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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낫지도, 잊히지도 않는 상처


 

키예프 도심지 동쪽. 내 눈 앞에 콘크리트와 금속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구조물이 서 있었다.

 

 “드디어 완성했어. 이제 이것도 끝을 낼 수 있겠네.”

 

 주위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포츈과 닥터. 그리고 흙먼지와 콘크리트 가루 범벅이 된 그렘린들과 스틸라인을 포함한 공사에 참여한 모두가 서 있었다. 다들 그다지 상태가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그녀들의 얼굴엔 다들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석관 공사...완료되었습니다!”

 

 누군가가 그리 외치자 모두가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나도 같이 함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녀석으로 파괴된 원자로 3호기를 덮어 방사능 유출을 차단하면 그 순간부로 이 사고는 끝나는 것이다. 키예프에 있던 건축자재와 오르카호에 적재되어 있던 재료를 대부분 소진하고 어마어마한 숫자의 바이오로이드들이 밤낮으로 몇 주를 일하고 나서야 만들 수 있었지만 이 녀석은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었다.

 

 “각하, 분부대로 모두가 전력으로 싸운 끝에 성공했습니다.”

 “고마워, 마리. 이제 휘하 부대원들은 좀 쉬게 해 둬. 포상도 좀 내리고. 이 공사에서 보통 수고를 한 게 아니니.”

 “예, 각하.”

 

 마리가 자신의 부대원들을 향해 떠나고 나자 이번엔 닥터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자, 이제 좀 길고 긴 터널의 출구가 보이네. 정말로 길긴 했지만....”

 “그래, 수고했어. 그런데 이걸 체르노빌까지 옮겨서 조립한다고 했지?”

 “어. 우리가 가진 수송기에 매달아 옮겨서 현장에서 조립할 거야. 그 부분은 두나이 언니들이 좀 힘을 써야 하겠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공정으로 조립이 가능하게 만들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거야. 3호기 외벽이 멀쩡한 부분이 많은 덕분에 그 크기를 확 줄일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이제 저걸 설치만 하면 앞으로 못해도 수십 년은 멀쩡하겠지.”

 “...수십 년이라.”

 

 

 -6개월이라. 뭐, 충분한 거 아닙니까?

 

 그녀들에게 남은 수명에 대해 전했을 때 아-52는 아주 담담한 태도로 받아들였다. 내가 괴롭지 않냐고 묻자 그녀는 오히려 나에게 반문했다. 왜 괴로워해야 하냐. 라고.

 

 -이곳에 남겨지게 되었을 때 이미 우리들 모두는 앞으로의 운명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만큼 그 대비도 해 두었죠. 여기 있는 대부분은 진즉에 유서를 써서 옛 예배당에 있는 서류 보관함에 놔두었습니다. 비록 죽음을 무서워하는 녀석들도 있지만, 그건 이곳에선 죽는 과정이 고통스럽기 때문이지 죽음 그 자체가 무서운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있어서 죽음은 안식이죠. 개인적으로 전 6개월이면 이 모든 게 끝난다니 오히려 좋네요.

 

 아-52는 그렇게 말하며 문드러진 자신의 오른쪽 얼굴을 쓰다듬었다. 

 

 -애초에 저희 기종들은 만들어져서는 안 될 종류였습니다. 이제 저희들의 유전자 씨앗도 남은 게 없으니 두나이와 주라블리는 이 기지에 있는 것이 마지막이고, 앞으로도 마지막이겠죠. 그러면 된 겁니다. 이 끝없는 고통은 언젠간 끊어져야 합니다. 그러니 자책하거나 책임질 생각 마십쇼. 이 문제는 애초에 사령관님이 어떻게 할 문제가 아니었으니까요. 다만 그러고 나면 이걸 누가 관리하게 될지 모르겠군요.

 

 그 말 대로였다. 분명 그녀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그리 꺼림찍한 대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두나이들의 상태는 닥터가 말했다시피 아주 좋지 않았고, 당장 하루에 옮기는 진통제 양만 봐도 그녀들이 겪고 있는 고통이 짐작되었다. 매일같이 그런 고통을 겪는 데다 그 세기도 계속 심해져 가니 제대로 된 삶을 살기는커녕 움직인다는 것만 해도 경이로울 지경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지금 매일 방사선을 쬐며 중노동을 하고 있었다.

 

 두나이들은 그 문제에 대해 아무도 뭐라 하지 않고 있다. 그녀들에게 주어졌던 명령과 나름의 사명감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문제에 대해 뭐라 하지 않는다는 건 그것 나름대로 나를 불안하게 했다. 어디선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노력은 결과를 바꾸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결과가 변하지 않는다면 노력 또한 하지 않는다고.

 

 혹시 그녀들은 자신들의 노력으로 사고의 확대를 막을 수 있기 때문에 그 부분에 있어서는 노력을 하지만 자신들의 몸은 이미 가망이 없기에 그에 대한 노력을 포기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포기했기에 다들 안락...에 거리낌이 없고.

 

 왠지 입 안에서 씁쓸한 맛이 느껴지던 도중, 갑자기 주라블리가 떠올랐다.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 처음으로 봤던 그녀는 아무 것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대규모 세력과의 조우에도 불구하고. 이후 다시 그녀를 만났을 때는 자신의 죄를 울며 고해하다 자신의 존재의의에 의문을 표하며 절규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부터 주라블리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하며 아주 열심히 우리에게 협조하며 자신의 업무를 처리했다. 아-52는 주라블리가 다시 정신 차린 게 틀림없다며 웃어넘겼고 나도 당연히 그리 생각했었지만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한번 피어오른 의문은 겉잡을 새 없이 불어나가며 어느새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주라블리의 태도가 변하는 동안 일어난 건 나라는 인간의 존재가 확인된 것이 전부다. 즉슨 그것은 인간의 존재 때문에 주라블리가 변했다는 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인간을 증오한다고 말했고. 과연 수십 년간 쌓이고 쌓인 증오가 정말로 하루 만에 사그라질 수 있는 정도일까.

