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학교 본관의 복도를 걸어가고 있다. 

마지막 수업이 끝난 지 조금 긴 시간이 지난 지금 대부분의 교실은 잠긴 채 텅 비어 있었다. 아무도 없이 조용한 복도에는 터벅거리는 나의 발소리만이 울렸다. 혼자만 있는 탓인지 평소보다 조금 더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복도의 서쪽에 나란히 달린 큰 창문 밖에서 보이는 정원에는 이제 막 나무에서 피어나기 시작한 초록색 잎들이 보였다. 오후인 지금 태양은 서쪽으로 기울어 복도 창문을 통해 햇빛을 가득히 비추고 있었다.

그리 길지 않은 복도를 걸어가 다다른 끝에는 구교사로 향하는 계단이 있었다. 나는 그 계단을 천천히 한 걸음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계단의 층계참에도 복도에서 봤던 것과 같은 큰 창문이 달려 있었다. 나는 층계참에 올라 문득 창 밖의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창 밖에는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떠 있었다. 오후인 지금 태양은 서쪽으로 기울어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층계참의 창문으로 햇빛이 비쳐 들어오지는 않았다. 창문 밖으로는 맑게 갠 푸른 하늘이 보였다.

“참 분위기가 밝은 학교구나.”

나는 작은 목소리로 조용히 중얼거리고선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내가 지금까지 이 화문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느낀 것은 이 학교에 ‘어두운’ 분위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학생들 대다수는 모두 활기차고 밝은 표정을 하고 있으며 교사들 또한 수업에 매우 충실하며 아이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 것이라는 열정에 차 있었다.

이 학교가 이렇게나 밝은 분위기를 띄는 것은 성적이 뛰어난 아이들만 입학할 수 있는 비평준화 사립 학교이기에 질이 좋지 않은 학생들이 없기 때문이라고 나는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

확실히 학교 안에서는 누가 누구를 괴롭히거나 따돌리는 행위는 보이지 않았다. 수업 시간에 떠드는 행위로 수업 중의 분위기가 망쳐지는 일도 없었으며 그나마 점심 시간과 쉬는 시간에는 평소보다 조금 소란스러울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째서인지 이 학교의 밝은 분위기와 맞지 않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구교사의 서고에는 이미 죽은 소녀의 유령이 있다’ 는 것이다.

그 소문에 의하면 옛날 이 학교 문예부의 부실로 구관의 서고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 소녀는 문예부의 부원이었는데, 어느 날인가 작품을 생각대로 잘 창작할 수 없는 슬럼프가 와 스스로 비관에 빠져 극단적인 선택을 해 버렸다고 한다. 소녀는 지금까지도 서고에 남아 학생들을 몰래 지켜보며 방과 후에 서고에 남은 아이들을 죽여 버리고 주변 사람들의 아이들에 대한 기억도 지워 버린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구교사의 서고에는 옛날 문예부 부원들이 쓴 소설이 숨겨져 있는데, 그 소설을 읽으면 저주에 걸려 죽어 버린다고도 했다. 

소문은 같은 반 다른 아이들의 대화에서 어쩌다가 듣게 되었다. 아이들의 반응은 ‘무섭다’, ‘사실이 아닐 것이다’ 같은 평범한 반응이었다.

나 또한 이 소문을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가볍게 넘기려 했다. 보통의 소문이 그렇듯이 대개 정보가 왜곡되어 있거나 사실이 아닐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소문은 나의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아, 구교사를 지나갈 일이 있을 때마다 계속 서고와 그 소문이 신경쓰여 미칠 지경이었다. 그 덕에 입학하지 얼마 되지 않아 들어가 본 적도 없는 구교사의 서고에 더욱 거리를 두게 되었고, 독서를 할 때에는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데다 흉흉한 소문이 없는 별관에 있는 도서관만 사용하게 되었다.

그 소문을 잊으려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려 해도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학교에 가는 길에도, 수업 중에도, 쉬는 시간에도, 책을 읽을 때에도, 수업이 끝나 집에 돌아가는 길에도, 학원에서도, 밥을 먹을 때에도, 심지어 잠들기 전까지도 그 소문이 계속해서 생각나는 것이 너무나도 싫었다. 마침내 가장 좋아하는 취미인 독서를 할 때 글이 제대로 읽히지 않는 지경까지 다다르자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상담하려 해 봤지만 부모님은 일 때문에 항상 바빴고, 반에는 상담을 요청할 정도로 친한 아이가 없어 항상 힘겹고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스스로의 힘만으로 해결해야만 했던 나는 이 소문을 누군가에게 말하지도 못한 채로 혼자서 고민해야만 했다. 

