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연은 1861년 칠곡 출생이야.

1887년에 통역관 지위로 미국 워싱턴 D.C.의 조선 공사관으로 발령받았어.  

외교활동과 더불어 1893년 시카고 엑스포의 조선관 구축 및 운영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귀국하게 됨   



이채연이 활동하던 시기의 워싱턴 D.C.  

당시 미국은 노면전차가 대세였고 이채연도 그 매력을 알고 있었어.  

특히 워싱턴 D.C.는 방사형 도로/도시계획으로 미국에서도 상당한 수준의 도시구조를 가지고 있던 동네였지.  



반면 동시기 19세기 후반, 

조선의 수도 한성은 외국인들에게 조롱의 대상이었어.  

일국의 수도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전근대적인 인프라와  더러운 환경으로 비판받았고 

도로는 조선조 500년간 불법건축물과 노점에게 점거되어 사실상 골목화 된 상황이었으니까



무려 외국인들은 이런 증언을 했지.    

정부는 1896년 아관파천 이후 한성을 근대화시키는 작업에 주력하는데,  

고종은 미국 경험이 있는 이채연을 한성부판윤(서울시장)으로 임명해.



그는 내부령 9호, 「한성부 도로의 폭을 규정하는 건」을 발표해. 그 내용은 


1. 한성 내 주요 간선도로의 불법 건축물 철거 및 도로확장 

2. 덕수궁 앞(현 서울광장)을 중심으로 방사형 간선도로체계 구축  

3. 한성에 전차, 전기, 수도, 가로등 등 인프라를 설치  

4. 탑골공원, 퍼브릭파크(Public Park) 등 도심 공원 조성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그는 한국 최초로 현대적 개념의 도시계획을 주도한거야. 




워싱턴 D.C.는 백악관을 기점으로 여러 도로가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며, 도심 교차로 곳곳에 기념공원이 있는 구조인데  

이채연은 이 워싱턴 D.C.를 모델로 서울을 바꿔. 


덕수궁을 미래의 궁궐로 생각하고 백악관에 치환하여 덕수궁 중심의 방사형 도로망 체계를 구축해.  

그게 현대 서울광장 육거리야. 

이때 소공로, 서대문로 등을 제대로 닦고 세종대로와 남대문로를 연계시켜. 지금 육거리의 기반이 이때 닦였음. 

 또 탑골공원 등 사대문안 공원도 이 사람이 주도해서 만들어짐. 




결과적으로 이랬던 한성이




고작 몇 년 만에 이렇게 깔끔하고 도로가 넓은 도시가 됨. 


도로는 넓어지고, 가로등으로 밤에도 밝게 빛나고, 전차가 다니고, 도시가 깔끔해졌어.   또 한성의 오명이었던 길거리의 똥도 찾아볼 수 없게 됐어.



특히 이 사람의 업적은 전차 도입이야.  

그는 워싱턴 D.C.의 전차를 보고 한성에 전차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어.

1898년 친구 미국인들과 합작으로 한성전기회사 설립을 주도했으며 초대 사장으로 취임했지.   


이 사람이 대단했던 건 앞서 시행한서울 도로 확장 및 보수가 전차 도입을 위한 기초인프라 조성이었다는 거야. 


 그는   

1. 도시개발을 통한 노면전차 기본 인프라 구축  

2. 동대문에 차량기지와 발전소를 설치  

3. 자본을 유치하여 주식회사 형태의 전기회사 설립  

4. 사회간접자본(SOC)개념의 최초 도입. 선로 부설 및 전차 구입   


을 순차적으로 진행했는데

이는 최초의 현대식 도시/교통 행정 정책이야. 

당시 조선을 기준으로 완전히 시대를 앞서간 사람이었다는거임.

SOC/민간합작투자/사전 인프라 조성 등 최초였지. 




전차는 1899년에 개통했는데 이는 도쿄(1903년)보다 더 빨랐어. 
세계 첫 전차개통이 1881년이었으니 세계적으로 빨랐던거야. 이채연은 트렌드를 읽고 기반이 없던 조선에서 그걸 해낸 대단한 사람인거지. 



1890년대에 똥의 도시라는 오명을 가졌던 한성은 1900년대에 서양인들의 찬사를 받는 도시가 됐어. 

 너무 발전해서 본래의 색을 잃어가는 도쿄나, 혼란스럽고 어지러웠던 베이징보다 훨씬 아름답고 단정하다는 평가를 받았음.    


그러나 이채연은 1900년 만 40세의 나이로 의문사했어. 

 그의 미국인 친구 샌즈의 증언으로는, 

저녁식사를 한 후 자신을 찾아와서 '나랑 같이 식사한 이들의 동향을 살펴달라'고 부탁했다고 해.  

그런데 같이 식사한 사람들도 대부분 죽어 있었고 이채연도 그 소식을 듣고 샌즈의 품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져.  


 당시 이채연과 한성전기회사를 필두로 대한제국 인프라를 장악하던 회사 콜브란은 그가 이용익에게 독살당했다고 주장했어.  이용익은 황실측근세력이었고 이채연은 유명한 친미파였는데 둘의 갈등은 상당했거든. 



당시 그의 서명. 


이채연은 시대를 앞서간 행정가였어.  

이 사람이 다져놓은 기반을 토대로 일제강점기에도 경성 개발 계획이 이루어졌고 서울의 뿌리깊은 교통축인 첫 전차선도 만들었으니까.   

워싱턴 D.C.에서 근무할 때 미국은 물론 일본, 영국, 프랑스, 멕시코 인맥까지 두루 만들었을 정도로 사람 자체도 좋았다고 해.   

당시 조선인이 워싱턴 D.C.를 탐구하고 그 구조를 조선에 접목시키려 했다는 발상, 

어떤 기반도 없던 국가에서 근대식 행정 절차로 도시 개혁을 진행한 공로를 가지고 있지. 


우리가 일제에서 개발했다고 생각했던 근대 서울의 밑바탕에는, 이채연의 개혁이 먼저 선행되어 있기에 가능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