로 펼쳐졌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흘러가는 유념 속에서 한 단락을 낚아챘다. 그는 말했다.


“...닮아서요.”

“누구를 닮았나?”

“저도 모르겠어요.”

“모르는 게 당연하지.”

“당신은 어떻게 아는 거예요?”

“그건 조금 미뤄두고. 뭐 좀 물어도 되겠나?”

“제가 대답하기 싫다고 안 할 수도 없잖아요.”

“그럼 첫 번째 질문. 어떤 감정이었나?”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늑대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그것을 감정이라고 부를 수 있었나? 그 단편적인 이끌림을? 물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처음엔 육체적 끌림이었다. 하지만 한 번 만나보고 나서 생각이 달라졌다. 그때 느꼈던 감정은...


“가냘프고 고달프며, 아련하고도 아릿했지.”

“사춘기는 오래전에 지났는데요.”

“좋아. 두 번째. 자네 둘은 어떻게 만났나?”

“그거야...”


 우연케도 같은 학교에 입학하고, 서로 같은 반에서 만나고, 늑대는 고양이의 소문을 듣고, 고양이는 늑대에게 서서히 마음을 연다. 모든 게 정말 운명적이다. 마치 누군가 그렇게 설계했다는 것처럼.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늑대는 오한을 느꼈다. 세 번째, 혹은 마지막으로 들어올 질문이 무엇일지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래. 그럼 마지막 질문. 이 모든 게 운명이라면, 자네는 어쩔 건가?”

“...전 운명론을 믿지 않아요. 그와 만나는 것도 제가 선택한-”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지. 정작 일이 흘러갈 방향은 정해져 있는데.”


 늑대의 말이 멈췄다. 사실이기 때문이다. 상대의 어투에서 알 수 있었다. 일상적인 어조로 한탄하듯이 내뱉지만, 그 무게는 절대적인 수준으로 다가왔다. 소위 말하는 필연과도 같았다. 무시하려 해도, 듣지 않으려 해도, 그럴 수 없다는 듯이 귀에 꽂혔다.


“자네가 그 아이를 사랑하게 된 계기도 참 흥미로워. 그렇지 않나?”

“그게... 그게 무슨 뜻인가요. 흥미롭다뇨?”

“알 텐데. 우연케도 소중한 사람을 잃고, 10년이나 지나서 그와 닮은 사람을 만나고. 이번에야 지켜내겠다고 다짐했지. 무의식적으로 말이야.”

“...말하려는 게 뭔가요.”

“단순한 이야기일세. 자네의 삶은 모든 게 정해진 상태지.”


 그리고 말이 끊겼다. 하지만 늑대는 이해했다. 운명이 존재할 때 자신이 하는 모든 언행이, 그동안 내려온 선택이, 그 전에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유의미할까? 그는 섣불리 답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마치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는 듯이.


 늑대는 천천히 회상했다. 스스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기억에 남은 일들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별로 유쾌하진 않았다. 시체같이 누워있던 고양이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또 그와 처음 만났을 때의 경험도 기억했다. 정말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귀엽고, 동시에 능수능란한 면도 보이고, 무엇보다....


“저항했어요.”

“뭐에 대해서?”

“그냥... 모든 거에 대해서요. 그러니까...”


 누군가를 닮았다. 단순히 외견에 한정하지 않고 그동안 봐 온 모습들이, 계속 무언가를 자극했다. 단순한 감정이 아니었다. 물론 더 많이 웃게 해주며 곁에 있길 바랐다. 하지만 그보단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눈에 익었다. 고양이가 아닌 사람이 계속 말해온, 처음으로 사랑한 사람의 유언이, 늑대의 성대를 타고 그의 목소리로 이루어졌다.


“운명이 있더라도, 어차피 발버둥 치는 거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조금은 슬픈 표정을 지었지만, 죽는 순간조차도 담담했다. 기막힌 우연이었다. 그 사람도 심연에 몸을 던졌으니까. 십 년이란 시간의 간극에도 무언가 반복되는 셈이다. 하지만 이번엔 늑대가 구제받을 차례가 아니다. 오히려 타인을 구해야 한다. 설령 이 모든 게 정해져 있었더라도, 이제는 순서를 바꿔야 한다. 그제야 그는 결론을 내렸다. 누군가의 마지막 말이, 산 자의 선언이 되어 심연 안에 울렸다.


