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때가 왔다.'
라고 생각하며 나는 수송기에 몸을 실었다.
최근 인접 국가에 대한 무력 시위 차원에서
우리 부대는 국경 근처에서 각종 훈련을 하는 중이다.
사격 훈련부터 시작해서 전차를 기동하거나,
국경선을 따라 폭격기를 비행시킨다거나.
지금 내가 하게 될 공수 훈련도 말이다.
그리고 내가 왜 때가 됐다고 생각하는 중이냐면,
나는 오늘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에 착지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음...
생각해보면 여태까지 내 인생은 거의 불행의 연속이였다.
내 무책임한 부모란 작자들은 나를 낳자마자
고아원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내가 2살 쯤 됐을 때
우체국을 털다가 민병대에 잡혀서 수용소로 보내졌다고 한다.
7살 쯤 됐을때 할아버지께서 수소문 끝에 나를 찾아
본인의 집으로 데려오셨다.
할아버지와 사는 동안은 유일하게 행복한 시기였다.
나는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옆집에 살던 이리나
라는 여자 아이와 함께 할아버지를 따라 숲으로 갔다.
할아버지께선 장작으로 쓸 만한 나무들을 베어오셨고,
이리나와 나는 나무 밑둥에서 버섯들을 찾아 따왔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할아버지께선 저녁으로 카샤를
만들어 오셨다. 별 재료는 안 들어갔지만 참 맛있었다.
저녁을 다 먹고 나면 할아버지는 전쟁 때 이야기를
풀어주시곤 하셨다. 언제 들어도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런 행복도 내가 16살 때 끝나고 말았다.
여느 날처럼 나무를 하러가신 할아버지는
쓰러지는 나무를 피하지 못하고 그만 깔려버리셨다.
병원으로 급히 이송했지만 버티시지 못하시고
잘 살아야한다는 말만 남기신 채 눈을 감으셨다.
그 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울다 지쳐 기절도 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는 모든 일에 의욕을 잃고
거의 숨만 쉬는 듯이 살아갔다.
학교에서도 거의 엎드려만 있는 나를 보고
보다 못한 이리나가 부모님에게 간청해
나를 자기 집으로 데려왔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감정을 밖으로 잘 표현하지 못해서 말 할 기회가
없었지만 그녀의 호의에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아무튼, 이리나 집에서 그녀의 가족들과 지내면서
그들의 도움 덕분에 나는 차차 기운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마음 한 편으로는 그녀와 그녀의 부모님에 대한
미안한 감정이 밀려들어왔다. 본인들도 먹고 살기 바쁠텐데
나까지 같이 살게되면서 먹여야 할 입이 늘어났기 때문에
죄송함에 각종 집안일을 도맡아 했지만
괜한 죄책감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리고 또 뭐... 솔직히 밝히자면
이리나에 대한 열등감도 살짝은 원인이 됐다.
법대에 진학하겠다는 목표를 가졌던 그녀는
항상 시험에서 1, 2등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서 나는 체육 빼고 나머지 과목은 평균 이하점이였다.
그래서 뭐 이것저것 복잡한 생각에 괴로워 하던 어느 날
결국 담임 선생님께 방과 후 이 일에 대해 상담을 요청했다.
선생님께선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시더니, 책상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보이셨다. 모병 포스터였다.
"VDV에 입대 해보는건 어떠니? 곧 졸업이기도 하고. 네 체력 수준이면 문제는 없을 것 같구나."
공수부대라...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께서도 공수부대라고 하셨었지.
선생님의 제안을 받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지원서를 작성하고 나왔다.
집에 돌아와서 이리나의 가족들에게 지원서를 썼다고
발표하니 모두 놀라 잠시 하던 행동을 멈췄다.
특히 이리나는 경악하며 나를 뜯어말리려고 했다.
"공수부대라고? 바실리! 거기 가면 버티지도 못할꺼야! 차라리 마을 민병대에다 지원 해보는건 어때? 여기에 남아있을 순 있잖아?"
"이미 지원서까지 내고 왔어 이리나..."
"왜 떠나려고 하는거야...?"
"미안... 언제까지 얹혀살 수는 없잖아..."
내 대답을 들은 이리나는 울먹거리더니
쾅 소리가 나게 문을 닫으며 방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죄송해요 아저씨 아주머니... 미리 말씀 드려야했는데..."
"아니 괜찮다 바실리. 근데 사실은 우리도 걱정은 좀 되는구나."
"걱정마세요. 선생님께서 제 체력이면 문제없다고 하셨어요."
"여기 있는게 부담스럽니? 우리 눈치는 안봐도 되는데..."
