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화 1화 2화 3화 4화 5화 6화 7화 8화

--------------------------------------------


 #9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짧았지만 결코 짧게 느껴지지 않았던 반나절 간의 전투 후 우리 오르카호 인원들은 승리에 다들 기뻐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앞에 닥쳐온 것은 절망이었다.

 

 [아니, 철충들을 전멸시킨 것과 그 도중에 한 명의 사망자도 안 나왔다는 건 기적적인 일이긴 한데, 그 대가가 너무 큰 것 아닙니까?]

 “....”

 [탄약과 포탄 잔여량은 고작 1할. 키예프 서쪽 도심지의 극심한 파괴. 드네프르 강의 모든 다리 폭파로 인한 사용불가. ...실례지만 정말 석관 작업은 차질 없는 것 맞습니까?]

 “그건 확실해. 공사 현장은 도심 동쪽이었고 피해도 없어.”

 [그런데 물자는 주로 서쪽에 적재해 두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분명 다리는 전부 파괴되어 현재로서는 수리도 불가능하다 들었는데.]

 “...일단 가교를 건설 중이고 급한 대로 부교도 놓았으니 어떻게든 될 거야. 정말로.”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다시 아-52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면 저희는 사령관님만 믿겠습니다. 그래도 사령관님은 믿을 만한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처음엔 불안했지만 아-52가 나를 부르는 호칭이 어느새 인간님에서 사령관님으로 변한 걸 알고는 나도 긴장이 좀 풀어졌다. 그런데 그런 나와는 반대로 정작 아-52의 얼굴에서 갑자기 긴장감이 느껴졌다.

 

 [그런데...저도 들었습니다. 제-358이 ‘그’ 이야기를 했고, 하-68의 일도.]

 

 그 한마디에 내 등골이 서늘해졌다. 안 그래도 그 문제 때문에 고민하다가 갑자기 철충이 쳐들어와 잠시 잊고 있었는데. 다시금 그 문제를 떠올리자 눈앞의 아-52를 쳐다보기가 갑자기 힘들어졌다. 

 

 [뭐라 말해야 할지. 우리들이야 그것이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사령관님은 그렇지 않을 것 같아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단 한 명의 바이오로이드도 잃지 않으셨다고 하셨으니.]

 

 그 말에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코헤이 교단 가고시마 지부의 그 아자젤.... 그리고 그곳에 있었던 바이오로이드들.... 

 

 갑자기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아까와의 침묵과는 다른 종류의 침묵이 또다시 흘렀다. 

 

 [괜찮습니다. 일단 사령관님은 그쪽 일들에 우선 집중해 주십쇼.]

 

 그 이후 한동안을 작업과 관련된 대화로 시간을 보낸 후 나는 통신을 종료했다. 화면이 어두워지자마자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 제대로 앉아 있기도 힘들었다. 안 된다는 건 알지만 갑자기 술이라도 마시고 싶은 기분이었다. 정말 그 정도로 모든 걸 잠시 잊고 싶었다.

 

 결국 도저히 견디질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자 나는 패널을 조작해 호출 신호를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함장실 문을 두들겼다. 들어오라고 말하자 붉은색 수단을 걸친 바이오로이드가 들어왔다.

 

 “어서 와, 아르망.”

 “폐하,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영 좋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부른 거 맞아.”

 

 대충 사정을 설명하자 아르망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내가 이 문제에 대해 상의하기 위해 불렀던 인원들 중 한 명이었으니 이 사안이 어떤 것인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불러 주신 것은 감사드리나...애석하게도 저라도 그 문제에 한해서는....”

 “그게 아니라....”

 

 어떻게든 견디던 와중, 결국 몸에 힘이 풀려 버렸다. 시야가 확 뒤집혀지더니 어두워졌다.

 

 -폐하? 폐하!

 

 다급히 외치는 아르망의 목소리를 끝으로, 나는 정신을 잃었다.

 

============================

 

 “다행히 그냥 기절하신 거에요. 좀 쉬시면 괜찮아질 것 같아요.”