결국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이 기이한 소문에 대한 기억을 지워 버리기 위해 내가 직접 소문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를 스스로 확인해 봐야겠다고 결정했다.

분명 이 기억이 지워지지 않는 것은 ‘유령 소녀가 방과 후에 서고에 남은 아이들을 죽여 버린다’는 것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과 공포심에서 나온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서고에 들어가 유령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면 이 소문은 완벽한 거짓이 되고, 사실이 아니게 된다. 그럼 이제 더 이상 거짓이라고 직접 확인한 소문에 신경을 쓸 필요도 없으며 구교사를 지날 때마다 그 소문을 떠올리는 일도 없어질 것이다.

나는 계단을 계속해서 오르고 올라 마침내 최상층인 5층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복도를 걸어갔다.

“그런 소문이 사실일 리가 없어. 분명 그냥 소문일 거야..”

나는 스스로를 안심시키듯 조용히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걸어간 끝에 마침내 복도의 정중앙 서쪽 방향에 있는 서고의 문 앞에 멈추어 섰다.

“유령 소녀가 정말로 서고에 있는 게 사실이라면, 최소한 아이들을 죽인다는 내용은 거짓이었으면 좋겠다.”

의미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선, 나는 용기를 내어 서고의 문을 열었다.



서고의 문은 소리 없이 아주 조용히 열렸다.

나는 서고 안으로 들어가 주변을 살펴 보았다. 서고 안에는 선생님도 학생도 없이 나 혼자였다.

주변에 소설, 시집, 만화 등 여러 종류의 책들이 꽂힌 길고 넓은 책장 여러 개가 있었다. 전부 십진 분류법을 철저히 따라 한 서가 안에 있는 책장 하나에는 같은 종류의 책들이 꽂혀 있었다. 책장은 먼지가 수북히 쌓이거나 거미줄이 쳐져 있는 공포 영화 같은 분위기와는 거리가 먼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서고 곳곳에는 책을 읽기 위해 설치된 둥근 책상과 의자 여러 개가 놓여 있었다. 책상에는 낙서나 칼로 그은 자국 없이 깔끔했고, 의자 또한 방금 전에 본 책장과 같이 공포 영화와는 거리가 먼 깔끔한 모습이었다.

서고에 놓인 가구는 책장과 의자, 책상이 전부인 것 같아 나는 서고의 내부 인테리어를 둘러 보기 시작했다.

서고의 벽에는 상아색의 벽지가 붙여져 있었다. 약간의 광택이 나는 전통적인 연꽃 문양이 새겨져 있어 고풍스러운 느낌을 풍겼다. 벽지가 붙은 지 시간이 오래되어 약간 때가 타기는 했지만 벽지가 뜯어져 있거나, 낙서가 되어 있거나 하는 공포 영화와는 거리가 멀게 깔끔한 모습이었다. 문에서 들어왔을 때 오른쪽에 보이는 벽에는 시계 하나가 걸려 있었다. 이것 또한 오래되기는 했지만 고장나 있지는 않았으며, 스마트폰에 출력되는 것과 같은 정확한 시각을 표시하고 있었다.

서고의 바닥은 쓰레기 하나 없이 깔끔했다. 마룻바닥은 단단한 박달나무 원목으로 틈틈히 짜여져 있었고 이음새가 벌어진 흔적이나 어딘가가 파인 흔적은 하나도 없었다. 공포 영화처럼 먼지가 수북히 쌓여 걸어다닐 때마다 발자국이 남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들어온 문의 맞은편에 있는 벽을 바라보았다.

그 벽은 벽 전체가 창문으로 되어 있었다. 천장과 만나는 맨 위부터 마루와 만나는 맨 아래까지 전부 흠집 하나 없는 깨끗한 유리로 되어 있었고, 위쪽 절반은 앞으로 열 수 있는 형태의 창문이었다.

창문은 서쪽을 향해 있어 오후의 햇빛이 비쳐 들어와 서고의 가구들 밑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떠 있는 맑은 하늘과 밝은 햇빛이 서고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의 서고에 유령이 있다고?”

