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도 길었다.

 길고도 길었다.

 정의를 위해 시작한 전쟁이었고, 무고한 자들을 지키기 위해 동료들과 함께한 싸움이었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지키고자 했던 무고한 이들은 부조리한 희생을 강요당했다. 불합리한 폭력과 맞서싸웠고, 분노에 눈이 멀어 파괴력에 몸을 최적화해 적들을 짓뭉게는 와중에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등을 맡긴 동료들도 대부분 쓰러졌다.

 쓰러진 동료들의 유지를 짊어지고 최강의 기사가 되어 검을 휘둘렀지만, '신'에게는 닿지 못했다. 결국 나 자신도 쓰러져 간 자들의 유지로 남아, 남아있는 동료들에게 뒤를 맡길 수 밖에 없었다.

 분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졌음에도 통하지 않았다는 것이.

 화가 났었다. 저만큼 강대한 힘을 가진 자가, '신'이라는 존재가 무고한 이들을  약자들을 돕기는 커녕 파멸로 몰아 간다는 것이.

 미안했다. 그들을 지키지 못한 것이, 마지막까지 싸우지 못한 것이.

 억울했다. 쓰러져 간 동료들의 피가, 그 숭고한 희생이 무위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것이.


 하지만 희망의 빛은 꺼지지 않았다. 가장 작고 약했던 아이가, 라피스가 동료 케르키온과 함께 '신'을 쓰러트렸다.

 전쟁은 끝났고, 평화가 찾아왔다. 살아남은 이들은 새로운 가정을 꾸렸고, 이전과 닮은 그렇지만 다른 새로운 부족들이 별 위에 번창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눈을 감지 못했다.

 생전에 무리한 싸움을 반복한 대가였던가. 쓰러진 몸이 어둠을 삼키기 시작했다. 시커멓게 물든 육체가 일어서, 파괴를 자행하기 시작했다.

 그 파괴의 힘은 강대했고, 파괴의 육신을 막으러 온 과거의 동료, 용사 케르키온은 망가진 육신을 마주했다. 그 비참한 모습때문일까. 혹은 쓰러진 동료의 육신을 파괴해야 한다는 설움 때문일까. 분투하던 케르키온은 결국 울분을 내뱉으며 쓰러졌다.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인가.

 무고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그런데 어째서 남겨진 육신은 무의미한 피를 흘리고 있는가.

 정의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 그런데 어째서 무력한 나의 영혼은 동료들의 유지를 배신하는가.


 망가진 육신은 케르키온이 가진 파괴의 힘을 흡수했고, 기괴하게 뒤틀린 육신은 어둠을 내뱉기 시작했다.

 쏟아져나온 어둠은 질서와 섭리에 오류를 새겨넣었고, 새롭게 태어나야할 존재들은 영혼을 잃은 인형이 되었다. 텅 빈 육신들은 어둠의 세력이 되어 세계를 좀먹었다.

 어둠의 세력은 감히 막을 수 있는 이가 없었고, 이윽고 분투하던 라피스와 그가 창조한 휘석의 용들은 그 힘을 빼았겼다.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망가진 육체가 그 힘을 전부 집어삼켰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나의 몸에는 하나된 휘석의 힘이 깃들었지만, 그 모습은 더 이상 영광스러운 다이아몬드의 기사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저 일그러진 파괴의 거인일 뿐이었다.

 파괴의 거인이 된 육신은 '신수'를 향해 진격했고, '신'의 사도들을 깨우고 말았다.


 이 별에 다시 한 번 거대한 전쟁이 찾아왔다.


 동료들을 볼 면목이 없다. 쓰러져 간 이들의 이름을 부를 수 없다. 기사의 이름을 칭할 긍지가 없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 불살랐던 육신은 새로운 전쟁의 거름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료들은, 그 의지와 힘을 이은 새로운 생명들은 나를 용서했다.

 깊은 절망과 자책 속을 해매이던 영혼에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다.

 휘석의 기사는 별의 기사로 재탄생하여 '신'의 사도들과 맞서 싸웠다.


 무자비한 파괴의 사도들과의 전쟁은 치열했고, 드디어 적들이 쓰러졌다. 하지만 멈출줄을 모른다는 듯이, 남겨진 파괴의 화신들은 하나되었고, 봉인된 용의 힘마저 손에 넣었다.

 얼어붙은 연옥의 그림자. 그 힘은 '신'에 필적했다.


 그 압도적인 힘 앞에 별이 된 휘석마저도 속수무책이었다. 저항할 수 조차 없는 강대한 절망과 악의가 종말의 형태로 다가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의 주민들과 전사들은 맞이할 종말에 저항했다.


 살아남기 위한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종말이 강림하는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창조와 파괴, 별과 휘석의 힘이 한데 모여 종말과 대적하는 그 때에, 망가졌던 별의 섭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과거에 쓰러졌던 '신'의 잔재가 별의 운명을 지키기 위해 새로이 10명의 전사를 만들어냈다. 그들은 '신'에 필적하는 적을 쓰러트렸다.

 하지만 승리의 환희는 이어지지 못했다.


 파괴하기 위한 싸움 또한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잠들어있던 또 다른 '신'이 깨어났다.

 양 손에 파괴와 창조를 쥔 '창성신' 그 강대한 적에게 맞서 별의 주민등을 지키기 위한 과거의 대전쟁이 반복되었다.


 두렵고, 고통스럽다. 자신은 한 번 저 존재에게 패배했고, 그 결과 망가진 자신의 육신은 비극을 되풀이했다.


 하지만


 용기가 두려움을 이겼다. 자신은 패배했을 지언정 동료들은 '신'을 쓰러트리고 승리했다. 그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자신과 함께 해주고 있다.

 희망이 고통을 몰아냈다. 승리하고 되찾은 평화. 그 속에서 피어난 새로운 생명들이, 전사들이, 힘이 함께하고 있다.


 이길 수 있다. 하나되어 싸우리라.


 각성한 열 한 번째의 힘이 휘석의 전사에게 깃들었고, 별에게 선택받은 전사들의 힘이 한대모였다.

 모든 힘을 받아 들인 휘석의 전사는 '신'에 필적하는 용이 되어 '창성신'을 마주했다.


 천 날, 천 번의 밤을 싸운 끝에 신은 쓰러졌고 용 또한 쓰러졌다.




 창조와 파괴, 두개의 섭리는 별을 만들고 운행했지만, 그 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종말을 내렸다. 하지만 별의 주민들은 종말을 이겨냈다. 수 많은 전사들이 쓰러졌고 영웅들은 별을 지켜냈다. 그 선봉에는 잠들지 못한 채 전쟁만을 반복했던 정의로운 영혼이 있었다.

 쓰러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했지만, 이제는 잠들 시간이었다.


 이제는 정말로 퇴장이다. 앞으로의 미래는 과거의 전사가 아닌 새로운 생명들의 시대여야만 한다.


휘석의 전사는 눈을 감았다. 희망과 미래를 남기고 말이다.









 시원한 흐름이 몸을 감싸안았다.

 밝은 빛이 시야를 채웠다.

 이것이 사후의 지평인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앞서 간 동료들인가. 그들을 마주하고 싶지만 차마 면목이 없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얼굴을 다시금 보고 싶다는 마음이 앞섰다. 어떻게 인사해야할까, 무슨 말을 해야할까, 그런 생각을 하던 중 푸른 빛이 시야를 가렸고, 청명한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도 모르게 한 마디, 고민조차 못해봤던 첫 마디를 내뱉었다.


 "일어나세요. 용사님!"


 "애미 씨발. 좀 쉬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