 

 다프네의 그 같은 말에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놀랐네요. 재작년에 한번 이러셨던 이후론 이런 일이 없어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음, 그렇긴 하지.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이번 전투지휘가 확실히 고된 일이긴 했지만 각하께선 이 정도로 쓰러지실 분은 아니라는 것이지. 아무래도 아르망의 말에 따르면 그 일로 마음고생이 심하셨던 것 같군,”

 

 누워 있는 사령관의 얼굴은 확실히 하루 만에 상당히 해쓱해져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자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구원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이렇게나 심하게 고생할 정도의 일이라면 보통 일이 아니었을 텐데.”

 “그러고 보니 어제 그 자리에 없었던 분들도 있군. 간단하게 요약해서 말하지.”

 

 아스날의 설명이 끝나고 나자 이 이야기를 처음 듣는 바이오로이드들은 하나같이 인상을 찌푸렸다. 다만 경멸이 아닌 애처로움으로.

 

 그저 돈에 대한 인간의 탐욕 때문에 그녀들은 제조되었고, 이후 수십 년간 몸이 천천히 망가져가며 이 고립된 곳에서 쉬지도 못하며 하나둘 죽어가야만 했다. 오르카호의 바이오로이드들 중 몇몇은 멸망 전쟁 전에 생산되어 인간의 잔인함을 눈앞에서 지켜보기도 했던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눈앞에서 다른 바이오로이드가 피투성이로 전신이 해체되는 것을 보는 것과 자신을 포함한 전원이 적막 속에서 수십 년에 걸쳐 몸의 조직이 전부 파괴되다 결국 하나하나 자신의 손으로 그 고통을 끝내 주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끔찍한 것일까. 비록 확답은 내릴 수 없어도 후자가 결코 전자보다 못하진 않을 터. 

 

 그 자리에 있던 그 누구도 주라블리에 대해 말을 꺼낼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저 저마다의 생각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운 채 입은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 후에야 그녀들은 일제히 사령관을 돌아다봤으나 사령관은 침대에 누워 잠든 채 그대로였다.

 

 그래도 잠시마나 편히 쉬는 사령관의 얼굴을 본 그녀들은 잠시 서로의 얼굴들을 마주본 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령관 옆에 최소한의 간호 인원만 남긴 그녀들은 다들 각자의 일을 처리하러 흩어졌다. 사령관이 직접 처리해야 되는 업무만을 제외한 모든 업무가 각지에서 처리되기 시작했다.

 

 이 문제가 다른 누구도 아닌 사령관 스스로가 해결해야 하는 것인 만큼, 그녀들은 그 짐을 대신 들어줄 수 없었지만 다른 짐들을 조금씩 대신 들어주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들이 각자의 맡은 바에 열중하는 동안, 프리피야트에서 통신 하나가 들어왔다.

 

==============================

 

 그날의 작업을 끝낸 아-52는 자신의 방에 돌아와 의자에 눕다시피 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어쩐지 요즘 들어 몸이 피곤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종종 들어서 그녀는 결국 자신의 보물 제 1호를 가져왔다.

 