말도 안 돼.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는 ‘유령이 있는 서고’ 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어둡고 음침한 분위기의 공간을 상상했었다. 바닥과 가구들에는 먼지가 가득하며 거미줄이 쳐져 있고 벽지가 찢어져 있으며 낙서가 새겨져 있는 벽의 모습과 깨져 있는 창문 같은 공포 영화에서 나올 법한 이미지였다.

하지만 이 서고는 내가 상상한 분위기와는 완전히 정반대였다. 가구들은 전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먼지가 쌓이거나 거미줄이 처진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으며 벽지 또한 낙서 따위 전혀 없는 깔끔한 모습에 창문은 흠집 없는 투명에 가까운 빛의 유리로 되어 있어 밝은 햇빛이 서고 안에 가득 들어오고 있었다.

이렇게나 밝은 분위기의 공간 속에 음침한 존재인 유령이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했다.

“게다가, 아직 난 죽지 않고 살아 있잖아.”

분명 내가 들은 소문대로라면 서고의 유령 소녀는 방과 후에 서고에 있는 아이들을 죽여 버린다고 했었다.

나는 교복 바지의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은 오후 5시 25분. 방과 후의 서고에 혼자 남아 있는 나는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내가 잊고 있었던 아이들의 대화가 생각났다.

‘서고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유령이 모습을 드러내는 건 정확히 오후 5시 30분인데 이 전에 서고를 나가거나, 유령을 불러내서 소중한 무언가를 바치면 살아남을 수 있어.’

‘유령을 어떻게 불러내는데?’

‘불러내는 방법은 우선 박수를 3번 치고, “서아 양, 서아 양,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예요.” 라고 말하면 돼.

그리고 옛날 문에부 부원들의 소설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 것도 그 소녀 뿐이라고 했었나?’

나는 유령이 나올 시간은 아직 되지 않았고, 유령을 불러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렸다.

분명 이 서고는 겉으로 보았을 때 유령 같은 건 없어 보이는 밝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직접 스스로 확인해 보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내가 이 서고에 온 이유도 유령이 있는지, 없는지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눈으로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야. 겉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이 가장 현명한 사람이니까.’

오래 전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을 나는 천천히 떠올렸다. 언제 들었는지도 누가 말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이 말 하나를 계속해서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이제 곧 유령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이 몰려와 전신에 묘한 감각이 들었다.

 

나는 유령을 불러내기 위해 손뼉을 세 번 쳤다. 짝, 짝, 짝 하고 손뼉이 세 번 부딪히는 소리가 서고 안에 울려 퍼졌다.

“서아 양, 서아 양,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예요.”

유령을 불러내는 나의 목소리가 서고 안에 울렸다. 

그 말을 끝으로 서고 안에서는 몇십 초 동안 침묵이 계속되었다. 내가 들을 수 있는 소리는 내 심장이 뛰는 소리와 서고의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이 똑딱거리는 소리뿐이었다.

“네, 누구신가요?”

오랫동안의 침묵을 깨트린 것은 어떤 소녀의 목소리였다.

동시에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점점 나에게 가까워지더니 마침내 내 앞에 다다른 후 멈추었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긴장감과 공포심, 동시에 신비로움이 뒤섞인 꿈을 꾸는 듯한 묘한 감각이 온 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내 눈 앞에는 살짝 미소를 띈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소녀가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네. 너는 누구야?”

소녀는 나에게 그렇게 말하고선 살짝 웃었다. 태양이 아까보다 더 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나는... 서유현.”

소녀의 말을 듣고 나는 마치 기묘한 마법에 걸린 것처럼 순순히 내 이름을 털어놓았다.

“나는 최서아. 너도 이 학교에 다니는 거야?” 

상냥하면서도 밝은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최서아’ 라고 밝힌 소녀는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소녀는 허리보다 약간 위까지 내려올 정도의 긴 흑발을 지니고 있었다. 남색 체크 무늬 형태의 원피스와 블라우스로 이루어진 형태의 교복을 입고 있었고 무릎까지 올라오는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또한 왼쪽 귀에는 마치 책갈피 같은 디자인의 귀걸이를 걸고 있었고, 작은 붉은색 국화 장식이 달린 머리핀을 꽂고 있었다. 

“응.. 근데, 네가 혹시 그 유령이야?”

