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툴 마을의 족장은 감염자 집단의 정치체계를 엿볼 수 있는 말을 해주었다. 하지만 족장이 아는 것은 많지 않았다. 나는 우선 감염자 집단에 대해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족장님, 감염자 마을의 족장은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 생명체와 교감할 수 있나요?"

"정확한 거리는 알 수 없지만 대략 4킬로미터가 아닐까 하네. 우리 오크족의 뛰어난 족장은 대략 2킬로미터 정도에 있는 늑대와 교감을 나눌 수 있지. 감염자 마을의 족장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더 강력한 교감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다네." 

"돌연변이 바이러스 자체가 정신을 통제하는 파동을 만들어내어 도움을 줄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감염자 집단의 족장이 더 강력한 교감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는 이유가 설명되겠지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 나는 과학에 정통하지는 못하지. 바이러스가 정신을 지배한다고 어렴풋이 생각했지만 어떻게 지배하는지는 모르겠거든."

"만약 감염된 족장이 교감 에너지를 아주 멀리 보낼 수 있다면 어떻게 할까요? 그 때는 장거리에 걸친 전투통제가 가능해지겠지요? 그럼 숲을 벗어나 다른 지역을 정복하기 위한 대대적인 작전을 개시하지 않을까요?"

"자네는 감염자 집단이 대대적인 공격을 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작전통제를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말인가? 감염자 집단이 군대를 통제할 수 있는 거리가 4킬로미터쯤으로 국한된다면 정부 차원의 대규모 공격에는 대응할 수 없겠군."

"그 이유도 있겠지만 감염자 집단이 마을로 나뉘어 서로 분쟁을 하고 있는 것도 이유겠군요?"

"그렇다네. 감염자 집단은 아직 통일되지 못했거든." 


이제 숲 너머의 하늘에서는 동이 터온다. 사툴 마을의 오크와 늑대떼는 떠나려고 했다. 사모아 형사가 헤어지기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장로님, 이제 사툴 마을로 되돌아가시겠죠? 감염자 집단의 침입을 받는다면 저희에게 연락을 주세요. 저희가 돕겠습니다. 또 저희가 공격을 받을 때에도 도움을 청하겠습니다. 혹시 단말기를 갖고 계신가요?"

"내가 사회에서 벗어나 숲속에서만 산 것은 수십년이 지났네. 단말기를 갖고 있지 않지."

형사는 배낭에서 단말기를 꺼냈다.
"그럼, 이 단말기를 가져가세요. 언제라도 출동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시면 달려가겠습니다."


오크 족장이 휴먼이나 다른 지성체에게 정신 교감을 통해서 연락을 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스파링과 나는 오크 족장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오크 족장도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 때 도깨비 용병단이 다가와 사모아 형사에게 질문을 했다. 

"형사님, 저희가 감염자 집단의 침입을 격퇴하지 않았나요? 그런데도 임무 완료로 표시되지 않고 보상도 지급되지 않네요."

"여러분이 얼마나 싸우셨나요? 30분 남짓 싸웠을 겁니다."

"30분 싸운 것으로 50나노의 보상은 과하지 않나요? 또 감염자 집단이 퇴각했을 뿐 언제라도 다시 침입할 수 있어요. 아직은 침입을 격퇴한 것이 아니랍니다. 50나노는 통상적으로 3개월 이상 매일 임무를 수행해야만 얻을 수 있는 보상이 아닌가요? 감염자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을 겁니다. 꼭 지불할 테니 염려하지 마시고요."


마코와 준코 형제는 당황하거나 속았다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순박한 농사꾼인 도깨비 형제는 3개월 이상의 보상을 단지 30분만의 활동으로 받는 것이 오히려 양심불량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다른 도깨비 용병도 투덜거릴 듯 말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 그래도 오늘 오랜만에 싸우니까 통쾌하더군."

"맞아, 농사짓다가 심심하면 가끔씩은 이렇게 싸워야 몸이 풀리지."


어떤 도깨비 용병은 스파링과 나의 어깨를 두툼한 손바닥으로 탁탁 치며 말했다.

