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다.
새하얀 비가 머리 위로 온다.

검은 새벽이 자정을 말없이 지나갈때. 별빛이 먼지 낀 네온사인으로 대체되는 시간에. 너는 거리에서 커플링을 손에서 빼 허공으로 집어던지면서 술김인지도 모를 입으로 하얀 입김을 내보내며 외치듯이 말했다.

헤어지자는 말이 머리에 울렸다. 그 뒤로 나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불쌍해서 사귀어줬고, 돈 때문에 내가 몇년을 참고 사귀었더니 이렇게 추할줄은 몰랐다는 등. 온갖 이유를 대며 한참동안 일방적인 통보를 한 채 네가 돌아섰다. 익숙하지 않은 냉기가 네 눈에서 느껴졌다.

네가 눈을 밟으며 멀어지는 발소리만 귀 사이에서 맴돌았다. 네가 내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제서야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사이에 껴들었다. 한참동안 그 자리에 서있었다.

눈오는 새벽 밤하늘 사이에 달이 외롭게 떠있었을때, 우린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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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1년. 매일 식은땀을 흘리며 꾸는 익숙한 악몽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버릴 타이밍을 놓친 커플링은 책상 한쪽에 박혀 먼지가 쌓여가고 있었고, 원룸 구석의 담배갑과 약봉지는 점점 늘어가고 있었다.

거친 숨을 내뱉으며 떨리는 손으로 어지러운 책상 위에서 빈 갑들을 뒤져 담배 한개비를 찾아 꼬나물고 창문으로 다가갔다. 별이 보이지 않는 하늘 가운데에 구름에 가려진 달이 어슴푸레 빛을 비춰주고 있었다.

아직은 싸늘한 새벽 바람에 몸을 한번 떨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땀으로 푹 젖은 등이 차가워졌다. 주머니에서 익숙한 진동이 울렸다. 담배연기가 보지 말라는 듯 눈 앞을 옅게 가린다. 검은색 스마트폰을 꺼내 들여다봤다. 정신과 상담 예약 문자였다.

그날,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받았던 날. 술이 다 깬 뒤 자신이 말을 실수한거라고. 미안하다고. 제발 한번만 만나달라고 통화의 뒷편에서 울부짖는 그녀의 연기는 수준급이었다.

흐느끼는 소리만 나오는 통화를 끊었다. 9년이란 시간을 차치하더라도 용서는 애초에 선택지에 없었다. 한때 결혼까지 생각했었지만 이젠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다. 미친듯이 울리는 스마트폰의 전원을 끈 뒤 베개에 울리는 머리를 묻었다. 대학교를 자퇴하고 폐인처럼 지냈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돈이 해답이었고 돈이 문제였다. 돈이었다. 돈 때문이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쭉 빨아들였다.

유산은 항상 골칫거리였다. 몇 없는 연락처에 있는 변호사에게 전화 한통이면 꾀죄죄한 원룸을 벗어나 타워팰리스 같은 으리으리한 곳으로 갈 수 있었다. 억 단위는 따위라고 할 수 있는 반짝이는 미래가 눈 앞 갈랫길에 항상 준비되어 있었다.

다른 이들이 나를 본다면 욕을 할지도 몰랐다. 배부른 고민일지도 모른다. 얼굴도 모르는 부모가 죽었다며 변호사 군단이 내게 왔을때는 어버버하며 병신처럼 굴었다. 번듯하게 정장을 입고 내게 와 서류를 들이대며 회사의 사장이 되어야 한다고 했을 때는 혹시 그들이 장기매매범이 아닌가 의심까지 했었다.

결론은 아니었다. 삼류 싸구려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 한 상황이 현실이었다. 고민하는것 보단 차라리 도망치는게 나았다.

꺼진 화면에 얼굴이 흐릿하게 비친다. 추레한 몰골, 깎지 않은 수염. 감지 않은 머리와 군기라도 잡는듯 삐딱하게 물고 있는 다 타버린 담배까지. 아직 뜨거운 꽁초를 창 밖으로 내던지고 창문을 닫았다. 그대로 바닥에 등을 대고 눈을 감았다.

달빛이 창문에 은은하게 비쳤다. 창문에 비치는 굳게 닫힌 문도, 주머니 속에서 밝게 빛나는 핸드폰도 담담하게 비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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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온다.

정신과에서 상담을 받고 병원 밖으로 나오니 눈이 오고 있었다. 골목 골목 놓여진 쓰레기 더미들은 하얗게 변해있었다. 벽에 기대서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

“네, 지금 가능할까요?”

“...”

짧게 이어진 대화가 끊겼다. 검은 세단이 부드럽게 내 앞에서 정차했다. 푸근한 인상의 기사가 차 안에 타있었다. 거리를 눈에 머금은 채 나는 차 안에 탔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내리는 눈이 차 창문에 붙었다. 지나가는 인영들 속에서 언뜻 익숙한 얼굴이랑 눈을 마주친 것 같았다. 눈을 감았다. 힘을 양껏 줘 감았다. 보지 못한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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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버린 나이였다. 그래도 죽을만큼 미친듯이 공부했다.

회사는 이름값과 다르게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꼬여버린 실타래를 풀긴 어려우니 차라리 그냥 실타래를 굴려 눈덩이처럼 크게 만들었다. 사원들과 같이 일하고, 울었으며 웃었다. 우여곡절 끝에 신제품을 출시하자 꼬이고 뭉쳐 도저히 풀 수 없을것 같던 실타래는 녹아내렸다. 강철 와이어가 꼿꼿하게 일직선으로 났다.

그리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왜 도망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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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자녀. 부모가 사고로 죽음. 굴지의 대기업 이사. 기묘하게도 그녀와 나는 같은 운명이었다. 다른게 있다면 그녀는 나를 아직까지 사랑한다는 점이고, 나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처음 만났을때 어딘가 초점 없는 눈으로 나를 껴안았고 나는 기계적으로 그녀를 팔로 둘렀다. 계약된 약혼은 결혼으로 이어졌다.

"내가 실수했다고 했잖아."

새벽. 눈 오는 날. 아무도 오지 않을 어스름한 가로등 아래에서 손톱이 뽑혔다. 방울진 피가 눈 아래로 떨어졌다.

"왜?"

산발이 된 머리 사이로 보이는 광기 어린 눈. 손 밑 피 범벅이 된 눈은 새로 내리는 눈에 덮어져 가려졌다. 눈을 감았다. 눈 내리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사랑해."

그녀가 피 묻은 입으로 내 귀에 속삭였다. 눈은 계속 감겨져 있었다.

눈이 내린다.
빨갛게 녹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