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안개가 낀 선로 너머로 길쭉한 형체가 다가온다. 유선형의 흐릿한 형체는 천천히 다가오다 이내 10m 조금 못 되는 거리가 돼서야 겨우 그 모습이 구분되기 시작했다. 짙게 깔린 안개 사이로 나온 것은 도시 외곽에서 하루에 두 번 운행되는 고속철이었다. 박 기자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표에 적힌 행선지를 확인하고 철도에 몸을 실었다.

 

  박 기자와 각성자가 향하는 곳은 수도에서 10km가량 떨어진 산맥이었다. 관문이 집중적으로 생성된 산맥은 위험구역으로 선포되어 검증된 각성자가 아니라면 출입이 엄금된 곳이었다. 박 기자는 그곳에 들어가야 하느냐고 묻고,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만약 그렇다면 들어갈 방법은 있느냐고 물었지만, 최수진은 시종 죄책감이 얹힌 표정으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박 기자는 애꿎은 화풀이를 각성자에게 하는 대신에, 끓어오르는 속을 달래며 아무것도 묻지 않고 따르기로 결정했다. 대답해줄 수 있는 것과 대답해 줄 수 없는 것이 명확하게 구분된 상황에서, 그가 알 수 있는 것이란 그녀가 알려주는 것과 그가 어림짐작한 몇 가지 가설들뿐이었다.

 

  고속철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은 박 기자는 사무실 한켠을 축내며 인터넷 신문의 사설란에 자질구레한 인터넷 소문이나 올릴 때 떠오르던 일종의 무력감을 느꼈다. 그는 남들이 시키기 전에 움직이지 않는 철저히 수동적인 인간이었으며, 언제든지 갈아치울 수 있는 일회용품과 같은 구성원이었다. 하여 박 기자는 알 수 없는 사태가 가져온 불안감과 막막함,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서 비롯된 차가운 분노마저 느꼈다. 허나 그 분노는 갈 곳을 잃고 속을 끓이고 있었다. 박 기자는 각성자에게 분노를 풀 만큼 멍청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얼굴도 제대로 본 적 없는 국장에게 화를 풀기에는 그는 너무도 먼 사람이었다.

 

  박 기자가 속을 달래는 동안 옆자리에 앉은 수진은 좌석을 더듬으며 과거의 기억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박 기자가 보기엔 그랬으며, 실제로도 그러했다.

 

  “박 기자님. 국장님이 말씀하시길……. 도착지에서 저희를 안내할 사람이 한 명 있다고 하네요.”

 

  “그것참 다행이군요.”

 

  그녀의 말에 좋은 감정이 떠오르지는 않았으나 박 기자는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메시지를 남기는 국장의 방식에 소름마저 돋았다. 철저히 최수진의 능력에 기대 남기는 메시지는, 그녀의 능력이 아니면 너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박 기자에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몇 번의 마른세수, 입에서 튀어나오는 장탄식. 박 기자는 정체가 모호한 국장과 씨름하기보다, 목적지까지 세시간 남짓 남은 동안 눈을 감고 잠을 청하기로 작정했다.

 

 

3

 

 

  수도에서 조금 떨어진 산맥은 도심과는 다르게 안개 한 점 없이 맑기만 했다. 낮게 깔린 뭉게구름이 산꼭대기에 걸려 쨍한 햇빛을 가려주고 있었다. 박 기자는 열차에서 내린 수진에게 말을 건넸다.

 

  “그래서 저희를 안내할 사람은 어디에 있답니까? 아니 그 전에, 저희가 저 산맥에 들어갈 수는 있습니까?”

 

  “글쎄요, 국장님은 도착하면 알 것이란 말밖에 안 하셨어요.”

 

  “그것참……. 믿음직하군요.. 국장님의 말이라니 믿을 수밖에요.”

 

  박 기자는 비꼬는 기색을 숨기려 하지 않은 채 말했다. 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전개되는 사건에 지친 탓이었다. 최수진은 잠깐 눈썹을 찡그리다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수진 씨가 사과할 일이 어디 있습니까? 괜찮습니다. 다만 조금 답답해서 그래요.”

 

  그 말을 끝으로 박 기자는 입을 꾹 다물었다. 수진은 안절부절못하다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산더미만한 덩치의 남성을 발견하곤 표정이 일변하여 환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여기에요! 박 기자님, 저분이 저희를 안내한다는 사람이에요.”

 

  “그렇군요.”

 

  박 기자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단답했다. 우람한 덩치의 사내는 고개를 까딱이고 두툼한 손을 불쑥 내밀었다.

 

  “황석영이요. 이 국장이 보낸 사람들 맞수?”

 

  “예에. 저는 박건이라고 하고, 이쪽의 여성분은 최수진이라고 합니다.”

 

  “그쪽이 말단 기자고, 저쪽의 여성분이 각성자겠군.”

 

  사내는 소개를 듣자마자 대뜸 말했다. 박 기자는 잠깐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국장님 부탁이 아니었더라면 댁들 같은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건데, 운 좋은 줄 아쇼.”

