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


애틋한 감정. 목소리. 잔잔하게 메아리치는 그 목소리가 두둥실 떠오르며. 나를 밀어낸다.

멀어져가는 꿈속을 다잡으려 발버둥을 쳐보지만 끝끝내 나는 꿈에서 깨어나고, 이내 그것을 망각하고 만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7월의 끝자락.


이런 꿈을 꾼지도 벌써 몇달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이젠 어떻게 꿈이 끝나는지 예상할 수 있을 정도다.


도대체 뭘까. 누굴까.


한가지 확실한 점은, 나에게 속삭이던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나 그립고 애틋해서. 나는 도무지, 정체조차 할 수 없는, 내 뇌가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모르는 그 여인을 사무치도록... 꿈에서 깨어난 몇분 간은 애달프게 보고싶어한다는 점이다.


만난 적도 없는 사람. 얼굴조차 흐릿한 사람.

도대체 나는 어떤 트리거로 인해 이런 꿈을 꾸게 된 걸까.


왜 나는...


"하아..."


만날 수도 없는 그녀를 그리워하며 씁쓸하게 입맛을 다셔야만 하는가.



*



"얀붕아! 이거 박스 좀 날라다 실어라!"


"예!"


무더운 여름 날에 잡화점 일을 돕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땀은 비오듯 쏟아지고, 반팔은 물에 젖은 걸레마냥 찝찝해서 차라리 벗어버리고 싶지만, 여기가 동남아도 아니고 그랬다가는 주변사람들의 눈총을 받겠지. 벌써 삼일 째. 잡화점을 리모델링한답시고, 김 아저씨는 어릴 적 인연을 앞세워 나를 무작정 단칸방에서 끌고 나와 일을 도우라 명령을 내렸고, 나는 그것을 불평하면서도 따르고 있다. 애초에 내가 묵고 있는 그 단칸방이 김 아저씨네 창고에 딸린 '종물'이 아니었다면, 난 진즉에 얼어죽었을테다.

"아이고 일 잘하네. 역시 젊은게 좋아? 그치?"


"허억. 허억. 그러게요. 젊은게 최고네요."


"여어 물~ 얼음물이니께 조심히 먹으라고?"


"감사합니다."


능글맞기는. 김 아저씨가 적시에 건낸 얼음물 페트병을 건내받은 나는 병뚜껑을 따 곧장 입으로 가져다댔다. 시리도록 차가운 물이 입을 따라 목구멍을 넘어 식도를 타고 흐른다. 구렛나루에 흐르는 땀방울의 감촉을 느끼며, 나는 입에 가득 얼음물을 머금고 우물우물거렸다.


"아~ 이번 여름 지독하다 지독해~ 인자 8월인디 참말로 떠죽겄구만 떠죽겄어."


"하아... 하아... 그래도 얼음물 마시니까 좀 낫네요. 금방가겠죠, 여름도."


"크~ 역시 젊은것이 좋아~?"


"가진게 이거뿐인데요. 얼음물 감사합니다, 아저씨."


"어어. 잠깐 쉬어. 저 수건으로 땀도 좀 딲고."


"예."


목에 두른 수건으로 얼굴과 머리를 빙글빙글 돌려 땀을 닦아내자, 돌려짜면 땀이 뚝뚝 떨어질만큼 젖어버렸다. 나는 대충 그것을 털고 김 아저씨가 마련한 그늘 밑 플라스틱 의자로 걸어가 엉덩이를 맡겼다. 


아. 천국이다.


"하."


"요새 공부는 잘되감?"


"예 뭐, 덕분에 무리없이 잘 하고 있습니다."


"그려. 에어컨도 달아줬는디 열심히 해야지."


"감사합니다.. 하핫."


"우리 손주 구한 귀인 대접하는 것은 허투루 하면 안되니께. 신경 확실히 쓰는겨."


"......"


