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예진


모르는 사람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한번도 만나지 않았다.

일단은 뭐... 전화번호부에 저장되있는걸 보면 위험한 사람은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어, 전화를 받기로 했다.


[어디야?]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어...유식역 근처인데요?]


[그래, 그럼. 거기 근처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어.]


[아, 그러면 근처에 휠윈드 카페라고 있는데 일단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여기 정확한 위치가 어디냐면...]


[알고 있어, 기다려 금방 갈게]


-뚝.뚝.뚝.뚝....


뭐야, 자기 할말만 하고 끊어버리네 그러면 일단 기다릴까? 아니면 집가는 버스를 탈까?

...휴대전화 시계를 보니 이제 시간은 7시를 살짝 넘기고 있었다. 


서울에서 대구 가는 버스의 시간표를 확인했다. 10시 30분. 


유식역에서 제일 가까운 버스 터미널에 가는 시간은 30분. 뭐.. 대충 단순하게 계산을 하면 진짜 넉넉하게 시간을 잡으면 한 2~3시간 정도의 시간이 있었다.


충분히 여기서 다른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수 있는 시간이었다.


걸음을 돌려 휠윈드라고 적혀져있는 카페의 문을 열었다. 


모르는 여자의 전화를 받고 그 여자가 하라는대로 카페에서 기다린다. 조금... 이상한 선택지를 고른것 같지만 지금의 내게 있어서 딱히 뭐 더 고를만한 선택지가 없다.


지금까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여러 일들이 내게 일어나고 있다.


"주문하시겠어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요"


"드시고 가세요?"


"네 먹고 갈 거에요, 계산은 현금으로 할거에요"


나는 지갑을 열어 10000원의 숫자가 적혀져 있는 지폐 한 장을 건네주고 거스름 돈을 받았다.


뭐... 당연한 소리지만 내가 모르는 여자의 위인이 그려져 있는 지폐를 카페의 아르바이트생에게 줘도 뭐 아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위인이 그려진 지폐, 그러니까 세종대왕이라던지, 이황이라던지 이이라던지 그런 지폐는 더 이상 이세계에서 쓰이지 않았다.


TS그룹같이 내가 모르는 제3의 것으로 지폐가 바뀌어진 상황.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상식이 바뀌어버린 이 세계를 살아가는데 있어서 나는 너무나도 아는게 없었다.


잠시 후 플라스틱 쟁반 위에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를 가져다 주었고, 나는 그것을 받아 들고 2층 창가로 자리를 옮겼다.


카페의 바깥에 비친 도시의 야경은 네온사인과 조명이 가득했고,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니 정조역전의 세계라고 해서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이랑 별로 다를바가 없었다.

그러면 이제 경치 감상은 그만두고 일단 내게 전화를 한 여자가 이곳으로 오기 전까지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머리 속으로 정리해보자.


지금까지 알아낸 사실 하나.


나는 지금 정조역전의 세계로 온 상황이다.

이 세계에서는 남녀간의 성역할이 완전히 반전된 세계.


그리고 알아낸 사실 둘.


당연히 내가 살고 있던 세계와는 다른 정조역전의 세계답게 뭐 이재용이라던지... 정주영 회장이 세운 현대나 삼성 같은 대기업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홍대 입구는 청대 입구처럼 내가 알고 있던 지역명과 다른 지역명을 쓰고 있었다.


알아낸 사실 셋.


그래도 한가지 다행이라면 부모님은 여전히 있고, 친구들은... 좀... 여성스럽게 변해버렸지만, 뭐 그래도 괜찮다.


있다는게 중요하지. 그렇지만, 모르는 여자가 내 휴대전화에 저장되어 있다는 점은... 음... 그건 좀 생각해봐야할 문제다.


나는 이예진이라는 사람을 모른다. 하지만 내게 전화를 건 이예진이라는 여자는 아주 예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내 위치를 물어보고 내게 그곳으로 찾아간다는 말을 했다.


...음... 대충 이 정도인가?


창밖을 바라보며 대충 알아낸 사실을 머리 속으로 정리해봤다. 머리가 복잡하다. 

사람이 장시간 스트레스를 받으면 머리가 핑핑 돌고, 열이 받는다고 하는데 지금 내 상황이 그렇다.


뭐 어떻게 차가운걸 마시면 머리가 조금 식혀질까? 그런 생각에 냉각수를 들이붓는 것처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전부 들이마셨다.

씁씁할 커피와 각얼음이 내 입안을 굴러다닌다. 머리가 띵하다.


"찾았다"


"어... 음..."


누군가가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린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보니 한 여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젊은 여자였다. 날개뼈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를 가진 여자가 내 눈을 바라보았다.

동태의 눈처럼 검고 초점이 없는 눈동자가 인상깊다. 


