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




비가 추적추적 내려서 거의 24시간 동안 쏟아져대고 있을 때, 나는 산 위에 서 있는 누군가를 보았다. 우리 집 뒷산은 별로 높지 않았지만 한 번도 올라가본 적은 없었고 거기 올라간 사람도 본 적이 없었는데, 그 위에 누군가 서 있었다. 얼굴도 보이지 않았고 옷도 거무죽죽한 남색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지만, 그 사람은 거의 3시간 동안 거기 서 있었다.




나는 도저히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어 우산을 들고 뛰쳐올라갔다. 그리고 소리쳤다.




"이봐요! 당신 거기서 뭐 해요?"




그는 청년이었고 예상대로 우산은 없었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답은 의외로 조용했다. 나는 우산을 내밀어서 그 사람이 더 이상 비를 맞지 않도록 했지만 그게 의미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 사람은 이미 흠뻑 젖어 있었다. 나는 내 우산을 쓰고 그 사람 옆에 서서 그를 보며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여기 그렇게 오래 서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 생각이요."




"사랑하는 사람이라고요?"




그의 얼굴은 딱히 잘생겼다고 말하기는 애매했다. 아니, 차라리 굳이 편을 가르자면 좀 못생긴 편에 속했다. 물론 그렇다고 많이 못생긴 것도 아니고 그냥 딱 평균 수준이었다. 그가 나를 보면서 다시 대답했다.




"네. 사랑하는 사람이요."




"어떤 사람이길래 여기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내가 그렇게 한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뒤가 천 길 낭떠러지였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이 사람이 여기 서서 "사랑" 타령을 하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 사람이 여기 온 이유는 하나로밖에 귀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굳이 왜 그런지, 한번 물어봤다. 원래 사람은 털어놓으면 좀 나아진다.




"나한테 얘기해달라는 건가요?"




눈치 한 번 빠르다.




"뭐, 한번 해보세요."




"그냥, 뭐, 시작은 평범했어요. 굉장히 귀여운 애였죠. 고등학교 1학년 시작하던 날에 봤는데, 다른 애들은 다 그 애보고 못생겼다고 해도 제 눈엔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키가 컸고요. 다리도 길고, 얼굴은 귀여웠어요."




"그래서요?"




"글쎄요, 아마 그대로 한 1년 동안 계속 혼자 속으로만 끓이고 있었어요. 사실 제가 그 애를 좋아한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고등학교 1학년이 끝날 쯤 되니까, 걔는 문과고 저는 이과니까 갑자기 가슴이 철렁하더라고요. 앞으로 계속 같은 반에서 같이 있을 수 없다는 게 그렇게 무서웠어요. 그래서 고백했죠."




아무리 봐도 이 작자가 고등학생으로는 안 보였기 때문에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진 않을 거고, 그러면 적어도 차이진 않았던 게 확실하다.




"차였어요."




"어컥! 콜록콜록!"




"그래서 뭐, 굉장히 서먹서먹하게 겨울방학을 넘겼죠. 고등학교 2학년이 됐을 때 좀 재밌어졌어요."




"뭐가요?"




"사는 게요. 주변 애들이 다 몰려와서 걔 대체 왜 좋아하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존X 못생기고 존X 멍청하고 존X 역겨운데 왜 좋아하냐고 막 따지는데, 아니 제 눈에는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성실하고 착하고 섹시하게 보이는데!"




세상 사람들이 다 못생겼다고 하면 일단 당신 눈을 좀 의심해보는 게 먼저 아닐까? 하지만 그런 말은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걔도 절 피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걜 피했어요. 굳이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마주치면 더 서먹서먹해질까 봐."




"그래서요?"




"근데 얼마 안 가서 걔가 남자친구가 생기더라고요. 보고 있자니 기분은 좋더라고요. 굉장히 행복하게 방실방실 웃으면서 잘 지내는데, 속은 끓었고. 뭐, 걔가 행복해하니까 그걸로 됐죠."




저런!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대충 앞으로의 시나리오를 생각했다. 흠. 그렇다면 이제 그 커플이 결혼을 해서 지금 인생에 심한 박탈감을 느껴 자살하려고 여길 오셨군. 완벽한 추리였다.




