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병나팔을 불며 붉은 빛이 사그라들며 회색으로 어두워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숲에 있을 때 맑았던 하늘이 점차 검은 구름으로 뒤덮이고 있다. 각자에게 소주 1병은 적절한 주량이었다. 누구도 더 마시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하루의 피로를 푸는 다음 단계는 뭐라고 해도 잠을 자는 것이다. 단시간에 과도한 에너지를 소모한 탓인지 하품이 나오고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사모아 형사와 수전 연구원은 인근의 호텔에서 잠을 자겠다고 한다. 적절한 가격에 적당한 편의시설이 갖추어진 잠자리일 것이다. 스파링과 나는 졸린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올린 채 아파트 16층을 걸어올라갔다. 잠기지 않은 현관문을 열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쓰러졌다. 


나는 모처럼 일찍 잠이 들었지만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는 뾰족귀를 가진 아름다운 여인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녀는 은발을 휘날리며 꽃길을 걷고 있다. 나는 그녀를 멀뚱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꽃봉오리를 바라보던 그녀가 고개를 든다. 나는 고개가 바라보는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늠름한 청년이 환한 웃음을 얼굴 가득 채우며 걸어온다. 


나는 소리지른다. "리라, 조심하세요." 내 목소리가 채 목젖을 벗어나기도 전에 리라의 앞에서는 두려워하던 일이 벌어졌다. 리라를 향해 걸어오던 청년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좀비의 것으로 변한다. 나는 달려가며 좀비의 가슴에 주먹을 날렸다. 좀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나를 비웃더니 내 목을 손으로 강타했다. 나는 쓰러졌고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남성 좀비는 리라의 손을 잡고 저만치 걸어간다. 점점 리라도 좀비로 변했지만 아름다움은 여전했다. 제 자리에서 발버둥치며 들리지 않는 고함을 지를 뿐이었다. 


나는 "안 돼" 소리를 지르며 깨어났다. 개꿈이다. 내가 리라를 꿈속에서 본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좋지 않은 모습으로 보았다. 리라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어렴풋이 짐작되는 청년에게도 미안했다. 둘 사이에 끼어들고 싶어하는 내 마음이 투영된 꿈인가 보다 했다. 내 무의식이 말해주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었다. 확실히 깨꿈인 것은 맞다. 


아직 한밤 중이다. 다시 잠들지 않기 위해 단말기에 저장된 테트리스 게임을 했다. 차곡차곡 쌓이는 블록을 맞추는 데 집중을 한다. 점점 빨리 떨어지는 블록은 내 정신을 모조리 빼앗았다. 잠시 단말기를 끄고 창문을 통해 밤 하늘을 바라본다. 먹구름으로 칠흑같이 어둡다. 이런 으스스한 날씨에는 무서운 얘기가 최고다. 다시 단말기를 들고 검색했다. 좀비와 인간의 사랑을 다룬 옛 지구의 동화를 읽었다.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스스로 잠이 들었다. 


아침에 다시 눈을 떴다. 하늘은 맑었다. 상쾌한 아침이라고 생각하며 가만히 누워있는데, 단말기로 연락이 왔다. 발신자는 수전 연구원이었다. 

"수전인데요. 안녕히 주무셨나요?"

"예, 잘 잤습니다."

"한누리, 제가 곰의 혈액을 분석해보았는데 그곳에서 풍토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의 것과 비슷한 분자구조를 가진 바이러스를 발견했어요. 자세한 내용은 만나서 얘기해요. 용병 휴게소로 오세요."

"알겠습니다. 곧 뵐께요."


오늘은 내가 먼저 스파링의 방문을 두드렸다. 물론 스파링은 잠을 자고 있지 않았다. 대답이 없길래 문을 열자 정좌하며 명상에 잠긴 스파링을 볼 수 있었다. 


스파링과 내가 휴게소에 도착하자 사모아 형사와 수전 연구원은 이미 테이블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모처럼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군. 부지런해서 나쁠 것은 없다. 수전 연구원은 사모아 형사에게 단말기의 영상을 보이며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 내가 다다가며 말했다. 

"수전 박사님, 곰 혈액에 나타난 바이러스의 분자구조에 관한 영상인가요?"

"잘 맞추쳤군요. 생물학에도 조예가 깊으시네요. 풍토병 바이러스의 핵심적인 특성을 그대로 갖고 있어요. 누가 보더라도 풍토병 바이러스의 돌연변이라고 할 거예요."

"그 말은 곰들이 집단행동을 한 것이 바이러스 때문이라는 것이 되겠군요."

"그렇게 짐작할 수도 있겠죠."

"수전 박사님, 혹시 이 알약이 곰에서 추출된 풍토병 바이러스의 돌연변이에도 효과가 있는지 검토해주시겠어요."

"그렇게 할 게요."

"분석은 언제까지 완료하실 수 있나요?"

"알약을 풍토병 바이러스가 들어 있는 혈액에 용해시켜 보면 바로 알 수 있어요. 얼마 걸리지 않아요. 제가 차량에 두고 온 분석장치를 이곳으로 가져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수전 박사는 승합차로 가서 분석장치를 갖고 왔다.

