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쪽의 어느 추운 지방, 높게 솟은 검은 화산 아래 자그마한 마을이 하나 있었다.


그 작은 마을은 검은 화산을 지배하는 사악한 드래곤의 지배 아래에 놓여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드래곤의 폭정에 고통받으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


드래곤은 매년마다 재물로 바쳐질 인간과 가축과 금을 요구했고 요구를 거절하거나 듣지 않는다면 마을을 습격해 마을 주민들을 괴롭혔지만 모두 드래곤이 두려웠기에 저항 할 생각 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마을 근처 숲에는 마녀가 살고 있었다.


그 마녀는 참 기묘한 존재였다. 사람들은 가끔씩 마녀에게 찾아가 무상으로 치료를 받거나, 점성술을 받는 등 도움을 받았지만 마을 사람들의 대부분은 마녀를 배척하여 마녀는 언제나 숲에 있는 오두막에 머물렀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날 마을 광장은 웅성거리는 마을 사람들로 가득 찼다.


바로 마을을 습격하려던 도적을 처형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


그 도적은 원래 전쟁터에서 탈영한 용병이었다. 그는 함께 도망친 동료들을 이끌고 마을을 습격하려 했으나 마을사람들의 저항으로 인해 실패하고는 혼자 살아남아 마을 광장으로 끌려나온 것이었다.


그의 죄목은 살인과 강도. 커다란 교수대로 팔이 묶인채로 끌려오는 용병은 무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걱정하는 표정, 화를 내는 표정, 마을 사람들이 가지각색의 표정으로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삐걱거리는 계단을 밟고 교수대에 오르자 거친 밧줄로 만들어진 밧줄이 그의 목을 감싸안았다. 잿빛 하늘에서 내리는 싸라기눈이 바람에 날렸다.


나무 바닥이 사라지려던 그 때였다. 누군가 황급히 달려와 용병의 옆에 섰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가벼운걸로 보아 남성은 아니었다.


용병의 옆에 선 누군가는 바로 마녀였다. 마녀는 마을사람들이 전부 모이는 처형 시간을 틈타 마을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할 생각이었다.


그 덕에 처형은 잠시 중단되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것이었다. 용병이 마을을 약탈하는 도적 행위를 하려 한것도, 그 과정에서 마을 청년 한명을 살해한것도 사실이니까.


마녀는 마을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연설을 시작했다. 어느새 마을 사람 전부가 마녀의 연설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마녀는 마을사람들에게 불가능할것이라 믿어졌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바로 화산에 사는 드래곤의 폭정의 함께 맞서 싸우자는 이야기였다.


반응은 그녀가 연설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않아 격하게 튀어나왔다. '그게 무슨소리인가' '그게 가능하다면 이미 진작에 시도 해 보았을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언성을 높였다.


마녀는 마을사람들의 격한 반응을 듣고 답했다. 그럼 계속 이런식으로 살것이냐고, 저 드래곤이 늙어 죽을때까지 사람들을 희생시킬것이냐고.


마녀는 말을 계속해서 이었다. 언제까지고 이런 식으로 살아갈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두가지 선택지가 있다. 한가지는 드래곤과 맞서 싸우는 것, 또 다른 하나는 드래곤의 발 아래서 목숨을 연명하는 대신 평생 노예로 사는 것.


마을 사람들은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지 않은가', '그래도 드래곤이 있어서 괴물들이 마을을 습격하지 않는다'


마녀는, 마을 주민들을 돌아보며 그렇다면 단 한명이라도 자신과 함께 드래곤과 맞서 싸우겠느냐며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마을 광장은 침묵에 휩싸였다.


마녀는 마을 사람들을 보며 한숨쉬었다. 그렇다면 자신 혼자라도 가겠다며, 자신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았으니 드래곤이 알아차려 보복을 할 걱정은 하지 말라며 걸음을 옮기려던 그 때였다.


마녀의 옆에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다면 자신이 가겠다며 말이다.


마녀와 마을 주민 전부가 경악하는 표정으로 용병을 바라보았다. 용경은 밧줄이 목이 감긴채로 말을 이었다.


