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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주나


 

일리야 세르게예비치 아베리나가 프리피야트로 온 것은 2101년이었다. 우크라이나군 소속인 그녀가 이곳에서 할 일은 관리직. 그 당시의 프리피야트 기지는 바이오로이드를 제외하고도 소수의 인간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과 다른 자들을 부릴 때 그들을 관리하는 건 어지간해서는 동족에게 맡기는 법이니 말이다. 

 

 하지만 바이오로이드의 특수성 덕분에 그녀들을 관리하는 데는 10여 명 전부면 충분했다. 대충 10명 단위로 조를 짠 후 다시 백여 명 정도로 묶은 후 다시 천 명 단위로 묶다 보면 10명이 조의 지휘권자 몇몇만 관리하면 되니 말이다. 그런 만큼 기지에서 관리직을 맡게 된 인간들은 그다지 할 일이 없었다. 발전소를 관리하는 기술진들은 노후화된 원자로 때문에 자주 바빴지만 그들은 별도의 지휘체계에 속했다. 

 

 아침에 일어나 기지를 한번 돌아본 후 별 것 아닌 보고나 좀 처리하고 두나이들이 작성한 보고서 초안을 조금 손보고 도장을 찍으면 하루 일과가 끝이 났다. 그러면 나머지 시간은 사실상 자유시간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자 그들 입장에서 이 기지의 유일한 단점이라고는 출입이 제한된다는 것과 방사능의 존재였지만 전자는 관리직 상당수가 군인이었다는 점에서 별로 문제가 되지 못 했다. 후자도 2101년쯤에는 제염 작업이 상당히 진행되어 기지가 위치한 프리피야트 외곽은 사람이 살기에 크게 문제없는 정도로 방사선 수치가 낮아져 있었다. 

 

 그러니 이곳에 배치된 일리야 세르게예비치는 몇 주 만에 할 일이 없어 미칠 것 같은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독서나 명상 같은 것들로 시간을 때웠던 선임들과는 다른 방법을 쓰기 시작했다. 그녀는 하루 일과가 끝나면 바이오로이드들의 막사로 향했다.

 

 물론 처음에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그다지 친하지도 않은 상사가 막사로 찾아왔을 때 진심으로 반겨 줄 수 있는 부하란 것은 도수 낮은 보드카와 비슷한 느낌이니까. 하지만 한 가지 다행이었던 것은 일리야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일리야 세르게예비치가 아닌 일리샤로 부르게 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녀의 고조할머니가 한때 이곳에서 살았다는 사실은 두나이들의 경계심을 한층 더 누그러뜨렸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일리야와 적잖은 두나이들은 서로를 반기며 인사할 수 있을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 다만 몇몇 두나이들은 그녀를 그다지 반길 수 없었다. 결국 그녀들은 바이오로이드고, 일리야는 인간이었으니까. 

 

 실제로 일리야를 제외한 다른 관리직들은 바이오로이드와 친한 사람이 없었다. 당시 대다수의 인간들이 그러했듯 바이오로이드 자체를 그저 도구로 보기도 했고 지역 특성상 그녀들의 몸에 쌓인 방사선이 두려웠기도 했던 것이다. 비록 기지의 두나이들에게서 2차 피폭을 당할 가능성은 매우 낮아 사실상 불가능하긴 했지만 두려움이 이성적인 감정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몇 년이 지나며 대부분의 두나이들은 일리야에게 마음을 열었고, 자연스레 주라블리들과도 친해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주라블리 5번이 프리피야트로 보내져 왔다. 제조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녀는 자연스레 다른 주라블리들에게 막내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를 막내 취급하는 건 주라블리 1,2,3,4번만이 아니었다.

 

 이미 수년을 기지에서 근무하며 두나이와 주라블리들과 지내다 보니 이 기지와 작업에 대한 것이라면 일리야는 주라블리 5호기의 모듈에 입력된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자신의 머릿속에 가지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종종 이론과 현장의 괴리에 쩔쩔매던 주라블리 5번이 일리야의 보조와 함께 작업을 수행하는 모습이 보이곤 했다.

