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그녀가 우혁의 집 앞까지 따라온 건 아닐까? 내일 아침 집 밖을 나설 때, 집 앞에 그녀가 있는 건 아닐까? 아까처럼 우두커니 서서 우혁의 얼굴을 쏘아보는 건….


 하지만,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워 한 숨 돌리고 나니, 그녀가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행정고시를 준비하는 사람은 대부분 서연고생들이다. 학력이 높을수록 인격적으로 훌륭하다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다들 출신이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에, 몇 다리만 건너면 대부분 알 만한 사람이라는 게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다들 행동을 조심한다. 기껏 이 어려운 시험을 합격해놓고, 연수원에서 '저 사람이 그 또라이래.'라는 소리를 들으며 손가락질 받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가만히 누워서 생각해보니 세진의 행동이 이해가기도 한다. 아마, 어린 나이에 이 촌동네에 혼자 방을 잡고 공부만 하다 보니 외로움이 사무쳤을 것이다.


 '이젠 안 그러겠지. 또 그런다 해도 다른 사람한테 그러겠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괜한 걱정으로 잠을 설치기엔, 내일도 할 일이 너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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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에 집 밖을 나서면서, 어젯밤 자신을 쏘아보던 세진의 눈빛이 떠올라 불안한 나머지, 우혁은 한참 집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역시 세진은 없었다. 


 또 평소와 똑같은 하루의 시작인 것이다. 그게 안심이 되는 동시에, 지겹기도 했다. 오늘 밤도 녹초가 되어 쓰러지겠지?


 하지만… 그런 우혁의 생각과 어긋난 점은, 어제와 똑같지 않아야 할 부분까지도 똑같은 하루였다는 점이다.


 "안녕하세요, 우혁씨."


 "......."


 "어쩜 이렇게 글씨를 예쁘게 쓰세요? 이 많은 내용을…. 마치 컴퓨터로 타이핑한 것 같아요."


 "......."


 어젯밤 일이 마치 꿈이었던 것마냥, 세진은 또다시 우혁에게 찾아와 그런 인사를 건넸다.


 그래도,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그런 대화를 나누는 건 불과 몇 초도 채 되지 않고, 필기자료를 기다리는 수 많은 수강생들 덕분에, 세진은 우혁의 앞에 오래 서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혁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어젯밤에 그런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거는 이 여자가 무서웠다. 한 마디라도 받아주면 이 여자가 다시 우혁의 독서실 문 앞에 서 있을 빌미를 주게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우혁이 자료 배포를 끝내고, 수업을 듣기 위해 자리로 가보니… 책상 위에는 초코우유가 놓여져 있었다. 쪽지와 함께 말이다.


 '죄송해요 우혁씨. 인사도 받아주지 않는 걸 보니 많이 화가 나셨나 봐요. 냉정하게 생각해보니까 충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었던 것 같아요. 이제는 그런 짓 하지 않을게요. 제대로 사과를 하고 싶어요. 오늘 밤 11시에 독서실 앞에서 기다릴게요.'


 아주 정중한 말투였다. 역시, 그녀도 상식이 아주 없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대학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혼자 떨어지는 바람에 정서적 혼란을 겪어서 실수를 저질렀을 것이다.


 하지만 우혁은 그녀를 다시 만날 생각이 없었다. 


 고시생은 정말 바쁘다. 알아먹기도 힘든 수업은 매일 연속으로 4~5시간씩 진행되고, 나머지 시간은 그 내용을 필사적으로 복습하고 머리에 집어넣는 데 써야 한다. 오늘 배운 걸 이해하지 못하면, 당장 내일 진도를 따라가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촘촘한 공부일정에서 겨우 벗어난 밤시간을 왜 그녀에게 써야한단 말인가?


 "죄송한데, 독서실 남은 기간 환불 가능한가요?"


 "되긴 하는데… 그러면 월초에 받은 할인 혜택도 없어지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제가 좀… 급한 사정이 있어가지고…."


