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변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일어난다.

약속처럼.

조용히.

느닷없이.

빠르게.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켠으로 제정신이 아님을 알고 있다.

선명하면서도 점점히 흐린 기억의 편린들은 잔뜩 으깨놓은 감자처럼 뭉개져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난 지금 무얼 하고 있는거지?

혼란스러운 기억을 애써 떨쳐내며, 감았던 눈을 떴다.



...분명.

분명 눈을 뜨고 있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두 눈은 마치 잿가루를 뿌린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지독한 어둠뿐.

이곳은 칼가라스 평원이 아니다.

피를 피로 씻으며, 서로에서 이빠진 칼날을 쑤셔박던 전장이 아니다.

그 진창이.

그 냄새가.

가열차게 뛰며, 제국 병사의 목을 베어내던 감각이 아직 남아있다.

기억의 혼란 속에서도 그 감각만은 선명했다.

그렇다면, 난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 어디를 둘러봐도 똑같았다.

어둠.

공허.

느껴지는 것이라고는 오직 '서 있다'는 감각 뿐.

자리에 주저앉아 손으로 만지고서야 내가 어떤 땅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런 땅은 듣도 보도 못했다.

위대한 탐험가들을 찬양하던 음유시인들도 이런 곳이 있다고는 노래하지 않았다.

마법?

머릿속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마법은, 고명한 학자들 몇십명이 달라붙어도 되살릴수 없었던 고대의 학문, 혹은 주술.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에, 오히려 의문만이 늘어난다.

그렇다면, 어쨰서 난 여기 있는 것일까.

난 죽은건가?

하지만, 아직도 맥박치는 이 심장이, 그 가능성을 일축한다.


"하아."


감각이 예민해진다.

애써 침착하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 불안함이 치솟고 있었다.

어둠에 대한 원시적인 공포.

사람은 어둠 속에 있으면 겁을 먹고, 약해진다.

그 점을 알고 있기에, 애써 숨을 고르고, 침착하려 애썼다.

한 걸음.

두 걸음.

보이지도 않는 어둠 속을 걸었다.

발 끝 하나하나에 신경을 집중했다.

오로지 한 방향.

이곳이 어두운 동굴 같은 곳이라면, 분명 벽같은 곳에 도달하리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한참을 걸어도 벽 같은 것은 없었다.

적어도 '벽'은 없었다.


투둑, 툭...


무뎌지기 시작하던 발의 감각이 날카롭게 경고했다.

다음 발걸음은 없을 것이라고.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바로 앞.

보이지는 않지만 깊은 낭떠러지, 절벽 같은 것이 바로 내 앞에 있었다.


"후우, 후우.."


거칠어지는 숨을 애써 정리했다.

단 한 걸음.

한 걸음으로 코 앞의 죽음에서 멈춰섰다.

미친듯이 쿵쾅이는 가슴을 부여잡고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분간이 가지는 않지만, 피부에 느껴지는 서늘한 감촉이 밀려 올라왔다.

저 아래에는 무엇이 있을까.

발에 채이는 아무 돌이나, 떨어뜨려보지만 밑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끝도 없는 무저갱.

무저갱은 지옥을 연결하는 구덩이라고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렇다면 정말 나는 죽은 것일까.

그 전장에서 죽은 것인가.

그렇다면 왕국은.

철사자 기사단과 황금매 기사단은.

모두 어떻게 되는걸까.


털썩.


문득, 어지러워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렇게 허무한건가.

죽음이란, 이토록 고독한건가.

많은 생각이 들었다.

다만, 머지 않아 납득할 수 있었다.

하긴, 그럴테지.

죽음 끝이 뭐가 있을지는 죽은 자들만이 알테니.

산 자들이 어떻게 알겠나.

그리 생각하며, 씁쓸한 마음을 어루달랬다.


사아아아.


"흡!"


순간이지만, 소름이 돋았다.

절벽에서 불어오는 싸늘한 바람에, 저도 모르게 허리춤을 붙잡았다.

하지만 언제나 익숙하게 느껴지던 검의 감촉은 느껴지지 않았다.

무저갱.

그 안에 무언가가 있다.

보이지는 않지만 확실히 느껴지고 있었다.

마수?

아니면 지옥의 구덩이를 뚫고 올라오는 악마들인가?

애써 달래왔던 공포가 턱 끝까지 밀고 올라왔다.

몸은 완전히 공포에 지배되어 덜덜 떨리고 있었다.

하다 못해 검이라도 있었다면.

그 느껴지는 '무언가'에게 통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오랜 세월 전장에서 살아오면서 언제나 손에 느껴지던 검의 감각마저 없다면 완전히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천마리의 마수를 베었다는 사냥꾼 키론이 아니다.

야만인들이 살던 불지의 땅에서 천년만년 이어질 제국을 일으킨 마나바 황제도 아니다.

작은 왕국의 중급 기사.

미물에 불과한 볼품없고 초라한 존재가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큰 시련이다.


"흐윽, 후욱 흐읍."


꺼질듯한 숨을 억지로 들이 내쉰다.