 

 그러다 보니 주라블리 5번이 남의 손을 빌리지 않아도 될 무렵이 되자 일리야와 주라블리 5번은 서로를 계급보다는 일리샤와 주나라고 부르고 있었다. 일리야가 자기 삼촌을 부르려는 마음을 먹은 건 그때쯤이었다.

 

 신부가 군 기지-당시 프리피야트 기지는 PECS의 관할이었지만 전기만 꼬박꼬박 대 주면 신경 쓰지 않았기에 군 관할 비슷하게 운영되고 있었다-에 들어와서 나쁠 건 없었기에 일리야가 낸 신청서는 수리되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뒤엔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풍채 좋은 사내가 프리피야트로 들어왔다.

 

 야콥 이바노비치 에버린은 바이오로이드 제조 행위는 주님의 뜻을 거스른 용서받지 못할 행위라고 굳게 믿고 있었지만 제조된 바이오로이드는 그저 원죄를 가졌을 뿐인 똑같은 인간이라 믿는 상당한 진보주의 성향의 신부였다. 조카딸의 연락을 받은 후 바로 프리피야트로 달려온 그는 즉시 낡아서 버려진 창고 하나를 찾아서는 일주일 만에 어엿한 예배당으로 바꿔 놓았다. 게다가 어디서 어떻게 구해 온 건지는 몰라도 족히 수 세기는 된 것 같은 거대한 십자가까지 가져다 놓자 딱히 종교에 관심이 없던 자들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 십자가는 박물관 진열창 속에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한 물건이었으니까.

 

 물론 야콥은 개인의 자유의지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자신의 정상적인 신념 하에 포교 행위를 일절 하지 않았으나 그의 넉살 좋은 성격과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 그리고 미사 때는 사람이 바뀌었다고 착각할 정도의 경건함은 충분히 그 자체만으로도 포교였다. 결국 예배당은 확장을 거듭하다 아예 개방형 반 야외 예배당으로 개조해야 할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일리야와 야콥을 제외하면 바이오로이드들에 대해 그리 우호적이지 않던 다른 인간들도 조금씩 바이오로이드란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미사 때 바이오로이드들과 자리를 구별하지 않고 앉는 것부터 시작하더니 일리야가 온 지 10년, 야콥의 경우에는 5년째가 되는 해의 연말 파티는 인간과 바이오로이드들 모두가 한 자리에 앉게 되었다.

 

 비록 세상은 기업들 간의 대전쟁으로 피폐해져 가고 있었지만 한 버려진 도시 안에서는 이렇듯 아직 따뜻함이 남아 있었다.

 

 그러던 2111년 어느 봄, 일리야는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랐고, 손재주가 좋은 삼촌의 도움을 받아가며 작은 나무판에다가 하늘을 날고 있는 백학-주라블리를 조각해 그려 넣었다. 그녀가 제조된 지 5년째가 되던 날에, 주라블리 5번은 반창고투성이가 된 일리야의 손에 들린 나뭇조각을 받아들고 환하게 웃었다. 일리샤를 필두로 한 모두가 주나를 축하해 주었던 만큼, 주나는 그 이후로도 며칠 동안은 언제나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로 있었다.

 

 그리고 자신도 일리샤에게 무언가 해 주고 싶어진 주나는 일리샤는 물론이고 모두에게 숨겨가며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비록 일리샤를 포함한 모두가 며칠 만에 알아 버리긴 했지만 누구도 굳이 말하진 않으며 일리샤의 생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무토막이었던 것이 어떻게 보면 일리샤라는 걸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목각인형으로 변하자 주나는 간신히 시간을 맞춘 것에 기뻐했고, 내일 일리샤에게 건네주는 모습을 상상하며 침대에 누웠다.

 

 일리나 세르게예비치의 생일은 5월 19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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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52는 연신 마셔대던 술병을 다 비워버리자 탁자 옆으로 치웠다. 비록 화면에 나오진 않지만 거기엔 빈 병들이 잔뜩 있을 것이다. 이번에 공수된 물품들 중 섞여 있던 주류의 상당수가 이 방 안에 있었다.

 

 [그래 가지고...뭐, 결국 이렇게 되어 버린 겁니다. 둘은 진짜 친자매 못지않은 사이었으니까요...]