어차피 자신은 이미 죽은 목숨이다. 여기서 죽나, 드래곤에게 죽나 똑같고 옆에 있는 이 처자는 드래곤을 혼자서 토벌할 생각인것 같은데 그정도면 자신 보다 훨씬 더 강한것이 분명하니 자신이 도망치거나 이 여자를 죽일 수는 없을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마녀는 너가 어째서 여기 끼어드는것이냐는 표정으로 용병을 노려보았지만, 그는 마녀에게 눈길 조차 돌리지 않은 채로 찌뿌둥한 하늘을 응시할 뿐 이었다.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촌장이 앞에 나섰다. 그러곤 사형집행을 맡은 남자에게 말했다.


목에 건 밧줄을 풀어주라고. 어차피 저 자는 죽은 목숨이니 기왕이면 유용하게 쓰고 죽이는게 맞다고 말이다.


목에 걸린 밧줄이 사라지고, 손에 묶인 포승줄도 풀렸다. 물론 마을 사람들과 마녀 모두가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


곧이어 마을의 유일한 대장장이가 용병에게 검 한자루와 방패를 건넸다. 그는 용병에게 검을 건네며, 드래곤 슬레이어의 검으로 전시해 대장간 홍보용으로 쓸 생각이니 다 쓴다면 돌려달라며 농을 쳤다.


용병은 검을 들어 허공에 몇번 휘두르고선 검집으로 다시 집어넣었다. 꽤나 괜찮은 검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쥐어본 수십개의 검들 중 이 정도 퀄리티의 명검은 아마 없었을것이다. 


그렇게, 용병과 마녀는 마을 정문을 벗어나 높이 솟은 검은 화산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싸라기눈은 어느새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으로 변해있었다.


그들의 여정은 초반부터 흔들렸다. 강력한 드래곤이 서식하는곳 답지 않게 온갓 산짐승부터 몬스터들이 그들을 습격해오기 시작했다.


마녀와 용병, 그 둘 사이의 신뢰의 부족 또한 여정을 힘들게 만드는 요소들 중 하나였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해 몇번이고 싸움이 일어나 둘 중 하나가 크게 다칠지도 몰랐다.


화산 등반을 시작한지 며칠이 지나고, 둘의 관계는 조금 나아졌지만, 동시에 더욱 특이해졌다.


밤만 되면 서로에게 무기를 겨누지만, 전투를 하는 동안 그 둘은 서로의 등을 아무렇지 않게 맡길 수 있었다. 서로가 적 이면서도 서로밖에 믿을 수 없는 전우였다.


또 시간은 흐르고, 마녀와 용병이 산 중턱 쯤에 다다르자, 준비해 온 식량은 점차 부족해져갔다. 


그들은 이곳까지 오며 몇번, 많게는 수십번의 전투를 치루었지만 이곳에서 포기할수는 없었다. 습격해오는 곰과 늑대들을 피와 생살을 씹어가며 그들은 묵묵히 등반을 계속해갔다.


눈보라는 더 심해지고, 화산이 연신 우르릉거리는 소리를 만들어댔다. 둘이 사람의 몇배 크기의 곰은 만나 겨우 쓰러뜨렸을 때, 용병의 방패는 절반이 날아가버린 상태였다.


마지막 남은 식량을 마녀에게 양보한 용병은 힘겹게 빙벽을 올랐다. 매서운 추위가 그의 몸 전체를 내달렸고, 손발 끝의 감각은 진작에 사라져버린지 오래였다.


용병의 몸이 중심을 잃고 떨어지려던 그때, 가냘픈 손이 자신을 억세게 잡아끌어 올렸다. 이 처자 생각보다 힘이 참으로 좋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 더 이상 시선 위로 눈덮인 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제 돌아갈 길은 없었다. 둘은 거대한 분화구를 뒤로한채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드래곤을 향해 무기를 겨누었다. 마치 고양이 앞에서 최후의 저항을 시도하는 쥐를 보는 듯 했다.


먼저 공격을 시작한것은 용병과 마녀였다. 둘은 드래곤을 향해 돌진하며 무기를 휘둘렀다.


갑작스러운 공격에도 드래곤은 여유를 부리며 시종일관 둘을 압도해가며 싸웠다. 애초에 상대도 되지 않는 싸움이었지만 둘에게는 이제 남은 길이 없었다.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용병이 드래곤의 공격을 막아내기 힘들어질 지경, 마녀가 강력한 일격을 날리기 위해 드래곤에게 접근했다.