 붉은색 깡통에 담긴 검은색 가루를 뜨거운 물에 넣어서 휘젓자 향긋한 쌉싸레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수십 년 만에 다시 맛보는 커피에 그녀는 요 근래를 통틀어 가장 살아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혹시라도 흘릴까 조심스레 잔을 집어든 아-52의 움직임에서는 경건함마저 느껴졌다. 남이 그 모습을 본다면 그 잔에 든 것이 인스턴트 커피가 아닌 녹은 황금이나 신의 성혈이라도 들어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한 모금 커피를 입에 머금은 후에는 눈을 감고 코로 숨을 내쉬며 그 향을 극한까지 즐긴 후에야 조심스레 목구멍으로 흘러 넣었다. 입에서는 쌉쌀한 맛이, 코에서는 향긋한 향기가. 그리고 뱃속에는 따끈한 기운이 퍼지자 아-52는 얼굴 가득히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한 모금, 한 모금 아껴 마셨지만 결국엔 잔은 바닥을 드러냈다. 한참을 잔 바닥만 들여다보던 아-52는 이내 붉은색 깡통으로 시선을 돌렸다. 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어느새 깡통은 반 넘게 비어 있었다. 비록 공수받은 물자에서 커피가 많지는 않지만 부족하지는 않았고, 커피의 인기는 초콜릿이나 술, 담배 같은 다른 기호품들에 비하면 그다지 많지도 않았지만 그녀는 굳이 남들의 몫을 빼앗아가며 커피를 마시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자신 몫으로 돌아온 다른 기호품들은 그다지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 두나이들에게서 커피로 전부 교환해 버렸기에 물물거래도 불가능했다. 만약 그녀가 부탁하기만 하면 다른 두나이들이 기꺼이 자기 몫을 나눠 주기도 할 것이다. 다만 그 행위 자체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것임을 아는 아-52는 한참을 빈 잔과 커피 깡통을 번갈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몇 분 뒤, 결국 아-52의 잔에는 새 커피가 채워져 있었지만 그 양은 잔의 절반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간신히 욕망과 이성 사이의 중재를 끝낸 아-52가 다시 커피를 음미하려던 순간, 그녀의 방문이 갑자기 벌컥 열렸다.

 

 “우워우웃으아아뜨그흐으으으에헤엑?”

 

 비록 의미 없는 문자의 나열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아-52는 깜짝 놀라 커피를 쏟아버리고 그에 대해 아까워하면서도 뜨거운 커피로 인해 손을 덴 고통을 호소했지만 자신의 방에 들어온 상대를 보고 경악했다는 이 상황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단 한 문장만으로 표현하는 데 성공했다.

 

 몇 초 뒤에야 간신히 언어의 특성을 지닌 소리를 낼 수 있게 되자 아-52가 가장 먼저 외친 말은 이것이었다.

 

 “지, 지휘관? 왜 여기까지 온 거야?”

 

 문을 열고 들어온 건 피리피야트 기지의 지휘관, 주라블리였다.

 

==================================

 

 쓰러지고 반나절 가까이 지나고서야 사령관은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의 얼굴이 보이자 사령관은 멋쩍게 웃어 보았다. 잠시 침대에 누운 채 마저 휴식을 취하던 중 닥터가 사령관을 찾아왔다.

 

 “휴, 이제 몸은 좀 괜찮아?”

 “어, 미안. 또 걱정하게 해 버렸네.”

 “그러니 오빠는 너무 걱정하지 말라니까...라고 하고 싶긴 한데. 일단 사과부터 할게. 아무래도 내가 오빠 걱정을 늘려 버릴 것 같으니까. 비록 깨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긴 해서 나도 고민했지만, 아무래도 이건 차라리 빨리 아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하며 닥터는 파일 하나를 사령관에게 내밀었다. 파일을 받아들고 그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사령관의 얼굴이 급속도로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조금 시간을 들여 파일을 전부 읽은 사령관은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한 번 더 정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걸 한 번 더 반복한 후 사령관은 얼굴을 손으로 덮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 오빠.”

 

 닥터의 표정과 말투는 그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지만 사령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곁에 앉아 있던 아자젤이 입을 열었다.

 

 “반려, 대체 무슨 일이죠. 지금 당신의 표정은 너무 괴로워 보여요.”

 “아자젤...한 가지만...물어봐도 될까....”

 “네?”

 

 이어진 사령관의 말은 아자젤에게 상상도 못 할 충격을 안겨 주었다.

 

 “내가...정말로 구원자가 맞는 걸까?”

 “...! 지금 무슨 말을!”

 “읽어봐.”

 

 순간적으로 아자젤은 당황을 넘어 분노할 정도로 감정이 치솟았지만 너무나도 사령관의 태도가 차분해 자기도 모르게 파일을 받아든 후,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한동안 의학 관련 전문 용어들이 나열된 후, 결론이라는 글자로 시작하는 마지막 문단을 읽으며 아자젤은 경악했다.

