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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전선 얀데레를 써볼까 잠깐 고민했다가 이미 벌려놓은 짓이 너무 많아 접었다.

누가 위에 것 번역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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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얀순 누나, 아니 얀순 선생님과의 재회 이후 시작된 고등학교 2학년.

 매일이 얀붕이에게는 꼭 겨울방학이 다시 시작된 것처럼 설레는 날이었어.


 자기 담임 선생님이라 매일매일 눈을 마주치는데다가 또 2학년 수업 과목인 동아시아사도 맡고 있어서 일주일에 3시간은 자기 반에 수업하러 들어오는 얀순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지.

 과장 좀 섞어서 눈을 어디에 두든, 문 열고 어디를 가든 얀순 선생님을 마주치는 것 같달까. 뭐 어쩌면 얀붕이 머릿속에 계속 얀순 선생님 생각이 나서 계속 얀순이만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지. 아니면 그 반대거나.


 물론 그런 건 있지. 얀순 선생님은 과연 자기에 대한 감정을 가지고 있을까? 확실하지는 않잖아. 그리고 그건 얀순이도 마찬가지였고.

 그뿐이야? 학교라는 게 본디 발이 닿는 곳이면 반드시 다른 사람의 눈길을 피할 수 없는 좁은 공간이라 둘이 학교에서 거시기머시기한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는 곳도 없으니 둘이 뭔가를 하고 싶어도 썸 이상의 진도가 안 나간단 말이야.


 근데 계속 얀순이를 보고 있으니까 생각나는 건데, 어째서인지 평소의 얀순 누나랑은 뭔가 다른 것 같다?

 얀붕이가 알던 얀순 누나는 털털한 성격에 붙임성이 좋아서 선생님이 되면 복도 걸어가다 마주친 학생들이랑 서로 놀리기도 하고 수업하다 중간에 농담도 하는 그런 타입이 될 것 같았는데, 자기가 지금까지 본 모습은 그렇지가 않았거든.


 수업하는 중에 학생들이 "그럼 선생님도 대학교가서 연애 많이 해봤어요?" 같은 질문을 던지고 그것 때문에 교실이 시끌벅적해져도 얀순 선생님은 그걸 제대로 통제를 못하고 쩔쩔매다가 복도를 걸어가던 교장 선생님에게 걸려서 보이지 않게 한소리 듣기도 하고, 교무실에 들어갔다가 얀붕이가 봐도 무슨 나쁜 일이 생긴 게 딱 보이는데 그거 때문인지 다른 선생님이 얀순이를 조용히 불러다 휴게실로 데리고 가는 모습도 우연히 봤었지.


 근데 또 얀순이는 처음 학교에 온 젊은 여교사잖아. 학생들이 가만히 둘 리가 없거든. 아무리 비평준화 고교라고 해도 또라이 총량 법칙은 적용되게 마련이라 영악한 녀석들이 얀순쌤을 놀리려고 별러대서 얀순 선생님 수업만 되면 별의별 상황이 다 펼쳐진단 말이야.


 그러면 얀순 선생님은 더 위축돼서 학생들이랑 마주치면 그저 얌전하게 "응 안녕..^^;" 하며 고개만 끄덕이고 지나가고, 수업 때도 학생들이랑 상호작용은커녕 그냥 강의식 수업만 하다 끝나고, 그러면 지루해진 학생들은 그대로 자거나 또 장난을 걸고.. 악순환의 연속이지.


 몇 주쯤 지나니까 학기 첫 날 봤던 얀순 선생님의 그 신선하고 밝은 기운은 이제 더 찾을 수가 없었어.


 얀붕이는 그걸 보기가 싫었던 거야.


 그래서 어느날 학교가 끝나자마자 얀붕이는 퇴근하는 얀순이를 만나서 같이 얘기 좀 하자고 불렀어.

