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그늘에서 움직이는 어슴푸레한 그림자의 정체는 곧 밝혀졌다. 곰 두 마리였다. 아마도 암수의 짝일 것이다. 


우리 일행은 일제히 곰이 나타난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스파링은 곰들을 향해 방패를 던졌다. 늑대들도 방패를 따라 곰에게 덤볐다. 스파링의 방패 톱니바퀴가 깊숙히 곰의 앞발을 가르며 지나갔지만 잘려나가지 않았다. 곰이 방패에 신경을 쓰고 있는 틈을 노려 늑대들이 곰들의 앞발을 물었지만 곰은 다른 앞발로 늑대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늑대들은 바닥에서 크릉 신음을 하면서 바로 일어나지 못했다. 


늑대가 쓰러지는 것을 본 스파링은 분노하여 곰에게 달려들며 머리에 도끼를 내리찍었다. 그 사이 사모아 형사도 왼손의 장검으로 곰의 앞발을 막은 후 오른손의 장검을 곰의 심장 깊숙히 찔러넣었다. 그것을 본 옆의 곰이 사모아 형사의 옆구리를 무지막지한 앞발로 휘둘러쳤다. 사모아 형사는 공중으로 날아가 나무둥치에 심하게 부딪혔다. 나는 틈을 노려 사모아 형사를 날린 곰의 심장을 찔렀지만 곰은 바로 죽지 않은 채 반대 손을 내 머리쪽으로 휘둘렀다.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에서 되돌아온 방패를 회수한 스파링이 내 머리를 막았지만 육중한 곰의 팔에 밀려 나가떨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 뒤를 바로 쫓아오던 수전 연구원이 장검을 곰의 심장에 꽂아넣었다. 두 곰은 순서대로 쓰러져 땅을 울렸다. 


"수잔, 감사해요. 일격에 곰을 쓰러뜨리셨네요."

"아 제가 가진 무기 덕분이랍니다. 자 이것을 보세요."

수전은 자신이 가진 장검을 들어올리더니 엄지에 힘을 주었다. 장검의 끝에는 표족한 면도날 비슷한 것이 나와서 한바퀴를 휘젖더니 들어갔다.

"한누리, 이러한 장검은 곰과 같은 덩치가 크고 심장이 튼튼한 짐승에게 효과가 있는 무기이죠. 어제 곰이 출현하는 지역에서 조사한다고 하길래 이런 검을 준비했거든요. 아마도 사모아 형사님께서 갖고 계신 장검도 제 것과 비슷한 기능이 있을 겁니다."

"앗 사모아 형사님, 괜찮으세요?"

나는 나무 둥치에서 일어나 걸어오는 사모아 형사를 바라보았다. 

"한누리, 너무 걱정하지 말게. 이렇게 나가떨어질 것을 다 예상을 하고 보호성능을 강화한 슈트를 입고 왔으니까 말이지. 자네들은 딱히 곰을 상대하면서 장비를 업그레이드하지 않았나?"

"저희는 늑대를 상대할 때와 같은 장비로 무장했을 뿐인데, 저희한테 미리 조언을 해주셨다면 준비를 했을 텐데요... 하기야 곰 지역으로 오자고 한 것이 저희였군요. 저희가 어제 곰을 상대할 때는 한 마리라서 그런지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거든요. 별다른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스파링은 곰의 머리에 박힌 도끼를 회수하였다. 도끼와 같은 무기는 그 육중함만큼이나 곰에게도 유용한 무기인 듯했다. 하지만 너무 무거워 다수의 적을 동시에 상대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스파링, 곰을 상대하려면 무기를 업그레이드할 필요가 있다고 하는데, 용병 사무소에서도 무기류를 판매하던가?" 

"용병 사무소의 밑층에 있는 용병 휴게소에서도 전형적인 무기류는 판매할 거야. 우리가 갖고 있는 무기의 바로 상위 버전쯤은 그곳에서 구할 수 있겠지."

다행스럽게도 우리 일행의 누구도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사냥을 진행하기는 좀 무리가 따랐다. 곰을 한 마리씩 상대할 것이라는 당초 예상과는 달리 처음부터 두 마리를 한꺼번에 상대했더니 몸과 정신이 상당히 피로했다. 조금씩 쉬는 것이 좋을 것이다.

"형사님, 여기서 조금 쉬도록 하죠. 또 곧 점심시간이군요."