귀인 대접하는거 치고는 이리 무더운 여름날에... 아니다... 히키코모리 우울증 백수자식을, 손주 구했다고 이렇게 소중히 대해주는 사람은 아마 서울 바닥에 김 아저씨가 유일할 것이다. 아내는 젊을 적에 사별하셨고, 두 딸과 아들 하나를 이 잡화점 하나로 대학까지 보내 키운 독한 아저씨니까. 그렇기에 이런 나를 거둔 것이고, 그렇기에 나는. 처음으로 그 기대에 부응해야겠다는 '의무감'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 



매일 아무 목적없이 살아가던 나날.



목표를 잃고, 홀로 길을 잃고 방황하며 세상 탓만 하던 나를. 거둔 것은... 김 아저씨니까.



만일 그 꿈만 아니었더라면, 나는 좀 더 행복했을 것이다. 이 과분한 행복을 주시는 것에, 감사함을 느끼면서.



"아저씨."


"왜?"


부채질을 하던 김 아저씨는 하늘을 고이 올려다보며 되물었다. 나는 산 너머의 하늘 높이 솟아오른 거대한 구름무리를 바라보았다. 아마, 김 아저씨의 눈도 이것을 사진기처럼 콱하고 박아두고 있을터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저 거대한 솜뭉치를 보며 말했다.



"저도 여자를 만나봐야할까봐요."


"잉? 여자?"


"예. 뭐... 꿈에 여자가 나오네요."


"만너~ 만나믄되지."


"......"


"꿈에 여자가 나오면, 만나야지."


"만나고 싶은데요..."


"노력을 해야지? 뭐, 내가 중매를 서? 다 자식들 장가보내고 손주낳고 살고있는데?"


"그것도 그러네요."


"꿈에서 여자가 뭐라고 하는데. 이쁘냐?"


"아니 뭐..."



무더운 바람이 젖은 머리를 삭 스치고 지나간다.



뭐지. 분명 뜨거운 바람인데도 뭔가...



"사랑한다고... 하던데요? 몰라요 목소리가... 음, 메아리치듯이 멀어져가는? 그런 느낌이고. 깨면 딱히 기억도 안나고... 그래요."


"............... 부적을 사다가 붙혀봐야되나 이거."


"에이.. 그건 아....니지않을까요. 에이 설마..요..."


"잡화점이라서 가끔 이상한 물건들이 섞여들어올 때가 많어. 약간 그런게 있어."


"아..."



아무튼... 그러시단다. 뭐, 소득없는 시시콜콜한 대화는 어느덧 막을 고했다. 나와 아저씨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일을 시작했고, 그렇게 1시간을 더 하다가 일은 마무리가 됐다.



"아저씨. 저 잠시 요 앞 공구상가 좀 다녀올게요."


"어~ 카드 갖고가냐?"


"예, 제가 갖고있어요~"


"난 준 적이 없는데?!"


"예예."



아저씨를 뒤로한채, 나는 가게 앞에 홀로 고독하게 서있는 김 아저씨의 오래된 애마, 낡은 자전거 안장에 올라타 앉아 페달을 밟았다. 뜨끈한 열기가 아스팔트 바닥에서 올라와 뒤지게 뜨거워도, 나는 페달을 밟았다. 이내 속도가 붙자. 뜨뜻미지근한 바람이 온 몸을 휘감고 지나갔다.



"아우, 더워라."



어지간히도 더운 여름이다. 작년에는 이렇게까지는 안더웠던 것 같은데. 멈춰서 신호등을 기다리는데 구청에서 설치한 차양막이 아니었으면 진즉에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기온이었다. 뜨거운 열기 때문에 달구어진 횡단보도 흰 줄이, 아지랑이 때문에 이리저리 뒤흔들린다. 



띠디디



파란불이 들어옴과 동시에 사람들이 움직인다. 나도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앞을 지나간다. 모자라도 쓰고 올 걸 그랬다. 그렇게 페달을 밟으며 횡단보도에 들어서는 순간.



끼익



"아."



뭐지? 정지선이 아닌가? 



내가 초록불에 건넌 것이 아니었나?



