좆됐다.


"...얀붕아. 누구야? 응? 누구야?"


좆된 게 맞다. 나는 좆됐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렇다. 내가 다른 친구들에게 비밀로 해왔기에 그동안 아무도 몰랐던, 나의 '숨덕 레이더'가 미친 듯이 돌아가고 있다.


"잠시만, 얀순아. 잠깐만..."


위이이잉ㅡ! 위이잉! 위이이잉ㅡ!


전화가 울려온다. 타이밍 좋게. 아니, 타이밍이 몹시 나쁘게.

씨발.

억지로 전화를 껐다. 

그래, 조금 더 머리를 쥐어짜내보자. 

그야말로 '죽은 눈'으로 나를 궁지에 몰아넣고는, 이렇게 말로 나를 폭행하는 사람.

그러니까... 이런 캐릭터 유형을... 간단히 말해보면 다음과 같다.


"누구냐고. 얀붕아? 응? 말을 해. 왜 말을 안해? 나한테도 말을 못하는 거야? 응? 못해? 응?"


얘, 얀데레다.


---


그래, 아마 그때부터 나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얘들아! 맞다! 까먹고 있었다! 중대발표! 중대발표 상황이 왔음!"


"얀붕아, 얀순이 좀 조용히 시켜. 쟤는 뭐만 하면 중대발표..."


"아니아니, 이번엔 진짜! 진짜 중대발표야. 진짜로!"


"그래...뭐, 들어는 줄게. 뭔데?"


딱 한 달 전이었다. 점심 시간이었을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여파로 인해, 칸막이가 쳐진 식당에서 식사하고 있었을 바로 그때.

평소 밥을 같이 먹던 9명의 친구들끼리, 뭔가 외롭다는 생각과 함께 속닥속닥 옆칸으로 넘어가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바로 그때.

어쩌면, 고3이었던 우리들에게 가장 쓸쓸한 시간이 아닌가 생각하고는 했던, 바로 그때였을 것이다.


언제나처럼 얀순이가 우리를 주목시키고, 칸막이 너머에서도 들릴 법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주변 친구들에게도 들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을 즈음.


그 아이는 그렇게 말해왔다.


"얀붕이, 나랑 사귄다."


"...뭐?"


"오늘 만우절 아닌데."


"개구라 하지 마라. 가뜩이나 피곤해 죽겠는데..."


당연히 장난친다는 생각이었겠지. 모두의 짙은 다크서클에선, 이 일의 티끌도 관심이 없다는 게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그럼에도, 힐끗 모두의 이목이 다시금 나에게로 쏠렸고,


"...흐."


나는 아무 말 없이 밥을 먹었다.


"너 고3이라 연애 안한다면서. 이새끼 또 우리 놀리는 거 아냐?"


"아니 ㅋㅋㅋ 애초에 ㅋㅋㅋ 김얀붕 이 새끼랑 황얀순 이 새끼랑 붙어먹을 일이 뭐가 있냐고 ㅋㅋㅋㅋㅋㅋ"


"한 명은 학급 회장이고, 한 명은 전교 3등이고... 음... 일단 둘이 어디 놀러나간 적도 없지 않냐?"


"아니 병신들아, 당연히 둘이서 우리 놀리려고 존나 포커페이스 깔고 있는 거잖아. 모르겠냐?"


제육볶음은 늘 맛있는 것 같다. 급식 아주머니께, 평소 잘 먹는다는 인상을 심어준 건 다 이런 때를 위해서였지.

나는 급식판 가장자리까지 싹싹 긁어 밥에 붓고는, 비비기 시작했다.


"...뭐야. 얀붕아. 너 왜 아무 말도 안 하냐?"


드디어 좀 눈치있는 애가 생긴 건가?

흥미롭다. 그래도 제육볶음이 먼저다. 자고로 밥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까.


...정적이 흐른다.

아니, 고요한 건 이 근처만이다.

하지만, 이 작달막한 칸막이 덕분인지, 그 고요함은 내가 더이상 견디기 힘들 정도로 강해지고 있었다.

주위의 친구들은 어서 상황을 설명해 보라는 듯, 나를 은근히 부추기고 있었다.

싸악, 싹ㅡ. 식판 긁는 소리만이 내 귓가에 울려퍼졌을 때.


"투투임. 2200원씩 걷어. 얀순이랑 잘 쓸게."


나는 입을 열었다.


"...뭐ㅡ"


"뭐어어어어어어??? 아니 진짜? ㄹㅇ로? 정말로? 아니 왜 우리한텐 말 안해줬어?"


"와, 김얀붕 미쳤네? 아니 왜 배신을 때려? 애초에 너 얀순이랑 안 친하지 않았냐?"


"씨발...김얀붕도 여친이 있는데...라고 말하기엔 얀붕이가 좀 아깝긴 하다."


"너 뭐라 했냐 씨발?"


"아니, 얀순아. 농담이잖아..."


"그나저나 얘네 사귀고 있던 거 솔직히 알던 사람 손?"


"애초에 아는 사람이 있었냐? 난 진짜 ㄹㅇ 낌새도 몰랐는데..."


나는 자기들끼리 떠드는 친구들을 무시하곤, "식판 갖다놓고 온다." 며 먼저 급식실을 떠났다.

그리고 조용히, 얀순이는 내 뒤를 따라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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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식실을 나오고 운동장을 천천히 걷고 있을 때였다. 나는 아무 행동 없이, 그저 말 하나를 툭 던졌다.


"왜 그랬어?"


"......"


"안 그러기로 했잖아. 싫었어?"