 

  대놓고 깔보는 듯한 태도에 수진의 얼굴이 구겨진다. 황석영은 그들의 탐탁잖은 기색을 읽은 듯 코웃음 치며 몸을 돌렸다.

 

  “갈 길이 머니 빨리 따라오는 게 좋을 거요. 오늘 안으로 산맥 중턱에 난 관문으로 가야 하니.”

 

  그 말에 박 기자는 언뜻 불안 같은 것을 느꼈다. 살인사건을 조사하는데 가는 곳은 산맥 중턱의 관문이라는 사실에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박 기자는 발을 옭아맨 불안에도 불구하고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수진 씨, 저희가 가는 곳이 관문이라고요?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글쎄요, 저도 자세한 사정은 몰라서…….”

 

  수진은 보기 드물게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도 옅은 불안감 같은 것이 비쳤다. 하여 박 기자는 그녀에게서 캐묻는 것을 그만두고 걸음을 재촉했다. 황석영이 덩치에서 비롯된 큼직한 보폭과 빠른 걸음으로 인해 그들에게서 빠르게 멀어지고 있는 탓이었다.

 

  박 기자와 일행은 황석영이 말한 대로 산맥으로 들어섰다. 그들이 산맥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 박 기자는 땀에 푹 절어 거의 혼절하기 직전이었다. 산까지 난 큼직한 도로 옆 작은 인도로 땡볕을 받으며 1시간 남짓 걸으니 각성자도 아닌 박 기자는 죽을 맛이었다. 황석영은 그런 박 기자의 상태를 못 본 척 산맥 입구를 틀어막은 커다란 철창 앞으로 걸어갔다. 박 기자와 최수진에게 그 자리에서 꼼짝 말고 기다리라는 말을 한 뒤였다.

 

  황석영은 철창 옆의 좁다란 공간에 난 창구를 통해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었다. 그의 몸이 움직일 때마다 위협적으로만 보이는 몸짓이 상대를 향하고 있었다. 대화가 잘 풀리지 않는 듯 약간의 고성이 오가다, 10분간의 언쟁이 끝나고 황석영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채 씩씩거리며 돌아왔다. 박 기자는 그의 얼굴을 흘겨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어떻게 됐냐고? 젠장! 잘 됐수다! 저 꽉 막힌 양반이, 국장에게서 말을 전해 들은 게 분명한데도 강짜를 놓다가, 돈 좀 찔러주겠다고 하니 겨우……”

 

  황석영은 분을 못 참고 고함을 지르며 씩씩거리다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짜증스럽게 턱을 매만지던 황석영은 박 기자에게 불쑥 말했다.

 

  “방금 건 못 들은 걸로 치쇼.”

 

  “예?”

 

  “가는 귀를 먹었어? 못 들은 거로 치라니까!”

 

  “아, 예. 알겠습니다.”

 

  박 기자는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되묻고 싶었지만, 그의 코앞에 주먹을 흔들며 다그치는 황석영의 태도가 워낙 거친 탓에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황석영은 그제서야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에게 손짓했다.

 

  “딱 붙어서 따라오슈. 여기서부터 댁들은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나 못 보는 곳에서 뒈져도 나는 모르는 일이요. 알아 들었수?”

 

  침엽수가 빽빽하게 들어찬 수림에 들어온 황석영은 관문 너머로 작게 난 오솔길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풀이 무성하게 자라난 산길로 걸음을 옮겼다. 최수진이야 본래 각성자였기 때문에 산길을 걷는 데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지만, 거리낄 것 없다는 듯 험한 산길을 쭉쭉 나아가는 황석영의 뒤를 따라잡기 위해 박 기자는 풀에 살갗이 쓸리면서도 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수림은 조용했다. 요란하게 울리는 풀벌레 소리와 풀숲을 헤치는 소리를 제외하면 어떤 소음도 나지 않았다. 세간에 자자한 악명과는 다르게 평화롭게까지 보이는 풍경이었다. 허나 박 기자는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을 놓지 않은 채 주변을 경계하며 황석영의 뒤를 바싹 따라붙었다. 한여름의 폭염과 긴장으로 난 식은땀으로 땀에 푹 절은 박 기자는 약간의 현기증마저 느꼈지만, 험한 기세로 길을 걷는 황석영에게 차마 말을 걸지는 못하고 대신 약간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최수진에게 말을 건넸다.

 

  “수진 씨는 국장님에게 무언가 전해 들은 게 있습니까? 걷기만 하니 조금 불안하군요.”

 

  “아니요, 저도 저분을 따라가라는 얘기 외엔…….”

 

  최수진은 정말 죄송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박 기자는 짜증이 불쑥 솟아올랐지만, 차마 그에게 사과를 하고 있는 수진을 닦달하지 못하고 다시 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박 기자와 최수진 사이의 짧은 문답을 끝으로 셋은 한동안 무거운 침묵에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박 기자가 탈진해 쓰러지기 직전 황석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전까지의 기세등등한 모습과는 다르게 이상하게 떨리는 목소리였다.