스파링과 나는 쓰러진 곰에게 나아갔다. 각자 단도를 꺼내어 곰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뒤적여 쓸개를 찾아 도려내었다. 나는 쓸개를 수집함에 넣었다. 사모아 형사가 말했다. 

"한누리, 역시 자네들은 알뜰하구먼. 꼬박꼬박 챙길 것은 남겨두지 않으니 말이야. 쓸개가 남성의 정력에 좋다는 것은 잘 알고 있나?"

"수전 박사님, 과연 의학적으로 곰 쓸개가 남성에게 그렇게 좋나요?"

"곰 쓸개는 담석이나 위경련 등 다양한 질병에 효능이 있지요. 딱히 남성에게 더 좋다고 보기는 어렵겠죠. 성기능 개선 효능은 없으니까요." 

"누군가 곰 쓸개의 가격을 올려려고 퍼뜨린 소문이겠죠. 형사님, 곰 쓸개가 그렇게 먹고 싶으신가요?" 

"한누리, 이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고. 나는 그런 것 없어도 몸 건강하게 잘 살고 있거든." 

"형사님, 점심시간인데... 혹시 곰 고기 드셔보시겠어요."

"한누리, 나는 사양하겠네. 나도 용병 일을 하면서 곰 고기를 먹어본 적은 있지만 내 비위에는 잘 맞지 않더군. 수전 박사님, 곰 고기를 드셔보시겠어요?"

"아니요. 저도 사양하겠어요. 모두들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그 전에 조사할 것이 있거든요."


수전 연구원은 곰 신체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더니 말을 이었다. 

"이 두 마리의 곰은 모두 수컷이군요. 당초 암수로 한 쌍일 것으로 생각했었는데요."

"박사님, 그 말인즉슨 두 곰이 짝짓기 행동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집단행동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한누리, 당신 말마따나 집단행동을 했을 수도 있고, 각자 곰이 홀로 거닐다가 만난 공격대상이 우연히 일치하게 된 것일 수도 있겠죠. 아무튼 자세히 조사를 하면 알 수 있을 거예요."

수전 박사는 주사기를 곰에 뽑아 피를 추출했다. 

"박사님, 곰이 바이러스에 의해 집단행동을 하게 되었다면 뇌의 구조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을까요?" 

"한누리, 우선 피를 분석해서 바이러스가 있는지를 조사할 생각이에요. 바이러스가 발견되면 그 때 곰의 뇌를 조사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이곳에 곰의 시체를 놔둔다면 늑대나 다른 맹수가 와서 다 먹어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요?"

"곰 사냥을 오늘 마친 뒤 내일은 하지 않으실 건가요? 오늘 모든 조사를 마무리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것 같네요. 만약 뇌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면 내일 잡은 곰의 뇌를 해부하면 될 거예요." 


맞다. 곰의 뇌는 내일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보다 자연을 더 사랑하는 생물학자에게 곰을 최대한 덜 죽이는 방법을 설파할 필요는 없겠다. 


우리는 각자가 싸온 점심을 먹었다. 스파링과 나는 값싸고 맛없는 빵과 음료수를 먹었고, 사모아 형사와 수전 연구원은 미리 준비해온 도시락을 먹었다. 얼핏 보니 사모아 형사는 샌드위치와 양념 불고기를, 수전 연구원은 김밥을 먹고 있었다. 나는 각자가 가져온 음식을 나눠먹자고 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체면을 차리기 위해 그냥 딱딱한 빵을 무미건조하게 씹었다. 


점심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숲 더 깊숙히 나아갔다. 그 때 저 멀리에서 바람을 가르며 화살이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황급히 그쪽을 향해 뛰었다. 우리 일행은 엘프가 곰을 사냥하는 멋진 장면을 볼 수 없었다. 엘프 외에는 사냥에서 활을 사양하는 종족이 없기 때문에 방금 전에 날아갔던 화살의 임자는 분명 엘프일 터였다. 


나무 둥치 사이에 커다란 곰이 쓰러져 있고 엘프 청년이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혀 몸의 배를 마르며 쓸개를 채취하고 있었다. 나는 지레짐작으로 소리를 질렀다. 

"안녕하세요. 카라쿠롬!"

카라쿠롬은 아름다운 엘프 여성의 약혼자인데, 역시 내 짐작이 맞았다. 우리 일행쪽으로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본 사람의 얼굴은 카라쿠롬이 틀림없었다. 

