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상태창이 더는 열리지 않아….’

 

텅 비어만 있던 공간은 어느새 학교 운동장을 연상시키는 장소로 바뀌었다.

 

7명의 여성, 그리고 나. 

 

바뀐 공간에서 가장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쪽은 바로….

 

“클, 클라라.”

 

“믿을 수 없어. 당신이 정말 제 부군인 밀즈 님일 리가? 아니, 나도 죽은 건가요?”

 

나에게로 클라라 이클립스, 금발의 공작영애가 부채를 고고히 흔들며 다가온다. 저 품에 서슬 퍼런 단도가 숨겨져 있을 것만 같아 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엄청난 말괄량이에 프라이드가 높은 성격이라 실패한 걸 알면 다시 죽일지도 모른다.

 

“…네가 누군지 모르겠으나 그에게서 일단 물러서. 명령이야.”

 

청은발의 냉미녀, 유세라가 얼음장식이 박힌 검을 바닥에 박아 넣으며 경고하나, 속으로 쓴웃음만 나온다….

세라, 저 비치 년은 원작 주인공의 X을 빤 걸로 모자라 내 몸을 두 동강 냈다.

 

“명령? 당신이 어느 한미한 가문의 여식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미하다는 건 실력도 없이 방약무인한 네 쪽을 말하는 거 아닐까?”

 

유세라가 검을 두 손으로 꼭 누르자, 클라라를 향해 날카로운 얼음기둥이 솟아오른다. 

대한민국 랭킹 8위, 그녀가 일명 [빙염여제]라고 불리는 이유는 고유 능력이 얼음과 빙결을 다루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에게 방약무인하다고 하는 건지요? 이까짓 잔설(殘雪) 정도는 저에게 우습답니다.”

 

세라에 맞서 클라라가 부채를 휘두르자, 얼음기둥 주위를 자그마한 불꽃들이 둘러싸더니 그대로 녹여버린다.

강력한 화령(火靈) 이프리트의 가호를 받은 악역영애, 클라라답다면 답다.

 

‘망할, 이 쌍년들. 여기서도 쓸 수 있다니.’

 

이프리트의 가호나, [빙염여제]의 고유 이능을 사용할 수 있는 거라면 상황은 더 나빠졌다. 

나에게는 특별한 능력이라곤 오직 상태창과 현생에서 알던 지식뿐이었다.

 

 

“크읏. 강도진, 이 여자는 누구야?”

 

세라는 입술을 꽉 깨문 후 중얼거린다. 얼음에 불이라니 상성이 나빠도 나빴다.

제대로 붙으면 헌터로 활동한 유세라가 클라라를 압도하겠으나 상황이 너무 갑작스러운 것도 한몫했다.

 

“밀즈 님은 제 부군이랍니다.”

 

“부군? 강도진, 내가 아는 의미의 부군이야? 나, 나밖에 없다고 분명….”

 

둘의 대화에서 알아챈 게 있다.

『그 악역영애를 죽여라』의 집사 ‘밀즈’ 와 『아카데미의 F급 헌터가 되었다』의 ‘강도진’은 달라도 너무 다르게 생겼다.

 

“밀즈는 모노클을 쓴 장신의 여리여리한 흑발, 강도진은 탄탄한 몸에 머리를 노랗게 탈색했었지,”

 

-그러나 둘은 나를 각각 밀즈와 강도진으로 인식하고 있다.

 

“두 귀인 모두 부디 진정해주지 않겠사옵니까? 서방님은 본녀만의 서방이온데.”

 

당상화, 무협소설 『천마도』의 등장인물. 흑발녹안.

그녀는 나풀거리는 검은 도복으로 입가를 가리며 배시시 웃는다.

 

“…너는 뭐야. 사극이라도 찍어?”

 

연하늘색 빙검에 얼음결정을 집중시키며 차갑게 쏘아붙이는 유세라. 

 

“당신과는 나중에 놀아드리겠어요. 지금은 저 여자부터….”

 

상화에게 눈길조차 안주고 도깨비불을 더 늘리는 클라라는 눈빛은 이글이글거린다.

본격적으로 둘이 싸우기 직전에 싱긋 웃은 상화가 나비와도 같은 움직임으로 소매를 펼쳐본다.

 

“…비록 방계의 천한 여식이나 당문의 술은 미약하게나마 익혔사옵니다.”

 

타-악, 순식간에 클라라와 유세라의 목에 작은 바늘이 박힌다. 순식간에 몸이 마비되는 클라라와 유세라.

독공(毒公), 정파와 사파를 넘어드는 사천가의 자제답게 당상화는 각종 독을 지니고 다닌다. 그녀 자체가 뱀이자, 전갈이자, 지네인 셈.

