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회용 이긴한데..몇 화에 나눠도 될지 모르겠어서 일단 소설탭에 올립니다. 주최자분께서 답하시는대로 수정하던가 하겠습니다.

순애는 몰라도 얀데레는 또 처음 써보는지라 괜찮은지 모르겠네요.

추천하는 음악
https://youtu.be/1o84y-5-cO0

사유: 제가 이걸 들으며 썼습니다. 어울릴지는 모르겠고

짤은 갤에서 주운 동기의 모티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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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사랑이 너무 무거우면 생기는 일-1

처연하게라는 말은 그녀를 지칭하는 단어일터였다.
가랑비가 내리다 그친 날, 변덕스런 무지개 아래에서 그녀는 분명 처연하게 보였다.

평소라면 지나쳤을 광경에 말을 걸어버린건 이제 기필코 내 목까지 조르는 붉은 실 때문일까. 운명이라는 말로 포장된 올가미. 그 끝을 붙잡고 놔주질 않는 것은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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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한지혜. 같은 대학 그리고 같은 학번의 임상심리학과 재학생이라고 했다. 하필 로망을 따라 길을 선택한 것이 같았던 탓에 우리는 금세 친해졌다.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조금은 후회하고있다. 그래, 아주 조금은. 아니 사실 많을지도 모르겠다.

"너는 왜 여자친구를 안 만들어? 생화학과면 동기중에 여자도 많을거아냐."

"글쎄..과생활은 거의 안하니까. 과방도 거의 안 가. 가봐야 괜히 부담스럽고. 여자랑 얘기하는 것도 누나빼면 너밖에 없다."

흐응하며 콧소리를 내던 지혜. 그 눈초리가 초승달처럼 휘어지는걸 그때의 나는 그저 아름답다고만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저 밥친구에서 시작했던 관계가 시험을 두번 정도 치고나니 술친구가 되는건 금방이었다. 교수의 욕부터 장학금 얘기, 듣기 힘든 집안 사정까지. 술자리는 술집부터 편의점, 그리고 서로의 자취방까지 달라졌다.

"진짜 하선아, 너가 최고야. 교수도 동기들도 다아 좆같은데! 심지어 엄마도 내가 좆같다고 하는데 너는 지이인짜로..사랑해 하선아."

"야야, 너 취했어. 지난번처럼 또 맨바닥에 드러눕기 싫으면 적당히 꺾어마셔. 술도 약한게 뭔 따르자마자 원샷을 때리냐?"

그때의 나는 지혜에 대한 마음을 반쯤 포기하고 있었다. 내 주제에 너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너는 나와는 달리 빛나고 있는 존재라며, 은근슬쩍 가까워지는 지혜를 밀어내곤 했다.

하지만 네 생각은 조금 다른 듯 했다. 슬쩍 살핀 프로필에는 나와의 투 샷 아래 인생에는 학점보다 중요한 게 많다, 라는 지혜답지 않은 말이 적혀있었으니까. 솔직히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지혜의 모습은 누가봐도 나에게 호감이 있었으니까.

다음 학기, 과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내가 양다리를 걸치고다닌다는 소문이었다. 얘기 한번 나누지 못한 동기 남자애들, 선배들 가리지않고 진짜냐고 묻는 통에 수업에는 지각하기 일쑤였다.

여자애들의 싸늘한 눈초리는 덤, 항변할 기회따위 아싸인 나에게 주어지지않았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건 유일한 술친구에게 하소연하는 것뿐.

"니네 과에서 그딴 소문이 돈다고? 아니, 다른 놈도 아니고 널 가지고? 웃긴다 진짜. 줘도 못먹는 새낀데, 안 그래?"

"줘도 못 먹긴 뭘 줘도 못 먹어. 하, 진짜 군대나 갈까 생각중이야. 어차피 복학해도 아싸인건 똑같은데. 최소한 그러면 신입생들이라 말은 안 걸거아냐."

너의 말에 반농담 삼아 휴학을 언급했을 때,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린걸 보고 짐작했어야 했는데. 갑자기 변해버린 지혜의 모습에 나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휴학? 날 두고 휴학을 하겠다고? 농담이지? 농담이라고 말해. 당장."

"..농담이지. 왜 그래 갑자기? 나도 군대 가긴 싫어. 가봐야 편지 써줄 사람도 얼마 없는데 뭐."

장난이라며 애써 가라앉혔지만 지혜의 눈에선 일말의 불안감이 사라지질 않았다. 술잔이 비어가는데도, 그 눈빛에선 무언의 압박같은게 느껴질 정도로. 그래서 그 날은 과음을 했다. 이 꺼림칙한 감각을 술로나마 씻어내리고 싶었으니까.

다음날, 술 때문에 자체휴강을 때린 내 방문에는 있을리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크 소리, 택배를 시킨 적도 없는데 이례적인 일이었다. 문고리를 돌리자 서있는 것은 지혜였다.

"아침부터 웬 일이야? 난 골이 아파서 수업 쨌는데..넌 괜찮아? 어제 엄청 달렸잖아."

"그럴까봐 친히 요거트까지 사왔지. 고맙다고 말해."

그러면서 건넨 것은 비요뜨 하나. 성큼성큼 들어와선 내 옆에 걸터앉는 지혜의 모습에 나는 당연한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너 지금 전필 있다고 하지않았냐? 교수 출석점수 짜대매. 안 들으러 가?"