 학교에서 눈빛만 자꾸 몰래몰래 보낼 뿐 얀붕이와 사적으로 만나는 건 피해온 얀순이였지만 얀붕이의 강권에 결국 예전에 자주 함께 찾던 카페로 들어갔어. 그리고 얀붕이가 물어봤지. 요즘 많이 힘들어 보인다. 수업하는 것도 누나답지 않게 굳어있어서 보는 내가 다 힘들었다고.


 얀순이는 안 그래도 많이 힘들었던 참이었어. 교직생활 절망편을 상상해 봐. 학생들은 만만한 선생 잡았다고 날뛰지, 학부모들은 자기 자식 담임교사한테 매일 성적이 어떻고 생기부가 어떻고 하며 따져대지, 하필 또 사립학교라 선배 교사들은 길게는 수십 년 마주치고 살아야 해서 어떻게 개기지도 못하지… 때려치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였어.


 만약 그 자리에서 얀순이가 주변에 아는 사람도 없겠다 바로 달려들어서 자기 너무 힘들었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면 기분이 좀 낫지 않았을까? 얀붕이가 어떤 아인데. 얀순이 혼자서 소주 세병 까놓고 얀붕이를 반대쪽에 세워두고서 끝없이 한탄을 해도 군말 없이 다 들어주는 아이잖아.


 하지만 얀순이는 침묵했어.

 말 하기 싫다고 생각한 것도 아냐. 그냥 입이 떼어지질 않았어. 다만 그저 얀붕이가 입고 있는 교복에 눈이 가 있을 뿐.

 아마 그동안 생겨버린 학생에 대한 불신 때문에 얀붕이도 그 범주 안에 들어간 게 아닐까?


 그런지 어떤지 몰라도 그 가만있는 얀순이 덕분에 각자 얘기도 많이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얀붕이는 도대체 얀순누나가 왜 저러는지 알지를 못했지. 적어도 사적인 자리에서는 괄괄하게 얌마 술자리를 가야지 여기서 어떻게 얘기하냐 하면서 있는 얘기 없는 얘기 다 꺼내놓을 줄 알았거든.


 얀순이의 교사 생활이 정말 고되다는 걸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지.



 아무튼 얀붕이와 얀순이가 애매한 분위기에서 커피만 쪽쪽 빨다 돌아간 그날 이후.


 얀순이의 힘든 표정은 나아지기는커녕 더 심해지는 것만 같았어. 얀붕이의 손을 저버린 게 계속 마음에 남았거든.

 그리고 그런 모습은 얀순 선생님의 수업을 듣는 얀붕이에게도 보일 수밖에 없었지.


 이렇게 되니 얀붕이도 이제는 자기가 뭐라도 해야 된다고 느꼈어. 얀순이가 쪽을 당할 때마다 꼭 자기가 조리돌림 당하는 것처럼 아프고, 밤에 자러 침대에 들어가 누워도 이 시간에 얀순 누나는 방에서 홀로 울며 슬픔을 삭이고 있을까 하는 상상에 잠이 안 오니까.

 

 그래서 얀붕이는 얀순 선생님한테 더 붙어다녔어. 괜히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교무실에 자주 들러서는 얀순 선생님한테 별 쓸데없는 질문을 걸었지. 다른 선생님들이 얀순 선생님을 갈구지 못하게 시간을 벌 생각으로.


 그리고 또 어디서 학부모들 겁주는 입시설명회 나부랭이를 보고온 부모님이 얀붕이 생기부나 성적 이야기를 한다치면 자기 머리 탓 자기 노력 탓을 해서라도 담임 선생님 얀순이를 변호했어. 뭘 또 전화 걸어서 선생님 스트레스 주려고 하느냐고.


 수업 시간에는 괜히 하지도 않던 예습 복습을 해다가 궁금한 점들을 모아 질문 리스트를 만들어서 얀순 선생님한테 '선생님 그럼 이건 어떻게 되는 거예요?' 하는 학구적인 질문들을 남발하며 어떻게든 상호작용을 만들어내 반 분위기를 전환해보려 몸부림을 쳤지. 자기 반이나 다른 반에 아는 친구들 몇몇을 모아다가 밥을 사주며 얀순 선생님 수업 때는 정말 공부벌레들마냥 질문도 열심히 하고 반응도 잘 해달라고 부탁도 했었어.


