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붕이는 어렸을 때 사교성이 좋은 편이었다.


말도 오목조목 야무지게 잘했고 생긴 것도 귀엽다보니
또래 아이들부터 선생님들까지
모두 얀붕이를 좋아하고 아껴주었다.



그런 얀붕이가 얀순이를 만난 건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얀순이는 생긴 건 정말 인형같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독보적으로 귀여웠지만 항상 친구가 없었다.


이유인즉슨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같은 반 여자애들이 예쁜 얀순이를 질투해서 왕따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남자 아이들은 어릴 때 여자애들과 어울리면
 얼레리꼴레리 놀림을 받으니 자연히 얀순이와
 어울리려하지 않았다.


한번 낙인이 찍히자 고학년이 되어도 왕따는 지속됐다.



얀순이를 왕따시킨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계속 왕따당해왔던 아이들에게
막상 말해보라고 판을 깔아주면
쉽사리 하지 못하는 법.

그러니 상황은 나아질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얀순이를 구원해준게 얀붕이였다.



얀붕이는 아무리 봐도
예쁘고 탈도 없는 얀순이가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있는게 안타까웠다.


또 얀순이는 말수가 많지 않았지만,

가끔 하는 말을 들어보면
사람 자체가 재미 없는 아이는 아니었다.



그렇게 결론내린 얀붕이는 얀순이에게 가서



- 야 얀순아! 우리 친구하자! 안될거 뭐있노? 안될거 뭐있노? 아주 빠르게~!



라고 하며 우스꽝스럽게 친구가 되기를 자처했다.


얀순이에게 친구가 생긴 건 그 때가 처음이었다.


심지어 자기가 제안한 것도 아니고
저 쪽에서 제안해 준 것이다.


너무 크게 감동 받아 울음을 터뜨린 얀순이가
얀붕이에게 안겨오자

얀붕이는 한 편으로는 아찔해졌지만

우는 얀순이를 달래 준다고
등을 토닥토닥 쓰다듬어주었다.

얀순이와 얀붕이는 절친이 되었고

그렇게 인싸 얀붕이와 어울리면서
자연히 왕따를 벗어난 얀순이는 주가를 올리기 시작했다.


중학교에 가서부터는
격이 다르게 예쁜 외모로
얀순이는 여기저기 입소문에 올랐고

또래 남자 아이들의 많은 고백을 받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러나 얀순이는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준 그 날부터 일편단심 얀붕이를 좋아해왔기 때문에 이를 모두 거절했다.


헌데 그렇게 얀순이는
누구나가 알아주는 인기인이 된 반면에
얀붕이는 그 반대였다.


커가면서 얼굴이 역변하는 경우에 속했던 얀붕이는
귀여운 외모에서 그야말로 평균 외모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게 중고등학교를 같은 반 친한 아이들끼리
지내온 얀붕이.


졸업후 시간이 지나자 자연히 고등학교 친구들과 연락이 끊겼고,
대학교에 와서는 아예 친구를 만들지 못했다.


그나마 얀붕이를 좋아했던 얀순이가
얀붕이와 같은 대학교의 같은 과에 지원해서
함께 다니게 되었다는 게 위로 아닌 위로였다.


예쁘고 친구 많은 얀순이와

평범하고 친구 없는 얀붕이

결과적으로 둘의 신세가 바뀌고 만 것이다.



그렇게 친구도 없는 얀붕이에게 하필
최악의 가정사까지 찾아오고 말았다.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신 것이다.


얀붕이와 얀순이는 어릴 적부터 절친한 친구여서
서로의 부모님과도 친분이 있었다.


밥을 사주시거나 서로의 집에 놀러 가면
부모님들이 직접 요리를 해주신 적도 많았다.


이렇다 보니 얀붕이는 얀순이에게
부모님이 급작스럽게 상을 당하셨다며
장례식에 와줄 수 있겠느냐고 문자를 보냈다.


헌데 하필 그 때 얀순이는 동기들과 술자리에 있었고,

얀순이가 잠깐 전화기를 두고 화장실에 간 사이에
옆에 있던 얀순이의 여자 동기가 그 문자를 보고 말았던 것이다.