"자네들이 우리 농장의 외양간을 침입한 늑대떼를 물리쳤다며? 늦었지만 고맙다는 인사를 지금 하겠네."

"그래, 다들 자네가 늑대떼의 칩입에서 마을 일을 도와줬기 때문에 새벽에 전화를 받자마자 뛰어온 것이지, 하하."


뒤늦게 도착한 용병들은 보상에 관한 소식을 전해듣고는 아쉬운 표정을, 혹은 다행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실 공공의 안전을 위협하는 긴급한 사태가 발생하는 경우에는 용병은 출동해서 전투력을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용병 사무소에 용병으로 등록하면 휴게소의 커피를 무료로 이용하는 등의 소소한 편의를 제공받고 임무를 수행해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대신에 몇몇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어차피 수행해야 하는 의무였는데, 굉장히 짭짤한 보상이 덤으로 주어진다면 좋은 일이었다. 보상의 지급이 유예되었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반면, 다행스러운 것은 전투에 미처 참여하지 못한 사람이나 참여한 사람이나 모두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사람은 자신의 이익보다 남이 잘 되는 것을 보고 배 아파지는 것을 더 크게 생각한다.


용병들은 전투가 끝났지만 숲밖으로 복귀할지, 아니면 여기에서 진지를 구축해서 감염자 집단의 공격을 대비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나는 소리쳤다.

"여러분, 각자 복귀하세요. 전투상황은 종료되었어요."

사모아 형사가 뚱한 표정으로 내게 묻는다.
"한누리, 내가 용병들한테 복귀하라고 했나?"

"아니요. 하지만 감염자 집단이 언제 공격해올지 모르지 않나요?"

"그래, 자네는 역시 판단력이 빠르군. 자 우리 함께 복귀하도록 하세. 수전 박사, 경찰청 본부에는 방금 전 전투상황과 그 결과를 보고하세요."

"형사님, 혹시 경찰청에는 자세히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복귀하셔야 하나요?" 

"아니, 그것은 아닐 걸세. 지금처럼 상황이 급박할 때에는 소도시에 상황실이 설치되고 본부에서 높으신 분들이 내려오실 거야. 그리고 우리는 그분들의 결정에 따라 행동해야겠지. 이제는 사태가 우리가 임의로 결정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났으니까 말이야."

"아니 의사결정의 단계가 많아질수록 결정을 하는 데 시간이 더 걸리지 않나요? 급박하다면서 높으신 분들이 관여하실 이유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것이 행정이라네. 자네는 잘 모르겠지만. 좋은 점이 있다면 상황에 따라서는 더 대규모의 전투력을 충원할 수 있다는 것이지."


우리 일행은 숲밖으로 걸어나왔다. 우리는 간밤에 한숨도 자지 못했다. 이제 각자의 숙소로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사모아 형사와 수전 연구원은 호텔쪽으로 향했고 스파링과 나는 낡고 낡은 아파트로 향했다. 아파트 16층까지 걸어올라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누웠으나 이상한 불안감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스파링은 곤히 잠을 자고 있건만 나는 몇 시간 동안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끝에 어떤 결론에 도달했다. 나는 급히 스파링을 깨웠다.


"스파링, 빨리 일어나!  내 생각이 맞다면 급한 일이야. 우리 함께 용병 사무실로 가자구."

"한누리, 알았어. 무슨 일인데 그래?"

"확실하지 않은 일이야. 내가 실수하더라도 화내지 말고. 용병 사무실에 도착한 다음에 알려줄 테니까."


나는 허겁지겁 16층에서 1층까지의 충계를 뛰어내려왔다. 


내가 괜한 망상에 빠져있는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오토바이를 타고 용병 사무소의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도 타지 않고 역시 계단으로 1층의 용병 휴게소로 뛰었다. 


아직 점심시간은 한참 남았기 때문에 몇몇 용병만이 탁자 주위에 둘어앉아 있을 뿐이었다. 카운터에는 엘프 리라가 어떤 남성 엘프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보인다. 