"하하... 그게 아니라요... 졸업도 다가오고... 슬슬 자립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 기특하구나."
시간이 흘러 나는 졸업을 하게 되고,
마침내 이리나의 집을 떠나는 날이 되었다.
이리나는 문을 걸어 잠구고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아보였다.
"이리나! 어서 나오렴! 바실리 이제 출발한다!"
"....."
"얘가 오늘따라 왜 이러는지 참..."
"이리나! 나 이제 가야 돼. 마지막으로 얼굴 한 번 보자"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조금 열렸다.
이리나는 얼굴만 살짝 문 밖으로 내놓고 나를 노려보았다.
밤새 울었는지 시뻘건 눈에 눈물이 살짝 고여있었다.
"이기적인 자식... 빨리 가버려라."
"이리나!"
"하하하... 괜찮아요. 가서 편지쓸게 이리나."
"됐거든!"
라는 말과 함께 문이 쾅 닫혔다.
"미안하구나 바실리. 이리나가 많이 서운한가봐."
"저도 이해해요. 그럼 이제... 가보겠습니다."
"휴가 나오면 곧장 와야한다? 알겠니?"
"어유, 당연하죠. 여기 말고는 갈 곳도 없는데요."
입대 한지 1년 차에 아프가니스탄 파병이 확정되었다.
선임들은 싹 쓸어버리고 바로 돌아오면 된다고 했는데,
그것은 명백한 오판이였다. 게릴라전에 뛰어났던
현지인들의 습격에 당한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였다.
싹 쓸어버리고 금방 돌아오겠다던 선임들은
계속되는 매복에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갔다.
나도 결국 파병 2년차에 다리에 총알을 맞아
부상을 입고 귀국 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엔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다리는 아파도
내심 기뻐했지만 그것도 잠시,
또 다른 고생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토예프 하사. 똑바로 대답하는게 좋을거야."
건너편에 앉은 남자가 내게 호통을 쳤다.
"당신은 지금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조사받고 있는 거라고."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런 말을 하는 겁니까?"
"그 날 그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건 자네 하나 뿐이였어. 왜일까?"
어이가 없었다. 그럼 나는 거기서 죽었어야 했다는 건가?
"내가 운이 좆나게 좋았나봅니다."
"이봐!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해!"
남자가 책상을 주먹으로 쾅쾅 치면서 호통을 쳤다.
젠장, 왜 이렇게 시끄럽게 구는거야?
"내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나는 그저 목숨을 걸고 싸웠을 뿐입니다. 대체 누가 이런 터무니없는 제보를 한겁니까?"
"상부에서 특별 지시가 내려왔어. 자네는 이제 혐의가 밝혀질때까지 계속 우리의 감시 대상이야."
그 날 이후로 그들은 내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감시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내 동료들에게도 내가 진짜로 적과 내통했다는 양
이간질을 시켜놔서 동료들도 내게서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너무 억울했다. 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러는거지?
내가 KGB에게 집중 조사받을만큼 큰 잘못을 한게 있었나?
삶이 또 다시 피폐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공수 훈련날이 다가오자 결심하게 된 것이다.
이 나라를 벗어나자. 이대로 가다간 정말 여기서 죽겠다.
여기서 탈출하겠다는 결심으로 화물칸에 올랐다.
수송기가 낙하 고도까지 이른 후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
후- 수도 없이 해왔던 강하지만
오늘은 왠지 좀 떨리네.
강하를 알리는 초록불이 작동했다.
"강하! 강하!"
라는 외침과 함께 달려가 비행기에서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
"죄.. 죄송합니다! 놈이 탈출해버렸습니다!"
".....탈출이라니?"
거침없이 서류를 작성하던 여간부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국경에서 강하 훈련 도중에 월경했습니다..."
"흐으음..."
여간부는 고민에 빠진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외람된 말이지만... 도대체 저희가 이 자를 쫒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록상으론 아무 문제 없어보이는데 왜 위조된 혐의까지 붙여서 쫒는 이ㅇ.."
"상부의. 지시다."
여간부는 얼어붙는 듯한 표정으로 부하를 노려보았다.
"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봐."
부하가 나간 뒤 여간부는 긴장을 풀렸는지 책상에 엎어졌다.
"후우우...."
여간부는 엎어 놨던 액자를 다시 원래대로 해놓았다.
액자에는 기관총을 잡고 포즈를 취한 바실리의 사진이 들어있었다.
사진 속 바실리의 표정은 정말 즐거워보였다.
사진 속의 바실리를 보다 여간부도 피식 웃었다.
"후훗, 역시 쉽게 잡힐 녀석은 아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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