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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시간이 꽤 흘렀다.


나는 지금 추억에 빠져 폰으로 찍은 사진을 한장 한장 넘겨보고 있다.


이 사진은 수능 날짜에 찍은 사진이다.


뒤를 보며 손을 가볍게 흔드는 얀순과 그녀를 응원하는 땅꼬마 후배,


그리고 사진을 찍느라 집중하는 내 모습이 찍혀 있다.


그해 수능은 못 보게 되었고, 1년 꿇어서 열심히 공부한 결과로 나는 목표하던 대학에 간신히 붙었다.


재수생 시절에 그녀에게 받은 스파르타식 교육은 지금도 몸서리가 쳐질 만큼 힘들었다.




다음 사진 속에는 병원 앞에서 웃고 있는 나와, 새침한 표정의 얀순, 잠깐 한 눈이 팔려 딴 곳을 보는 후배가 서 있다.


여름방학이 끝나기 전에 나는 입원 치료를 받기 시작했고,


그녀에게 의존하던 심리적인 문제와, 나조차도 돌보지 않아 엉망이 된 내 몸을 어느 정도 정상궤도에 올리는 데에 성공했다.


치료 도중 수능 날짜에 맞춘 원대한 탈출 계획을 세워 그녀를 만나러 가려고 했지만,


생각보다 간단히 외출 허가를 받게 되어 허무했던 기억이 난다.




다음 사진을 넘기려던 도중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그건 또 왜 보고 있냐?"


"갑자기 생각나더라구."


"그래? 그래서 뭐 먹을래?"


"아무거나."


"아니 시-바 먼저 왔으면 그런 거나 좀 정해 놓으라고오오오오."


머리에 그녀의 헤드락이 걸린다. 어아악....


"원, 원래 그런 건 늦게 오는 사람이 정하는 거야."


"그러네. 그게 맞지. 모른다고 하면 바-로 뚝배기 깬다."


얀순이 지금은 나의 동기가 된 후배를 처참한 시체로 만들 계획을 세우는 동안,


힘 빠진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이요...."


음... 얘는 이미 시체다.


시험 일정이 개판 나서 중간고사를 무려 1달 동안이나 쳐야 한다고 했다.


"왔어?"


"녜에에...."


아무래도 점심 메뉴는 내가 정해야 할 것 같다.


뭐 먹지?












"사진 보다가 생각 난 건데, 얀순이 넌 왜 정신과 치료 안 받았어?"


"이게 병이냐?"


"애매하긴 한데, 고치려면 고칠 수 있는거 아니야?"


"그러게요, 그 챱챱거리는 살구색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요."


두 사람은 얀순을 몰아세우기 시작했지만, 딱히 심적으로 몰리지는 않는 얀순이다.


그녀는 자신이 생각했었던 것들을 그냥 내려놓듯이 말한다.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


"좋아하는 사람한테 집착하고, 의심하면서, 학대하는 것도 분명히 내가 맞는데,"


"그만큼 니 상처 하나에 벌벌 떨고, 걱정하고, 어떨 때는 내가 희생하고 싶어하는 것도 내가 맞으니까."


"나도 이해 못 하겠긴 한데, 생각 정리가 되니까 조절이 잘 될 것 같더라고."


"그거 막 이중인격 그런 거 아니에요?"


"죽일까? 얀? 아니 참아야 해. 순."


걱정하는 후배와 달리 얀순을 놀리고 있는 얀붕이다.


곧이어 얀순의 포크가 식탁 위에 박혔다.


"합죽."


얀붕은 한 마디만 말하고 눈치 빠르게 입을 닥쳤다.




빙수에 미친 누군가 때문에 다른 후식을 먹는 날은 거의 없다.


"응 그때 봐~"


"?"


"누구랑 통화를 그렇게 해?"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는 얀순과 직접 물어보는 얀붕이다.


"남친이요."


"언제부터?"


"글쎄요? 어떤 커플이 겁나게 눈꼴시게 해서 사귀었죠."


"그런데 여기서 우리랑 이렇게 있어도 되는 거야?"


"아니 우리가 만나 봐야 한 달에 몇 번이나 본다고 그래요?"


두 사람의 사고방식은 여전히 평범한 사람의 것을 잘 따라가진 못한다.


아마 다른 사람이었으면 한 달에 한두 번 보는 것도 꽤 위험했을 것이다.


"생각해 보니까 그것도 그러네."


"그리고 얘 지금 고3이라 자주 못 봐요."


"고3은 어쩔 수 없지."


계속해서 자신이 할 말을 얀붕에게 빼앗긴 얀순이 한마디 한다.


"걔 도망 못 가게 확 잡아 놔야 할걸? 나처럼?"


"저는 안 잡아도 안 도망갑니다."


"킥킥. 그거 저 차이라고 하는 말인가요?"


"아 들켰네."


장난스러운 대답이지만, 얀붕은 얀순이 진심으로 조언했을 거라고 짐작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피곤한 한 사람은 시험공부를 해야 한다며 도로 기숙사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동거 중이다.


무려 양측 부모님께 허락을 받은.


거리의 풍경과 두 사람의 옷차림은 바뀌었지만,


함께 하교하는 루틴은 여전하다.


운이 나빴다면, 걸어가려면 필히 대학로를 걸어야 하고,


거기엔 이목을 끄는 옷차림들이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얀붕이 쳐다보고 있는 저기 저 여자의 맨다리처럼 말이다.


얀붕이 저렇게 얇으면 걷다가 안 부러질까? 같은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는 동안,


재앙은 천천히 그 크기를 키우고 있었다.


"존나 건방지네?"


"응?"


"집에 가서 봅시다. 오늘은 우리 후배님께 잊지 못할 추억을 드릴 거에요."


"오늘 무슨 날이었나?"


딴생각이나 하던 얀붕은 상황 파악이 늦다.


"어. 니 제삿날 이 개새야. 한 눈 잘 팔더라?"


"아니 선생님 그게 아니고.."


"갑시다. 자세한 건 서에 가서 얘기하세요."




최근 두 사람이 함께했던 성관계 중 가장 얀붕에게 무서운 관계였다.


더 무서운 것은 얀붕이 얀순의 물건 취급을 받으며,


인정사정없이 범해지는 게 엄청 기분 좋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얀붕에게 의존증이 다시 도진다고 해도,


이전처럼 가라앉아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그를 구해낼 테니까.














두 사람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녀와 희망적인 미래를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이젠 나를 깊은 수렁으로 빠뜨리지 않고, 몇 번이고 내 손을 잡아줄 그녀와,


그녀를 위해서 무엇이든 해 줄 수 있는 내가 있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피아노를 연주한다.


나와 그녀를 이어준 피아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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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났다.


에필로그랑 외전 같은 것도 써보고 싶었는데 뇌절 치다가 망치지 말고 그냥 빠지는 게 좋겠더라.


각 잡고는 처음 써보는 장편인데도 좀 생각 없이 의식의 흐름대로 썼어.


그래서 세세한 것에만 신경 쓰고 큰 줄기는 잘 보여주지 못해서 아쉽네.


이렇게 쓰니깐 마지막으로 갈수록 점점 어려워져서 식겁했다.


그래도 몇 주 동안 쓰면서도 즐거웠고, 내내 얀순이 얀붕이만 생각하면서 지내는 것도 즐거웠음.


얀붕이들이 한 마디씩 의견 남겨 준 게 엄청나게 도움이 많이 됐다.


다들 고마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