"자 이것은 알약성분을 용해할 수 있는 액체입니다. 자 알약이 용해되었죠. 이것을 곰에서 추출한 혈액에 넣어보겠습니다." 

수전 박사는 알약성분이 용해된 액체를 패트리 접시에 담긴 혈액에 넣었다. 그리고는 재빨리 분석장치의 홈에 패트리 접시를 끼웠다. 

"자, 이제 패트리 접시에 담긴 혈액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영상으로 볼까요?"

수전 박사는 단말기를 조작하여 홀로그램 영상이 투사되게 하였다. 홀로그램 영상에서는 풍토병 바이러스의 돌연변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여주었다. 대부분의 바이러스는 약 성분에 반응하지 않고 멀쩡했지만 일부는 그 분자구조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수전 박사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특이하군요. 약이 풍토병 바이러스와 그 돌연변이에서 각각 다르게 반응하는군요. 이 영상을 보실까요?"

수전이 다른 영상을 기존 영상의 왼쪽에 보여주었는데, 거기에서는 모든 바이러스가 박멸되고 있었다. 

"왼쪽 영상은 알약이 일반 풍토병 바이러스에 반응하는 것이죠. 풍토병 바이러스는 주로 임종을 앞둔 쇠약한 노인한테만 정신착란 증세를 일으키는 바이러스입니다."

수전은 오른쪽 영상을 보여주며 말한다. 

"오른쪽은 알약이 돌연변이 바이러스에 반응하는 모습입니다. 돌연변이 바이러스와 일반적인 풍토병 바이러스를 비교해보세요. 바이러스의 돌기부분이 보이시죠? 풍토병 바이러스에서는 돌기부분이 혈액의 혈소판과 반응하지 않은 채로 있어요. 하지만 돌연변이에서는 대부분의 바이러스가 혈소판과 반응하는군요."

나는 오른쪽 영상에서 혈소판과 이미 반응한 바이러스가 모두 무사한 것을 보았다. 하지만 혈소판과 반응하지 않은 바이러스는 약에 반응을 해서 파괴되고 있다. 일반적인 풍토병 바이러스는 전부가 혈소판과 반응하지 않고 약 성분과 반응해서 파괴되었다. 나는 영상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 수전 연구원은 말을 계속 이었다. 

"여러분, 두 영상을 비교하시면 아시겠지요? 이 알약은 곰의 혈액에 있는 바이러스에 대해서 일부만 효과가 있어요."

나는 궁금한 것을 물었다.

"수전 박사님, 곰 혈액에 있는 돌연변이 바이러스는 어떤 경우에 혈소판과 반응하지요? 혈소판과 반응하지 않게 하는 방법은 뭘까요?"

"한누리, 돌연변이 바이러스는 서서히 혈소판과 반응을 하는 것 같아요. 그것을 막는 방법은 신속하게 약물을 투여해서 파괴시키는 것이죠."

"박사님, 돌연변이 바이러스가 온몸의 혈소판과 결합하는 데는 얼마나 걸릴까요?"

"한누리, 곰의 경우에는 정확한 기간을 알 수 없지만 대략 며칠은 걸렸을 거에요. 하지만 인간의 혈액량이라면 하루도 채 걸리지 않겠지요."

"박사님,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 때 바로 알약을 먹는다면 효과가 있겠군요?"

"그렇지요. 하지만 뒤늦게 약을 복용한다면 상당한 바이러스가 혈소판과 결합했기 때문에 약 효과가 없을 겁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바이러스에 감염된 증상이 나타나겠지요?"

"박사님, 돌연변이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어떤 증상이 나타나나요? 곰의 경우에는 곰 자신의 본능이 아니라 외부적인 조정에 의해 집단행동을 하게 된 것으로 보이죠?  감염증상이란 정신지배를 당하게 된다는 것인가요?"

"한누리, 이런 자료만을 갖고 그렇게 추정할 수는 없어요. 그런 추정은 제가 과학적으로 내린 것이 아니라 한누리 당신의 상상력으로 추론하신 것이지 않나요?" 

"저는 바이러스가 곰의 뇌를 통제하는 상황에서는 지성체를 감염시킨 바이러스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해요. 아직은 증거가 없지만 그렇게 가정을 한다면 오크 장로의 말을 설명할 수 있게 되거든요."

"그 말은 바이러스끼리 통신이 가능하다는 말인가요? 바이러스가 어떤 지성을 갖고 판단을 내리며 또 자신들끼리 의사소통을 한다는 건가요? 믿기 어려운 가설이군요."

"아직까지는 제 주장을 증명할 수 없네요. 결론은 충분히 조사를 한 뒤에 내려도 늦지 않겠지요. 우리는 아직까지 돌연변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지성체를 관찰하지 못했으니까요."

이 때 사모아 형사가 끼어들었다.

"일단 조사를 합시다. 증거가 충분하지 않으면 공리공론에 불과할 테니."


우리는 타클라호 숲의 곰 출현 지역으로 가서 단말기에 저장된 어제의 이동경로와 겹치지 않도록 움직였다. 이번에는 좀더 깊숙히 들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