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회에는 미참가합니다. 근데 완결은 낼것..
야스씬은 나올수도 있고 안 나올수도 있습니다.

1편:https://arca.live/b/yandere/7653801
2편:https://arca.live/b/yandere/7797989

추천곡
https://youtu.be/JS91p-vmSf0
사유: 쓰면서 이거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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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자 보이는 것은 묵빛 머리칼이었다. 채광따위 고려하지 않은지라 오직 동틀녘에만 몇시간을 허락하는 햇빛이 지혜의 머리칼에 부딪혀 이리저리 깨어진다. 어제의 광기어린 모습은 온데간데 없는 처연한 모습.

목이 아파 냉장고에 가는 길, 붉은 손자국이 멍처럼 남아있는게 보인다. 간밤은 일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선명하게 남아있는 통에 오늘은 때이른 폴라 티를 입어야만 할 터였다. 슬쩍 살펴 본 시계가 가리키는 시각은 7시 34분. 평소보다 30분은 더 일찍 일어난 셈이었다.

아침은 어제 먹지도 못한 채 식어버린 갈비찜이었다. 오늘은 금요일, 지혜도 나도 수업 자체는 없는 날이다. 다만 자연대생이 으레 그렇듯 나는 랩실이라는 족쇄에 묶여있을뿐. 하지만 섣불리 집을 나섰다가는 어제보다 더한 사태에 빠지게 될 터였다.

지혜가 왜 이러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린 시절 이혼했던 부모님이 자신을 서로 맡아 기르라며 떠넘겼다고도 했고, 할머니가 화냥년의 딸이라며 심심찮게 구박을 일삼았다는 얘기도 해줬다. 너에게만 하는 이야기라면서. 하지만 정식으로 우린 사귀는 사이조차 아니었다. 이제는? 모르겠다. 지혜와는 많은 얘기를 나눠볼 필요가 있겠지.

"지혜야. 아침이니까 일단 일어나자."

"으음..키스해주면 일어날게."

서투르게 입을 맞추자 혀가 감겨온다. 아침부터 호흡곤란으로 만들려고 아주 작정을 했는지 떨어질 생각을 않는 지혜의 입술. 그러면서도 바싹 안겨오는 모습에 차마 밀어낼 수 조차 없다. 결국 20분은 더 침대에서 뒹군 끝에 식탁으로 향할 수 있었다.

"갈비찜 맛있어? 다행이네. 좋아하는 요리 말해. 다 해줄테니까."

지혜는 만면에 미소를 띈 채 밥을 먹는 내내 나만을 바라보고있었다. 숟가락은 뜨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결국 내가 밥그릇을 비우고서야 깨작거리는 젓가락.
다분히 풀린 분위기에 겨우 물어볼 용기가 솟았다.

"나는 진짜 좋긴한데, 그..왜 이렇게 까지 하는거야?"

지혜는 물을 마시고서 대답했다. 직접 지혜의 입으로 들은 것은 처음이었던 이야기들, 여태 짐작만 해왔던 일들이 풀어져나온다.

"그 날 죽으려고 했었어. 네가 말 걸었던 날에."

"살아봐야 행복할 것 같지도 않았거든. 교수가 나더러 그런 말을 하더라. 학생은 행복이라는 단어를 모르는것같다면서. 우리 과는 그런 이들이 공부하기엔 맞지 않을거라고 ."

"아빠는 그냥 용돈만 많이 주면 애는 알아서 큰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 할머니는 말 다 했고. 그래서 그 날 그냥 죽으려고 했어."

"무지개를 보고선 처음 든 생각이 저 끝에 목을 매달고 싶다는 거였어. 웃기지?"

담담한 말투, 자신의 일을 마치 영화 감상하듯 늘어놓는 지혜. 행복한 가정은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고 했던가. 지혜의 모습은 말하는 내내 무표정하고 때로는 처연해보였다. 마치 우리가 처음 만났던 무지개 아래의 그 날처럼.

"그때 네가 나타난거야. 너 덕분에 아직 살아있는거니까 고맙다고 말해야겠지. 고마워, 하선아."

그러면서 배시시 웃는 지혜, 저 웃음을 보고있노라면 머릿속이 온통 헝클어진다. 기껏 생각해둔 위로의 말도 전부 사라질 정도로. 벌려진 입에서는 야속하게도 어떤 말도 나오지 못했다.

"그러니까 너랑 나는 운명이 맺어준걸로 생각해. 결국 나한테는 살아갈 이유가 너밖에 없었던거야."

어째서 결론이 그렇게 나오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도 그 두 눈에 담긴 마력에 져버리고 말았다. 대답은 언제나 그렇듯,

"응..나도 그렇게 생각해. 운명이지 완전."

긍정이었다.

***

결국 실험실에 대한 얘기를 꺼낼 수 있던 건 30분은 더 지나고서였다. 출근까진 채 15분도 남지 않은 시점, 잔뜩 긴장한 내게 돌아온 대답은 맥빠지게도 환한 긍정이었다.

"괜찮아. 너도 취업하는데 필요하다며? 어젠 내가 조금 예민해서 그런거였으니까, 신경쓰지말고 다녀와. 저녁은 파스타 해둘게."