 

 “...위의 결과들로 추측하건대, 프리피야트 기지의 두나이들에게 남은 기간은 최대 6개월? 이, 이게 무슨?”

 “처음에 병동을 지은 후 대규모 건강검진을 계속해서 하고 있었어. 그리고 그 결과와 채취한 샘플들을 닥터가 분석하고 있었고.... 오늘에서야 그 결과가 나온 것 같네.”

 

 사령관은 생기 없는 두 눈을 아자젤을 향해 돌렸다.

 

 “아자젤, 미안해. 아까 전의 내 말은 실언이었어. 너에게 못할 말을 해 버렸네. 뭐라 사과해야 할지 모르겠어. 최소한 지금은 그렇네. 하지만...순간적으로 이걸 본 순간 너무나도 충격이 커서 그만.... 내가 과연 구원자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 가능할지 의문이 들어버려서....”

 

 그 이후로도 계속 사령관이 말하려던 찰나, 아자젤은 온몸으로 사령관을 끌어안았다. 

 

 “아아, 부디 그 이상으로 말하지 말아줘요. 당신은 잘못한 것이 없으니까. 다만 제발 그렇게 자신을 부정하지만 말아줘요. 당신은 제 반려이지만, 그 이전에 당신은 저희들을 구원해 준 ‘구원자’이니까요. 그렇지 않나요? 당신은 비록 그 방식은 다양할 지라도 우리 모두를 구원해 줬으니까.”

 

 말없이 아자젤의 말을 듣던 사령관의 입가에 간신히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비록 그 눈은 아직 웃고 있지 않았지만. 그리고 불운하게도 아직 사령관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노크소리 후 한 바이오로이드가 문틈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저, 저기. 사령관님?”

 “유미 양? 무슨 일이죠?”

 “프리피야트에서, 사령관님을 지명한 통신이 들어와 가지고요.”

 

 닥터는 그 말에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오빠는 좀 쉬어야 하는데...급한 일이 아니라면 다른 언니들이 처리하겠다고 아-52 언니에게 그렇게 전해 줄래?”

 “그, 그게. 통신을 요청한 게 아-52씨가 아니라서요.”

 

===============================

 

 [프리피야트 기지의 지휘권자 ПК-76 주라블리입니다.]

 “오르카호의 사령관입니다. ...무슨 일로 부른 거야?”

 

 그저 평범한 대화를 주고받았을 뿐임에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나는 도저히 주라블리가 나와 만나고 싶어 하는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겠다. 당장 첫날 만났을 때도 그녀는 나라는 인간의 존재에 시큰둥하다 못해 싫어한다는 느낌까지 받을 정도였으니. 게다가 그녀 입장에서 인간을 증오할 이유는 차고 넘치니....

 

 그런 생각에 빠져 있던 나는 주라블리의 요청을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다시 되물어야 했다.

 

 “미안, 뭐라고?”

 [...그쪽에 성직자나 그 비슷한 게 있는지 물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내 고개는 옆으로 돌아가 아자젤을 쳐다봤다. 그와 동시에 아자젤도 나를 쳐다봤고. 

 

 [저 천사풍 바이오로이드입니까.]

 “아, 네. 코헤이 교단의 아자젤입니다. 신도 분...이신가요?”

 [정교회 신자지만 지금은...뭐, 어쩔 수 없겠군. 아-52. 잠시 나가 있어.]

 

 아-52가 화면에서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주라블리는 나를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죄송하지만 인간님도 잠시 자리를 피해 주시겠습니까.]

 “왜죠? 구원자는 저희들을 이끄는 분 이신데다 죄를 사하실 권한도 가지신....”

 [그래? 그렇다면 계셔도 되겠군요.]

