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서울 사대문안은 남촌과 북촌으로 나누어져 있었음.    

청계천을 기준으로 북부는 궁궐이 있고 고관대작들이 거주하는 동네였는데  여기를 북촌이라고 했으며,  

남부는 가난한 선비들과 하급 관리, 서민들이 살았으며  남촌이라고 했음.     

이 남촌과 북촌이 중구와 종로구의 역사적 원류임. 





개화 후, 외국인은 성 내부에서 사는 것이 금지되어 성문 밖에서 거주했음. 

일본인 상인들은 남대문 밖 남산 자락에서 살았는데, 

을사조약 이후 성 내부에 일본인의 진입이 허가되고 성벽이 허물어지면서 일본인들의 거주지역이 남산과 가까운 남촌으로 확대됨.  


이 남촌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을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개발되었으며, 지금의 충무로/명동/을지로 등이 이때 생김. 

원래 도성 외곽의 별볼일 없던 동네가 북촌을 제치고 조선 대부분의 행정기관과 상업시설, 경제기관이 있는 중심이 된 것. 



북촌은 계속 조선인들이 인구 다수를 차지했으며 친일파 고관대작이라도 여전히 북촌에 사는 것을 선호했음.   

주요 상권은 종로였으며, 남촌과 달리 종로는 일제강점기에도 조선인과 조선말 간판이 즐비했음.   

첫 한옥단지인 북촌 한옥마을이 들어선 시기도 이때임. 


또 행정구역도 조선식인 ‘동’으로 되어 있었음 (안국동, 혜화동)     

즉 일제강점기 경성은 완전한 이중도시 형태를 띄고 있었음.   

남촌과 북촌은 인구집단과 언어, 분위기 등이 마치 외국마냥 전혀 달랐지.  




1943년, 조선총독부는 경성부에 구를 설치했는데  

남촌을 중구, 북촌을 종로구로 하면서 이 구분이 실제 행정구역으로 변했음.   

중구가 중구인 이유도 당시 일본인들이 기거했던 지역이기 때문임.       



참고로 이러한 구조는 당시 조선의 지방도시에서도 흔히 볼 수 잇었음.   

대표적으로 전주의 일본인들은 전주성 서문 밖에 살다가 한일병합 이후 성 내부에 들어왔는데 

지금도 전주 원도심의 중심 상권은 구 전주성 서부인 객사와 웨딩의거리 일대임.   

반면 조선인이 주로 살던 남문 일대는 지금의 한옥마을이 생겨났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