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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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이라기엔 이르고 아침이라기엔 조금 늦은 시각, 햇빛이 고층 건물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도시의 낮은 곳을 비추기 시작했을 때쯤 빈센트는 은신처를 나서 10번지의 초입으로 향해 있었다.

그가 마약상과 거래를 터 가며 10번지에 들어가려는 이유란 10번지 자체에 목표를 가졌다기보다는 그 이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발판을 마련하려는 목적에 가까웠다.

지금 그는 안개가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는 지점을 둘러보다 마침 높게 솟은 가로등 겸 수십 개의 간판이 달린 녹슨 기둥 위로 은밀히 타 올라간 상태였다.

주변의 동향과 10번지의 대략적인 형태를 살피기 적절하며, 오고가는 자를 지켜보는 카메라들보다 높이 위치하여 있기에 혹시 모를 감시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다.

그의 코트 주머니에서 짧은 진동이 울려퍼지자, 빈센트는 이 전화가 지금 가장 올 법한 연락이라는 가정 하에 극도의 언짢음에 휩싸인다.

'듀크, 311-4582'

아니나 다를까, 휴대전화의 작고 파란 화면엔 듀크의 연락처가 떠올라 있었다.

[이봐, 이번 한 번이 끝이라고.]

"그 말을 몇 번째 하는 건지 알기는 하나?"

[그래, 그만큼 중요한 사항이니까 네 멍청한 알고리즘에 박아둬.
우리가 제공하기로 한 '상품'들은 압생트를 묻어버린 후에 받기로 계약서에 서명까지 했는데...]

"그래, 자비로운 공작님. 이런 일이 더 있진 않을 테니 안심하라고.
다음 물건을 받기 전까진 확실히 압생트를 처리해줄 테니까."

[뭐가 자비로운 공작...]

빈센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중앙의 버튼을 눌러 전화를 끊었으나, 이내 다소 착잡한 감각에 휩싸였다.

저들에게 일말의 정도 붙여서는 안 된다.
저들은 마약상. 유혹을 이기지 못한 자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악인이며 빈센트 자신이 언젠가 처단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의 심란함을 대변이라도 하듯 낮에 가까워지자 도시 이곳저곳에서 흐르는 각종 매연, 후텁지근해진 공기를 받아들여 팽창하는 흰 안개가 빈센트를 향해 침범해 온다.

그는 품에서 작은 캡 형태의 물건을 꺼내 카메라 옆 호흡구에 부착했다.

이는 듀크 패밀리로부터 제공받은 것으로, 사이보그의 호흡기에 장착하도록 만들어진 특수 필터.
간결하고 투박한 디자인이지만 새어나오는 톡 쏘는 향으로 미루어 보아 상당히 복잡한 화학적 공정이 들어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은은히 새어나오는 기름의 향과 톡 쏘는 분말의 향기, 이따금 피어올라 존재감을 드러내는 희미한 허브들의 향기.
아마 그 하얀 안드로이드의 솜씨이리라.

허리춤의 칼집을 만지작거리며 잡념을 떨쳐낸 그는 몸을 날려 안개 속으로 뛰어내렸다.


*


그의 시각 센서는 꽤나 혹사당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전방을 파악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그는 마력을 최대 범위로 펼쳐 주변을 감지하려 애쓰고 있었다.

해당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10번지의 대략적인 지형을 표시한 데이터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눈앞의 길목에 대조하는 것만 해도 상당한 장애가 뒤따르는 작업이었다.

호흡구에 끼워진 필터 또한 드나드는 공기에 대해 최대한의 존재감을 발휘하며 극독의 안개로부터 그의 호흡기를 보호하고 있었다.

마력 투과율조차 매우 높아 보호막도 뚫고 들어오는 안개가 가히 평범한 것은 아니었으니, 이 저주받은 물질을 배출하는 하이먼들에게 의구심을 넘어 뒤틀린 존경심이 피어오르려 하는 그였다.

실은 일반적인 경우라면, 그와 같은 정도로 신체를 개조한 사이보그들은 호흡에 유독성 물질에 섞여들어간다 한들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빈센트의 경우, 그가 마법사라는 사실이 그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마법사에 관한 정보를 일정 이상 쥐고 있는 자들은 매우 희소하고, 적절한 위장만 가한다면 지팡이를 보고 마법사라 특정하는 이들도 많지 않다.

더군다나 그는 지팡이 없이 활동하는 경우도 잦았기에 마법사라는 사실이 그에게 위험을 안겨줄 상황은 본래 매우 적었다.

허나 마탑의 마법이란 마나 호흡을 전제해야 하는 것이기에, 대기 중의 마나를 빨아들여 마법을 사용하고 생명을 유지하는 빈센트의 입장에서 10번지의 안개는 큰 위협이었다.

