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냥 지켜볼 수 만은 없다. 그런데 어느 때에 들어가지? 잘못 들어갔다가 마리가 다치면 어쩌지? 마리는 그의 맹렬한 공격을 받아내면서도 힘든 기색 하나 없이 천진난만한 목소리의 선율을 이어갔다.

"아참, 그리고 소개가 아직 안끝났어요. 저기 있는 친구는 테세우스 알렉산더에요. 줄여서 테스라고 부르죠."

헤임달은 순간 내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나는 그의 주황빛 눈 속으로 '신'을 온몸에 두르고 무작정 달려나갔다. 헤임달은 수십 미터 뒤로 튕겨져 날아갔다. 그의 몸에 부딪힌 나무들이 이제껏 버텨 오던 세월이 거짓말이라는 듯 힘없이 꺾여나갔다.

"백마 탄 왕자님이 이제야 오셨군요."

마리가 비아냥대며 말했다. 바이저 너머로 그녀의 장난스런 얼굴이 연녹색 필터가 입힌 채로 보였다. 나는 어이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래서. 안 피할 거야?"

헤임달이 있는 힘껏 코피스에 불꽃을 질러 내질렀다. 날카로운 불꽃은 아슬아슬하게 우리 사이를 가르고 지나갔다. 갑주 너머로 따스한 기운이 느껴질 정도였다. 마리는 어느 새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는 내게 크게 코피스를 휘둘렀다. 나는 뒤로 빠지면서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코피스가 휘둘러진 궤적대로 그어진 불꽃이 공중으로 떠오른 나뭇잎들을 태웠다. 내가 몸을 추스를 시간도 없이 그는 순식간에 자세를 바꿔 내게 칼날을 들이밀었다. 상체를 펼 겨를도 없이 무리하게 백스텝을 밟느라 그만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헤임달은 내 앞으로 빠르게 다가와서 코피스를 위로 올렸다. 그의 무기에서 불꽃이 하늘하늘 춤을 추며 한가득 피어올랐다. 그것은 몇 초 내로 내 머리를 두동강낼 것이다. 극한의 절망이 판도라 상자 밑바닥에 남은 희망마저 갉아먹고 피어올랐다. 궁니르를 꺼낼 수 있겠지만 그 순간 저 주황빛 손아귀는 내 머리를 양쪽으로 헤집어놓을 것이다. 마리가 목이 쉬어라 불러대는 내 이름을 배경음악 삼아 머릿속에 12년 전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기 시작했다. 이 '신'을 처음 얻었을 때이다.


그 때 나는 5살이었다. 그 날 천명시는 유독 어두웠다. 17살의 누나는 날 안고 무작정 뛰고 있었다. 그 뒤를 두 발과 하나의 눈을 가진 메카트로닉스, 모노 아이가 우리를 뒤쫓고 있었다. 매일 오후 1시에 방영하던 만화영화, '출동! 노바특공대'가 생각이 났다. 노바의 자랑스런 꼬마특공대가 노바국제해방군의 로보트를 타고 악당들을 쳐부수는 내용이었다. 모노 아이는 꼬마 주인공 '제임스'가 타는 로보트로, 끝까지 악당을 쫓아가 쳐부수는 용감한 영웅이었다. 지금 저게 우리를 쫓고 있으니까 우리가 악당인가? 난 내가 잘못한 일을 헤아려 보았다. 숙제가 너무 어려워서 답안지를 베낀 게 3번, 밥 먹기 전에 엄마 몰래 사탕을 먹은 게 5번. 또 뭐 있지? 누나는 그걸 생각할 겨를도 안 주고 골목으로 뛰어들어갔다. 그 골목에는 내가 친구들이랑 놀 때 사용했던 낡은 축구공이 붉게 물든 채 쓸쓸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누나는 기겁하더니 내 눈을 가렸다. 누나의 따뜻한 체온이 눈을 통해 들어오자 안도가 되었다. 모노 아이는 머리가 커서 골목에 들어오지 못하였다. 그것은 화난 듯이 하나의 눈으로 우리를 노려보다가 다른 곳으로 갔다. 누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도 온 몸이 늘어지려는 때, 날카로운 소리가 내 귀를 찢었다. 누나가 풀썩 쓰러졌다. 쓰러진 누나의 뒤에는 총열에서 연기를 내뿜고 있는 셰퍼드(Shepherd)가 서있었다. 쓰러진 누나의 밑에는 붉은 카펫이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셰퍼드의 총열이 나를 겨냥했고 나는 그 때...