 그래도 말 안 듣는 연놈들은? 오히려 얀붕이가 불쑥 일어나 내신 관리에 방해된다면서 역으로 쪽을 줬지. 비평준화 고등학교인 게 여기서는 득이 됐어. 내신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애들이 반에 수두룩빽빽하니까.

 사회과 과목이면 그렇게 비중이 낮은 과목이 아니거든. 그래서 진지한 표정을 짓고 '또 수업시간에 지랄하면 죽여버린다'고 엄포를 놓으니 애들이 나서서 말리고 정말로 주먹이 나갈까말까 하는 통에 저절로 갑분싸가 되어서 더 이상 소란은 나지 않았지.


 이렇게 분위기도 잡아 가며 얀붕이가 땅을 다 다져놓으니 그 위에 선 얀순 선생님의 수업도 점점 활기가 생겨나기 시작했어. 인류학 교수 얘기 들어본 적 있지? 재미없게 강의하기로 유명한 교수의 강의에서 학생들이 열심히 반응하고 질문하니까 교수도 열의있게 수업에 임하면서 학생들도 강의에 열심히 참여하게 됐다고. 얀붕이가 밥 한끼 사주며 심어놓은 지하 점조직들도 딱 그런 효과를 본 거야.


 그리하여 어느새 동아시아사 수업의 수호자 타이틀을 얻은 얀붕이는 사람들이 얀붕이 이름 앞에 '역덕'이라는 호를 붙여줄 만큼 학교의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어. 생기부 장래희망 란에 '역사 선생님'을 자기도 모르게 적고 있는 걸 보며 얀붕이 스스로도 그게 체감이 되더라고.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얀붕이가 역사를 공부할 때마다 항상 붙는 사람이 누구겠어? 바로 얀순 선생님이지. 물론 다른 역사 선생님도 있었지만 얀붕이는 더 설명을 잘해 주신다, 수업때 봐서 익숙하다 하는 핑계를 대며 언제나 얀순 선생님을 찾았지. 교무실에 질문을 하러 가도 얀순쌤, 동아리 활동을 해도 얀순쌤, 수학여행에서 박물관을 가도 얀순쌤….

 그러니까 다른 선생님들도 얀순 선생님에게 관심을 가졌어. 대체 어떻게 수업을 하길래 몇 달만에 2학년 역사 수업이 저렇게나 살아나고 얀붕이 같은 광신도까지 생겼냐며 말이야.

 그래서 다들 얀순 선생님의 젊은 패기를 칭찬하며 야 얀붕이 저놈 저거 크게 될 놈이다, 1학년 때는 탱자탱자 놀던 녀석이 얀순쌤이 지도해주니까 달라졌나봐 호호 하며 친근하게 다가오는 거 있지?

 얀순이도 그렇게 바라던 동료 교사들의 신뢰를 얻어갔던 거야.


 그렇게 여름방학이 다가올 때쯤이면 이 둘은 아침마다 학교로 가는 게 기대되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었어. 매일매일이 즐거웠으니까.


 물론 착각일지도 모르지. 그저 몇 달 지나고 나니 얀순이도 교직생활이 익숙해지며 분위기가 풀어진 것일 수도 있고.

 하지만 다 생각하기 나름 아니야? 얀붕이도 얀순이도 서로 상대방 덕분에 이렇게 학교생활에 자신감이 붙었다고 생각했으니까, 둘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그래서 이제 1학기도 다 저물어 가고, 얀붕이의 기말고사 성적이 나왔어. 상위권이었지.

 저번에 말했듯이 얀붕이도 머리통에 든 하드웨어는 꽤 좋은 애거든. 공부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하니 1년 동안 놀고 있던 머리도 점점 효율이 높아지고 다른 과목에서도 두각을 나타냈지.