"그런건 이제 신경 안써. 어차피 시험만 잘치면 적당히 주던데?"

그러고는 마치 자기 집처럼 냉장고며 부엌을 이잡듯이 뒤지는 모습. 구태연한 잔소리가 뒤를 따랐다. 하필 장을 보려던 날 술을 먹자며 부른건 다름아닌 지혜였다. 그러니 이 사태의 절반은 응당 그녀의 몫이리라.

"이러니까 애가 빼빼 말랐지. 어떻게 냉장고에 고기 하나 없니 너는. 에휴, 너는 나 없이 어떻게 사냐."

"그래도 너 없이 20년간 잘 살아왔거든?"

나의 대꾸에 돌아온건 날선 시선과 무언의 압박. 답정너라고 하던가, 결국 나는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지혜가 원하던 답은 따로 있었으니까. 아직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라는 말이 입안에 맴돌았지만 차마 내뱉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

"지혜님이 안 계시면 굶어죽을겁니다. 예, 뭐 그렇죠."

"그렇지? 역시 너도 내가 옆에서 잘 챙겨줘야겠지?"

임상심리학과라는 전공답게 그녀는 내 본심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우유부단한 내 성격 앞에 단 하나의 답을 밀어넣으며 강요하는 것. 그것만으로 지혜는 원하던 대답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네..오늘처럼 옆에서 잘 챙겨주세요."

그제서야 활짝 웃는 지혜. 이런 말하긴 좀 그렇지만, 이때부터 나는 그녀의 어긋난 부분에 대해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어딘가 깨져버린 마음. 술자리에서 풀어놓았던 가정 환경 탓일지 혹은 아직 나에게도 말하지않은 과거의 흉터일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그녀가 임상심리학과라는 취업과 영 딴판인 과에 진학하게 된 이유를 상당부분 차지하고 있으리라.

"간단하게 만들어본 수프야. 내가 만든거니까 남기지말고 다 먹어. 냄비에 더 있으니까 그것도 더 먹고."

처음 먹어본 지혜의 손요리는 맛있었다. 우리 집에 있는 재료라고 하기도 뭣한 부스러기들로 이런 맛을 창조해내다니. 상당히 오랜 기간 요리로서 자립했다는걸 절로 느낄 수 있었다. 지혜는 바닥까지 비운 나를 흐뭇하다는 듯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

"다 먹으면 장보러 가자. 우리 저녁 먹을 것도 없으니까."

호칭이 너에서 우리로 바뀐 것을 겨우 인식한 찰나, 요란스레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실험실의 선배. 1년 휴학한지라 학년 자체는 같지만 특유의 분위기 덕에 선배라는 호칭을 저절로 붙이게된다.

"네 선배. 아, 센트리퓨지 돌린 샘플들 확인하라구요? 밥만 먹고 바로 갈게요."

지혜와의 계획은 이 전화로 어그러져버렸다. 최대한 미안함을 담아 쳐다본 그녀의 표정은 나로선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물건이었다. 앙 다문 입술, 노기가 잔뜩 어린 눈꼬리에 냉기가 풀풀 흘러나오는 목소리까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거친 말투가 그 분위기에 정점을 찍었다.

"그년 누구야? 지가 뭔데 너를 막 불러내는거냐고."

"미안, 실험실 선배야. 실습중인게 있어서.. 금방 끝내고는 싶은데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네."

지혜는 순식간에 내 멱살을 부여잡고 시선을 맞췄다.
소름끼칠 정도의 태세변환, 내가 휴대폰을 놓친 것은 당연할 정도였다. 잔뜩 흔들리는 갈색 눈동자는 오로지 나에게만 초점이 맞춰지고, 동공 역시 흥분의 여파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여자는 나 밖에 없다고 그랬잖아? 이건 뭔데, 나는..나는 너뿐인데. 너는 선택지가 많나봐?"

"아냐. 큭, 진짜로 아냐. 그냥 같은 연구실이라, 흐으, 얘기도 거의 안해. 진짜야."

"그럼 사정이 있어서 못 가겠다고 말해? 저딴 갈보년보다 나랑 장보러 가는게 더 중요하다고, 행동으로 보이란말야!"

채 끊지 못한 전화기 너머로 선배의 말이 웅얼거리며 들려왔다. 잔뜩 충혈된 지혜의 눈을 애써 피해가며 휴대폰을 주워든다.

"아 죄송해요. 제가 사정이, 사정이 좀 생겨서..내일 꼭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내일? 헛소리말고 와. 너 점심 끝나고 수업도 없더만. 박사님께 너 샘플 버린다고 말하기전에 적당히 하고 와라. 끊는다."

진퇴양난의 상황. 시선의 압박에도 내가 원하는 대답을 내놓지 않자 붉어진 눈가에는 눈물이 매달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눈물이 커지다못해 흘러내린 직후.

"그래? 좋아. 꺼져, 꺼지라고! 해보자는거지? 니가 시작한거야. 각오해. 후회하게 해줄테니까"

그러고는 나를 벽에 거세게 밀치고 나가버리는 지혜. 이불 위로 지혜가 흘린 눈물이 점점이 남아있었다. 시계를 보자 지난 시간은 30분이 채 안되는 시간, 여태까지 살아온 인생 중에 가장 길게만 느껴지는 30분이었다.

그리고 이 30분은 세달 간 벌어질 악몽의 전초곡에 불과했다는걸, 이 시점의 나는 아직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