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에 감염된 오크 장로가 말을 마치자 늑대떼가 몰려올 때보다 더 강력한 땅울림이 느껴졌다. 어둠으로 깔린 숲을 더욱 검게 하는 그림자 무리가 밀려온다. 장로가 말한 곰 전사들이 몰려오고 있는 것이다. 곰떼는 대략 60마리가 넘어 보였다. 3-400마리의 늑대와 60마리의 곰이 싸우면 어디가 이길까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다. 


사모아 형사는 곰떼와 늑대떼가 싸우기 시작하는 장면을 목도하자 이곳에서의 전투가 장기화될 것으로 본 모양이다.
"수전 박사, 용병 사무소에 다시 연락을 해서 집결지를 우리가 서 있는 이곳으로 재설정하세요. 여기 전투가 계속될 것 같군요."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이곳으로 와달라고 하죠."


수전 박사는 연락을 취했다. 과연 이른 새벽녘에 긴급한 소집에 응해 이곳으로 뛰어올 용병이 얼마나 될까? 용병 보상을 50나노로 올렸으니까 웬만한 용병이라면 돈 욕심 때문이라도 이곳으로 올 것이 분명하지만 지금 상황으로서는 얼마나 빨리 올 것인지가 문제였다.


전투에 곰떼가 합류함과 동시에 늑대떼를 먼저 보낸 절벽 아래 분지 마을의 오크도 무리가 뒤따라왔다. 오크 무리는 방패와 창을 들고 있었다. 고대 전투의 팔랑크스 대형을 연상시키며 거북의 등껍질처럼 밀집된 방패 사이로 긴 방패가 삐죽 나와 있었다. 방어에 치중하는 전투대형이었다. 아무래도 바이러스에 감염된 적군의 오크 병사나 곰에게 몸을 물리게 된다면 아군이 적군으로 돌변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보니 방어에 더욱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도 하다. 반면 바이러스에 감염된 오크는 방진형태를 취하지 않고 저돌적으로 공격을 감행하는 것이다. 동화에서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된 생명체는 쉽게 죽지 않았다. 반면 곰 사냥 경험으로 느꼈듯 돌연변이 바이러스에 감영된 생명체는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엄청난 스테미너로 공격을 하지만 체력적으로 더 끈질긴 면모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이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이다.  


 한 동안 우리 일행은 양측 간에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우리야 기껏 4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전황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니었으며 좀 전까지만 해도 적에게 일방적으로 쫓기던 상황이라 미처 반격할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곰떼가 끼어든 후로 양측의 전력은 막상막하였기 때문에 교착상태가 지속되었다. 

"사모아 형사님, 전투 양상을 보니까 곰의 전투력이 늑대의 전투력보다 훨씬 강해요. 더구나 곰이 무리를 지어 합동행동을 하면 늑대가 거의 피해를 입히지 못한 채 체력이 고갈될 수 있겠어요. 이 숲에 서식하는 늑대만이 고유한 능력을 가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늑대가 모두 죽는다면 나중에라도 치료제를 개발하는 데 지장이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4명에 불과하지만 전투에 참여해서 늑대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좋겠어요." 

"한누리, 자네 말이 맞는 것 같군. 하지만 우리 중에라도 놈의 공격을 받아 물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상황이 매우 안 좋게 변할 수 있겠지. 신중하는 것이 좋을 거야. 또 우리가 전장에 끼어들 때 늑대떼나 아군 오크들이 우리를 적으로 알고 공격하지 않도록 미리 오크 장로에게 알려주는 것이 좋겠군."

"우리쪽 오크 장로에게는 스파링이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 좋겠는데....... 스파링, 할 수 있겠어?"

"한누리, 오크 부대는 이미 우리를 알고 있을 거야. 지난 번에 만난 적이 있었잖아. 우리가 바이러스 감염집단에게 쫓긴다는 것을 알고 우리는 도와 주려고 온 것이 분명하잖아! 또 늑대떼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곰과 오크만 공격할 테고. 우리가 지금 공격해도 문제를 없을 거야."

사모아 형사는 결심을 하듯 말한다. 

"그래, 후퇴는 그만 하고 이제 여기에서 반격을 시도할까? 우리는 전투진형의 측면에서 곰 무리를 공격하는 것이 좋겠군."