 

“일다경의 삼분지 정도 몸을 못 쓸 터이니 머리를 식히시지요. 서방님, 회생하신 거 경….”

 

일다경의 삼분지라면 5분 정도. 상화의 위험 순위는 둘보다는 높은 편이다.

남편에게 무형지독을 항아리 독채로 쏟아버리는 냉혈한이니….

낯짝이 납빛으로 변한 나에게 천천히 다가오던 상화의 몸에 활시위가 스치고 지나간다.

 

“그쪽 귀인은 귀를 보면 묘족의 여인 아니 실련지요? 직접 뵈옵는 건 처음이온데 왜 본녀에게?”

 

“유피는 몸이 약해. 약이 없으면 유지도 못한다고. 너에게선 해로운 오라가 느껴져.”

 

사이버펑크 세계의 엘프 아가씨, 스노우벨이 연이어 빛이 나는 화살을 쏘자, 당상화는 무림의 여인답게 가볍게 피한다.

 

“제법이네.”

 

과학-마력을 담은 화살이 쉴 새 없이 떨어진다. 기업도시 ‘네오-서울’의 정수가 담긴 기술.

당상화는 그런 화살을 요호처럼 피하며 스노우벨에게 독수(毒手)를 펼쳐 보인다.

 

“본녀를 적으로 돌리는 사람은 누구도 살아남지 못 했사옵니다.”

 

설상가상.

5분도 채지나지 않아, 몸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영애와 헌터. 초인적인 육체라 가능한 일이다.

 

“…죽이겠어.”

 

“저기 말이죠. 눈에 거슬리는 건 밟아 드려야 상책이거든요.”

 

냉기와 열기, 초과학 화살이 한순간 어그로를 끈 당상화에게 집중된다. 

그녀는 이제야 한 떨기 꽃처럼 위태위태하게 피하면서 외친다.

 

“서방님, 시해선(尸解仙)이 되신 거면 소첩을 부디 도와주지 않겠사옵니까?”

 

“유피에게 다가서지마.”

 

“크읏, 저 여자 뭐야. 강도진, 대체 뭐냐고? [마탄의 사수]답게 말해봐.”

 

X까. 나는 입을 여전히 다물었다.

사 파 전, 나로서는 4명 모두 뒤지는 것이 가장 좋다. 살인마 새끼들….

 

타―앙! 이 어지러운 자리에 총탄 소리가 이 자리를 메운다.

 

“야하, 다들 진정하게나. 조수군?”

 

연기가 새어나오는 리볼버를 들고 한눈을 찡긋 해 보이는 탐정, 앨리스 리들. 눌러쓴 모자 사이로 날카롭게 빛나는 흑갈색 눈빛이 보인다.

 

“자네 주변에 별난 사람이 많은 건 알지만 저들은 너무 별난 것 아닌지…. 흥미가 동한다네. 그래도 이 자리에 우리처럼 평범한 인간도 있는데 자제해주기를 간곡히 부탁하는 바.”

 

앨리스는 『러브&보트』의 등장인물, 교복을 입은 권나연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다시 허공에 총을 탕- 쏜다. 

처음부터 추리보다는 사격에 더 자신이 있던 여자다.

 

“리들 언니, 대단해요! 다들 조용해졌어요.”

“글쿤, 난 명탐정이니까.”

 

자신 있게 팔짱을 껴 보이는 앨리스와 선망어린 눈망울로 바라보는 권나연. 확실히 이 둘에겐 초능력에 가까운 재능은 없다.

 

‘리들 씨하고 나연이….’

 

추리게임과 러브코미디, 아니, 망할 쓰레기 현대물의 등장인물이니까. 

 

“어머, 리들 씨. 저는 평범한 사람에서 왜 빼놓으시죠? 펫샵 주인일 뿐인데요.”

 

위험순위는 당상화보다 높을 인물, 공포게임 『STP재단의 사건부』 괴이이자 소환사인 신하나.

 

펫샵의 ‘펫’이 뭔가 현세의 것보다 꾸물텅거리고 끔찍한 존재를 말하는 것이라면 난 하나의 말에 동의할 수 있다.

-그녀 존재 자체가 코즈믹 호러니까.

 

“자네, 정말 평범한 사람이 맞는가? 난 이런 점에서 냄새를 잘 맡거든.”

 

의심스러운지, 탐정 아가씨가 볼을 부풀리며 검지를 들어 올린다.

 

“그럼요. 아, 이제 뭘 하고 싶은 건지 말해주실래요? 성호 씨랑 다른 차원의 여자들까지 불러놓고 대체 무슨 일일까요?”

 

신하나는 밤색 머리카락을 자신 있게 튕기며 입을 열었다.

그 여자가 말을 건건 이곳에 있는 어느 누구에게도 아니었다. 바로 허공에 말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