싱글싱글 웃으며 대답하는 지혜. 그 미소를 뒤로하고 나서는 와중 들려온 혼잣말에 실려있던 악의는 괜한 의심이었을까.

"....너는 어차피 곧 나만 보게 되어있으니까."

결국 실험실에는 5분정도 지각하고 말았다. 박사과정생의 눈초리를 애써 무시하고 가운을 입을 무렵 선배가 말을 걸어왔다.

"어제 여자친구랑은 잘 풀었어?"

"안 그래도 어제 선배때문에! 하..아니에요. 적당히 풀었으니까 신경 꺼주세요. 졸업반 아니셨어요? 논문 발표도 금방인데."

"그래? 역시 그랬구나. 하긴 그런 소문을 낸걸 보면 보통내기는 아니겠지. 목 하나로 흉터가 끝나서 다행이네."

선배의 말에 황급히 손거울로 목을 살피자 손톱자국이 작게 남아있었다. 폴라티를 입는다는걸 깜빡한 탓에 그대로 드러난 흉터. 분명 어젯밤의 작품이겠지. 그건 그렇고 소문이라니, 다시 물어보려 돌아본 순간 선배는 이미 사라져있었다.

결국 선배를 다시 만난건 점심 무렵이었다. 바쁘게 실험을 돌리던 와중, 점심시간이 되어 찾아간 박사과정생의 자리에는 머리를 싸매고선 신경질을 부리는 불쌍한 대학원생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실험값이 예상치와는 너무 다르게 튀어버린 모양.
당연하게도 오늘의 점심은 선배와 단 둘이서 불편하게 먹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귀결되었다.

"치킨까스라, 맛잘알이네."

"..이게 제일 싸서 시킨건데요."

그건 그것대로 좋다며 웃는 선배. 어제처럼 짖궂은 말로 신경을 긁진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만 툭툭 내뱉는 말들이 다른 의미로 신경을 끌 뿐.

"너같은 아싸한테 누가 그런 유언비어를 풀었나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말이야."

그러고선 이어지는 폭언. 너무나도 직설적이라 화가 나기는 커녕 오히려 궁금증까지 자극하는 정도였다.
대체 무슨 근거로 이딴 소리를 해대는지 말이다.

"너, 여자친구랑은 헤어지는 편이 낫겠다."

"갑자기 무슨 소리신지..어제는 저한테 잘 해보라고 포스트잇을 붙여놓으셔서 그 사단을 내놓으시더니, 이젠 헤어지라구요? 아무리 선배라고해도 너무하시는거 아니에요?"

하지만 선배는 그런 내 말에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말을 이어놓았다.

"그 소문을 낸 주인공이 누구일것같아? 네 동기, 그것도 아니라면 선배들 중 너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있을까? 천만에. 네 이름을 아는 사람이 더 적을걸."

"어제 슬쩍 신경을 긁으면서 반응을 떠봤는데, 너는 전혀 그럴 깡이 없을게 뻔해. 나도 학교에서 짬을 좀 먹어서 이런건 빠삭하단 말이지. 그리고 뭐, 여자의 감이라는 것도 있으니까 말하는건데."

"그거 백퍼센트 니 여친이라는 분께서 퍼트린거야."

기계적으로 밥을 먹어 없애던 내게 폭탄을 떨궈버린 선배. 나로서는 애써 회피해왔던 일말의 가능성을 눈앞에 들이대며 윽박지르는 모양새다.

"그걸 선배가 어떻게 확신하시는건데요. 객관적인 증거같은건 아무것도 없으시면서, 개인사정이니 그냥 좀 내버려두시라구요!"

"어제 슬쩍 떠본 포스트잇이 네 목에 손톱자국으로 돌아왔다는게 첫번째, 두번째는 아마 곧 알게될거야. 니 여친의 수작질이 그냥 과에서 도는 소문으로 끝나진 않을테니까."

한참을 말이 없던 식사 자리가 파국으로 치닿는건 금방이었다. 휴대폰을 바라보던 선배가 건네준건 우리 대학의 페이스북 커뮤니티. 적힌 내용에는 악의가 가득 담겨있었다.

"와..이렇게 터뜨린다고? 축하해. 내 말이 그대로 실현된 것같으니까. "

슬쩍 본 휴대폰에는 통칭 '저격'글이 올라와있었다. 내 신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채, 여자친구에게 자비로 낙태를 강요한 인간쓰레기로 말이다. 증거로 제시된건 문자기록에 병원 진단서, 초음파 사진. 그 주인공이 나였다는 점만 아니었다면 필시 진위따위는 의심조차하지 않았겠지.

"이게..이게 다 뭔지, 선배는 다 알고있었던거에요?"

"내가 말했지. 여친이랑 헤어지라고, 뭐 이제와선 그러기에도 늦었을지도 모르겠네."

선배는 그러면서 내게 미소지었다. 애잔함과 연민 그리고 약간의 욕망까지 섞인 미소.

"어디 한번 열심히 해봐. 재밌어보이니 나도 손 닿는데까진 도와줄게."

아무래도 내가 엮인 인연은, 운명을 재단하고자 하는 인형술사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붉은 실에 걸린 마리오네트에 불과할테고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인형이 되어버릴터였다.

지혜는 그런 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