내 오른쪽 옆구리에 알 수 없는 고통이 느껴졌다. 난 옆으로 튕겨져 날아갔다. 헤임달의 코피스와 불꽃 검기가 큰 소리를 내며 내 뒤쪽의 나무 여러 그루를 위아래로 쪼갰다. 나는 옆구리의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자세를 바로잡고는 궁니르를 꺼냈다. 죽을 위기는 넘겼지만 이상하게도 주마등은 끝나지 않았다.


셰퍼드의 총탄 소리가 뭔가 좀 작은것 같았다. 착각인가 하고 눈을 떴을 때 내 눈 앞에 보이는 풍경이 좀 이상했다. 시야가 좁아진 것 같았고 살짝 초록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눈앞에 알 수 없는 글자들이 깜빡거렸다. VR영화를 보던 때가 생각났다.

'아스가르드 사의 제품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품 품질보증 기간은 1억년이며 무상 AS가능 기간은 10년입니다. 제품 제조일은 4006년 10월 13일입니다.'

정체불명의 안내방송이 내 머릿속에 울려퍼졌다. 나는 옆으로 구르며 셰퍼드의 총알세례를 피했다. 총알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벽에 박혔다.


헤임달이 코피스를 크게 위에서 아래로 휘둘렀다. 그의 무기에서 나온 불꽃이 호를 그리며 내게로 돌진해왔다. 나는 옆으로 굴러서 피했다. 불꽃의 풍압으로 나무들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아스가르드 사는 수많은 연구와 실험을 통해 착용자를 보호하고 적들을 효과적으로 처리하는 최고 품질의 특수 능력 강화복 Special Abilitized Powered Exosuit를 개발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나는 앞으로 돌진해 셰퍼드의 몸체에 팔을 꽂아넣었다. 금속이 구겨지는 소리와 플라스틱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헤임달에게 순식간에 돌진해 그의 바이저에 주먹을 한 방 먹였다. 금속이 맞부딪히는 경쾌한 소리가 온 숲에 울려퍼졌다.


'현재 SAPE를 생산하는 회사는 아스가르드 사, 올림포스 사, 타카마가하라 사 등이 있으며 저희 아스가르드 사는 믿음직한 품질의 SAPE를 세계 곳곳에 공급하고 있습니다.'

나는 셰퍼드 안의 부품들을 손에 잡히는대로 잡아뜯었다. 긴 전선들이 마치 혈관처럼 늘어졌다. 심장부를 잡아 뜯긴 셰퍼드는 감전된 강아지처럼 쓰러져서 움찔대다 시동이 꺼졌다.


그는 잠시 비틀거리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코피스를 다시 휘두르려 했다. 그 때, 그의 코피스가 마치 투명한 벽에 부딪힌 것처럼 멀리 날아갔다. 나는 그 때를 놓치지 않고 궁니르의 뒷면으로 그의 배를 가격해서 자세를 무너뜨린 뒤, 발로 냅다 걷어찼다. 그는 또 십 수 미터가량 날아가서 나무 여럿을 쓰러뜨렸다.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났다. 나는 여전히 몸에서 긴장을 뺄 수 없었다. 먼지 속에서 의문의 빛이 번쩍거렸기 때문이다. 먼지가 걷힌 뒤에야 그 빛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헤임달의 갑옷이 눈부시게 빛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태양처럼. 그 주변의 나무들이 빠른 속도로 말라가고 있었다. SAPE, 그러니까 '신'의 눈 보호 필터로 빛을 어느 정도 차단하고 있는데도 눈이 부셔 똑바로 쳐다 볼 수 없었다. 그는 나를 노려보더니, 함성을 지르며 두 팔을 벌렸다. 강렬한 태양풍이 그의 몸에서 쏟아져 나왔다. 나는 피하려고 뒤로 돌진했지만, 피할 수 없었다. 가공할 태양풍의 위력에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었다. '신'이 차마 완화해주지 못한 충격이 내 몸으로 전달되었다. 온 몸이 얼얼해서 정신이 혼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