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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연을 들여다볼 때는 조심해야 한다. 내가 심연을 관찰하는 만큼 심연도 나를 관찰하기 때문이다. 

 긴 연구 끝에 소환한 심연의 존재는, 그래서 나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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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해? 연구, 아니면 그냥 독서? 어느 쪽이건 넌 책만 읽으니까 구분하기 힘들어.”

 “연구.”

 “아하! 나를 돌려보내는 건 불가능하다고 증명했지? 그러면 이번엔 뭐야?”

 “방해하지 말고 꺼져.”

 “네~. 식사 준비 해 둘 테니까 배고프면 먹어?”

 “……”


 심연이 달라붙은 자리에 온기가 남아있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외모에 상냥하기 짝이 없는 성격에 속으면 안된다.

 저것은 내 영혼을 노리는 존재였으니. 


 심연은 나의 영혼을 가지겠다고 선언한 다음 연구실을 현실과 분리시켜 버렸다. 

 바깥에도 마을과 건물과 농장과 사람들은 있었으나 영혼 없는 껍데기에 불과했다. 심연은 둘 뿐인 세계에서 나를 끊임없이 유혹할 뿐. 


 맛있는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심연이 흥얼거리는 노랫소리는 달콤했고, 심연의 온기는 여전히 따스하다. 

 매순간 돌아가기를 포기하고 심연에 몸을 맡기고 싶은 유혹이 밀려온다. 마음 같아서는 심연을 난도질해 죽이고 싶었지만-. 


 “날 죽이고 싶어?”


 접시를 내밀며 심연이 물었다. 


 “죽어줄 수 없어서 미안해.”


 여전히 웃는 얼굴. 그러나 그 표정은 어딘가 서글퍼 보인다. 


 “젠장.”


 차라리 심연이 날 고문하고 괴롭혔다면 이런 기분을 느끼지는 않았을 텐데. 심연은 언제나 저런 식이었다. 아무리 밀쳐내도 끈질기게 달라붙으며 아무것도 없는 이곳에 유일하게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존재로 서 있었다. 


 서서히 저항이 힘들어진다. 그러나 아직 희망은 남아있었다. 

 이곳은 현실이 아닌 어딘가. 세계의 구성요소를 분석할 수 있다면 돌아갈 방법을 찾을 수 있을 지 모른다. 

 미약한 희망이라도 포기할 순 없었다. 


 “그런 점, 정말 좋아해.”

 

 심연은 나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내 연구를 거들기 시작했다. 문자는 읽지 못하지만 마법적인 지식은 풍부한 녀석이었다. 

 나를 도와주는데 거짓도 없으리라. 


 “응. 방해할 생각 없어. 어차피 돌아갈 수 없는 걸.”

 “닥쳐.”

 “미안해. 그래도 사실이야. 세계의 구조를 분석하고 자신을 개조하며 어쩌면 근원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을 지도 몰라. 하지만 여기서 벗어날 순 없어.”

 “닥치라고!”


 심연은 내 주먹을 피하지 않았다. 흐르는 코피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닦아내며 녀석은 부드럽게 속삭였다. 


 “화풀이 하고 싶으면 얘기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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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의 성과가 있었다. 세계를 구성하는 법칙은 같았지만 이곳은 보다 심연에 가까운 구성요소를 취하고 있었다. 

 이곳의 요소를 차용해 차원을 찢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다면 탈출은 가능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 


 희망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많은 도움을 준 건 심연이었다. 내가 자신을 분석하고 해체할 수 있도록 해 줬으니까. 여기저기 감은 붕대는 조금 안쓰러웠다. 


 “아프진 않아?”

 “피부 조각 좀 떼 준 건데 뭘. 헤헤헤. 너, 처음으로 나 한테 먼저 말 걸었네?”

 “……”


 짜증나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심연은 아랑곳 않고 내게 다가와 안겼지만. 떼어 내기 귀찮아서 내버려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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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년 5개월 뒤. 다시 한 번 성과가 있었다. 꾸준한 수련 덕택에 나는 원래 있던 세계에서 흔히 말하는 아크메이지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차원을 가르고 시간을 조종하는 마법사! 