 

 어느새 얼굴이 새빨개진 아-52는 이미 비어버린 병을 거꾸로 들어 병 바닥을 손바닥으로 툭툭 치고 있었다.

 

 [우쒸, 요약해 말한다고 말하긴 했는데...그 시절 이야기 하려면 그 시절을 다시 떠올려야 되니까...맨정신으로는 힘들다고요.... 나 애들한테 부탁하면서 까지 술 얻어왔다고요....]

 

 결국 탁자에 머리를 박고 쓰러진 아-52는 간신히 고개만을 들어 이쪽을 쳐다봤다. 그녀의 얼굴에서 빛나는 무언가가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다.

 

 [일리샤는...사태 직후에 어떻게든 근처에서 도와줄 인원들을 불렀지만...턱없이 모자랐고...워낙 현장에 손이 모자라니까 자기도 나서고...우리는 다들 주나를 걱정해서 뒤로 보냈던 건데...아마 그게 주나는 한이었나 봐요.... 차라리 거기서 같이 일리샤와 있기를 바랬고, 그때 실제로 그러려고 했으니까.... 그런데 나중에 나머지가 다 그렇게 된 걸 보고 그런 마음이 들었으니 자괴감이 오죽하겠어요? 그런 거 마음에 담아 두지 말래도...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거 알면서...지휘 개체가 한 명은 있어야 했잖아....]

 

 아-52가 그 이후로 한동안 말이 없다가 숨소리가 느려지기 시작하자 나는 다급히 물었다.

 

 “그, 그럼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됐어?”

 [뭐라고요? 아. ...굳이 물어서 뭐 해요. 그나마 일리샤는 오히려 너무 심하게 피폭되어서...22일에 죽었죠. 고통은 거의 없이 가 버렸죠. 우리처럼 몸이 아작 나기 전에 죽어 버려서... 신부님은 조카딸의 죽음에 진짜 엄청 우셨는데...그래도 끝까지 서유, 아니 성유성사 집행하시다가 결국 자신도 피폭에 쓰러져 가지고...그 힘든 걸 그 몸으로 끝까지 하시더라고요...평범한 인간이셨는데.... 나머지도 다 죽었어요. 유리도, 야코프도, 바실리도. 막심, 세르게이, 이고르, 올레크, 미하일, 안나. 모두 다 1달을 버티질 못 했어요. 기술자 분들도...오히려 더 빨리 죽었죠. 그 곳에서 작업을 해야 했으니. 주나는...그렇게 열심히 만든 걸...콘크리트와 함께 일리샤 곁에 던져 넣을 수밖에 없었어요...다들 그때 우는데...주나만 울지 못하더라고요....]

 

 아-52는 주라블리가 던져 버렸던 나뭇조각을 집어 들고 쳐다봤다. 희미하긴 하지만 두 날개를 한껏 펼친 학이 보였다. 조심스레 그걸 내려놓은 아-52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이콘도...신부님이 처음에 가져오셨던 것들 중 하나였는데. ...진짜 괴롭겠죠. 그래서 같이 그걸 겪은 녀석들은 다들 주나를 이해하는 편이에요. 체 번대 애들은 좀 덜하지만. 체 번대는 사고 후 너무 우리 피해가 심해서 남아 있던 자재를 끌어 모아서 간신히 만들어낸 애들이거든요. 그래서 가장 최신 애들인데도 완성도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죠. 휴, 그래서 솔직히...체 번대 애들이 갈 때면 뭔가 찜찜해요. 우리 책임도 있는 것 같아서.]

 

 아-52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뭐, 주라블리 기종의 전투력은 두나이 기종과는 비교가 안 되는 만큼 주나가 폐인이 되지만 않았으면 지금까지 있었던 철충들과의 전투에서 사상자가 더 적었겠지만...어쩔 수 없죠. 게다가 주나도 스스로 그걸 아는데 굳이 우리가 뭐하러 말해요...안 그렇습니까. 괜히 괴로운 애 괴롭혀서...뭐 하냐고요....]

 “주라블리 기종이 전투력이 뛰어나다고?”

 

 주라블리 기종을 본 건 두 번 밖에 없긴 하지만 그다지 전투용 같지는 않았던 만큼 나는 아-52에게 물었다.