내가 그 질문을 던진 것은 소녀가 유령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살아 있는 인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녀의 긴 머리카락에는 윤기가 흘렀고 피부는 보통 사람처럼 혈기가 돌고 있는 색을 하고 있었으며 흑색의 두 눈동자는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거라면, 혹시 이 서고의 소문을 말하는 거야?”

소녀 자신도 그 소문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맞아. 방과 후에 서고에 나오는 유령 소녀는 나를 말하는 거야.   혹시 못 믿겠으면 확인해 볼래?”

“어떻게?”

“간단해. 내 손을 잡아 보면 돼.”

소녀는 그렇게 말하고 손을 내 앞으로 뻗었다. 

나는 의아해 하면서도 소녀의 말에 따라 손을 뻗어 잡으려 했다. 

이 방법으로 소녀가 유령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을지는 몰랐지만 딱히 유령에 대해 아는 것도 없는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소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내 손이 소녀의 손에 닿으려 하는 순간 불가사의한 광경이 펼쳐졌다.

나의 손은 소녀의 손에 닿지 않고 그대로 소녀의 손을 통과해 버렸다. 소녀의 몸은 홀로그램 영상처럼 눈에는 보이지만 직접 만질 수 없는 형태를 하고 있었다. 

“이제 내가 유령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겠어?”

“확실히... 네가 인간은 아닌 것 같아.”

나는 속으로 몹시 놀라며 다시 소녀에게서 손을 뗐다. 소녀는 다시 자신의 손을 원래 자리로 돌려 놓았다.

“난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거든. 보통은 죽은 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을 만지는 건 불가능해.”

“네가 유령이라는 건 확실히 알았어. 그럼 너는 이제 날 죽일 거야?”

분명 소문대로라면 유령 소녀는 방과 후에 서고에 있는 아이들을 죽여 버린다고 했었다. 나는 5시 30분이 되기 전에 소녀를 불러냈기에 소문이 사실이라면 죽을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질문을 던졌다. 

“죽인다...니?”

소녀는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잠시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금새 이해한 듯 미소 지었다.

“나는 아무도 안 죽여. 기억을 지우는 나쁜 짓도 한 적 없고.” 

그 말을 듣자 나는 휴우, 하고 안도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진짜로 죽어 버리면 어쩌나 했는데 소녀가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니 정말 다행이었다.

“어쩌다가 내가 아이들을 죽인다는 소문이 퍼진 건지 잘 모르겠어. 유령이 되어서 누군가를 해친 적은 없는데 말이야.”

“방과 후에 누군가가 네 모습을 보고 놀라서 도망친 후에 그런 이야기가 생긴 건 아니야?”

나는 나름대로 의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보았다. 확실히 저런 디자인의 교복을 입고 다니는 학생은 이젠 이 학교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도, 날 불러내려는 사람도 흔치 않아. 오랫동안 유령인 내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었어.

네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말하고선 소녀는 나를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나는 그 표정이 약간 부담스러워 시선을 피하고선 말을 이었다.

“좋아. 어떻게 그런 소문이 퍼진 건지는 일단 논외로 하고.. 사람을 죽인다는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서 다행이네. 그럼 널 불러내면 뭔가 소중한 걸 가져간다는 건 사실이야?”

“무언가를 가져가거나 하지는 않지만... 네가 원하는 소원을 대가 없이 딱 한 가지만 들어줄 수 있어!”

“소원을 들어준다고?”

내가 들었던 소문이 유령이 있다는 것 빼고는 완벽히 왜곡되었다는 것을 다시금 실감하게 되었다. 무서운 짓을 당할까 봐 나름 각오하고 왔는데 사실을 알 때마다 점점 김이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응! 내가 가능한 선까지는 무엇이든 들어줄 수 있어. 너는 무엇을 원해?”

소녀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내 소원은...”

나는 눈을 감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행운이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와 무슨 소원을 빌면 좋을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무엇을 빌면 좋을까. 시험 성적을 올려 달라고 할까. 아니면 최신 스마트폰을 얻게 해 달라고 할까.

마침내 몇십 초 동안 고민한 끝에 나는 빌 소원의 내용을 정하고 눈을 떴다.

“하아암... 소원은 다 정했어?”

소녀는 따분한 듯 입을 벌린 채 눈을 반쯤 감고 하품을 하고 있었다.

“응. 정했어.”

“좋아! 너는 무슨 소원을 빌 거야?”