 

 주라블리는 잠시 화면 밖으로 나가더니 무언가를 들고 돌아와 그녀 뒤 창가에 그걸 기대 세워 놓았다. 자세히 보자 그건 그림이었는데 멸망 전 기록에서 자주 보던 기독교라는 종교의 예수 같았다. 비록 내 기억과는 좀 다른 특이한 그림체이긴 했지만.

 

 다시 자리로 돌아온 주라블리는 의자를 치우더니 바닥에 꿇어앉았다. 모자와 마스크를 벗은 그녀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맞잡은 후 고개를 숙였다.

 

 [고백성사를...하고 싶습니다.]

 “자, 잠시만.”

 

 나는 황급히 화면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아자젤도 따라왔고, 나는 유미에게 다가가 잠시 이쪽을 음소거하라고 속삭였다. 장치로 다가간 유미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바로 아자젤에게 말을 걸었다.

 

 “이거 어떡해야 하는 거지?”

 “...하, 하던 대로 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렇지만 그대로 하기엔 너무나도 저 주라블리가 경건한 신자 같다. 그녀 입장에서는 수십 년 만의 성사인데 아무리 나와 아자젤이 코헤이 교단이라 해도 이대로 우리 식으로 해 버리는 건 뭔가 미안하다. 게다가 사실 나도 완벽하게 그 절차를 아는 건 아니기도 하고,

 

 마지막 부분을 뺀 내 의견을 아자젤에게 말하자 그녀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대로라면 이 문제에 한해서는 아자젤이라도 그녀의 의견을 굽히지 않겠지만 아무래도 나처럼 저 주라블리에게 무언가가 느껴지는 것 같았는지 내 의견에 동의했다. 

 

 결국 멸망 전 데이터베이스를 긴급히 검색해 기도문을 찾아낸 후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제 되셨습니까. 그 바이오로이드 분은 어디로 가셨는지.]

 “아자젤은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할 일이 생겼어. 그럼, 시작할게.”

 

 그러자 장치 뒤에서 나를 마주보는 형태로 서 있던 아자젤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직접 성사를 볼 수는 없지만 나를 지켜보겠다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당신은 하느님과 내 앞에 서 계십니다. 아무것이나 부끄러워 말고 말씀하십시오. 당신은 나에게 고백하는 것이 아니고 이 자리에 계시는 하느님께 고백하는 것입니다.”

 

 검색한 내용에 적혀 있던 기도문을 읊자 주라블리가 이어서 말했다.

 

 [마지막으로 고해한 지 70년이 넘게 흘렀습니다. 저는 그동안 수많은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날 사고가 났을 때. 제 언니들은 저를 사고현장이 아닌 후방으로 보냈습니다. 막내인 저를 덜 위험한 곳으로 보내려는 의도였으나, 저는 그 말에 안도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게 어째서....”

 [현장에서 작업을 지휘한 후 언니들은 전부 심각하게 피폭되었습니다. 4교대로 작업을 지휘했음에도, 모두가 허용치를 한참 넘겼습니다. 저도 함께했더라면 그 양이 더욱 줄었을지도 모릅니다. 비록 그렇게 해도 모두가 같이 죽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저는 그 말을 들은 순간 제가 그곳에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내심 생각해 버렸습니다. 저는 그런 생각으로 언니들의 희생을 폄하해 버렸습니다. 모두가 목숨을 버리는 가운데, 홀로 살아남아 버려서. 그런 옹졸한 마음으로 그 숭고한 결의를 더럽힌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공포에 사로잡혀 제 의무를 방치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너무나도 많은 바이오로이드와 인간이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갔습니다. 제 언니들은 방사선 방호력이 뛰어난 주라블리 기종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 고통이 길게 이어져야 했습니다. 언니들은 아무리 봐도 붉은색 살덩이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었습니다. 저는 그 언니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언니들이 고통에 내지른 비명 소리가 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모든 체액이 흘러나오는 몸이 눈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언니들은 그 기지에서 유일하게 자신들을 죽여 줄 수 있는 제게 그만 끝내 달라고 부탁했고, 저는 도망쳐 지하실 안에 틀어박혔습니다. 언니들이 이 세상을 떠난 후, 그 육신과 장비들을 전부 콘크리트 아래에 파묻을 때도 그 모습은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그 콘크리트 속에서 체액이 흘러나오고, 비명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제 지휘권을 아-52에게 위임한 후 숨어 버렸습니다. 숨어서 꼴사납게 살아갔습니다. 저는 이 땅이 무서웠습니다. 제 피부가 문드러지기 시작하자 그 공포는 더욱 심해져 버렸습니다.]