"...그래도, 그, 좀, 알잖아? 나. 그러니까... 아니다. 미안해. 너랑 합의한 거였는데."


얀순이는 우물쭈물하며 내 팔에 안겨왔고, 나는 못본 척 계속 걸었었다.

평소 집에서처럼 내게 애교를 부리는 얀순이를 가볍게 떨어트리곤, 나는 계속해서 얀순이에게 훈계하기로 마음먹었었지.


"됐다, 됐어. 무슨 투투데이에 약속을 깨먹어... 나랑 너랑 약속 만든 것도 얼마 안 되는데."


"으음...잘못했어어... 한 번마안... 용서해줘어..."


"...진짜 한 번 만이야. 다음 번부턴 안 그럴 거야. 정말로."


"으응~, 알았다고, 정말. 되게 사람이 깐깐하다니깐..."


그래도, 그 애의 애교에 금세 넘어가버리곤 했었지만.

얀순이가 내게 잘못한 일이 있던 날에는, 집에서 나를 유혹하곤 했다.


남몰래 동거한다는 두근거림과 처음 마셔보는 술기운에 취해, 첫경험을 해본 것도 벌써 보름은 지났다.

첫키스는 달콤한 자몽 향이 났다. 무슨 짓이냐며 놀랄 새도 없이, 나는 분위기에 취해 얀순이와 살결을 맞대었다.

그때의 쾌락은 그 어떤 때에도 비할 것이 아니었다. 평소 소꿉친구로 있던 그 아이가 아니었다. 그 아이도 여자였다. 처음으로 내가 그 아이를 여자로 인식했다. 부드러운 살결, 스르륵 넘어가는 단발머리. 그리고 그 입술...


양쪽 부모님이 우리들을 믿었기에 동거했던 우리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날 이후 아침은 뭔가 어색한 기분마저 감돌았었다. 하지만 그 기분 탓에, 장난삼아 사귀자고 했던 우리가 연인의 풋풋함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얀순이를 훈계한다는 그 뒤에는, 오늘 밤에도 하고 싶다는 투정이 살짝 섞여있었다.

물론, 내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그 애의 취향에 맞춰줘야 했기 때문에 나는 되도록 완벽한 모습을 보이곤 했지만,

나와는 반대로, 간혹 얀순이는 일부러 약속을 깨고 내게 응석을 부려오곤 했다.

...오늘은, 그게 좀 지나치긴 했지만.


"아아아, 머리 쓰다듬지 마. 존나 헝클어지잖아..."


"오늘 약속 어겼으니까 이정도는 당연한 거잖아. 그보다, 정말 왜 그런 거야?"


"응? 뭐가?"


"아니, 사귄다는 거. 사귀는 건 양쪽 어머니께 먼저 말씀드리고 말하기로 했잖아. 왜 갑자기 말한 거야? 솔직히 화는 별로 안 나는데, 그래도 알고 싶어서."


"...음. 그냥."


"그냥? 그냐앙? 내가 널 몇 년을 같이 봐왔는데, 뭘 그냥이냐? 솔직히 까봐. 말하면 뽀뽀해줄게."


"그냥 네가 하고 싶은 거잖아. 이런 운동장에서 할 거야? 그리고 멘트 존나 아저씨같아."


"아, 뭐가 되었든 간에. 진짜 말 안해줄 거야? 나 삐질 거야? 막 애들 앞에서 흥흥, 이러고 다닐 거야?"


내가 가볍게 애교를 부려주자, 얀순이는 "아 ㅋㅋㅋㅋ, 그게 뭐야, 존나 웃겨 ㅋㅋㅋㅋ"라고 말하며 내 등을 후려갈겼다.

좀 따갑긴 하지만, 얀순이를 위해서라면, 이정도로 만족했다.


"...음...그래. 말해줄게. 그냥 말해줄게."


"뭔데?"


"..."


"아, 빨리, 빨리 말해 봐."


"좀 질투나서."


"응? 뭐라고?"


"아, 씨발. 됐어. 나중에 집 가서 말해줄게."


"그래, 알았어. 누구한테 질투 났는지 좀 궁금하긴 하다. 그렇지?"


내가 능글맞게 되묻자, 얀순이는 얼굴이 빨개진 채 주먹으로 내 등을 후려갈겼다.


"크헉...!"


"아니, 말을 들었으면 들었다고 얘기를 해야 될 거 아냐! 놀리면 재밌어? 응?"


"응, 재밌어. 너무 귀여워."


"아...진짜..."


손부채질을 하는 얀순이를 보며, 나는 싱글벙글 웃었다.


"걱정 마. 바람 절대 안펴. 너야말로 바람피면 진짜 나 울 거임. 알아? 내 이 마음을 아냐고."


"아니, 나야말로. 너 바람피면 죽여버릴 거야. 알지?"


그래, 바로 이때.

이때였다.

순간 얀순이가 무섭게 보였던 건.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런 것 따위 보이지 않았다.

진심으로 얀순이를 좋아했으니까.


나는 그런 얀순이에게 다가가 마스크를 슬쩍 들어올리곤,

조심스레 입을 맞췄다.


...제육볶음 맛이 났다.


"말하면 뽀뽀해준다고 했지?"


입을 땐 내가 그렇게 말하자, 얀순이는 입을 비죽였다. 


"...아직 너 혼날 거 남았어."


"그건 집에 가서 혼나고~, 일단 교실에나 들어가자."


조심스레 손을 잡고 얀순이를 이끄는 나는,

그리고 그런 나를 따라오며 투닥투닥거리는 얀순이는,

세상 그 어느 사람들보다 행복한 이들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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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소설 없냐? 급하다... 좀 누가 써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