나의 대답을 듣자마자 소녀는 방금 전의 따분함이 거짓말처럼 날아간 듯 눈을 빛내며 빌 소원을 궁금해하고 있었다.

참 변덕스러운 사람이구나. 나는 속으로 생각하고선 대답을 했다.

“내 소원은...

친구를 사귀고 싶어.”

“친구...”

소녀는 잠시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좋아. 네 소원을 이루어 줄게!”

“고마워. 소원을 이룰 때는 어떻게 해? 특별한 도구 같은 걸 쓰는 거야?”

나는 원하는 것을 적기만 하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노트나, 사람의 마음을 조작할 수 있는 마법의 수정 구술 같은 판타지 같은 물건을 상상했다.

“으음... 소원을 이루려면,”

소녀는 잠시 서가로 들어가 책장에서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내 앞으로 돌아와선,

“이걸 쓰면 돼.”

소녀는 자신이 찾은 무언가를 내 앞으로 내밀었다.



소녀가 나에게 내민 것은 ‘친구를 사귀는 100가지 방법’ 이라는 제목이 적힌 책 하나였다.                                                                                         

“.......”

나는 당혹감과 실망스러움이 혼재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내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던 탓인지 소녀는 살짝 미안하다는 듯이 웃었다.

“그걸로 만족해.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힘은 그만큼 대가도 무거워지거든. 그러니까 딱 그 정도가 안전해.”

그렇구나.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애초에 이 소문은 완벽한 거짓인 데다가 소녀는 문예부 부원이었으니 어쩌면 이런 방식으로 해결해 주는 게 당연한 수순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의 제목을 보았을 때 어디에선가 들어본 듯한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 묘한 감각의 정체를 알아내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잠깐... 근데 나 이 책 이미 읽었어.”

“응?”

소녀는 당황한 듯한 얼굴을 하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전에 읽어서 이미 내용은 알고 있어.”

나는 이 책을 이미 중학교 때 읽어 보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책의 내용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첫 번째, 밝은 얼굴로 인사하기. 두 번째,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걸기. 세 번째,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대하기. 네 번째, 말할 때는 항상 신중하게...”

나는 책의 페이지를 하나씩 넘겨 가며 내가 기억하고 있는 책의 내용들을 점점 선명하게 떠올려 가기 시작했다.

“98번째, 자신의 특기를 살리기. 99번째,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기. 100번째, 이 책의 내용을 명심하기.”

나는 마지막 100번째 방법까지 전부 아는 내용임을 확인하고 책을 덮었다. 그리고 담담하게 소녀에게 말했다. 

“이 책의 내용은 전부 기억하고 있어. 그리고 직접 책 내용을 실행해 봤고.”

“그, 그러면...”

소녀는 여전히 당황한 채 살아 있지도 않으면서 진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 말의 의미를 이미 눈치챈 듯했다.

“응. 이 책은 아무런 효과가 없어.”

“다른 책을 가져올게.”

소녀는 서가로 달려가 책들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필요 없다는 듯이 소녀를 말렸다.

“다른 책도 읽어 봤어. ‘인간 관계가 서투른 당신을 위한 친구를 사귀는 법’, ‘내성적인 사람을 위한 친구 안내서’, ‘아싸 생활을 끝내는 혁신적인 방법’...”

나는 지금까지 친구를 사귀기 위해 읽은 책들의 제목을 줄줄이 읊었다.

“전부 내가 읽은 것들이야.”

소녀는 친구를 사귀는 법이 적힌 책들이 꽃힌 서가 앞에 멀뚱히 서 있었다. 서가에는 내가 읽어 본 익숙한 이름들의 책이 가득 꽃혀 있었다.

“정말로 효과가 없었어?”

소녀는 나를 불쌍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마치 내가 비에 젖고 있는 버려진 강아지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응.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걸어 봐도 친한 친구는 안 생기더라. 다른 방법으로도 마찬가지였고.”

“어째서 친구를 사귀고 싶어 하는 거야?”

“그건...”

조금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나는 옛날의 일을 천천히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나, 초등학교 때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했어. 항상 책만 읽고 말투가 건방지다느니 하는 이상한 이유로...”

소녀는 말 없이 내 이야기를 들어 주고 있었다.

“그래서 중학교 때부터 따돌림을 당하지 않으려고 갖은 노력을 했어. 책에서 읽은 대로 쓸데없는 말도 줄이고, 아이들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말투도 부드럽게 바꾸고. 선을 넘지 않게 신경을 썼어. 그 결과가 지금의 나야.”