 “그리, 곤...?”

 

 목소리가 중간에 어디서 걸린 것처럼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저는 한 바이오로이드를 만나고는 그녀를 죽여 버리고 싶다 느꼈습니다. 자신을 레모네이드 오메가라 칭한 그녀는 30년 전에 이곳으로 온 후 저희들을 보고선 끔찍하다며 보기도 싫다 말했습니다. 쓸 가치도 없는 땅과 바이오로이드들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갔습니다. 우리들이 아니었으면 이 땅에 서 있지도 못했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잘난 체 하는 얼굴을 원자로 노심에 처박아 그 피부와 살을 녹여 버리고 싶었습니다. 그 매끈할 팔다리를 토막내 태워 버리고 몸을 갈아 콘크리트에 파묻어 버리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창조한 기업의 잔재를 이끄는 자가 우리를 부정한 것이 너무나도 괴로워 그런 끔찍한 생각을 해 버렸습니다. 만약 제가 이 도시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면 그때 그 바이오로이드를 붙잡아 말한 그대로 해 버렸을 겁니다.]


 레모네이드 오메가. 정말로 이곳에 왔다 갔구나...그리고 그런 말을. 아-52가 그때 레모네이드란 말에 반응했던 이유가 그래서였군. 

 

 [저는 수많은 바이오로이드들을 제 손으로 살해했습니다. 모두 합쳐 17634명을 살해했습니다.]

 

 ...아.

 

 [1천 명을 약물로. 2천 명을 총으로. 나머지를 삽과 단검으로. 죽여 달라 울부짖던 그녀들을 제 손으로 살해했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대죄를 지었습니다. 어제도 그렇게 한 두나이를 죽였고, 그녀를 살리려던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의 노력을 부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수없이 죽여고 죽여도 저는 그것을 그만 둘 수 없었습니다. 괴로워하는 그들을 볼 때마다 제 언니들이 떠올랐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살아 있는 것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죽어간 언니들을 떠올릴 때마다 저는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며 손에 피를 묻혔습니다.]

 

 주라블리는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그 납빛 얼굴은 어느새 눈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저는 정말로 커다란 죄를 지었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입니다.]

 “말해...주세요....”

 [저는, 인간이 증오스럽습니다.]

 

 머리를 세게 부딪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이어진 말은 그 이상으로 내 정신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다.

 

 [바이오로이드로 태어나 인간이 증오스러우나, 그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의 잔혹함이 아니었습니다. 어째서...인간은 모두 악하지 않은 겁니까?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조상이 이 땅에 살았다는 그녀는 우리들에게 고마워하며 우리가 하는 일이 숭고하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녀는 저를 바이오로이드가 아닌 자신의 친구라 여겨 주었습니다. 그녀의 숙부 또한 그랬습니다. 정교회 신부였던 그 남자는 우리를 다른 종교인들처럼 부정하지 않고 비록 잘못된 방법으로 태어났을 뿐인 인간이라 칭해 주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저희들의 마음을 달래 주었고, 저희들의 죄를 사해 주었습니다. 저희들이 죽어갈 때도 자신이 가장 몸이 좋지 않았음에도 저희들이 앞으로 걸을 길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그 둘 이외에도 저희들에게 잘 대해 준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둘과 같은 소수의 인간들을 제외하면 나머지 모두가 너무나도 증오스럽습니다. 우리를 방사능 앞에 죽을 운명으로 창조하고, 이 지옥 같은 땅에 수십 년 넘게 묶어 두었으며. 제대로 장례도 치를 수 없게 명령한 인간들. 저는, 인간이 너무나도 증오스럽습니다. 그런데, 어째서...인간들이 제게 한 악행들을 떠올릴 때면 저는 그들이 떠오르는 겁니까? 