찾았다.


말만 들으면 뭔가 어린 아이가 보물찾기를 하다 물건을 찾은것같은 그런 느낌이지만, 생긴거는 그것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싸늘하다. 딱딱하다. 바늘로 질러도 핏방울 하나 나올 것 같지 않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집에 가자"


내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그녀는 내 손목을 잡고, 의자에 앉은 나를 자연스럽게 일으켰다.

내게 전화를 한 이 여자가 예진인건가? 솔직히 말해서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건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뭔 여자가 이렇게 힘이 세?


공장의 프레스기에 끼인것처럼 강한 압력이 내 손목에 느껴진다. 또 무슨... 사람이 아니라 인형을 잡는 것 같다.

너무나도 강압적으로 나를 일으키려고 하는 그녀의 행동에 나는 최대한의 반항을 했다.


"아니, 혼자서 갈 수 있어요"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존댓말. 


아니 뭐 일단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니 존댓말을 하는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보다 일단 존댓말을 한건 그것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다.


나를 내려다보는 눈매가 사납기 그지없다. 내 눈 앞의 예진은 나보다 키가 더 컸다.


어림잡아서 177?178? 그 정도의 키를 가지고 있었는데, 길거리에서 본 왠만한 여자들보다 더 큰 키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찜질방에서 인터넷을 하면서 여자들의 신체 능력이 내가 살고 있던 남자들과 비슷한 수준이라는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키가 크면 당연히 힘도 그와 정비례해서 세지는게 사실이다.


그래..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여기서 내가 뭐라 말을 하면 한대 쥐어터질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음... 그러니까 굳이 비유를 하자면 내가 하려는 행동은 동네 힘센 양아치가 내 눈앞에서 거들먹거리고 있으면 자리를 피하거나 아니면 바닥을 보고 고개를 숙이는 것과 같은 행동이었다.


아픈건 싫고 트러블이 생기는것도 싫다. 사실... 이런건 내가 계획 한게 아니었는데.

내가 말을 하건 말건, 예진이 내 손목을 놓아주는 일은 없었다.


나는 예진을 만나서 아주 조금 대화만 하고 본가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일단 사람이 만나자는데 만나고는 봐야 할것 아닌가? 뭐 별일 있겠냐?


그런 안일한 마음으로 그녀를 만난게 화근이었다. 먹다 남은 커피도 정리하지 못하고 목줄에 묶인 송아지처럼 질질 바깥으로 끌려나오는 일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카페 뒤편에 있는 주차장으로 가니 주차되어 있는 차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제일 비싸 보이는 SUV에 불이 깜빡하고 들어오더니 백미러가 펼쳐지는게 아니겠는가?


내 손목을 잡은 예진이 조수석 문을 열어, 나를 그 안에 밀어넣었다. 차 안은 내가 지금까지 타봤던 투싼이나 산타페같은 SUV랑은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고급스러운 인테리어가 내 눈에 들어왔다.


베이지 색깔의 차량 내부는 비행기의 퍼스트 클래스를 연상시킬 정도였으니까. 

어느새 운전석에 올라탄 예진이 시동을 걸고 미끄러지듯이 주차장 바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엄마가 모르는 사람은 따라가지 말라고 했는데.


초등학생때 질리게 한 말 중 하나가 모르는 사람이 집에 가자고 하면 따라가지 말라는 말이었는데, 


성인이 된 지금 이렇게 모르는 사람에게 붙잡혀 나도 모르는 곳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면 엄마가 뭐라 생각할까?


아니 근데 뭐... 선택지가 없었다. 다짜고짜 사람 손목을 꽉 쥔 다음 집으로 가자면서 사람을 질질 끌고 다니는데, 거기서 소리를 지를 수는 없지 않은가?


이것도 엄마가 끌려 갈 것 같으면 소리를 질러서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해라- 같은 말을 하기는 했는데... 솔직히 그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소리를 지르는건...

성인인 내가 할법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래, 조금 부끄러웠다. 


그리고 진짜 뭐 큰일이 생기겠어?


혹시 이런건 아닐까? 내가 모르는 TS그룹같은 회사가 생기고 청대 입구 거리같은 역이 생긴것처럼 내가 모르는 인간관계가 생긴건 아닐까?

솔직히 이렇게 된 판국에 현실성이 없다고는 하기 힘든 말이지않은가.


그러면 나와 이 예진이라는 사람은 대체 무슨 관계지? 아니 그것보다 이 여자 예진이 맞는건가?

전화하면서 들린 목소리랑 비슷하긴한데... 그래도 잘 모르겠다.


잠시만, 근데 여기서 내가 갑자기 당신 '예진'이 맞죠? 그렇게 물어보는것도 좀 이상한데?