몸은 완전히 굳어 무저갱을 내려다본채로 움직이지 않는다.

짐승의 숨결처럼 포악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심장을 도려내는것 같다.

도대체.

무엇이.

이토록.

불경스럽단 말인가.

.......

...

...

....

......

.......


"허억!"


새된 비명이 어두운 공허를 울렸다.

무언가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속이기에 더더욱 선명하다.

언제부터 있던 것이지?

아니, 처음부터 있었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이다.

마수...아니 악마...

아니다.

저건 그런게 아니다.

저 '무언가'는 악마 따위가 아니다.

더 위에.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다.

그것은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두통이 밀려온다.

마수 나가의 독 때문에 사경을 헤매던 때와는 차원이 다른 고통에, 이가 부셔져라 깨물었다.

이건, 이건.

....




그게 나를 쳐다봤다.





뭐야?

뭐야?

뭐야?

뭐야?

뭐야?

뭐야?

뭐야?

뭐야?

뭐야?

뭐야?

뭐야?

뭐야?

뭐야?

뭐야?



생각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이하게 비틀린 가면을 쓰고 있다.

가면 너머로 요사스럽기 그지 없는 형형색색의 괴기한 안광.

'그것'의 오른손에는 뼈로 이루어진 가위, 왼손에는 황금빛 실타래를 들고 있다.

그게 날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나는 미쳐가기 시작했다.


"크하아악!"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다.

머리를 쥐어뜯을 정도로 아프지만, 두통은 나아지질 않았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얼굴에 무언가가 흐른다.

눈이 멀은게 아니었는지, 시야가 붉게 명멸한다.

그것이 피라는 것을 깨닫기도 전에, 이미 나는 죽어가고 있었다.

신...인가...

그 경외스러우면서도 불경한 존재에 대한 얄팍한 정의를 내리며 의식이 꺼져간다.


[------------]


희미한 의식속에서 '그것'이 불경스러운 입을 열었다.

다만 '그것'의 말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걸 듣자마자,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완전히 의식이 꺼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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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허억?!"


폐부를 찢는듯한 고통에 기함하듯 숨을 토해냈다.

발작하듯 상체를 일으킨 내 몸은 망가졌다고 착각할만큼 온몸에 식은땀이 가득했다.

분명 끊어졌던 의식이었다.

그러나, 지금 내 의식은 확실히 깨어있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으레 버릇처럼 허리춤을 만졌다.


철컥.


"커흑, 허윽...여긴."


묵직하면서도 서늘한 감각.

그 무저갱에서 느껴지지 않던 그 감촉이 느껴지자, 정신이 맑아져 온다.

곧장 검을 뽑고, 사방을 경계했다.

무엇이 됬든, 방심해서는 안된다.


"후우, 후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둠과는 거리가 먼 푸른 녹음이 시야에 들어온다.

어디지?

갑작스런 풍경의 변화에 한참을, 둘러보다 차츰 기억이 떠올랐다.

칼카라스 평원.

제국과의 전투로 반쯤 폐허가 되어있던 지라, 바로 눈치채지 못했다.

돌아온건가.

아니면, 그저 나쁜 악몽이었을 뿐인가.

그제서야 돌아오는 현실감에, 안도의 한숨이 튀어나왔다.


스르릉.


뽑았던 검을 집어넣었다.

적어도, 위협이 될만한 것들은 없었다.

다만, 다시 의문이 들었다.

어째서 칼카라스 평원이 멀쩡한가.

분명, 이곳은 피와 살점으로 얼룩져, 옛날의 그 아름다움을 잃어버린지 오래였다.

그 생각이 들자, 이번에는 지금이 언제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주변에는 풀벌레 우는 소리만 들릴뿐 사람의 흔적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일단 왕국으로 돌아가자.

다행히 평원과 왕국까지의 거리가 멀지 않으니, 머지 않아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 내가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어디를 가려는겐가."


목소리에, 곧장 검을 뽑았다.

뒤.

분명 아무것도 없었던 평원이다.

근데, 그 목소리는 분명 뒤에서 들리고 있었다.

어디서 나타난건지 의문을 품을 새도 없이, 곧장 몸을 돌려 검을 찔렀다.

다만.


"성질이 급하군. 난 지금 대화를 하려하네."


날카롭게 쇄도하던 검 끝이 벽을 만난것처럼 멈추고, 움직이지 않았다.


"큭!"


"참으로 난폭하군, 자네는 지금 내가 누군지는 알고 검을 휘두르는 겐가?"


낮으면서도, 미성을 띤 음색이다.

이민족의 상징과도 같은 칠흑같은 머리를 흑단처럼 늘어뜨린 미인.

다만 정말 날 바라보고 있는건지 의문일 정도로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마법이라도 부린건가.

마법은, 이미 유실됬다더니...제국 학자놈들이 보면 아주 까무러치겠군.

내 검을 멈춘채, 흥미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노려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넌 뭐냐."


"질문은 내가 먼저 하려 했네만, 꽤나 무례하군."