나는 등에 업고 있던 오크 보초병을 내려놓았다. 등에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싸울 수는 없었으니까.
"수전 박사님, 오크 보초병이 마취에서 깨어나려면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았죠?"

"적어도 2시간 이상은 걸릴 거예요."

우리가 전투를 거의 종료할 때까지는 깨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양측의 투쟁이 이루어지는 전선쪽으로 접근해갔다.


우리 일행이 후퇴에서 공격으로 전환하자 늑대와 싸우던 카라쿠롬은 우리의 태세 변화를 알아차렸다. 늑대떼의 근접공격 탓에 활을 내려놓고 양손에 단검을 하나씩 들고 늑대와 싸우고 있던 카라쿠롬은 다시 뒤로 빠져 우리를 향해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스파링이 왼손에 방패를 들고 화살을 막아냈기 때문에 우리가 전투현장에 접근하는 데는 어려움은 없었다. 곰은 각각 서너 마리의 늑대와 싸우고 있었으므로 우리 일행의 접근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우리는 맨 외곽에 있는 곰부터 한 마리씩 처리하기 시작했다. 4명이 곰 한 마리를 처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적 진영의 외곽을 무너뜨리면 시간이 흐를수록 전투는 우리 진영에 유리하게 흘러갈 참이었다. 적의 지휘관인 오크 장로는 이러한 상황의 변화를 파악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리가 곰을 한 마리씩 처리하기를 5번 반복하자 늑대를 상대하던 곰들이 우리 일행에게 덤벼들기 시작했다. 우리가 맞설 수 있는 곰은 대략 4마리 정도있는데 그 숫자를 넘어서는 곰이 몰려들자 우리는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상대편 지휘관은 전반적인 전황을 지휘하는 한편 정신 교감 에너지를 주위에 계속 분출하여 주변 수풀에서 잠자고 있던 곰을 한 두 마리씩 싸움터로 불러모으고 있었다. 늑대떼와 우리 일행이 곰을 열 마리 이상 죽였을 테지만 전체적으로 곰의 숫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반면, 우리측에 붙어 싸우는 늑대의 숫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감소하고 있다. 


숲 외곽 방향으로부터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누리, 스파링! 우리가 가네! 조금만 참아!"


우렁찬 목소리의 주인공은 도깨비 준코였다. 준코가 이끌고온 용병은 도깨비들이었다. 도깨비 준코와 마코 형제는 스파링과 내가 무슨 일을 하는 줄 알고 있었기에 용병 사무실의 요청을 받자마자 우리의 신변에 위험이 닥친 것으로 알고 다른 용병들보다 먼저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나는 도깨비 형제와 다른 용병들을 보자 초조했던 마음이 한결 풀렸다.

"준코, 고마워요. 모두 소도시 인근에서 함께 일하는 용병들이신가요?"

"그렇다네. 이들은 모두 용병 일과 농장 일을 겸하고 있어."


도깨비 용병들의 무기는 강력한 방패와 창이었다. 준코와 마코가 일하는 소도시 인근 마을의 농장에는 주로 늑대가 출현하므로 곰 사냥에는 익숙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들 용병을 주업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래도 공격보다는 방어에 치중하는 무장을 갖추었다. 준코와 마코 형제와 함께 온 도깨비 용병은 모두 9명이었다. 

"준코, 당신들은 주로 늑대를 상대했고 곰을 상대하는 것은 처음이지 않나요?"

"한누리, 걱정하지 말게. 우리가 한 몸처럼 똘똘 뭉쳐서 방어와 공격을 하면 곰떼도 문제 없다네. 우리가 싸우는 모습을 잘 지켜보게."