 기존의 마법에 이 세계의 구성요소를 우겨 넣는 과정은 힘들겠지만 희망의 불씨는 어느때보다 환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심연은 자기 일인 듯 축하해 줬다. 

 그러고보니, 녀석과 친구가 된 것도 꽤 오래 지나버렸다. 처음엔 그렇게 싫어했는데 이젠 신뢰하는 동료라니. 

 내 영혼을 가져가려고 드는 점만 제외하면 심연은 정말 완벽했다. 

 가끔, 이대로 여기 있어도 되는 게 아닐지 고민될 정도로. 


 고개를 젓는다. 안 좋은 생각은 떨쳐버려. 심연이 아무리 좋은 녀석이라도 여기서 둘만 남아 지낼 수는 없었다. 


 “응원할게! 힘내!”


 주먹을 꼭 쥔 심연이 팔을 들어 응원했다. 귀여워서 무심코 머리를 헝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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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존의 마법 따위를 이곳에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모든 체계를 처음부터 다시 쌓아 올릴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언제?


 시간이 몇 년이나 지났지? 


 “17년 3개월 13일.”


 나는 늙고 지쳤는데 심연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저 안쓰러운 눈빛으로 나를 다독일 뿐. 

 포기하고 싶었다. 그저 심연의 품에 안겨 지내면, 그러면 편하리라 생각했다. 


 “정말 그래도 돼?”

 “너무…… 힘들어……”

 “쉬게 해 주고 싶지만…… 너는 네가 포기하는 걸 받아들일 수 있어?”


 젠장. 그럴 리 없었다. 포기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곳에서 벗어나야 했다. 하다못해 탈출할 수 없다는 것이라도 확실히 알고 싶었다. 

 나는 이미 마법의 끝에 다다른 자. 이곳에 맞는 형태의 마법을 만드는 것 따윈 아무것도 아니야. 

 시간이라면 얼마든지 있었다. 누구보다 든든한 심연도 곁에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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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시간을 되돌리고 세계의 법칙을 비틀며 연명한 건 얼마나 오래 된 일이었을까?

 기나긴 시간을 투자한 끝에 나는 마침내 성과를 얻었다. 심연 그 자체를 촉매로 삼으면 3.25초가량 사람 한 명이 통과할 수 있는 크기의 포탈을 만들 수 있었다. 대신, 심연은 죽는다. 영원히 사라져 다시는 볼 수 없게 된다. 

 

 “축하해!”


 그녀는 나를 진심으로 축복했다. 자신이 죽는다는 데, 내가 사라진다는 데 그저 내 소망이 이뤄진 걸 기뻐했다. 헌신적인, 아름다운, 누구보다 상냥한, 나의 연인이. 


 심연 없는 세계에 무슨 의미가 있지? 돌아가서 대체 뭘 할 수 있냐고?


 이 순간만을 갈망하며 살아왔건만. 나는 나의 삶을 부정했다. 심연을 잃을 수는 없었다. 설령 다른 누구도 만날 수 없게 된다 해도. 

 내겐 그녀가 누구보다 소중했으니까. 


 “정말 그래도 괜찮아?”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쁘면서도 슬픈 얼굴. 무엇이 너를 슬프게 하는 걸까?


 “영원히 돌아가지 못해도, 그저 내 옆에 있는 걸로 괜찮아?”

 “난 이제 그것 말곤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힘을 줘 강조했다. 심연은 눈가를 닦으며 나를 끌어안곤 깊게 입맞췄다. 그리고. 


 “저 안에서 계속 널 바라봤어.”

 “네가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에 가장 필요로하는 모습으로 있어줬어.”

 “드디어 이어졌구나.”


 사랑한다며 한 번 더 깊이 입맞춘 그녀는.


 “그래서 벗어날 수 없다고 했잖아.”


 심연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