“그렇게 살아가요. 최선을 다해 발악하면서, 언젠가 자신의 선택이 존재... 실존할 때까지요.”


 고양이를 사랑한 이유에 별 거창한 말은 필요 없었다. 그냥 자신의 선택으로 감정을 외쳤다. 그게 전부다. 늑대의 입가에 기쁨의 표시가 나타났다. 하지만 이내 사그라들었다. 자신은 심연으로 몸을 던졌고, 연정을 품은 이는 식물인간이 됐다. 압도적인 허무감이 몸을 휩쌌다.


“...훌륭한 대답이야. 죽은 사람치고는.”

“당신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어차피 전 여기 있고, 그는 병원에...”

“그거 말인데. 또다시 운명의 장난일세. 그 아이는 깨어났어.”

“제가... 사라지고 나서요?”

“그래. 자네가 없는 것에 상처를 많이 받았겠지.”

“...정말로요?”

“거짓말은 하지 않네.”


 일그러진 표정을 짓던 늑대가 급작스레 몸을 움직였다. 순식간에 균형이 흩어졌다. 처음엔 무의미한 행동으로 보였지만, 이내 그 의미가 나타났다. 거센 발악이다. 혹시라도 벽이 있을까 봐, 분명 타고 오를 수 있을 리가 없지만, 열성적으로 허덕이고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멈춘다. 그의 시선이 사방을 훑는다. 당연히 어둠뿐이다. 그렇지만 말한다.


“여기서 내보내 주세요.”

“무슨 이유로 어떻게?”

“당신이, 당신이 바로 심연이잖아요.”

“부정하진 않겠네. 그러나 특별히 자네만 보내줄 이유가 있나?”

“당신 스스로 말했잖아요. 멋진 대답이라고.”

“그건 사실이지. 다만 망자의 대답치곤.”

“아뇨. 전 살아있어요.”

“그게 사유가 될 순 없잖나.”

“그래서 이러고 있잖아요?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기요.”


 늑대의 대답에 암흑이 몸을 떨었다. 형체도 없고 어떻게 구별할 만한 것도 없지만, 긍정적인 무언가로 몸을 떨고 있다는 것은 느껴졌다.


“그래. 명답이야!”

“정답... 이요?”

“그동안 많은 사람이 같은 질문을 받아왔네. 또 비슷한 상황에 놓였지. 하지만 그들 중 대부분은 자네가 온 곳까지 오지도 못했네. 그런 대답은 정말 오랜만이군.”

“그럼... 어... 저는 어떻게 되나요?”

“어떻게 되냐고? 당연하지 않나? 자네는 사라지는 거야. 이 굴레 밖으로.”

“예? 저 죽어요?”

“아니. 일단 축하하네. 사슬 한 가닥을 걷어낸 것에 대해.”

“그... 럼 저는 갈 수 있는 건가요?”

“그래. 가게. 부디... 언젠가는 돌아오고.”


 언젠가는 돌아오라는 말에 늑대가 흠칫했다. 그러다가 이내 깨달았다. 저주가 아니었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으니까.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말고 계속 날뛰다가 돌아오라는, 이토록 낙관적이고 아름다운 저주에, 늑대는 눈을 감았다. 침대에 누운 듯 푹신한 감각이 전신을 감쌌다. 순식간에 졸음이 몰려왔다. 눈꺼풀 뒤의 세상이 밝아왔다.


 그가 다시 눈을 뜬 건 기말고사 날이었다.


-


 -라는 이야기를, 고양이에겐 하지 않았다. 그저 집안 사정으로 잠시 어디로 가 있어야 했다며, 고양이를 꼭 안은 채로 적당히 포장해서 말했다. 다시 만났을 때 무심하게 대한 이유도 잘 편집했다. 사실은 아니지만, 자신이 미울까 무서워서 그랬다고 고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본래는 이 모든 게 운명이란 사실이 고양이를 보자마자 갑자기 현실로 다가와서 그랬다. 자유로운 의지가 없다는 사실은 막연히도 두려웠으니까.


“그럼 이제 어디로 안 사라지는 거지?”