내 말에, 무례하다고 말하면서도 그 자는 여전히 흥미로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허나, 답해주도록 하겠네. 일단 통성명부터 해야겠군. 우선 내 이름은 [...........]라고 하네."


알아듣지 못했다.

이민족의 언어라던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언어가 아니다.

그 불길하면서도 불경한 이름에 저도 모르게 물러날 정도였다.

다만, 그것이.

너무나도 익숙했다.


"으흠...역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게로군."


"그건 이름, 아니 이름이라고도 말하기 뭣할정도로 불경하군."


내 말에 너털웃음을 터뜨리던 자는, 이내 여러가지 이름을 꺼내기 시작했다.


"이쪽에서 날 섬기던 자들에게는 모이라, 모이라이, 모에라이, 파르카이, 클로토, 라케시스, 아트로포스, 실을 자르는 자, 가면을 쓴자, 비틀린 자. 닉스. 등등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렸네만. 자네는 어떤 이름이 마음에 드는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너무나도 허황되거나 있을수 없는 이름이다.

다만, 그녀는 조금 곡해해서 받아들였는지, '이렇게나 많은데도 정하지 못하는 겐가.' 와 같은 말을 늘어놓았다.


"좋네, 그럼 날 닉스라고 부르게."


결국 그녀가 제멋대로 자신의 이름을 정했다.

닉스.

간결한 이름을 머리에 새기며, 다시 한번 그녀에게 물었다.


"....닉스라. 그래 닉스. 넌 뭐지?"


"주제를 모르는 놈이로군."


그 말과 함께 닉스가 다가왔다.

곧장 거리를 벌리려 했지만, 무슨 영문인지 다리는 도통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것 또한 마법인건가?

참으로 형편좋은 것이로군.

만능에 가까운 마법에 갇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전혀 속을 알수 없는 그 굳게 닫힌 눈을 들이밀며 서로의 입이 닿기 직전까지 다가왔다.


"이제 질문은 내가 하네, 이름이 뭔가?"


".........."


"오랫동안 살아오긴 했지만, 나는 그다지 인내심이 많지 않네."


"...얀붕."


그녀의 협박에 못이겨 입을 열었다.

닉스는, '얀붕, 호오, 얀붕인가.' 와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몇번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이내 미소를 지었다.


"좋네, 내 질문은 끝났네. 이제 마음껏 물어보게."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하아, 같은 질문만 세번을 받는군. 그리도 궁금한겐가?"


미련하다는 듯 그녀가 미간을 잡았지만, 난 반드시 들어야만 했다.

이 불길한 감각이.

그 무저갱에서 느꼈던 그 서늘함이.

그녀에게서 느껴진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만약.

정말 만약에.

그 때 본 그 무언가가.

그녀라면?

불길한 가정이, 현실이 되어 돌아올때, 나는 과연 버틸수 있을까.


"호기심은 때론 파멸을 불러들이지. 하지만, 그걸 무시할만큼 달콤한 유혹인것도 사실이야."


그렇게 말하며 닉스의 감긴 눈이 천천히 뜨였다.

그리고.


"........흐ㅡㅂ..."


"왜 그런가. 자네가 그토록 바라던 '내'가 아.....------"


그 후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아니,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저갱에서 들렸던 불쾌하고 불경한 토악질.

그녀의 동공이 있어야 할 부분에 무저갱이 있었다.

눈을 보는 것 만으로도, 그 끔찍했던 심연으로 빨려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닉스는 '그것'이었다.

심연속의 괴물.

아니 신.

다시금 멀어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노력했지만, 이미 의식은 흐려지고 있었다.

으.아...아...으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생각.

생가...

생ㄱ..

생..

ㅅ...


"이제 좀 알겠는가?"


쾌활한 목소리가 들렸다.

멍한 머리로, 닉스를 쳐다보았다.

어느새 감긴 눈.

그녀는 짖궂은 미소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너, 도대체...아으...무슨..."


"이제 그런 질문은 그만하게, 숙녀를 앞에두고 무슨 추태인가?"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어느새 주저앉아있던 내게 손을 내밀었다.


"먼저, 말하자면 나는 자네에게 아주 흥미가 많네. 그래서 그대의 여정에 동참하려 하는데, 괜찮겠나?"


그녀의 흰 손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거절따윈 상정하지 않은 듯한 자신감.

다만, 그녀의 정체를 깨달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읏차~ 좋네. 얀붕. 그럼 앞장서게."


갑주를 두른 내 몸을 아무렇지 않게 들어올리며, 닉스는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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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 씨 내가 뭘 쓴거지.

약간 코스믹 호러같은걸 끼얹으려다가, 잘못됬다는 생각이 들음.

일단은 플룻부터 짜서 천천히 써볼 생각인데...

얀데레 맞을까 싶기도 한데, 일단 인외의 신같은 존재가, 흥미를 가지다 천천히 사랑 혹은 소유욕을 느끼기 시작하는 거니까 얀데레 범주...일듯.

근데 벌써부터 머리아픔.

암튼 댓 남겨주신분들 감사함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