 그리고 그 모습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는 얀순 선생님의 행복은 말할 것도 없고.


 점심시간이 되자 얀순 선생님은 얀붕이를 따로 교무실로 불렀어. 얀붕이의 이 성적표를 꼭 자기 손으로 쥐여주고 싶었거든. 게다가 딱 지금 시간에는 선생님들도 거의 다 식사하러 나가서 교무실에 자기 말고 사람도 별로 없단 말이지? 이거 완전 기회잖아.


 불려온 얀붕이에게 얀순 선생님은 미소를 지으며 성적표를 건네줬어. 특히 동아시아사 과목 점수에는 붉은 색연필로 쫙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지. 100점이라고.


"쌤 저한테만 쉬운 문제 내주신 거 아녜요?"


"응? 사실 너한테만 어려운 문제 냈는데?"


 하며 얀순 선생님은 얀붕이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었어. 조병옥의 "으흐하핳하핳ㅎ하ㅏ핳하 자넨 솔직해서 좋아" 여자 버전이라고 해야 하나. 물론 그렇다고 정말 큰돈을 번 조병옥 웃음소리였다는 건 아니고. 저번에 얀순이가 이런 느낌의 목소리라고 그랬잖아. 그런 목소리가 기쁘게 웃는 걸 상상해 봐.

 아무튼 그 웃음을 보는 얀붕이도 이제 드디어 얀순 선생님도 기가 살아났구나 하는 확신이 들며 같이 웃었지.


"얀붕이 요즘 공부 열심히 하나봐?"


"선생님이 수업을 잘하셔서 그래요, 히히."


 하고 얀붕이가 너스레를 떨며 이야기가 오가는 동안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는데,


 얀순이는 바로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어. 이 분위기 그대로 한번 밀어붙여보기로 마음을 먹은 거지.


 그래서 얀순이는 곧바로 자기가 준비해두고 있던 말을 꺼냈어.


"있지, 축하하는 의미로 주말에 막창 먹으러 가자. 누나가 사줄게!"


 하고 '선생님'이 아닌 '누나'라는 말을 오랜만에 쓰면서.


 그리고 얀붕이도 전혀 거부할 기색이 아니었지.


"응, 누나!"


 하는 앳된 목소리에 얀순이는 정말 행복했어.



 그렇게 금요일이 되고.


 혹시나 거사를 치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리 김칫국을 들이킨 얀순이의 제안으로 일요일을 비워 둔 토요일날로 약속을 잡았고 이제 바로 약속 전날이 되었지.


 근데 사실 그런 생각은 남고생이 더했으면 더했지 못할 리가 없잖아?

 이거 만약에 거시기머시기한 관계로 갔다가 그렇고 그런 사이로 발전하면 어떡하지? 그냥 막 미친척하고 술을 뺏어마셔서 취기를 빌려볼까? 내가 먼저 고백해야 하나, 아님 연상인 누나가 먼저 하게 양보해야 하나? 드라마 보면 막 키스 같은 거 하면서 사귀던데 그렇게 해야 되나?

 혹시 콘돔… 필요할까..?

 설레는 남고생이라면 다들 그런 생각하고 두근두근대는 거 아니야?


 그래서 거실에 앉아 공연히 TV나 켜놓고 얀순 누나랑 나가서 무슨 얘기를 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옆에 앉아있던 엄마가 혀를 차는 거 있지?

 뭐야 싶어서 보니까 TV 뉴스였던 거야.

 헤드라인에는 굵은 글씨로 기사 제목이 쓰여 있었어.


[30대 여교사, 제자와 부적절한 관계 파문... 교육청 '중징계할 것']


"쯧쯧쯔… 아니 무슨 정신머리로 저런 생각을 해? 저런 것들 보면 하나같이 애인 보기싫어서 바람난 년들이라니까, 참내."


 얀붕이는 멍하니 TV를 바라봤어.


 머릿속에 무서운 생각이 딱 스쳐간 거지.






 ..........이거 내 얘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