 그렇게 우혁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독서실로 달려가 짐을 빼버렸다. 그 날 바로 다른 독서실로 옮겨버린 것이다.  그러면 이제 그녀와 얽힐 일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차라리 그녀와 적당히 화해를 하고 친구로 지내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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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날, 우혁의 책상 위에는 커피와 편지가 있었다. 초코우유가 커피로, 포스트잇이 문방구에서 파는 예쁜 편지지로 발전한 것이다.


 봉투를 열어보니, '왜 어제 오지 않으셨나요?'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장문의 내용이 편지에 담겨 있어, 당황한 우혁은 그걸 끝까지 읽지도 않고 대충 접어 가방에 던져넣었다. 커피는 먹지 않고 화장실에 버렸다.


 세진은 우혁이 생각했던 것보다 끈질긴 사람이 아닐까?


 그 날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우혁의 집으로 들어서는 골목 한 구석에 우뚝 선 그림자가 어쩐지 그녀인 것만 같아, 우혁은 5분이면 가는 거리를 빙 돌아 20분 만에 집에 도착했다.


 설마 내일도? 또? 


 불행하게도, 우혁의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그 다음날 우혁의 책상에는 편지와, 값비싼 고디바 초콜릿 선물세트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걸 먹고 싶은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어떻게 세진으로부터 도망쳐야할까하는 고민만 들었을 뿐이다.


 문제는 우혁이 필기조교라는 것이다. 다른 학생들은 좌석을 맡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줄을 서지만, 필기조교만은 전용 좌석을 이용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 


 하지만 그 말은, 매일 다른 좌석에 앉는 다른 수강생들과는 달리, 우혁은 세진의 편지공세를 피할 수 없다는 뜻이다.


 고작 정신 이상한 여자애 하나 때문에 필기조교 자리를 포기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기엔… 수업료가 너무 아까운데….


 누구한테도 말 못할 고민이었다. 독서실에서도, 고시식당에서도, 집에 가는 길에도 혹시 주변에 그녀가 있지 않을까 안절부절….


 그리고 실제로, 우혁이 집으로 가는 골목에는 이틀째, 한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는 여자의 형상이 있었다. 


 세진인지, 아니면 그냥 평범한 동네 미친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우혁은 이제 그 골목을 지나다닐 수가 없었다.


 그래도 스토커보다 무서운 건 돈이다. 세진이 우혁을 찔러죽이기라도 하겠는가? 우혁이 먹을 음식에 약을 타기라도 하겠는가?


 세진이 매일 우혁의 책상 위에 무언가 먹을 것을 놓아두긴 하지만, 우혁은 거기에 입도 대지 않는다. 


 세진이 우혁의 집의 위치를 어렴풋이 알긴 하지만, 우혁의 집 근처는 원룸촌이라, 그 골목에 있는 원룸 건물만 해도 6개가 넘는다.


 그녀도 고시생이니까 조금 지나면 포기하지 않을까? 곧 선택과목 시즌이라 서로 다른 수업을 듣게 될 테니, 그 동안만 참으면 되는 것이다.


 ...라는 생각을, 우혁은 그렇게 오래 이어갈 수가 없었다.


 열흘쯤 지났을까? 그 날은 우혁의 책상 위에 아무 것도 올려져 있지 않았다. 


 세진과의 인내심 싸움에서 드디어 이겼다는 생각에 속으로 환호하며… 우혁이 책을 꺼내려고 가방지퍼를 연 그 순간이었다.


 왜 그녀가 가방을 건드릴 거란 생각을 못했을까? 아니 그래도… 주변에 학생들도 있었을 텐데 대체 어떻게….


 우혁의 가방 안에는, 여성의 팬티와 브래지어가 들어있었다. 


 본의 아니게 손에 닿은 면의 감촉, 그 눅눅한 습기로 미루어 볼 때, 그건 절대 신품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