 

 [뭐, 기본적으로 주라블리 기종들은 오리진 더스트가 잔뜩 들어가서 말이죠. 대부분이 방사선 차폐성 조직에 쓰이긴 하지만 워낙 많이 들어간 덕에 기본 신체능력부터가 궤를 달리해요. 이런 말 하긴 뭣 한데...어쨌든 삽으로 가볍게 바이오로이드 두개골을 갈라버릴 수 있으니. 게다가 주라블리 기종은 전용장비가 따로 있어서...사실 그게 진짜죠.]

 

 아-52는 몸을 일으키더니 화면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녀의 손에는 낡은 사진 한 장이 새롭게 들려 있었다. 화면에 사진을 가까이 대자 사진에 찍힌 게 보였다.

 

 박살난 철충들의 잔해 한가운데 거대한 AGS가 하나 서 있었다. 전반적인 형태는 인간형 비슷했는데 두 팔의 끝부분에 손 대신 육중한 기관포가 달려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자 나는 이게 AGS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머리 근처에 해당하는 부분에 관측창이 조그맣게 나 있었는데 그곳을 통해 희미하지만 주라블리 기종의 얼굴이 보이고 있었다.

 

 [T-82라고 이족 보행 다목적 장갑 장비랬나? 대충 그런 건데...주라블리 기종이 다루는 겁니다. 사진에 나오는 것처럼 기관포가 달린 전투용도 있고, 손이 달린 작업용도 있죠, 주나에게 배정된 건 전투용인 A형이었습니다. 당장 여기 찍힌 것도 주나고...2111년쯤엔 철충들이 나오기 시작했으니까 그때 찍은 겁니다.]

 “기지 내에서 본 적이 없어서. 이런 게 있을 줄은 몰랐네.”

 [당연하죠. 주나의 것만 빼곤 다 외딴 곳에 버려 놨으니. 5대 있던 것들 중 3대가 작업용이고 2대가 전투용이었는데 전투용 하나는 아자즈가 작업용으로 개수해 현장에 투입했고...굳이 더 말할 필요는 없죠? 그리고 주나의 건 지금 무기 창고 구석에 처박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시동 건 지 반세기는 지났을 걸요.] 

 

 아-52는 오래된 나뭇조각을 집어 조심히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곤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이콘 조각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모아 한 곳에다 두었다. 

 

 [이것들은 좀 진정되면 제가 알아서 주나에게 돌려주겠습니다. 이제 사령관님도 좀 쉬시죠, 너무 걱정하지 말고. 아, 그리고 혹시라도 지휘관을 주나라고 부르진 마시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말입니다. 사실 저도 지휘관을 주나라고 마지막으로 부른 게...기억도 안 나게 오래되었네요. 어쨌든, 좋은 밤 되시길.]

 

 화면이 어두워지고 소리가 끊겼지만 무언가가 계속 어디서 들리는 것 같았다. 지난번에 봤던 묘지가 떠올랐다. 콘크리트 위에 수많은 십자가가 놓여 있던 그 공터. 그 앞을 지나갈 때 아-52는 발을 잠시 멈추고 모자를 벗고 잠시 묵념했다. 과연 그때 그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수십 년 만에 인간을 다시 만나고 있는 중에 수십 년 전에 죽었던 친했던 인간들이 묻힌 곳을 지나가는 건 그녀에게 대체 무슨 감정이 들게 했을까. 주라블리의 과거 이야기를 듣고 그녀가 왜 그렇게 슬피 울부짖었는지는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과연 내가 그녀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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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58은 조심스레 죽이 든 그릇을 들고 지하로 내려갔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가 당번인 게 원망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문을 두드리는 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러나 문을 두드려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문에 달린 조그만 창이 열리고 자신은 그곳으로 그릇을 집어넣은 후 빈 그릇을 받아왔지만 이런 상황은 지금껏 한 번도 없었기에 제-358은 무심코 문 손잡이를 잡았고, 문이 잠겨있지 않다는 걸 알아챘다.

 “지휘관님? 저, 괜찮으신가요?”