도깨비 용병단은 사각형의 방패끼리 틈이 없게 맞이었다. 영차 얏 하는 소리와 함께 방패를 움직이며 긴 창으로 곰의 옆구리를 찔렀다. 곰은 성이 나서 앞발을 휘둘렀지만 단단하게 이어진 방패에 어떠한 틈새로 만들어내지 못했다. 도깨비 용병들의 창은 날카로웠고 곰의 옆구리에 깊숙히 박혔다. 창이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해도 그것에 꾸준히 찔리다 보면 출혈이 누적되어 곰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도깨비 용병단은 한 발자국에 앞으로 나아가며 끊임없이 창을 찔러댔다. 우리측 오크도 창과 방패를 활용하였지만, 도깨비 용병단은 그보다 훨씬 더 강력한 전력을 과시했다. 도깨비는 휴먼이나 오크보다 2배나 강력한 힘을 자랑하기 때문에 찔러대는 창이 더 무겁고 길었다. 


도깨비 용병단의 합류로 곰의 숫자는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자고 있다가 전투에 참여하던 곰이 점점 줄어드는 반면, 죽어가는 곰은 늘어나고 있다. 전황이 점차 우리 측에 유리해졌다.


도깨비 용병단이 도착한 후 10여분이 지나자 숲의 외곽쪽부터 한 두 명씩 다른 용병들이 들어왔다. 이제 승리의 무게추는 확실하게 우리에게로 기울었다. 


이제는 곰을 모두 죽인 다음 감염된 오크 부대와 오크 장로를 제압해서 수용소에 감금하면 될 것이다. 치료제가 개발되면 사태는 종결된다. 내 가슴은 문제 해결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이 때 전투를 한참 지휘하는 상대편 오크 장로는 특이한 비명소리를 질렀다. 감염된 오크와 곰은 일제히 뒤를 돌아 달아나기 시작했다. 스파링이 말했다.

"한누리, 감염돈 오크 장로는 몇 백 미터 앞서서 도망가고 있어."

"아까 도깨비 용병단이 합류해서 기세 좋게 공격을 시작하면서부터 스스로 판단하기를 패색이 짙다고 봤나 보군. 벌써 몇 분 전에 뒤꽁무니를 뺐어."


늑대떼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무리를 쫓아서 공격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멈추었다. 절벽 아래 분지의 마을에서 온 오크 부대도 마찬가지였다. 오크 장로는 우리 일행 쪽으로 다가왔다.

"스파링, 왜 감염된 무리를 뒤쫓아가지 않는지 자네가 오크 장로에게 물어보게."

아무래도 오크 스파링이 물어보는 것이 나을 듯 했다. 장로는 목소리가 들릴 만한 거리까지 와서는 멈추었다.

"장로님, 왜 감염된 오크와 곰을 쫓아가지 않나요?"

"오크 형제여, 스파링이라고 했던가? 적의 마을은 한 곳뿐이 아니라네. 우리가 알고 있는 것만 해도 세 군데 이상이지. 또 적은 지금 전투에 참여한 곰의 숫자보다 훨씬 더 많은 곰을 통제하고 있다네."

사모아 형사가 다가왔다.

"장로님, 무리하게 추격했다가는 우리가 오히려 당할 수 있다는 말씀이군요?"

"그렇다네."

"장로님, 거주하시는 마을은 뭐라고 부르나요?"

"우리는 사툴 마을에서 살고 있네."

"장로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감염자 집단의 마을이 여러 개인데 아직까지 대대적으로 모여서 사툴 마을을 없애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 이유를 우리도 알 수 없네. 짐작하건대, 감염자 집단은 하나의 지도자가 완벽하게 장악한 상태가 아니네. 감염된 마을마다 1명씩 장로가 있지. 하지만 감염된 모든 장로가 일치된 의견을 갖지는 않았던 모양일세."

"감염된 장로들이 일치된 의견을 갖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말씀인가요?"

"감염된 장로들은 독자적인 판단능력이 있다네. 물론 감염된 각 개체가 어느 정도 독자적으로 생존활동을 할 수 있지. 하지만 교감 능력으로 통제되지 않으면 단순한 정신착란에 가까운 상태에 머무른다네. 감염된 장로는 교감 능력으로 무리를 통제할 수 있고 독자적인 판단도 할 수 있어. 장로들끼리 합의해서 개체성을 완전히 포기하고 하나의 지배자에게 절대복종할 수도 있겠지. 장기적으로 보아 이것은 매우 비효율적인 의사결정 구조라네. 그래서 아직까지 각 장로가 개체성을 포기하지 않았다네. 또 장로들은 이 행성에 대한 정복작전에 관해서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