드래곤은 아직 그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듯 보였다. 마지막으로 남은 힘 까지 모조리 쥐어짜내 드래곤에게 최후의 일격을 날리기 직전이던 그때, 느닷없이 드래곤의 날카로운 발톱이 마녀의 시아를 가득 매웠다.


드래곤은 이미 마녀가 자신의 등 뒤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싸움 시작부터 계속해서 귀찮게 굴던 마녀의 숨통을 확실하게 끊기 위해 기다리던것 뿐이었다.


단단하고, 날카로운 드래곤의 발톱은 마녀의 살갗에 파고들어 그녀를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상상도 못할정도의 고통에 마녀는 이를 악물었지만, 그런다고 해서 발톱이 막히는것은 아니었다.


천천히 숨통을 조여오는 발톱, 그러나 마녀는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띄우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드래곤이 느닷없이 울부짖으며 마녀를 내동댕이쳤다. 그 모습을 본 용병의 몸 속에서 알 수 없는 힘이 끓어올랐다.


이미 산을 올라가며 반파된 방패를 들고서 용병은 드래곤을 향해 달려나갔다.


드래곤은 가슴 부근의 알 수 없는 통증속 정신 없는 와중에 용병이 달려오는것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발톱을 휘둘렀다. 그러자 용병의 방패가 산산조각 나버렸다.


용병은, 부서진 방패의 날카로운 나무 조각을 왼손에 들었다. 그러고선 드래곤의 눈을 노리고 그대로 내리찍었다.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며 난동을 부리던 드래곤의 가슴팍, 단단한 드래곤의 외피를 뚫고 나있는 상처를 수십번의 전장을 드나들던 용병은 놓지지 않았다.


용병은 드래곤이 마구잡이로 휘둘러대는 팔을 피하고 파고들어 그대로 가슴팍에 검을 꽂아 힘을 주었다.


드래곤의 괴성은 용병이 가슴팍에 검을 꽂아넣자 순간 멈추었고, 용병은 검을 뽑고 드래곤의 상처 사이로 팔을 집어넣었다.


용병의 손에 무언가 잡히는 감각이 들어 그대로 뽑아내자, 드래곤은 뻣뻣이 굳은채로 기우뚱 하더니 시뻘건 용암이 혀를 내미는 분화구 속으로 추락해갔다.


용병의 손에는 아직까지도 팔딱거리는 용의 심장이 들려있었다. 이정도면 마을 사람들도 용이 퇴치되었다는것을 알것이다.


그리고, 용병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한쪽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는 마녀를 향해 달려갔다.


마녀의 상태는 심각했다. 용의 심장을 노린 댓가는 마녀 본인의 심장이 드래곤의 발톱이 꿰뚫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새하얀 눈과 마녀의 피부에 붉은 피가 흩뿌려져 있었다.


용병은 황급히 마녀를 안아들었지만, 이미 치료하기에는 늦은 상황이었다. 간신히 숨만 가쁘게 쉬고있던 마녀가 용병과 눈을 맞추었다.


그러고선, 힘겹게 입을 열어 말했다. 자신이 죽기 전에 한가지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느냐고.


마녀의 눈에서 눈물이 피와 함께 섞여 바닥을 적셨다. 마녀의 손이 이내 힘을 잃더니, 축 늘어져갔다. 마녀의 생명은 이제 끝이 난 상태였다.


용병은 천천히 안고있던 마녀를 들어올렸다. 그러고선 지상을, 마을을 향해 터덜 터덜 걸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용병이 용의 심장을 뽑아 돌아오자, 마을은 금새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이제 더 이상 무시무시한 드래곤의 습격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기에 사람들은 자신들이 단두대에 세웠던 용병을 영웅이라 추앙하며 기뻐했다.


촌장이 기쁜 표정으로 용병에게 다가가 말했다. 당신은 마을을 구한 영웅이다. 이제 우리는 마을을 구한 댓가로 당신이 원하는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다.


용병은, 한동안 답이 없었다. 그러고선 천천히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이 마녀를 마을의 공동묘지에 묻어달라.'


용병은 끝까지 자신의 죄를 사해달라는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용병은 그가 드래곤을 쓰러뜨릴때 쓰던 검을 대장장이에게 돌려준 뒤 쓸쓸하게 교수대로 향했다. 더 이상 싸라기눈은 내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