왜 탑차가 갓길을 비집고 들어와 있는 힘껏 이쪽을 향해 돌진하고 있을까. 



잔뜩 굳어 아무것도 할 수 없이, 그저 김 아저씨의 웃는 모습만 떠오를 때.



좀만 더 살갑게 굴 것을.



짧은 후회가 스쳐지나가며, 맞이하는 엄숙한 잔혹한 찰나에서.




쿠웅ㅡ




".......?"



처음 들어오는 느낌은, '의문'이 분명했다. 나는 분명 앞을 바라보고, 그 초점은 탑차를 향해있었다. 

그런데.

나는 분명 탑차만을 앞에 두고 있었는데. 왜 별안간 금발의 서양인 여자가 나타나서 차를 향해 손을 내뻗는 모습이 보이는 것인가?

내가 더위를 먹었다기에는, 머리도 어지럽지않고 멀쩡히 서있지않나?



띠-------------디----------------------



"어?"



신호등 소리. 아니, 소리를 길게 잡아늘어뜨린 듯한 묵직한 저음이 들려왔다. 사방이 조용하다 못해 서늘함마저 느껴졌다. 움찔하고 몸이 떨리자마자, 내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조금씩 사고를 하기 시작했다. 



나 말고 모두가 멈춰있는 정신적으로 미쳐버린 상황에.



그리고.



"......얀붕아. 안다쳤어?"



탑차를 향해 오른손을 왼손을 뻗은채,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서양인 여자가 내보인 안도의 미소에.



나는 그만.



"어."



정말 더위를 먹은듯 기절하고 말았다.






*




"사랑해."


어. 그래. 사랑하면 사랑해야한다. 


나는 언제나 오픈마인드다. 사랑하면 사랑해야하는게 인간의 숙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이번 꿈은 뭔가 낯설었다.


언제나 흩어지듯 멀어지던 메아리같은 목소리도 아니고.


안경을 벗은 것마냥 뿌옇고 흐릿한 얼굴도 아니고.


나를 직시하는 7월 마지막 여름날의 하늘처럼 푸르고 투명한 눈동자가 보였다.


조금 비현실적인 상황에. 나는 으레 그렇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김 아저씨 앞 가게인 세탁소 집에서 키우는 흑구가 허겁지겁 물을 햝짝인다. 


아니, 개를 묶어놓을거면, 이 더운 낮에는 잠깐이라도 가게 안에 들여놔도 되는 것 아닌가?


쓸데없는 오지랖은 둘째치고.


나는 아까 분명 자전거를 타고... 철물점에... 그러다가 더위를 먹었는지 쓰러졌고...



"......어?"



다시 고개를 돌려 서양인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변함없이. 흔들리지않은 굳건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다. 여전히, 그 특유의 지은듯 만듯한 절묘한 미소는 사람의 마음을 참 간사하게 만들었다.



"어...음.... 하이? 아.."


"사랑해."


"예?"


한국어! 유창하다. 


"사랑해. 얀붕아."


내 이름. 왜 당신이 그걸 알고 있을까. 근본적인 의문을 물으려던 찰나에.



"여자 만나고 싶다더니, 바로 자전거 타고 여자 데리고 온겨?"



"......"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김 아저씨가 자전거 체인에 WD40 스프레이를 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노안 탓에 돋보기 안경을 바꿔 쓴 김 아저씨가 번들번들하고 깔끔하게 까진 윗머리를 긁적이며 손으로 페달을 돌려본다.


"멀쩡하네. 10년은 더 타도 되겄다."


"아저씨. 어떻게 된ㅡ"


"사랑해."


"아니, 알겠으니까. 잠깐만 조용히 좀, 예, 조용히, 그, 해주시..겠어요? 아저씨 저 여기 어떻게 있는거에요? 저 그, 더위 먹어서 쓰러졌는데? 이거 꿈같은데 아니에요?"


"......."


페달을 돌리던 아저씨가 돋보기 안경을 벗고 미간을 찌뿌리며 나를 바라보더니 다시 돋보기 안경을 쓰고 말했다.