 

 그렇게 말하고 다시 문을 두드려도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모자와 마스크도 없이 주라블리가 울면서 부지를 달려가는 모습을 몇 시간 전에 봤던 두나이들 중 하나였던 제-358의 머릿속엔 온갖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고 결국 그녀는 심호흡을 한 뒤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문이 다 열리기도 전에 경첩에서 나는 삐걱거리는 소리에 깜짝 놀란 제-358은 조심스레 문 안을 들여다봤지만 어두워서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들고 있던 그릇은 문 밖에 내려놓고 조심스레 한 발을 내딛은 제-358의 발에 무언가가 밟혔다. 

 

 뇌가 감촉을 토대로 밟은 게 무엇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비명부터 지른 그녀는 소리가 방 안에서 울리는 바람에 꼴사납게 주저앉아 귀를 감쌌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녀는 다시 방을 둘려보려다가 그만 무언가에 발이 걸려 넘어졌고, 넘어지는 와중에 벽에 충돌하며 본의 아니게 얼굴로 전등 스위치를 눌렀다.

 

 불이 들어오자 그제서야 뭐가 뭔지 알 수 있게 된 제-358은 왜 자신이 문을 두드리고 불러도 안에서 대답이 없었는지 알게 되었다. 방 안에 주라블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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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당히 취한 채였지만 그렇다고 놀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아-52는 손전등을 챙겨 들고 밤중의 기지를 걷고 있었다. 비록 평소에도 하는 일은 그다지 없지만 기지의 지휘권자가 사라지면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작업에 나가지 않고 기지 안에 있던 두나이들 중 일부를 수색에 돌리고는 있지만 그다지 성과가 없자 결국 아-52는 무거운 몸을 끌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 보여도 독실한 정교회 신자인 만큼 최악의 상황이 일어나지 않으리라 믿고 있었지만 갈기갈기 찢어졌던 이콘을 떠올린 아-52는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믐달이 뜬 그날 밤은 구름마저 짙어 유난히 어두워 적막한 숲속과 어우러지며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아-52는 왠지 모를 불길함과 함께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불안감과 함께 기지 외곽을 둘러보던 중 그녀의 눈에 철조망이 들어왔다. 사실 철조망이라고는 해도 고작 가시철사 한 가닥이 나무들 사이에 쳐진 게 전부이긴 했지만. 자기도 모르는 새 접근금지구역 가까이 들어왔다는 걸 알아채자 아-52는 황급히 뒤로 돌아 달려갔다. 옷도 평상복 차림이었던 만큼 서둘러 거리를 벌린 아-52는 갑자기 무언가가 떠올랐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장비 창고로 달려간 아-52는 방호복을 꺼내 입은 후 원자로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무언가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다니는 곳인 만큼 눈 감고도 갈 수 있는 길이었지만 조금 전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감돌던 어두운 숲보다도 이 길이 그녀에겐 더 무서웠다. 

 

 그대로 원자로로 향하던 도중 옆으로 길을 틀어 걸어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목적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들끼리는 고물상이라고 부르는 이곳은 2111년의 사고 때 사용했던 장비들 중 심하게 방사능에 오염된 것들을 폐기해 둔 곳이였다. 두나이 기준으로 심하게 오염된 것들이 가득 쌓여 있는 만큼 이곳에 오래 있는 건 그다지 현명한 생각이 아니었지만 아-52의 눈 앞에는 현명하지 않은 선택을 한 바이오로이드 한 명이 있었다.

 

 “여기서 뭐하십니까? 마스크도 없이.”

 “...그냥 보고 있었어.”

 “이거나 쓰십쇼. 자기 물건은 챙겨야지.”

 

 주라블리는 아-52가 던진 모자와 마스크를 받아 다시 머리에 썼다. 

 

 “어쩌자고 갑자기 사라져서 이런 데 처박혀 있는 겁니까?”

 “갑자기 말 높이지 마.”

 “싫습니다요. 상관에게 경어 쓰는 게 문제됩니까?”

 

 말은 그리 해도 아-52는 뭔가 어색했는지 이내 평소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왜 여기 온 건데. 아무리 대장이라도 여기 오래 있으면 안 되잖아. 대체 볼 게 뭐가 있다고...아.”

 

 주라블리의 시선을 좆은 아-52는 어둠 속에서도 그 존재감을 여실히 드러내는 거대한 쇳덩이를 보게 되었다.

