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무섭다고 뒷담화는 깠지만, 메이브 부인이 없으니 집 안이 조용하네.” 잭이 침대에 누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메이드장이 일을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간지 겨우 이틀째였지만 확실히 저택 안 분위기는 변해있었다.

그것이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는 알 수 없지만 무언가 바뀐 것은 틀림없었다.

잭은 몸을 뒤척였다.

손에 잡힌 배게를 만지작거리자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앨리스... 되게 부드러웠지...” 옷도 딱 이 배게 커버 같은 느낌이었....

아냐! 내가 뭔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정신 차려, 이 새끼야.” 잭이 황급히 배게에서 손을 떼고 몸을 일으키는 순간,

삐걱.

천장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잭은 가만히 멈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밖에서 들려오는 물 소리, 문으로 들어오는 바람 소리, 그리고....

삐걱, 다시 한번 천장이 소름끼치는 소리를 토해냈다.

잭이 위를 올려다보았지만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애초에, 다락도 없는 이 저택의 천장에서 소리가 날 이유가 없었다.

잭은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 성냥의 불꽃이 양초로 옮겨갔다.

저택 안은 조용했다. 개미새끼 한 마리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천천히 촛등으로 천장을 비췄다.

한쪽 끝부터 반대쪽 끝까지.

단단하게 붙은 천장용 벽지와 굴곡 하나 없는 천장의 판자들.

! 그 순간 문 밖에서 무언가 떨어졌다.

거기 누구야!” 잭이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잭의 외침에 다른 방문들이 함께 열렸다.

무슨 일이에요?” 옆 방에 있던 앨리스가 말했다.

잭은 말없이 등잔을 들고 복도를 살폈다.

복도는 고요했다.

도둑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메이드와 집사들 말고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괜찮으신 거죠?” 앨리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아, 내가 바람 소리를 잘못 들었나봐.” 잭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어보이자 다들 방 안으로 돌아갔다.

무릎에 먼지를 잔뜩 묻힌 한 사람만 빼고.

그래서....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을 좀 해볼래?” 잭이 얼척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의 앞에는 잠옷을 입은 앨리스가 배게를 들고 서 있었다.

말씀드린 대로, 주인님의 잠자리를 지켜드리기 위해 저 앨리스가 이 방에 출장을 명 받았습니다!” 앨리스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차렷 자세를 취했다.

누가 명령 한 건데?”

메이드장이요! 시골로 내려가시기 전에 주인님한테 무슨 일 없게 잘 부탁한다고 말씀하셨답니다!”

메이브 부인이 너한테 나랑 같이 자라고 말씀하셨다고?”

설마요, 그냥... 주인님이 잠을 통 못 주무시는 것 같아서, 제가 보초도 설 겸 재워드리려고 왔죠.” 앨리스가 당당하게 말했지만 잭은 영 못 미더운 표정이었다.

전에 장난을 치다 그녀의 호신술 실력을 톡톡히 맛보긴 했지만, 저 몸매를 볼 때마다 싸움 실력에 일가견이 있다고는 믿기지 않았다.

침대는 안 가져와?” 잭은 반쯤 포기한 듯 말했다.

여기 있잖아요?” 그녀가 두 눈을 깜박거렸다.

이 방에 침대는 하나 뿐이었다.

잭이 사용하는 퀸 사이즈 침대.

너 진심이야?”

제가 언제 진심 아닌 적 있었어요?”

많지 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잭은 앨리스가 던지는 이불에 깔려 침대 위로 쓰러졌다.

주인님 잠자리는 제가 지켜드릴 테니 좀 주무시라구요.” 그녀는 자신의 배게를 침대에 내려놓더니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왔다.

손에 들린 한 자루의 단검과 함께 말이다.

, 너 아까부터 뭔데! 주머니에 왜 그런 걸 넣고 다녀!” 상상을 초월하는 앨리스의 행동에 잭은 넋을 놓고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호신용이에요, 호신용. 그러니까 주인님은 아무 걱정 말고 푹 주무시면 된답니다?” 앨리스가 잭의 옆으로 다가오자 그녀의 몸에서 비누 냄새가 그를 확 덮쳐왔다.

얇은 잠옷을 입은 예쁜 (그것도 그 부분이 상당히 돌출된) 여자가 자신의 옆에 단검을 들고 누워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잠에 들까 라는 생각이 가득한 잭이었다.

어때요? 꽤 잘 잤죠?” 아침에 눈을 뜨자 앨리스가 팔짱을 끼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녀는 어느새 메이드복으로 갈아입은 후였다.

지금 몇 시야..?” 잭은 아직도 잠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9시요. 10시에 식사 약속 있던 거 아니었어요?” 앨리스가 물에 젖은 수건을 가져다 주자 잭은 대충 얼굴을 닦고 황급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여기요.” 앨리스가 건네준 옷을 받으려던 찰나 잭은 자신이 잠옷 바지를 반대로 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행히 앨리스의 반응을 보니 눈치는 못 챈 것 같고, 이걸로 또 하루 종일 놀려대는 꼴을 보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시선을 돌려야만 했다.

오늘이 공작가 따님이랑 첫 만남인데... 이 옷은 좀 수수한 것 같지 않나? 다른 것 좀 찾아봐줄래?” 잭이 옷을 도로 내밀었다.

... 앨리스...?” 그녀는 옷을 받지 않았다. 초점 없는 눈으로 잭 너머의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오늘 있다는 식사 약속이, 케이트 그 년이랑 하는 거였어요?”

그 년이라니.... 말이 좀 심하...”

사람이 묻잖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차가운 듯 뜨거웠다.

말 끝에 살벌하게 서 있는 날이 금방이라도 잭을 베어버릴 것 같았다.

그녀의 눈빛이 싸늘하게 타올랐다. 얼굴에 진 그림자가 얼굴 전체를 뒤덮었다.

앨리스?”

, 죄송해요. 순간 다른 사람이랑 헷갈렸나봐요.” 방금 전 느껴졌던 살기는 어디로 갔는지, 앨리스는 밝게 웃어보이며 잭이 건넨 옷을 받아들었다.

,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녀의 살기에 딱딱하게 굳었던 몸이 이제야 움직였다.

... 앨리스? 톰한테 천장 좀 살펴봐달라고 부탁했는데, 오늘은 청소 안 해도 되니까 그것 좀 도와줄래?” 잭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웃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 한 마디 잘못 놀렸다간 어제 봤던 그 칼날에 베여버릴 것만 같았다.

앨리스가 말한 케이트가 누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전의 분위기로 봐서는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일단 죽이고 볼 법한 모양이었다.

, 알겠습니다. 잘 다녀오세요, 주인님!”

, 그녀가 잭의 볼에 입술을 맞추자 잭의 심장과 함께 긴장감이 사르르 녹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