“더는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지 않게 되었지만 누구에게도 호감을 살 수 없게 되었어.”

소녀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며 내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그래서 뭔가 고민이 있거나, 어려운 일이 생겨도 친한 친구가 없으니까 모든 걸 나 혼자 해결해야 했어. 대부분은 어떻게든 해낼 수 있었지만... 역시 누군가에게 털어놓거나 도움을 받을 수가 없으니까 좀 쓸쓸하더라.”

나는 입가에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네가 무엇 때문에 친구를 사귀고 싶어 하는지 확실히 알았어.”

소녀는 마침내 내 이야기가 끝나자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미안. 너무 무거운 이야기를 했나?”

“아니, 괜찮아.”

“그러고 보니까 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말한 건 네가 처음이야.”

“그럼 나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을 말해 줄 수 있을 정도로 신뢰가 가는 사람이라는 건가?”

후후후. 소녀는 기분이 좋은 듯이 작게 웃었다.

“나도 살아 있는 사람이랑 대화를 해 본 건 오랫동안 네가 처음이야.”

“네 이름이 유현이라고 했지?”

소녀는 이내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잠시 눈을 감더니,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응. 서유현.”

“좋아. 유현아, 네 소원을 이루어 줄 방법을 찾았어!”

소녀는 나를 ‘너’ 라고만 호칭하다가, 이제 나의 이름을 불러 주기 시작했다.

“어떻게? 설마 친구를 사귀는 방법이 적힌 다른 책은 아니지?”

“아니야, 아니야.”

소녀는 손을 저었다. 나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으음, 잘 생각해 봤는데...”

“유현이는 친구를 사귀고 싶어 하고, 책을 읽고 실행해 봐도 친구를 사귈 수 없었어. 그렇다면 나랑 친구가 되어 보는 건 어때?”

“너랑.. 친구가 된다고?”

나는 마치 판타지 소설 같은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소녀를 처음 봤을 때의 신비로운 감각이 온 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응. 나는 네 소원을 이루어 줄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나도 마침 인간 친구를 사귀고 싶었거든. 문예부의 부원도 필요했고.”

소녀가 말하는 문예부가 지금의 학교에 있는 문예부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이 서고가 문예부의 부실이었으며 소녀가 문예부의 부원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때? 나랑 친구가 될래? 싫다면 강요하지는 않을게.”

소녀는 가까이 다가와 검은 두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친구.”

나는 소녀를 내려다 보며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이 유령 소녀는 처음 만난 나의 소원을 들어 주기 위해 스스로 나의 친구가 되어 주겠다고 했다.

나는 분명히 친구를 사귀고 싶었다. 오랫동안 누구와도 친해질 수 없는 외로움 속에서 살아 가야만 하는 쓸쓸함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소녀는 지금까지 유령인 채로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아 쓸쓸히 홀로 서고를 지켜 왔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끝에야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나를 만났다.

소녀는 친구로 사귈 수 있을 정도로 좋은 존재인 것일까.

소녀는 불편하게 들릴 수 있는 무거운 나의 과거를 불평 없이 진지하게 들어 주었고 무엇 때문에 내가 그 소원을 바라는지 이해해 주었다.

내 소원을 들어 주기 위해 직접 책을 찾으며, 그것이 효과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도 포기하지 않고 내 소원을 이루어 주기 위해 다른 방법을 찾아 주었다. 

소녀는 사람들에게 무서운 존재로 인식되는 유령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내가 소녀에게 과거 이야기를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소녀가 믿을 수 있는 존재라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소녀는 내가 항상 느끼는 감정을 알고 있었다. 나 또한 소녀가 항상 느끼는 감정을 알고 있다.

나는 어쩌면 이 소녀와 친구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같이 이야기를 하고, 평범하게 시간을 보내고, 서로를 도와 주는 평범한 친구 사이로 지내기를 나와 소녀는 원하고 있었다.

소녀와 친구가 될 수 있을지를 고민한 끝에, 나는 드디어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했다.



“좋아. 너랑 친구가 될게.”

나는 소녀와 친구가 되기를 결정했다.

“정말? 정말로?”

소녀는 기쁜 듯한 얼굴을 하고선 눈을 빛내며 나를 올려보았다.