 

  “저 앞 동굴이 보이는지 모르겠군. 저기가 목적지요. 나는 댁들을 저 동굴까지 안전하게 안내하라는 말만 들었을 뿐이니, 어서 들어가쇼. 빨리 돌아가고 싶으니.”

 

  하며 주변을 불안하게 둘러보는 꼴을 보자니 박 기자는 치솟은 초조함을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안전한 것 맞습니까? 석영 씨를 제외하면 저는 비각성자에, 수진 씨는 전투 관련 능력을 가지지 못한 각성자입니다. 혹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젠장, 나도 모른단 말이요! 내가 그것까지 알려줘야 하나? 그냥 들어가기나 하쇼!”

 

  버럭 소리를 지른 황석영은 턱을 거칠게 문질렀다. 박 기자는 거친 숨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는 몸짓을 본 황석영은 그대로 몸을 돌려 수풀 너머로 사라졌다. 박 기자는 길섶에 주저앉아 땀에 젖은 얼굴을 연신 쓸어올렸다. 최수진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괜찮으세요?”

 

  “괜찮아 보입니까?”

 

  그리고 피로한 듯 눈을 감더니 이내 천천히 덧붙였다.

 

  “별로 괜찮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가버리고, 저희는 이 위험한 산맥에 덜렁 남겨진 신세 아닙니까. 빌어먹을, 당장 내일이라도 저희가 변사체로 발견된다면, 그건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닐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으셨습니까?”

 

  “네, 하지만…….”

 

  박 기자가 짜증을 내며 말하자 최수진은 약간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박 기자가 이렇게 선명한 짜증을 표현한 것은 처음이었던 탓이었다. 하지만 박 기자는 움츠러든 최수진은 신경 쓰지도 않고 언성을 점점 높여갔다.

 

  “애초에 이런 곳으로 저희를 보낸 국자의 진의조차 의심됩니다. 혹 당신도 저처럼 국장에게 찍힌 것 아닙니까? 국장이 남들 몰래 눈엣가시였던 저희를 처리하기 위해 취재라는 명목으로 이곳으로 보낸 것 아닙니까?”

 

  말을 마친 박 기자는 눈을 감고 거친 숨을 고르며 무거운 침묵에 빠져들었다. 최수진은 길섶에 주저앉아 숨을 고르는 그에게 무슨 대답을 할지 찾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박 기자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수진 씨도 말려든 신세에 불과할 텐데.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고서야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4

 

 

  잠시 체력을 고르고, 박 기자와 최수진은 무거운 침묵에 빠진 채 동굴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돌아가기엔 너무 위험했고, 동굴 안도 어떻게 될지는 모르나 혹 국장이 박 기자를 처리하려 했다면 이 산맥에서 빠져나가더라도 안심할 순 없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최수진은 단순히 국장을 믿고 행동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박 기자는 국장도, 심지어는 당장 그의 왼편에 자리한 최수진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동굴 안은 선선했으나 박 기자는 여전히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더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미지에서의 공포와 불안감에서 비롯된 식은땀이었다. 박 기자는 불안해하는 것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최수진의 약간 뒤에서 걷기 시작했다. 최수진은 가끔 동굴 벽을 짚으며 과거를 더듬어갔기 때문에, 그런 박 기자의 기색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게 기묘한 분위기를 유지한 채 동굴 안의 갈림길에 도달한 것은 그들이 동굴에 들어간지 30분 남짓 지난 무렵이었다.

 

  박 기자는 동굴 안의, 명백히 손길이 닿은 것처럼 보이는 갈림길을 보고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최수진은 박 기자가 주저앉은 것을 흘끔 쳐다보더니 동굴 벽을 더듬으며 과거를 짚어갔다.

 

  “박 기자님, 한 시간 전에 국장님이 여기에 뭔가 전언을 남긴 것 같아요.”

 

  “그래요? 그것 참 좋은 소식이군요. 뭐라고 하시더랍니까?”
 

  “그것이, 메시지를 남긴 지 아슬아슬하게 한 시간이 지나서, 자세한 내용을 알기는 힘들고……. 그러니까…… 물건을 찾아서, 관문을 넘어가라? 라는 말이 마지막에 나왔어요. 이게 무슨 뜻일까요?”

 

  “글쎄요. 국장님의 의도야 저보다 수진 씨가 더 잘 알 것 아닙니까?”

 

  그러자 최수진의 표정이 곤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제발요, 박 기자님. 저도 잘 모르겠어요. 국장님은 워낙 비밀스러운 분이셔서…….”

 

  “그래요, 그런 비밀스러운 양반의 명령을 잘도 따르고 있었군요.”

 

  “비밀스럽지만 믿음직한 분이니까요. 이렇게 말씨름할 시간이 없어요. 다음 단서가 사라지기 전에 빨리 결정해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