나는 리라가 있는 카운터로 뛰었다. 리라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뛰어오는 나를 바라본다. 엘프 남성도 나를 바라본다. 카라쿠롬이다. 


카라쿠롬은 나를 확인하더니 황급하게 리라의 양쪽 볼에 손바닥을 얹더니 자신의 얼굴로 고개를 돌린다. 그러더니 격정적으로 리라에게 키스를 한다. 


나는 카운터를 뛰어넘으며 주먹으로 카라쿠롬의 얼굴을 휘갈겼다. 얼굴을 얻어맞은 카라쿠롬은 비틀거리며 몇 발자국 거리의 바닥으로 날아가 쓰러졌다. 


리라는 나를 보더니 눈이 크게 동그렇게 변하면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죠?"

리라의 얼굴을 일그러졌다. 고통스러운 표정이다. 쓰러지려는 리라의 허리를 한 손으로 잡고 다른 손으로 목을 잡아 무릎을 꿇어 접은 나의 왼발 허벅지에 올려놓았다. 


카라쿠롬은 분노한 듯 한 팔을 짚으며 고개를 들어 있어났다. 그 양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나는 뒤따라 뛰어오는 스파링에게 소리쳤다. 

"스파링, 카라쿠롬을 상대해!"


나는 황급히 호주머니를 뒤져 간이 주사기를 꺼냈다. 그 주사기에는 내가 미리 늑대 눈알로 만든 알약을 녹인 액체를 담아놓았었다. 주사기를 리라의 목 동맥에 바로 꽂았다. 


리라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고개를 돌리니 카라쿠롬이 스파링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두르자 스파링은 방패를 휘둘러 막아냈다. 


카라쿠롬과 스파링의 칼싸움은 현란했다. 주로 카라쿠롬이 양손에 든 두 검을 이리저리 휘두르고 찔러오면 스파링이 방패를 휘두르는 식이었다. 스파링은 손에 든 방패를 카라쿠롬에게 던질 수 없었다. 카라쿠롬의 칼놀림은 워낙 빨랐다. 또한 도끼를 휘두를 수도 없었다. 


 카라쿠롬은 더욱 빠르게 칼을 휘둘렀다. 스파링은 방패의 외곽으로 톱니바퀴가 튀어나오게 했다. 방패로 막을 수 있는 면적이 늘어났다. 카라쿠롬의 검과 스파링의 톱니바퀴가 부딪히며 불꽃이 튀긴다. 


나는 리라를 무릎에 누인 채 몸상태를 체크했다. 과연 리라는 카라쿠롬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가 약물로 치료되고 있는 것일까?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찡그러졌던 리라의 얼굴은 조금씩 펴지며 평온함이 올라왔다. 그와 함께 몸의 떨림도 잦아들었다. 


나는 리라의 얼굴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리라 정신 차려요. 저를 알아보겠어요."

리라는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몸은 힘이 없이 계속 늘어지고 있다. 

"제가 누군지 말을 할 수 있나요?"

"한, 누, 리."


안심이 되었다. 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 때 카라쿠롬과 스파링은 한참 싸움에 정신이 없었다. 나는 카라쿠롬을 향해 소리쳤다.


"카라쿠롬, 정신을 차려요. 당신은 자기의 의지대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카라쿠롬은 나를 힐끗 보았으나 무표정한 얼굴로 기계적인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소리쳤다. 


"감염된 오크 장로, 당신은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소! 정신을 차리시오."


내 말귀를 알아들었는지 카라쿠롬이 깔깔깔 웃으며 소리를 지른다. 


"휴먼, 너의 이름을 안다. 한누리, 네가 내 일을 방해하는 만큼 나는 네 마음을 찢어놓을 것이다. 자 오늘은 여기에서 그만 헤어질 것이다. 다음에 만날 때는 각오해라."


카라쿠롬은 카운터를 건너뛰어 휴게소의 입구로 빠져나갔다. 그 발이 너무 빨랐기에 스파링도 나도 카라쿠롬이 도망치는 것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