 어째서 인간은 이중적이라 한 면만 증오할 수 없는 것입니까? 왜 저는 그들을 미워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는 것입니까? 대체 저는 어떡해야만 하는 겁니까!]

 

 방 안에 주라블리의 절규가 울려 퍼졌다. 그러더니 갑자기 주라블리는 나를 매섭게 쏘아봤다. 비록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그 두 눈빛은 너무나도 분명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제가 이렇게 괴로워한다고 해서 인간들이 돌아볼까요? 그럴 목적으로 만들어진 바이오로이드인데? 그래서 인간들이 차라리 모두 사라지길 원했는데...정말로 그렇게 되어버린 세상에서 우린 살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당연하죠, 우리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종속된 존재이니까요. 우리는 인간이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 명령한다면 그렇게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자유의지라고는 없는 인간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대체 이럴 거라면 저희들의 창조자는 어째서 저희들에게 이성을 준 것입니까? 그리고 애초에 저희들은 정말로 살아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들을 증오하거나 사랑할 자유도 얻지 못하는 존재들 아닙니까! 결국 제 죄는 대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애초에 제가 이렇게 고심하고 참회하고 고백하는 것에 의미가 있기는 한 겁니까? 제발 나에게 대답해 줘! 우리는 대체 뭐인 거야!]

 

 주라블리는 울부짖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 가운데 주라블리가 흐느끼는 소리만이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주라블리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화면에 내던졌다. 그 다음엔 창가로 뛰어가 그림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울부짖으며 그녀가 화면밖으로 나간 후 문 여닫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아-52가 들어와 화면에 잡혔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이게 왜....]

 

 아-52는 주라블리가 던지고 간 나뭇조각을 집어 들었다. 

 

 [일리야 씨가 직접 조각해서 준 이후 단 한 번도 몸에서 떼놓고 다니질 않았는데...저 예수 이콘은 또 왜? 수십 년간 애지중지 한 건데? 사령관님? 대체 뭔 상황입니까?]

 

================================

 

 주라블리는 울면서 밖으로 달려갔다. 건물 밖으로 나간 후 단숨에 기지를 가로지를 그녀는 자신이 나왔던 건물 지하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모자와 마스크를 놔두고 왔지만 주라블리는 그런 사소한 건 신경 쓰지 않았다.

 

 어둡고 좁은 방 안에서 주라블리는 홀로 우짖었다. 그 후엔 하염없이 소리쳤다. 문득 그녀는 자신이 막 찢어버린 이콘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 이콘은 아무것도 자신에게 해 준 것이 없다는 것이 떠오르자 그녀의 슬픔은 더욱 깊어졌다. 그녀는 다시 손을 맞잡고 기도하며 절규했다. 신, 인간, 정령, 세계 그 자체까지. 그녀가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초월적인 대상을 향해 그녀는 도와 달라고 외쳤다.

 

 

 

 

 

 그러나 그 외침을 듣고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


 일단 저는 이번 화 제목으로 쓴 문구가 현 종교계에서 여러 의미로 해석되는 만큼 그 해석들 중 한 해석에서 그 의미만을 차용했고 특정 종교를 비방할 의도가 없었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제가 정교회를 포함한 기독교 신자는 아니라 만약 오해한 것이 작품 내에 있고, 만약 거기에 불쾌하셨다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저 작품의 내용상 집어넣은 만큼 타당한 근거를 들어 지적해 주시면 그 의견대로 수정할 용의가 있습니다. 


---------------------------------------------


 부산서 올라왔더니 머리가 빠개질 듯이 아프고 속도 다 뒤집어져서 겨우 몸 추스리고 글 쓰는데 3화를 내리 전투장면만 쓰다 애들 속내 쓰다 보니 예상보다 늦게 돌아왔습니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작업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