 언제나 그랬듯이 늑대의 볼을 만지며, 고양이는 그렇게 물었다. 늑대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고양이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리고, 살짝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고양이의 표정은 여전했다. 잔잔한 미소가 건조하게 묻어나는, 어쩌면 무미건조한 태도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애정 서린 바보 같은 웃음이 고양이를 응시했다.


“곧 방학이네.”


 저녁거리를 사기 위해 겉옷을 걸치는 고양이에게, 문득 늑대의 말이 들려왔다. 이제 기말고사도 끝났고 남은 건 몇 없는 수행 평가뿐. 시간이 많이 남았다. 역시 낭비하기엔 아까웠다. 그렇다고 유달리 할 것도 없어서, 그는,


“우리 방학 때 뭐 할까?”


 고양이의 고개가 작게 까딱였다. 다녀와서 말하자는 의미겠지. 늑대는 별말 없이 침대 등받이에 기댔다. 창밖은 이미 어두웠다. 하지만 실명이나 심연같이 질척한 어둠은 아니었다. 구름 하나 끼지 않은 밤처럼, 별도 달도 없지만 어둡지 않은 하늘처럼, 포근한 명멸이 주위를 감쌌다. 졸리진 않았다. 잠은 충분히 잤으니까. 그저 기다림만이 남았다.


 그렇게 슬슬 없던 졸음도 생길 때쯤 고양이가 돌아왔다. 양손에 식재료를 한가득 쥔 채로, 나약한 체력에 허덕이며 현관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기뻐하는 듯했다. 비닐봉지 한편에 눌려 있는 고기를 보고 늑대가 밝은 표정을 보였으니까. 어떻게 하면 행복한 저녁 식사가 될 수 있을까 고민한 게 허사가 아니어서, 그는 무표정보단 밝게 웃었다.


“그래서 뭐 좀 고민해 봤어?”

“응. 내용이 많은 편인데, 요점이 뭐냐면.”


 반찬을 삼키며 고양이가 대답했다. 망상일지, 아니면 현실성 있는 계획일진 모르겠지만, 꽤 많은 걸 생각한 듯했다. 그만큼 식사도 푸짐했다. 평소 먹는 양이 많은 늑대가 보기에도 적진 않다고 느낄 정도면, 나름 작심한 것 같았다. 방금 고양이가 툭 내뱉은 말처럼 말이다.


“있지. 우리 같이 살까?”

“같이 산다고? 지금도 같이 사는 거 아냐?”

“내 말은, 아예 동거하는 거.”


 작가가 어휘를 수정하듯이, 오묘한 동작과 함께 고양이는 말을 고쳤다. 늑대는 긍정적으로 복잡한 표정이었다. 하기야 고양이가 먼저 제시하는 일은 잦지 않았다. 무언가를 하지 않겠냐고 늑대가 먼저 제안하면 잠시간의 고민 끝에 받아들이는 일이 더 많았다. 그런데 처음으로 꺼낸 제의가 동거라니. 만약 그에게 꼬리가 있었다면 열성적으로 흔들릴 것만 같았다.


“지금은 말고. 우리 다 집이 있잖아.”

“그럼 성인 되고 나서 하게?”

“어. 그때 함께 살자. 집 하나 얻어서.”

“되게 너답지 않네. 나도 생각은 했거든. 근데...”

“먼저 못 말했다고? 괜찮아. 그만한 일이잖아.”

“그래도 미안. 어쨌든 난 좋아.”

“다행이네. 나도 좋아.”


 어느새 식사가 끝났다. 둘은 편히 앉아 서로를 바라봤다. 전과는 달라진 점이 적잖았다. 앉은 위치부터 서로의 거리까지. 과거엔 식탁의 반대편에 멀뚱멀뚱 앉아있던 게, 지금은 체온까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당연히 다른 것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자면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 아니면 온기를 넘어선 열기 비슷한 것.


 고양이가 늑대의 옷깃을 끌어당겼다. 입을 맞추진 않았다. 그저 한결같이 투명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다. 그러나 다르다. 욕망에 젖은 손길이 늑대의 셔츠를 천천히 걷어냈다. 그도 당황하진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장난이란 걸 아니까. 그래도 상기된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작은 웃음이 들려왔다. 고양이다. 귀엽다는 듯이 그의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옅게 달아오른 볼에 짧게 키스하고선, 그는 말했다.