뭔 얼굴도 평범한 아싸새끼가
남친도 아니라던데 얀순이랑 맨날 붙어다니는 것이
평소부터 좀 안 좋게 보여서 벼르고 있었던 얀순이의 동기.


설상가상으로 얀순이가 갑자기
장례식에 간다고 빠지게 되면
얀순이를 보겠다고 온 남자애들이 빠지니
술자리가 파토날 것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얀순이의 동기는
술김에 얀순이의 전화를 들고 얀붕이한테 답장을 보내고 말았다.



- 여태 친하게 지냈다고 부모님 장례식에도 와달라고 하니? 너 나한테 관심있어? 어지간히 해 ㅋㅋ



당연히 오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이런 답장을 받은 얀붕이의 마음은 그야말로 미어졌다.


여태 나 혼자 친구 관계라고 생각했구나

내가 내 주제를 몰랐구나

아 이제 정말 나는 세상에 혼자구나


얀붕이는 장례식장에서 부모님을 보내드리면서
자기 곁에 아무도 남아있지 않다고 깨달았다.


그렇게 한참을 울다가 마음이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고 술자리를 끝내고 집에 돌아오는 동안
얀순이는 여느때처럼 얀붕이에게 연락하려고
전화기를 확인했다.


거기에는


자기가 보내지도 않은,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을만큼 매정한 말이
사랑하는 얀붕이에게 보내져있었다.


상황 파악이 되고 나서 얀순이는
늘 상냥하게 대해주시던 사랑하는 얀붕이의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충격적인 사실
+
누군가가 감히 내가 없는 사이에 입에 담기도 어려운 말을 얀붕이한테 보내놨다는 사실


이 두 가지 사실에 혈압이 올라
숨쉬기가 힘들어질 정도로 화가 났지만
동시에
오해부터 풀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얀순이는 뒤늦게 오해를 풀고자 전화, 카톡, 문자를 비롯한 할 수 있는 모든 연락을 했다.




- 얀붕아
- 미안해 내가 보낸거 아니야
- 옆에 있던 애가 장난쳤어
- 아니 어떻게 이런 장난을
- 얀붕아 오해야
- 전화좀 받아줘
- 어떻게 하면 믿어줄래 얀붕아? 장례식장은 어디야?
- 지금 당장 갈게
- 제발 말해줘 미안해 얀붕아 제발...




그 때쯤 얀붕이는 이미 마음이 무너져서
상주 노릇도 얼이 빠진 채로 하고 있었는데

이런 카톡이며 문자, 전화가 수백 수천 통이 와 있어도
이상하게 생각할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그 쯤 되니 검은건 글씨고 흰건 배경이다
라고 밖에 인식이 안될 만큼 정신이 흔들려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얼이 빠진 채로
한참을 울고
어찌저찌 장례를 치르고 나니



마음이 망가진 얀붕이는 말 그대로 폐인이 되었다.



그 뒤로 얀붕이는 누가 말을 걸어도


- 네
- 아니요
- 죄송합니다



라는 말 빼고는 못하게 되었다.


트라우마가 겹치다 보니 유사 실어증에 걸린 것이다.


다니던 대학교도 그만 두었으며
사정을 아시는 삼촌의 공장에 직원으로 들어가서
기계적으로 일할 뿐이었다.


얀순이는 매일 얀붕이를 찾아가서
오해를 풀기 위해 사과했지만

트라우마를 직접적으로 심어준 당사자가 찾아오자

얀붕이는 괴성을 지르면서
겁먹은 듯 몸을 웅크리고



-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


를 연거푸 반복하며 덜덜 떨기만 했다.



얀순이는 이제
사랑하는 얀붕이와 대화도 나눌수 없게 되었고
더해 얼굴조차 마주볼 수 없게 되었다.



얀순이가 눈에 띌 때마다
얀붕이가 너무나 무서워했기에
얀순이로서도 어쩔수 없었다.