그의 호흡구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나약한 폐부에 온갖 유독성 물질과 마약을 들이붓는 꼴을 방관하였다간 그것들이 마법사로써의 생명을 좀먹고 끝내 스러지게 하는 것이 머지않을 것이었다.

건설조차 채 마무리되지 않아 철골 구조가 앙상히 드러난 건물들을 줄지어 지나고 글자가 삭아 알아볼 수도 없는 종이 수천 장이 널브러진 광장을 지나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자 그가 목표로 했던 기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장벽으로 불리는 것.
지금껏 지대가 낮은 10번지에 아무 죄책감 없이 안개를 배출한 하이먼들이, 쌓이고 쌓인 유독 물질이 스스로의 영역을 침범하자 부랴부랴 설치한 티타늄 구조물이다.

그렇기에 이곳을 찾을 가치는 충분했다.

빈센트는 한 자릿수 번호를 가진 구역이 얼마나 접근하기 힘든 곳인지 진작에 깨달은 바 있다.
그러나 사냥꾼이 사냥감을 찾아 짐승의 굴을 좆듯 처단자를 자처하는 그가 처단 대상의 굴을 찾아야 함은 너무나도 명백한 일.

그는 들고 있던 가방에서 작은 휴대용 디바이스를 꺼내 검은색 광택을 빛내는 벽의 틈새 한 켠으로 던져 넣었다.
기기에서 하염없이 발산되는 인공적인 녹색 광채가 꺾인 틈으로 새어 나오는 것을 확인하자 그는 걸어온 길을 찾아 발을 옮겼다.


*


안개가 자욱한 10번지의 최심부.

조금 전에 빈센트 또한 목격한 바 있는, 수많은  종이뭉치가 널브러진 공터에 수상한 동향이 감돌고 있었다.
검푸른 옷을 치렁치렁하게 늘어트린 서너 명의 인영이 흩어진 종이들을 감흥 없이 즈려밟고 공터 중앙으로 향한다.

그들의 발소리는 마치 길가를 나도는 어느 작은 생물들의 그것과 같이 놀라울 정도로 존재감을 배제하는 무영의 걸음이었다.
추측컨대 체계적인 훈련 내지 전해져오는 특수한 방법을 통해 인위적으로 기척을 묻어버리는 것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

이 하얀 배경에 그들의 존재를 엿볼 실마리는, 안개가 흩어지는 찰나에 어렴풋이 비치는 어두운 옷자락이 전부였다.
고로, 그들 사이에 위치한 작은 그림자의 미약한 기척은 반대급부로 존재감을 더할 수밖에 없다.

혹자의 견식을 앞세우자면 다른 이들과 결이 비슷한, 그러나 그 서투름으로 인해 차마 온전하다고는 할 수 없는 걸음.
가벼운 몸뚱아리 덕인지 그조차도 심히 울리는 편은 아니었지만, 앞뒤로 걸어가는 인물들에 비해 그 존재를 감지하기 쉬운 것은 명백했다.

그들 모두의 머리에는 검은색의 사각형 판을 닮은 모자가 얹어져 있고, 그로부터 반투명한 검은 차폐막이 내려와 목덜미까지를 가리고 있었다.

그것들은 특유의 고상함과 종교적인 신비로움을 더하는 매개인 동시에 아마도 안개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주는 도구일 것이다.

공터 바닥에 완벽한 동심원으로 새겨진 문양의 중심에 다다르자, 일렬로 늘어선 인영들의 맨 앞을 지키던 키 큰 그림자가 우뚝 멈추어 서더니 절도 있게 뒤돌아 섰다.
그의 망토 자락 사이로 전체적인 복식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황금색의 기계 팔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바로 뒤에 있던 조그만 형체에게 말하기를,

"...성황님, 심장을 내어주시지요."

작은 형체는, 그가 원하는 것이 통상적으로 칭하는 심장이 아님을 잘 알고 있는 듯 품을 뒤져 황금색의 사슬자락을 꺼냈다.
사슬이 옷자락 사이로 끌러 나오며 청아한 소리를 울리고, 이내 그 끝에서부터 주먹 두 개만 한 크기의 금빛 광채가 나타났다.

대략 몇 분 전부터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던 빈센트가 생각하기를, 그것은 흔히 말하는 향로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흔하다는 표현에는 어폐가 있을지도 모른다.
향로와 같이 종교에 사용되는 그러한 물건들을 이 도시에서 찾아볼 일은 그리 많지 않았고, 어딘가에 있다 한들 그 정체와 쓰임새를 추측하지 못하는 이들이 대다수일 것이다.

그럼에도 빈센트가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은 도시 건설 이전부터 각종 종교적/역사적인 색채를 알부 지켜 온 마탑 출신이기 때문이리라.

그는 스승의 방, 그의 침대와 큰 사각형의 거울 사이 무심하게 결려 있던 그 물건을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이 어떤 마법의 매개인지는 더 이상 알 방도가 없었지만 말이다.