“넌 참 순수해. 덩치에 안 어울리게.”

“언제는 귀엽다면서. 이젠 안 그래?”

“아냐. 여전히 그래. 이렇게 잘 넘어가잖아.”

“그래서 그냥 장난이야, 아니면 진심이야?”

“지금으로선 전자. 앞으로는 다를지도 모르겠네.”

“...어떤 점에서?”

“방학이잖아.”


 잠시 고양이의 말이 끊겼다. 식기를 치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늑대가 먼저 몸을 일으켜선 식탁을 정리했다. 고양이는 잠시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가, 금세 맑게 웃으며 그를 도왔다. 굳이 말을 잇진 않았다. 어느새 이토록 가까워졌을까. 그런 의문도 없었다. 그저 앞으로의 미래를 바라봤다. 밝을지는 모르는 내일을 생각하며, 둘은 오늘도 함께 잠들었다.


-심연


“있지. 우리 헤어지자.”


 고양이의 말에 늑대가 멈칫했다. 그때 그의 표정은 뭐라고 해야 할까. 절대 실망스럽다는 태도는 아니지만, 어딘가 상처받은 것임은 확실했다. 다만 고양이도 마찬가지였다. 초봄 공기처럼 건조한 표정 뒤로, 미안한 감정이 드러났다. 그래도 역시 늑대는 납득할 수 없었다.


“혹시... 내가 뭐 잘못했어?”

“아니. 넌 좋은 사람이야. 엄청 좋은 사람.”

“그럼 왜? 내가... 음. 싫어진 거야?”

“그럴 리가. 난 여전히 널 사랑해.”


 연이은 고양이의 대답에 늑대는 더욱 혼란스러워했다. 서로를 향한 감정은 아직 같았다. 고양이 특유의 스스럼 없는 애정 표현이 그 사실을 짙게 확증했다. 하지만 그의 손길은 되게 미련스러웠다. 일단 헤어지자고 말했지만, 정작 시원스레 뱉지는 못했다. 그럼 무슨 이유일까. 운명적인 이유일까? 피할 수 없는 일이 생겼다거나, 아니면...


“그러니까. 내가 너를 너무 사랑해서. 잠깐만 떨어져 있자.”


 늑대가 멈췄다. 조각상처럼 그 자리에서 굳었다. 고양이는 고개를 내렸다. 어차피 늑대의 품에 앉아 있으므로 무의미한 행동이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 의미는 확고했다. 시선을 마주치기 두렵다는 뜻이다. 실망스러운, 혹은 미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볼까 봐.


“그건... 모순이잖아.”

“나도 알아. 말이 안 되지.”

“그럼 가지 마. 같이 살자고 했잖아.”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이러는 거야.”


 겨울 방학에는 같이 바다를 보러 갔다 오고, 눈싸움도 해 보고, 같이 스키장도 가고, 많은 걸 생각했다. 그리고 이뤘다. 둘 중 하나의 핸드폰만 확인해도 엄청난 양의 사진을 마주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봄이 오며 현실도 다가왔다. 공기가 따스해지며 환상으로 조각한 얼음이 녹아갔다. 둘은 학생이다. 그것도 고등학생이다. 하필이면 인생에서 제일 중요할 시기에 사랑에 빠진다는 것도, 어쩌면 지독하게 운명적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고양이는 말을 이었다.


“있지. 아. 이거 말 습관 됐네. 있지 말이야.”

“괜찮아. 잘 어울려. 되게... 너 다워.”

“고마워. 어쨌든 요점은 그건데, 들을 준비는 됐어?”

“어차피 이미 말했잖아. 그냥 해.”

“그럼, 음. 말했던 대로, 한동안 떨어져 있자.”

“얼마나 오랫동안?”

“아마 2년. 정시로 가든 수시로 가든 대학은 붙고 나서.”

“...공부에 집중하려고?”

“이럴 땐 눈치가 참 좋아. 안 어울리게.”


 고양이가 작게 쿡쿡댔다. 늑대는 웃지 못했다. 고양이도 진심은 아니었다.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억지로 만들어낸 가식일 뿐이었다. 마침 뒤로 이어진 말도 무심하리만치 건조했다.