"근데 닷새만에 헤어지더라고요."




이제 난 추리 따윈 하지 말고 닥치고 들어야겠다.




"그 커플이 끝나고 나서 걔가 정말 많이 울었어요. 소문으로 듣기로는 걔가 먼저 고백했다네요. 그래서 좀 더 정보를 캐 봤죠."




그거 스토킹이야, 이 미친 작자야.




"근데 알아보니까 그 남자애가 걔한테 '너같이 존X 못생기고 존X 멍청하고 존X 역겨운 애하고는 못 지내겠다'면서 폭언을 했다는 거에요. 그 말 듣고 나니까 정말 꼭지가 돌아버렸어요. 걔 눈에 눈물나게 만든 게 너무 싫어서요. 그래서 찾아가서 그 남자애하고 자리를 좀 만들었어요."




"뭐야, 치고받고 싸웠어요?"




"아뇨, 그냥 맞았어요."




솔직히 당신 딱 보아하니 맞게 생겼다고 말할 뻔했다.




"근데 맞고 나서 고등학교 3학년이 되니까 갑자기 걔한테 연락이 오더라고요."




아니, 미친놈아, 고등학교 3학년이면 공부해.




"잘 지내냐고. 넌 내 어디가 좋냐고. 어디가 좋아서 날 그렇게 졸졸 따라다니냐고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그냥 네가 좋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나같이 존X 못생기고 존X 멍청하고 존X 역겨운 X이 어디가 좋냐'고 하더라고요."




그 정도면 당신 눈을 진짜 의심해봐야 할 것 같아.




"그래서 그랬죠. 다른 사람들이 너한테 못생기고 멍청하고 역겹다고 하는 거 다 거짓말이라고. 네가 너무 예쁘고 착하고 사랑스럽고 귀엽고 순진하니까 너한테 질투하는 거라고."




이쯤되면 인지부조화인 것 같다.




"뭐, 그렇게 대충 몇 번 대화 하고 나서, 사귀게 됐어요."




그 대화를 알려 줘, 이 페르마 같은 새끼야. 대체 무슨 대화를 했길래 걔가 갑자기 널 좋아하는 거야.




"둘이 정말 행복하게 지냈어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성적 맞춰 보고 나서 같은 대학교 같은 과에 붙었죠."




그야 둘다 고등학교 3학년에 연애하느라 똑같이 공부 말아먹었을 테니까 그렇겠지.




"그리고 제가 군대를 가게 됐어요."




그게 결말인가? 대부분은 그게 결말이던데.




"군대에 갔다가 병장 찍고 전역했는데, 절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흠, 존X 못생기고 존X 멍청하고 존X 역겨운 사람이면 다른 사람이 대쉬를 안 할 테니까 어쩔 수 없이 기다린 거 아닐까? 난 아무리 봐도 그렇게밖에 안 보이는데.




"그리고 그렇게 대학교 졸업하고, 제가 2년 늦게 졸업했을 때는 벌써 취직해서 돈을 모으고 있더라고요. 결혼하자면서. 그래서 저도 일자리를 알아보다가 공무원 시험에 붙었죠."




"아이고!"




"이제 됐죠 뭐. 공무원 시험도 붙었고 여자친구도 취직을 했고, 그렇게 1년 정도 더 연애를 하다가 마침내 상견례도 하고 결혼식 날짜도 잡았어요."




뭐야, 근데 왜 슬퍼.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에요."




그리고 나는 그제서야 볼 수 있었다. 나는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장님이었다. 그것을 보지 못했다. 이 사람이 슬픈 이유를. 이 사람이 고통스러운 이유를. 이 사람이 여기 서서 3시간 동안 비를 맞고 있었던 이유가 눈앞에 있는데도 보지 못했다. 천 길 낭떠러지가 있는 뒤편 말고. 딱 30센티미터쯤 앞에. 엎어지면 코 닿을 지척거리에. 지름 120센티미터, 높이 60센티미터쯤 되어 보이는, 잔디를 매끈하게 입힌, 반구형의 흙더미를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