그 때부터 얀순이의 머리에는



- 일을 이 사단을 낸 년을 잡아서 족친다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분노를 추진력 삼아서 일을 진행한 얀순이가
일을 벌린 동기를 납치하는 것은 순식간에 매끄럽게 진행됐다.


그렇게 이 사단을 낸 자신의 동기를 납치한 뒤

손톱을 하나씩 뽑고 소금을 뿌리고

손발가락을 짓뭉개고

소독하고 다시 치료하고

소독한 수술용 칼로 피부를 도려내고

끓는 물을 붓고

다시 치료하기를 반복하면서



- 있잖아, 왜 그랬어... 왜....



라고 끊임없이 물어보는 얀순이

하지만 고통으로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동기의 입에서는



- 어으...어... 아파... 아파...



라는 대답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얀순이는 분노에 가득차서



-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프다고 하지마 씨발년아!!!!!!! 얀붕이는 더 아팠을 거 아니야!!!!!!!!!!!!




라고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대었다.

그럼에도 이 동기는 쉽게 죽일 수는 없었다.



최대한 고통을 줘야 했기에,


죽여버리면 그 이상의 고통은 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1년쯤 지났을까


얀붕이는 삼촌의 도움으로
그 동안 만나기를 거부하던 할머니를 만나
이야기를 듣다가

기적적으로 제정신을 차렸다.



- 너까지 그 꼴이면 내가
먼저 보낸 너희 어미 따라가서 볼 면목이 없다



라는 말을 들었을 때,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모양이었다.



그 때를 기점으로 유사 실어증도 낫게 되었고
제대로 앞을 보고 살기로 한 얀붕이


얀붕이는 지금까지 두려워했던 것들을 마주보기로 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1년이 넘는 시간을 폐인으로 보낸 얀붕이는

얀순이가 한 줄로만 알았던 일련의 사건이
자신의 오해였음을 깨달았다.



더군다나 자신이 괴성을 질러대며
얀순이를 밀어냈음에도

오히려 계속 얀붕이에게 찾아와서
미안하다고 울며 사과했던 얀순이

얀붕이는 그런 얀순이에게 찾아가서
제대로 마주보고 사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얀붕이를 못 봐서 수척해진 얀순이에게
얀붕이가 1년만에 찾아갔을 때

얀순이는 자기 눈이 잘못 되었는지 의심했다.


꿈에 그려도 볼 수 없었던 사람이
자진해서 찾아온 것이다.


얼굴만 봐도 비명을 지르던 얀붕이가
직접 찾아왔다는 것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몰라도
정신이 들었구나

하고 상황 파악이 된 얀순이

얀순이는 빛의 속도로 냅다 무릎부터 꿇었다.



- 얀붕아 마음 수습은 좀 됐어...? 미안해... 진짜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꺽...꺽... 미안해... 그런 애들 이제 다시는 안 만날게... 용서해줘... 제발 버리지 말아줘...



혹시나 정신을 차린 얀붕이가

아예 관계를 끊어내려고 왔다

이런 말을 하지는 않을까


무릎 꿇고 엉엉 울면서 얀순이는 두 손을 모은 채
그야말로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얀붕이는

오해한 것은 자기인데도
오히려 얀순이가 미안해하는 것을 보고



- 아니야 오히려 내가 미안해... 그동안 마음고생 많았지?



라고 눈물을 삼키며 얀순이를 안아주었고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 등을 토닥토닥 쓰다듬었다.









그 후로 6년이 지나고,



얀순이는 얀순이의 딸을 재우면서

엄마와 아빠가 만나게 된 옛날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얀순이의 딸은 비몽사몽 졸린 눈으로 엄마에게 물었다.



- 나쁜 아줌마는 어떻게 됐어요?



- 글쎄~ 어떻게 됐을까요~?



얀순이는

잠든 얀붕이와 아빠의 팔을 베개 삼아 자는 딸의 얼굴을 행복하게 바라보며






- 드럼통을 타고 동해바다 용궁에 갔다고 말할 수는 없겠구나






라고 생각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