“넌 어떨지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수시는 망했지 싶어서. 그냥 수능까지 목숨 걸고 공부하려고. 그리고... 아마 이사도 할 거야. 가족 사정으로. 따라온다고 하진 마.”

“너도 알잖아. 꼭 따라갈 거라고.”

“아니. 오지 마. 네가 따라오면 못 버틸 것 같아.”

“못 버틸 것 같다고?”

“응. 널 좋아해서.”


 단순히 좋아하는 것뿐일까. 분명 욕망이라 부를 만한 것도 존재한다. 순백하게 원색적이어서, 본래부터 단색이었던 캔버스처럼, 그는 순수하게 바랐다. 그게 문제였다. 당연케도 늑대와 하고 싶은 게 많았다. 단순히 동침에서 끝나지 않았다. 같이 살자는 말처럼 바라는 것이야 많았다. 하지만 그 모든 걸 이루기 위해선 먼저 삶을 만들어야 했다. 어지간해선 무너지지 않을, 견고하고 풍족한 삶을. 그러기 위해선 일단 흔들리지 않아야 했다.


“그러니까. 우리 둘 다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아니면 졸업하고 나서 다시 만나자. 그때는 같이 사는 거지. 나름 성공한 삶을 사는 성인으로서.”

“그렇다 치고, 언제 가는데?”

“다음 주. 아니면 내일. 인사는 지금 해 줘.”

“...기다리고 있을게.”

“다른 말은 없어?”

“나중에 할게. 다음에 만날 때.”

“그럼, 오늘... 할까?”

“또 장난이지?”

“아니. 네 맘대로 해.”


 고양이는 늑대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선 슬프게도 웃었다. 하지만 이내 흐릿해졌다. 늑대의 시야 곁으로 고양이의 눈이 스쳤다. 언젠가 그랬듯이, 고양이는 늑대의 어깨 위에 머리를 놓았다. 그리고선 속삭였다. 자신을 주겠다고, 오늘만큼은 네 것이 되겠노라고.


 늑대는 그를 안았다.


-봄, 그리고


 밤의 세계 특유의 활기마저 지고, 가을밤의 냉기가 스며들자, 드문드문 난 가로등만이 거리를 비춘다. 입김이 나올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얇은 후드만 걸치기엔 추운 날씨다. 늑대가 딱 그랬다. 별로 춥진 않겠거니 해서 간단하게 입고 나온 게 실수였다. 특히 기다림이 생각보다 길어졌다. 그의 잘못이었다. 너무 일찍 나왔다.


 그래도 오래 기다리진 않았다. 길의 저편에서 오늘의 주인공이 나타났다. 코트를 입고 목도리까지 하고 온 사람 말이다. 딱히 문제는 없었다. 애초에 여러모로 늑대와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더위를 덜 타고, 추위를 많이 타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또 냉소적인 사람. 이에 그는 반가움을 담아 팔을 크게 흔들었다.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기대하진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천천히 다가와서 일상적인 인사를 건넬 테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늑대를 보자마자 고양이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추더니, 이내 달렸다. 초봄 내음 가득한 공기 사이로 목도리의 끝이 흩날렸다. 온갖 감정에 물든 표정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단순한 감정은 아니었다. 그리움에서 온 반가움, 이어서 순수한 애정이 짙게 나타났다. 그리고 기대도 존재했다. 늑대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서, 그는 주저 없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마침 늑대가 팔을 벌려 고양이를 받아냈다. 인사 대신이었다. 어차피 그 누구보다 서로를 사랑했으니까. 3년 만에 가진 첫 만남은 이토록 열성적이어도 좋으리라. 그대로 이어진 키스처럼 말이다. 대화는 다음이었다. 한 계절이 세 번 반복될 동안 쌓인 감정을 일단 표현해야만 했다. 설령 과분하게 느껴질 정도라도 말이다.


“있지. 기다렸어?”


 한결같은 말습관으로, 전과는 다른 밝은 표정으로, 입을 뗀 고양이는 조금 헉헉거리며 말했다. 대답은 없었다. 그저 아직 만족하지 못했다는 듯, 늑대가 다시 고양이를 껴안았다. 그리곤 목덜미, 혹은 그 정도의 부위에 코를 대다시피 한 채 얕게 킁킁거렸다. 고양이는 역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마치 돕겠다는 것처럼.