"어어. 더위는 지금 먹었고..."


"예??"


"저 외국인 처자가 너 업고 왔어. 자전거 들쳐매고. 힘이 장사여. 키도 엄청 커가지고."


"......"


나는 유연하게 목을 돌리며 이 낯익은 서양인 여자를 바라보았다. 나와 다시 눈이 마주친 그녀는, 뭐가 그리 할 말이 많은지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시 그 특유의 지은듯 만듯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사랑ㅡ"


"아. 아. 아! 아... 하....."


이게 말이 되나? 


아니. 이게 말이 된다고?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앞에서 마주치게 되면, 인간은 무지에 의한 공포를 느낀다.


그 공포는, 마치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은 물속을 향해 다리를 내뻗는 것과 같다.


등골을 타고 흐르는 그 본능적인 공포.


이 여자가 보여준 그 비현실적인... 힘. 불가사의한 현상이 만약 내 환상이 아니었더라면?




몇달 동안 꿔온 그 꿈이... 내 환상이 아니라...

실제로 눈 앞에 있는 이 여성이... 그 꿈 속에 나와 나를 향해 말했던 것이라면?



"......."

"안다쳐서... 다행이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나는 모르겠지만, 이 여자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아름다운 눈을 활짝 휜다. 그러더니 오른손을 내뻗어 내 뺨을 애정이 묻어난 손길로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겨우 만났어. 얀붕아. 보고 싶었어."

"아."


나는 그만, 그 손길을 거절하고 고개를 뒤로 빼고 말았다. 



무서웠다.



이상하게 평소와 다름없는 김 아저씨나, 갑자기 나타난 이 여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지나가는 행인들이나. 갑자기 나타난 이 여자의 정체나... 뭔가 싶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뭐야, 이 여자?



"얀붕이 말대로야."

"......예?"

"놀란다고 했어... 내가 갑자기 다가가면... 분명 놀랄거라고 했어."


분명 속삭이듯 중얼거리는데도, 여자의 목소리가 마치 내 귓가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분명히, 또박또박 박혀들어왔다. 여자는 내가 자신의 손길을 거부한 것에 퍽 실망하고 슬퍼하면서도, 마치 이해했다는듯 그 이상의 반응을 내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당황스러운 것은 내 쪽이었다. 뭔가 더 선을 넘을 것 같으면서도, 넘지 않은. 뜨거운 여름공기에도 느껴지는 서릿한 실선이 여성에게서 뿜어져나와 분위기를 장악하는 느낌이 들었다.



"괜찮아. 얀붕아."



내 쫄아붙은 담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 여자는 다시 특유의 지은듯 만듯한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살포시 움켜잡았다. 

그리고. 이 세상 어느 누가와도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 감히 예상할 수 있는... 그녀의 여름하늘처럼 빛나는 푸른 눈이 나를 직시한다.



"우린 다시 헤어지지 않을거니까."



아.



음.



"젊은 것이 좋은거여. 허허 참."



김 아저씨. 제발....




*



"그래서, 얀순! 미국에서 온거여? 얀붕이 볼라고?"


"예... 미국에서 왔어요..."


"허~~~ 얀붕이 봉잡았네? 요 시키 이거. 아까는 뭐 꿈에서 여자가 나와서 여자 만나고싶다하더니."


"......."


"하하~ 내 둘째 아들이 저기~ 어디여~ 저저저~ 캘리포니아 주립대? 거기서 유학했어. 어어. 지금은 저기 삼송다녀 삼송. 갤룩시 만드는데. 알지?"


"헤, 네."