"저는 한누리입니다. 지난 번에 포세이톤 해산물 요리점의 대기장소에서 만나뵈었지요?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나는 카라쿠롬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카라쿠롬은 쓸개를 수집함에 넣더니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내가 뻗은 손을 마지못해 쥐며 살짝 흔들었다.
"아 얼굴을 보니 생각이 나는군요. 저한테 볼 일이 있으신가요?"

"곰을 혼자서 잡으셨나요? 대단하시군요."

"한 마리에 불과한데요. 저는 홀로 사냥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홀로 사냥을 하시다보면 위험한 순간이 종종 발생하지 않나요? 아무리 능력이 출중하시더라도 두 명 이상이 함께 사냥을 하는 것이 더욱 안전할 텐데요."

"여럿이 사냥을 함께 하면 복잡한 일이 많지요. 저는 의견이 달라 다투는 것보다 마음 편하게 자연을 거닐며 사냥하는 것을 선호하죠."

"그렇군요. 사실 엘프 종족은 위험을 감지하는 데는 탁월한 능력이 있으시니 혼자서 사냥을 하실 수 있으시겠군요." 


내 뒤를 따라 수전 연구원이 도착하여 카라쿠롬에게 말을 걸었다. 

"첨 뵙겠습니다. 저는 생물학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는 수전입니다."

"저도 첨 뵙겠습니다." 

"저희가 조금 전에 곰 수컷 2마리를 한꺼번에 사냥을 한 적이 있어요. 아직 곰이 집단행동을 하는지를 밝혀내지는 못했지만 안전을 위해서 조심하시는 것이 좋으실 것 같아요." 

"제 안전에 신경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여태껏 수컷 2마리가 함께 다니는 것을 보지 못했어요. 아주 이례적으로 우연이 겹친 것이겠지요. 물론 그렇게 낮은 확률이라도 대비해서 조심하는 것이 좋겠군요. 하지만 저는 곰 2마리가 한꺼번에 들이닥친다고 하더라도 사냥할 자신이 있습니다."

"저희는 화살 소리를 듣고 이곳에 왔어요. 곰이 가까이 다가오기 전에 활로 완벽하게 제압하시고 근접해서는 쓸개를 채취하시나 보죠? 하지만 여러 마리의 곰이 한꺼번에 들이닥치면 원거리에서 활로 모두 제압하기는 힘들지 않을까요?"

"제가 스스로 지나치게 자만하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저는 근접전에서도 C등급 용병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설사 곰이 저한테 다가오더라도 물리칠 자신이 있어요. 저는 가끔씩 활을 이용하지 않고 검을 이용해서 곰을 사냥하기도 합니다."

사모아 형사가 엘프 카라쿠롬에게 말을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경찰청에서 근무하는 사모아 형사입니다. 저희는 이 근처에서 발생한 사건을 조사하려고 왔습니다. 혹시 저희가 조사를 해도 방해가 되지 않겠지요?"

이 말은 조사에 방해되니 저리로 꺼지라는 말로 오해할 수도 있었으나, 카라쿠롬은 잘 대답한다.

"아닙니다. 형사님. 공무를 수행하시기 위해 이곳에 오셨는데, 방해가 되지 않게 제가 먼곳으로 물러나 사냥을 해야지요. 가끔 동선이 겹치더라도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혹시 곰이나 다른 맹수가 이상한 행동을 하면 저희한테 연락을 주세요."

사모아 형사는 연락처를 카라쿠롬의 단말기에 전송했다. 카라쿠롬의 배낭에서 단말기의 신호음이 들렸다. 자연친화적인 엘프의 특성상 단말기는 자주 이용하지 않는 듯했다. 


엘프 카라쿠롬은 쓸개를 회수한 후에도 작업을 계속했다. 날카로운 단도로 곰의 앞발과 뒷발을 잘랐다. 4개의 발을 보호필름을 잘 감싼 다음 배낭에 넣는 모습을 보니 나는 궁금증이 일었다.

"카라쿠롬, 곰 발은 어디에 쓰시나요? 혹시 식용으로 괜찮은가요?" 

내 묻는 말에 카라쿠룸은 잠시 머뭇거리는 듯했는데, 내 옆에 선 사모아 형사가 끼어들었다. 

"한누리, 미식가 중에는 곰발바닥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네. 물론 나는 좋아하는 편은 아니네만."

"그럼, 곰발바닥이 비싼 가격에 팔리겠군요? 진작에 말씀해주시지." 

"깜박했군. 자네가 어련히 알아서 알거라고 생각했더만.."


카라쿠롬은 우리가 서로 얘기하도록 놔둔 채 홀로 신속한 걸음으로 나무 그늘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