“...응. 그것보다 바디워시 바꿨어?”

“이걸 맞추네. 어떻게 알았어? 시간이 꽤 지났는데.”

“네가 쓰던 거 쓰고 있거든. 자스민 향.”

“그래? 그럼...”

“맡아 봐. 안 말릴게.”


 그에게 안긴 자세 그대로 그의 체취를 맡는 식으로, 이번엔 고양이가 응수했다. 처음엔 직물 특유의 건조한 냄새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찾던 것에 닿았다. 인공적이지만 나름대로 자연스러운 꽃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과거에 자신에게서 나던 향을 타인에게서,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느끼다니. 묘한 기분이었다.


“아. 근데 안 추워?”

“나야 원래 괜찮-”

“그래도 춥잖아. 여기. 가만히 있어 봐.”


 몸을 뗀 고양이는 목도리를 풀고선 섬세한 손길로 늑대에게 둘러줬다. 그리 어울리진 않았다. 옷이 전체적으로 어두운 단색인 것에 비해, 그가 두르고 있던 목도리는 밝은 밀색에 가까웠으니까. 그래도 고양이의 목에 감겨 있어서 그럴까. 늑대는 그런대로 따듯함을 느꼈다. 하지만 요점은 그게 아니었다. 그가 굳이 목도리를 하고 온 이유는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거, 어... 차고 왔어?”


 당황과 함께 늑대가 말했다. 이에 고양이는 살포시 웃었다. 옛날에 장난을 치던 때처럼, 어딘가 관능적이면서도 아련해 보였다. 물론 상황 자체는 전자에 가까웠다. 목줄 때문이었다. 3년하고도 몇 개월 전, 그가 고양이에게 선물한 물건 말이다. 비록 조금 닳고 완벽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 의미만은 충분했다.


“보다시피.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좋긴 한데... 음... 일단 좀 걸을까?”

“그래. 참. 대학은 붙었어?”

“사실은... 재수하고 있어. 넌?”

“그... 난 위대 붙었어. 어딘진 알지?”

“좋은 데 갔네. 앞으로 뭐 하게?”

“회사나 다녀야지. 아 참. 그리고...”


 둘은 길가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처음엔 조금 떨어진 채였다. 하지만 고양이가 먼저 팔짱을 꼈다. 늑대는 여전히 적응하기 힘들다는 듯했다. 아무래도 성격이 훨씬 발랄해졌으니까. 애정 표현도 같았다. 더욱 확고하고 잦아졌다. 지금의 말처럼 말이다.


“내가 대학 졸업하면 우리 결혼할까?”

“음... 난 졸업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괜찮아. 내가 너 먹여 살릴게.”

“...진심으로? 너도 알잖아. 나 많이 먹는 거.”

“그러니까. 아마 그때쯤이면 나도 직장이 생기겠지. 돈도 모아 뒀고.”

“그럼... 그때부터 같이 살게?”

“어. 아무래도 지금은 무리니까.”


 늑대가 조금 아쉽다는 듯이 볼을 긁적였다. 그걸 본 고양이는 손을 뻗어 늑대의 볼을 만지작거렸다. 사실상 군살이 없던 예전과 달리 조금 살이 붙었다. 다만 많이는 아니었다. 고양이가 예전보단 말랑해졌다고 느낄 정도였다. 하기야 전에는 아예 살이 없는 것에 가까웠으니까.


“있지. 혹시 외박할 수 있어?”

“나야 뭐. 이제 어른이니까.”

“그럼 자고 갈래? 그러니까 내 말은... 알아들었지?”

“네 집이 여기서 가까웠... 아.”


 늑대의 얼굴이 붉어져 감에 따라 고양이는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예전과 달라진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지만, 그래도 몇 가지는 여전했다. 둘은 서로를 사랑했다. 그리고 언제까지고 그럴 것이다. 물론 둘은 변해 간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확신할 수 있었다. 다른 무언가가 되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분명 더욱 깊은 것으로 변모할 거라고.


 고양이와 늑대는 길 위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