회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님을 다소 늦게 눈치챈 빈센트는 검푸른 옷 일행의 행동을 마저 관찰하며 그들의 눈을 피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소정의 목적을 달성하고 구역의 바깥으로 돌아가던 빈센트는 의도치 않게 10번지에 발을 들인 또 다른 무리를 마주친 상태였다.

그 말고도 이 죽음의 땅을 돌아다니는 자들이 존재하며 하필 그들과 같은 시간대에, 그것도 하필이면 바로 이 길목에서 그들을 마주쳤다는 사실은 참으로 괄목할 만한 우연이 아닐 수 없지만 이미 마주친 이상 따져봐야 의미 없는 생각이었다.

하필이면 저 광장-지금껏 공터라고 표현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광장이라는 단어에서 암시되는 일련의 활력감이나 북적거림 따위는 일체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아무래도 공터라 칭하는 편이 옳다고 생각되었다-을 지나지 않고선 10번지를 나갈 길목이 없었기에 공터로 통하는 십수 개의 길목 중 가장 좁은 곳에 몸을 숨긴 빈센트는 그들의 행위를 마저 지켜보았다.

"오오...위대한 밤하늘의 유산이여..."

사슬에 걸린 향로를 건네받은 황금 팔의 남자는 그것을 드높이 들어 올리며 감격에 찬 중얼거림을 흘렸고 뒤쪽에서 따라오던, 망토 안쪽을 특정할 수 없는 두 인물이 그것에게 예우를 갖추듯 살짝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향로를 건네준 작은 체구의 인물은 별다른 동요 없이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남자는 방금 자신 뒤의 인물에게 예우를 갖춘 것을 까맣게 잊기라도 한 듯, 혹은 그를 아예 시선에서 치워버린 듯 가쁜 숨소리를 내지르며 향로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은 보이지 않지만 아마 그 눈동자 안에는 향로의 찬란한 광채 외에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고 있을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제서야 빈센트는 시각 범위를 최대로 늘려 남자가 든 향로를 살펴보았다.
남자의 팔을 훨씬 뛰어넘는 순도의 황금으로 조형된 완곡한 선의 몸체, 그것을 둘러싸듯 새겨진 날개 달린 천사들과 기도하는 신도들, 무리 지어 타는 촛불들의 형체가 미적으로 퍽 아름다웠다.

아래쪽이 완만하게 굽어져 뾰족하게 끝맺음되고 위쪽과 아래쪽의 결합이 미묘하게, 하지만 자연스레 뒤틀린 것이 마치 인간의 심장을 연상케 했다.
아마 방금 저 남자가 심장이라 부른 것과 관련이 있으리라고 확신하는 빈센트였다.

한참 동안 그것을 들여다보던 황금 팔의 남자는 기도문에 가까운 말들을 외며 그것의 사슬을 잡고 천천히 흔들기 시작했다.

"...성인들의 피가 수정으로 굳어 흐를 적에, 
최초의 성자께서 그 오른손을 들어..."

남자의 말들에 반응하듯, 향로는 미약하게 진동하며 주변의 공기, 굳이 따지자면 주변의 안개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모여들어 더욱 뿌옇게 물든 안개의 흐름이 향로 이곳저곳의 구멍으로 빨려들어가자 그것의 광채가 서서히 강해지기 시작했다.

그 괴기한 신비로움을 품은 광경에는 빈센트 역시 내적인 감탄을 금치 못했다.
광채는 빛을 잡아먹는 안개를 무시하듯 뚫고 공터의 이곳저곳을 비추었으며 외곽에 불규칙하게 흩어진 콘크리트와 철근 자재들이 그것을 받고 황금빛으로 빛났다.

뒤쪽의 두 인물은 어느샌가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를 하는 듯 보였다.
빈센트는 그들의 손과 바닥에 닿은 무릎이 감격에 부들대며 떨리는 것을 보았다.

종교에 몸담지 않은 그로썬 본래 이해하기 힘들었을 행위이나 이 기적적인 광경은 마탑의 고위 인물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으며, 신비를 마주한 적 없는 이들이 혹하기에 충분한 빛이 아닐까 라는 짐작을 하게끔 했다.

그러던 와중 기도는 끝을 향해 달려가고, 향로의 빛이 점차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우리의 비탄-사에타를 굽어보소서."

남자가 기도의 중얼거림을 끝마치자 향로의 진동도, 모여들던 안개의 움직임도 멈추며 공터에는 잠시간의 침묵이 머물렀다.
그것이 어찌나 많은 안개를 빨아들였는지, 주변의 안개가 다소 옅어지며 물체를 분간하기 비교적 쉬워지는 정도에 다다랐다.

허나 안타깝게도, 그것이 빈센트에게 마냥 호재로 작용하지만은 않았다.

"...쥐새끼가 숨어들어 있었구나."





쓸지 어떨지 모른다고 했었는데, 쓰다보니 삘받아서 꽤 많이 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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