 

 “...생각 난 거냐.”

 “어.”

 

 둘은 말없이 같이 다른 주라블리들이 몰았던 T-82들을 쳐다봤다. 세월 앞에 녹슬고 꼴사납게 주저앉은 데다 먼지가 잔뜩 쌓여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저 기계들과 거기에 탄 바이오로이드들이 60년 전에 했던 일들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둘의 눈에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비쳤다.

 

 말없이 지켜보던 주라블리는 갑자기 노래 한 곡조를 조용히 읊조리기 시작했다. 몇 초 뒤에는 아-52도 잠자코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수십 년 전에 한 여자에게 배웠던 노래는 그녀들의 머릿속에 아직 그 가사가 남아 있었다.

 

 처음에는 둘 다 조금 머뭇거렸지만 이내 여럿이 부르던 때 못지않은 솜씨로 부르기 시작했다. 둘만이 아닌, 모두가 부르던 그때처럼.

 

 이백 년도 더 전에 지어진 오래된 노래. 원래 죽어간 병사들을 기리기 위해 지어졌던 이 노래는 그 제목과 같은 기종명을 단 바이오로이드들을 기리기 위해 다시 한 번 이 땅에서 불리고 있었다. 

 

 비장하고 애처로운 노랫소리는 프리피야트의 밤하늘 아래에서 조용히 퍼져나갔다. 둘의 마음속에서도 그러하듯.

 

 잠시 뒤 노랫소리는 그쳤다. 둘은 말없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둘 다 묵묵히 기지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제 그거면 충분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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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그날 밤 나는 도저히 편하게 잠들지 못했다. 몸과 정신 양쪽이 모두 피곤했지만 그 이상으로 머릿속의 생각들이 수면을 방해했다. 아침에 내 얼굴을 본 모두가 하나같이 밤에 안자고 뭘 했냐고 물을 정도로. 

 

 그래서 아침에 정기적으로 하는 프리피야트 기지와의 통신을 하려고 장치를 켰을 때 화면에 주라블리가 보이자 나는 놀라지 않고서는 배겨낼 수가 없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사령관님.]

 “주, 주라블리?”

 [네. 두나이 아-52번에게 대행했던 업무들을 오늘부로 다시 제가 맡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의 꼴사나웠던 모습은 죄송했습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이는 주라블리를 보고 있으니 다시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어서 평소대로 작업 진척 상황을 비롯한 이런저런 것들에 대한 주라블리의 보고를 듣는데 아-52 이상으로 명확하고 체계적인 업무 처리 방식에 나는 상당히 놀랐다. 아무래도 나는 내 안의 주라블리에 대한 인식을 대거 재수정해야 할 것 같다.

 

 [네, 그럼 이것으로 현 상황보고를 마치겠습니다. 혹시 따로 지시할 것이 있으신지요.]

 “딱히 없는데...미안하지만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

 [얼마든지요.]

 “어젯밤 이후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주라블리는 고개를 돌려 창가 쪽을 내다봤다.

 

 [그저 남아있는 것이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되새겼을 뿐입니다. 외면하고 있던 지극히 당연했던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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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르노빌 북쪽 어딘가의 숲속, 우거진 나무들 사이에 불룩 솟아나온 작은 둔덕이 있었다. 위에 이끼가 끼고 약간의 잡초가 자란 그 둔덕은 누가 보더라도 그냥 평범한 둔덕이었지만 갑자기 진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내 둔덕은 갈라지며 흙더미들을 내쏟았고 그러면서 생겨난 틈 사이에서 붉은빛이 번뜩였다.

 

 순식간에 위에 덮여 있던 흙들이 사라지자 나온 건 거대한 거미처럼 생긴 철충이었다. 그 철충은 붉은 눈으로 어딘가를 한동안 쳐다보더니 네 다리를 움직여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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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다 그리고 보니 영 맘에 안 들어서 옛 설정화(?) 찾아서 대신 넣었다는 슬픈 일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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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새 자꾸 하루씩 늦어서 그 이유를 찾아 봤더니 최근 들어 한 화당 글자수가 초기의 1.5배 이상이 되어 있지 뭡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