전화번호가 등록되어 있다는건 예전부터 친분이 있었다는 건데, 그런 사람이 갑자기 내 이름을 물어본다?


그건 그거대로 완전 이상한 일이다.


나라도 갑자기 우리 형이 '저기... 혹시... 아름씨 맞으시죠?' 그렇게 물어보면 이상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떠보기로 했다. 

 

"저기.. 왜...?"


"집에 오니까 없어서, 그래서 전화했는데"


너무나도 심플한 대답.


그래도 그런 그녀의 말은 자신이 예진이라는것을 말해주었다. 

나와 전화를 한 사람은 예진말고 다른 사람은 없었으니까.


뾰족뾰족한 마천루의 숲을 지나니 커다란 강이 보인다. 그리고 하늘을 찌를 것처럼 높이 솟은 마천루 중에서도 가장 높은 건물이 내 눈에 들어왔다.


겁나 높네, 대체 저게 몇층짜리야? 차 안에서 눈대중으로 높이 솟은 마천루의 층수를 세아리려고 하던 중.. 


예진이 차를 돌려 하늘을 찌를 것처럼 높이 솟은 마천루로 가는게 아닌가?


그리고 빼곡히 솟은 마천루의 안으로 차를 타고 들어가는 예진,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어안이 벙벙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런 타워 펠리스는 나랑 인연이 없었다. 


"저기, 아까 카페서 집에 간다고.."


"??집이잖아, 따로 갈데 있어? 무슨 문제라도?


"아뇨아뇨"


여기서 뭐라 말을 더 하면 이상한 취급을 받을 것 같아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내 눈앞에 있는 커다란 타워 펠리스를 바라보았다. 중세시대의 성처럼 높이 솟은 건물을 바라보니 고개가 뒤로 넘어갈 것 같다.


"안 내려?"


"내려야죠"


차에서 내린 예진은 마천루 중 하나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예진의 뒤를 잠시 바라보다, 다시 눈 앞의 거대한 건물을 바라보았다.


뭐라 말로 하기 힘든 그런 건물이었다. 롯데타워같기도 하고... 부르즈할리파인지 뭔지 그런 건물 같이 생긴것 같기도 하고. 

중요한건 그런 건물이 아파트 단지처럼 여러개가 있다는거다. 뭐라 어떻게 설명하기도 힘들만큼 너무나도 좋은 아파트였다.


이런데서 내가 살고 있다고?


우리 집은 이런 집에 살 수 있을 정도로 가정형편이 좋지 않다.


"빨리 집에 가자니까"


걸음을 멈추고 눈 앞에 있는 건물을 바라보고 있으니, 예진이 내게 와 내 손목을 붙잡고 다시 한번 나를 질질 끌어당겼다.


그리고 아파트 현관문을 연 뒤 엘리베이터 안에 나를 밀어넣는다. 그리고 제일 꼭대기 층수를 누르고 아무 말 없이 led 표시등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예진이었다.


무슨 영안실처럼 조용한 엘리베이터 안, 그때 예진이 내게 말을 했다.


"오늘 왜 그래?"


"어.. 죄송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잘못한게 없는데, 그냥 엘리베이터 바닥을 보고 예진에게 사과를 했다.


뭐 밑도 끝도 없이 정조역전 세계에 떨어진게 죄라면 죄였고, 내가 뭐 평소 어떻게 그녀에게 맞춰서 행동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평소처럼 행동하지 못한게 죄라면 죄였다.


아니 시발... 내가 대체 뭐 어떻게 해야하는건데?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반강제적으로 납치당하다시피 예진에게 붙잡힌것도 조금 무섭다.


가뜩이나 이것저것 내가 모르는것들로 전부 변해버려서 머리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내가 모르는 여자가 내게 다가와서 이렇게 강압적으로 구는 현실이 너무 힘들다.


여긴 대체 어디고, 나는 누군가? 그리고 나와 예진과의 관계는 어떤 관계이고. 왜 이렇게 이 여자는 내 손목을 박살낼 것처럼 강하게 붙잡고 있는 걸까?


"울어? 지금 왜 울어?"


"아니, 울고 싶어서 우는게 아니라, 뭐 아무것도 모르겠고, 나는 왜 여기있고, 내가 여기서 뭐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나도 모르게 어느새 투명한 눈물이 엘리베이터 바닥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 내가 울고 있구나.


어떻게 울지 않으려고 참아보려고 했지만, 한방울 두방울 떨어지는 눈물방울들이 모여서 물줄기를 이루고 있었고, 나는 수도꼭지처럼 펑펑 눈물을 흘렸다.


말 그대로 물이 찰랑거리는 둑이 무너진것처럼 눈에 있는 댐이 무너져 물이 쏟아지기 시작한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