“정말 고마워! 나랑 친구가 되어 준다니 나 너무 기쁜 거 있지. 지금까지 계속 혼자서 서고를 지키는 생활도 이제 끝이구나..”

그렇게 말하고선 소녀는 밝게 웃으며 날 바라보았다.

“아, 맞다! 친구가 된 기념으로 인연을 맺어야지. 잊어버릴 뻔했어.”

“인연?”

무언가 중대한 사항처럼 느껴지는 그 단어를 듣고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딱히 중대한 행사 같은 건 아니고 가볍고 간단한 거니까 걱정하지 마.”

소녀는 웃으면서 책갈피 두 개를 꺼냈다. 그러고선 나에게 손에 든 책갈피 하나를 내밀었다.

“책갈피?”

책갈피는 아무런 무늬나 색도 없는 투명한 재질의 종이로 되어 있었다. 위쪽에 뚫린 작은 구멍 하나에는 빛나는 금색 끈 하나가 단단히 묶여 있었다.

“여기에다 한자로 상대의 이름을 적으면 인연이 맺어져. 맞다, 서로의 이름이 한자로 뭔지 안 가르쳐 줬었지?”

“응. 나도 안 가르쳐 줬어.”

굳이 한자로 적어야 하는지 약간 의문이 들었지만, 뭔가 조금 오래된 의식이라 그럴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내 이름은 한자로 이렇게 적으면 돼.”

소녀는 노란 메모지를 하나 뜯더니 자신의 이름을 적고 나에게 내밀었다. 메모지에는 ‘崔書娥’ 라는 한자가 적혀 있었다.

“내 이름은 여기.”

나도 주머니에서 흰 메모지 하나를 꺼내 내 이름을 한자로 적어 소녀에게 건넸다. 메모지에는 ‘徐幽玄’이라는 한자를 적어 두었다.

“여기 펜.”

소녀는 내 이름을 받자 기분 좋은 듯 미소 짓더니 나에게 볼펜 하나를 건넸다. 

“고마워.”

나는 볼펜으로 책갈피에 소녀의 이름을 적기 시작했다. 소녀도 다른 펜 하나를 꺼내 내 이름을 적었다.

“다 적었어. 이걸로 끝이야?”

나는 소녀의 이름이 적힌 책갈피를 보여 주며 물었다. 

“아니, 아직 마지막으로 할 일이 남았어. 책갈피 가지고 날 따라와.”

소녀는 나의 이름이 적힌 책갈피를 보여 주고선 천천히 서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할 일이 뭔데?”

나는 소녀를 따라가며 물었다. 나와 소녀는 책이 가득 꽃힌 책장이 양 옆으로 늘어선 긴 길을 걷고 있었다.

“곧 알게 될 거야.”

소녀는 마침내 서고의 벽에 있는 나무로 된 작은 문 앞에 멈추어 섰다. 이내 주머니에서 열쇠 하나를 꺼내더니 그 열쇠로 문을 열었다.

“들어와. 이제 거의 다 왔어.”

소녀와 나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어두웠지만 어딘가에서 어슴푸레한 빛이 비쳐 들어와 방 안의 구조를 파악하는 건 가능했다.

“여기는 어디야?”

나는 소녀를 따라 계단을 올라가며 물었다. 계단을 올라갈 때마다 점점 어딘가에서 비쳐드는 빛이 밝아지고 있었다. 

“서고의 다락방 같은 곳이야. 내가 지내는 곳이기도 하고, 이 학교에서 가장 높은 곳.”

마침내 계단을 다 올라왔을 때에 본 것은 양 옆의 벽에 달린 창문에서 어슴푸레한 석양 빛이 비쳐 들어오는 광경이었다.

소녀는 바로 앞에 보이는 고풍스러운 목조 장식이 새겨진 문을 열었다.

“바로 여기야.”

소녀는 미소 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 달린 큰 원형 창문에서 눈부신 석양 빛이 가득 비쳐 들어오고 있었다.

“이제 여기에서 뭘 할 거야?”

나는 소녀의 이름이 새겨진 책갈피를 만지작거렸다. 인연을 맺는 과정의 마지막 단계가 대체 무엇이길래 이런 곳까지 나를 데리고 온 것일까.

“간단해. 책갈피를 들고 창문 앞에 서. 그리고 태양 빛이 정확히 책갈피를 관통하도록 위치를 조절하면 돼.”