바로 근처 치킨집 앞에서 플라스틱 의자와 테이블. 얀순이는 내가 어디 도망가지 않을까 테이블 아래에서 내 왼손을 부러져라 꽉 쥐고 있고, 김 아저씨와 스몰토크를 하며 웃고 있다. 나는 그저, 말없이 생맥주를 마시며 오늘 일어난 이 기묘한 일을 반추하고 있다.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



이게 꿈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다. 아니, 믿고 싶은 마음이다. 더운 열대야 속에서도 땀은 커녕, 5월의 봄처녀마냥 뽀송뽀송한 피부를 유지하는 것은 어느 경우일까. 줏어들은 바로는, 서양인들은 암내도 심하다고 하던데. 나는 얀순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암내는 커녕 오히려 계절과 맞지않은 향긋한 꽃내음 비스무리한 향기 탓에 내 옷에 섬유유연제를 뿌렸나 싶은 생각마저 들고는 했다.



꿈 속에서 그토록 나를 사랑한다고 하더니.



"여기 생맥 1700 추가요~ 아저씨~ 이 아가씨 힘들어요~ 말 좀 그만시켜요. 얀붕이랑 데이트해야하는데~"


"아이고! 그래도 면접시험은 치뤄야지!?"


"얀붕이. 여자친구 있었으면 진즉에 얘기하지. 우리 미진이 소개시켜줄려고 했는데~"


"아 거참 맘에도 없는 소리하네."


"왜요~ 미진이도 전에 얀붕이 정도면 뭐 일도 열심히하고 애가 나쁘지는 않겠다~ 이러면서 간보던데~"




뜨득ㅡ



""?""

"아.. 죄송해요... 살짝 힘을 줬는데.. 부서졌어요.."

"이야 역시 미국인은 힘도 쎄."

"그러게요 호호호~ 내가 금방 다른 의자로 바꿔줄게요~ 기다려봐~"


아닙니다 아저씨. 그게 아닙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오른손에 잡힌 내 왼손도 같이 바스라질까봐 입을 열 수 없었다. 아니 열지 않았다.

치킨집 사장아줌마의 딸 '미진'이라는 이름이 들리자마자 그녀가 어떤 눈빛을 했는지 나는 옆에서 다 보았기 때문이었다.

달려오는 탑차를, 왼손으로 멈추고... 뭐라고 해야할까. 시간을... 동결시킨 여자다. 그리고 무슨 일을 벌인건지... 이 여자의 얼토당토않은 현지화 수준에도, 사람들이 별다른 의심조차 품지 않고 있다. 외눈박이 세상에서 나만 홀로 두 눈을 가진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겠다. 이 여자는 보통 여자가 아니니까.



꿈 속에서 사랑을 울부짖던 여자다.



나는 이제 영원히 종속된 것이다. 김 아저씨 창고에 딸린 '종물'이자, 내 보금자리 단칸방처럼. 


"얀붕아. 좀 웃어라. 왜 이렇게 울상이냐? 치킨값은 내가 내는데. 너가 왜 죽상이여?"


"예? 아뇨. 아까 땀을 너무 흘렸나봐요?"


"얀붕.. 어디 아파? 호.. 해줄까?"


"아뇨. 아뇨아뇨. 괜찮습니다."


"얀붕아. 여자친구인데 좀 말 좀 편하게 해~ 왜 그렇게 목석마냥 그래~?"


"......예.... 사랑...해서요."



뜨득-


"?"


설마 또 의자가 금이 갔겠어? 사장아줌마의 그런 시선을 무시했다. 무시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얀붕아..."



어쩔 수 없어서 억지로 내뱉은 말조차, 얀순이는 이토록 눈물을 글썽이면서 행복해 할 일인가 싶었기 때문에. 나는 치킨무를 포크로 찍어 얀순이에게 건내며 말했다.



"의자는 그만... 하시고... 먹어... 일단."


"응!"



와삭!



"맛있어! 얀붕이가 먹여준거니까! 너무 맛있어!"


"...예...아악!!"



손이 부러질 뻔했기 때문에 나는 급히 답을 정정할 수밖에 없었다.



"응..."



만날 수도 없는 그녀를, 그리워하던 그녀를, 드디어 만났는데...




어째서 나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셔야만 하는가.



"식은 언제 올리냐? 나 아는 친구 예식장 하는데."


"예식장! 좋아요!"



아... 김 아저씨...



제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