소녀는 거리낌 없이 원형 창문의 창틀에 걸터 앉아. 책갈피로 석양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태양 빛...”

나는 조용히 중얼거리며 소녀가 있는 원형 창문의 창틀에 조심스레 앉았다. 

그리고 소녀가 말한 대로 태양 빛이 책갈피를 관통하도록 책갈피로 석양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 후로 알 수 없는 길이의 신비로운 시간이 흘렀다. 나는 책갈피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나는 이내 내 눈 앞에 펼쳐진 불가사의한 광경에 말을 잇지 못했다.

아무런 색도, 그림도 무늬도 없이 소녀의 이름만이 새겨진 투명한 책갈피에 그림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책갈피에는 마치 프린트에서 종이를 출력하듯이 천천히 윗부분부터 그림이 새겨지고 있었다.

조금씩 위쪽부터 보랏빛과 분홍빛이 섞인 색의 꽃잎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그 꽃잎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수를 늘려 갔다. 옆에서 본 형상, 아래로 떨어지는 형상,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형상까지 여러 가지 모습을 한 아름다운 벚꽃잎의 그림이 새겨지고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흘러 벚꽃잎이 책갈피에 전부 새겨지자, 책갈피의 배경도 색을 띄기 시작했다.

해가 저무는 저녁 하늘의 색과 같은, 어두운 푸른색이 책갈피 위쪽에서 그라데이션처럼 깔렸다. 그래도 투명한 것은 여전해 책갈피 밖으로는 전에 봤던 것과 같은 구름의 형상이 보였다.

“후후, 놀랐어?”

소녀는 나를 바라보며 책갈피를 흔들었다. 책갈피에는 나와 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살아 있었을 때,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에게 받은 거야. 인연을 맺는 방법도 그 사람에게 들었고.”

소녀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창 밖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그 사람의 이름도, 어떻게 생겼는지도 기억나지 않아. 어쩌면 그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몰라.

처음에는 그냥 농담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짜였었구나..”

소녀는 자신의 손에 든 책갈피를 바라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이름이 사라졌어.”

나는 책갈피를 보고선 그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책갈피에는 소녀의 이름이 사라지고 그림만이 새겨져 있었다. 

“으음, 나도!”

소녀는 자신의 책갈피를 들어 나에게 보여 주었다. 소녀의 책갈피에도 나의 이름은 사라져 있었다.

“그렇구나...”

나는 창 밖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이런 책갈피는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는 걸까. 정말로 이게 마법인지, 아니면 무언가 특수한 약품 같은 것을 묻혀서 만들어낸 것인지 궁금해졌다.

소녀가 살아 있었을 적에 이걸 주었다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녀의 친구일지, 같은 문예부의 부원일까. 유령에게도 사람처럼 오래된 기억을 잊어버리는 현상이 발생하기도 한다는-

“저기, 유현아?”

소녀는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 내 어깨를 쿡쿡 찔렀다.

“응?”

나는 어깨를 찌르는 듯한 감촉에 금새 생각하던 것을 잊어버렸다.

“잠깐, 네가 어떻게 날 만질 수 있어?”

분명 유령의 몸은 살아 있는 사람의 몸과 닿을 수 없을 텐데. 나는 의문을 느끼며 소녀에게 물었다.

“응? 만졌다고?”

소녀는 방금 전 자신이 만졌다는 감촉을 느끼지 못한 듯 나처럼 의문을 느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리가 없... 을 텐데?!” 

소녀는 내 팔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전과는 다르게 통과하지 않고 팔을 손으로 잡는 데 성공했다.

“어떻게 된 거야?”

“아마 이건 인연을 맺었을 때의 효과인 것 같아. 그 사람이 이것으로는 삶과 죽음을 초월해서도 연을 맺을 수 있다고 했어.”

소녀는 아직 방금 전의 놀라움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말했다.

“삶과 죽음을 초월해서...”

무언가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한 소설의 한 장문 같은 그 말을 나는 계속해서 되뇌었다.

“이제 우리는 완전히 인연을 맺은 친구가 됐으니까...”

소녀는 나를 검은 두 눈동자로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 유현아.”


“나의 친구이자 문예부의 부원으로서.”





이리하여 나는 친구가 되었다.

저녁의 석양 빛이 비쳐 드는 서고의 다락방에서,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유령 소녀와.



나는 소녀에게 평소와 같은 어조와 표정을 한 채 답했다.















“나도 잘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