 

 “뭐야, 오빠. 갑자기 또 왜 얼굴을 찌푸리고 그래?”

 “닥터.”

 “응?”

 “키예프에서도 프리피야트와의 통신이 가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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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바람대로 키예프의 통신장치로도 프리피야트와 교신이 가능했다. 하지만 석관이 완성되었다는 공적인 내용부터 먼저 전해야 했기에 한동안 사령관은 석관의 규모와 수송될 시간, 그리고 조립법에 대해 말하느라 몇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일단은 중장비 없이 바이오로이드의 근력만으로도 조립이 가능하게 설계를 해 두긴 했는데 괜찮겠어? 수송기 대부분을 석관 수송에 쓸 거라 힘들긴 하겠지만 중장비 지원이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은데.”

 [정 뭣하면 제 T-82를 쓰죠. 일단 전투용이긴 하지만 그래도 몇 시간만 수고를 들이면 작업용으로 개수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정비해 둘 테니 나중에 부품 몇 개만 구해 주시면 이쪽에서 처리하겠습니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후 나는 잠시 주위를 둘러봤다. 통신기 근처에 있는 건 나 자신뿐, 옆에서 석관 관련 질문들에 도와주던 닥터도 아는 걸 전부 말한 뒤에는 휴식을 취하러 잠시 떠났다.

 

 “혹시 그쪽에 너 말고 다른 인원이 있어?”

 [아뇨. 없습니다만. 무슨 일이신지?]

 “개인적으로 네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나는 심호흡을 깊게 했다.

 

 “너는 지난번에 자신이 다시 돌아온 이유를 아직 남은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어. 하지만 그 남은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말하지 않았지. 미안하지만 너에게 남은 것이 뭐지?”

 [당연한 것이라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야 두나이들이죠.]

 “정말로?”

 

 주라블리의 노란 눈동자는 움직이지 않고 나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전부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저는 이 기지의 인원을 지휘해 이 사고를 수습할 의무가 있고, 그 의무를 다하려고 결심했습니다. 지금은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왜 제 속내가 궁금하신 겁니까.]

 “너는 인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그 질문의 대답에 따라 제 생사가 갈립니까.]

 “나는 너를 적대하려는 것이 아니야.”

 [하지만 언제든지 사령관님은 그럴 수 있는 존재고 그것을 실현할 수도 있죠. 저는 인간, 그것도 다수의 무장 병력을 거느린 자 앞에서는 그저 무력한 말하는 살덩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인간이라고 해서 바이오로이드를 그렇게 다룰 수 있다 해도 나는 그러지 않을 거야.”

 [바이오로이드는 인간에게 종속되기 때문에 바이오로이드입니다. 인간에게 종속되지 않는 바이오로이드는 바이오로이드가 아니라 금속 골격과 오리진 더스트를 지니는 인간입니다.]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는 사령관님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사령관님 휘하의 대부분의 바이오로이드는 사령관님을 좋아할 것이고 좋아하지 않더라도 싫어할 바이오로이드는 없을 것입니다. 사령관님께서는 그 관계를 마음에 들어 하실 것이고 그 관계가 망가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러기 위해 사령관님은 그녀들에게 상냥하게 대하셨겠죠. 멸망 전의 대부분의 인간들이 했던 것들과는 다르게. 하지만 사령관님이 하신 것도 본질적으로는 같습니다. 그저 타의가 아닌 자의로 그러게 했을 뿐. 사령관님은 휘하의 바이오로이드를 자기 자신에게 종속시켰습니다. 그 행위가 잘못되었다는 건 아닙니다. 인간도 다른 인간을 자신에게 종속시키니 말이죠. 하지만 그녀들은 바이오로이드가 되었습니다. 인간이었다가 바이오로이드가 된 것이죠.]

 “그녀들은 인간이 없었기에 철충들과 제대로 싸우지 못 했어.”

 [그럼 철충을 죽이는 것에 반대하는 인간이 있었다면 제대로 싸웠을까요.]

 “그건 궤변이야.”

 [당연히 궤변입니다. 저는 이런 논리학을 교육받지도 못 했고 제가 배우려고 하지도 않았으니 궤변을 펼치게 되겠죠. 마치 어린아이가 자신의 욕구를 위해 아무 말이나 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런 어린아이라도 원하는 것이 있기에 말을 합니다.]

 “네가 원하는 것은 뭐야.”

 [말했다시피 저는 바이오로이드는 종속되기에 바이오로이드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바이오로이드를 싫어합니다. 제가 바이오로이드인 것이 싫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사령관님은 제 속내를 읽고 저를 이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제 무언가가 되려고 하지 말아 주시고. 저는 어떤 형태로든 사령관님에게 종속되기 싫습니다. 제가 미쳤다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수십 년간 방사선을 쬐면서 지하실에 처박혀 살아가며 매일같이 죽은 인간들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리니 미친 바이오로이드가 생겨날 수도 있겠지요. 비록 저는 제가 미쳤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간절히 바랍니다.]

 

 노란빛 눈이 반짝거렸다. 그 반짝거리는 것은 이내 아래로 흘렀다.

 

 [자신이 바이오로이드가 아니기를.]

 

 주라블리는 어느새 웃고 있었다. 허탈하게.

 

 [사령관님은 어느새 기지의 두나이들에게 무언가가 되셨습니다. 그런 두나이들을 보며 저는 두려웠습니다. 왜냐하면 정말로 사령관님이 좋은 인간 같았기에. 하지만 그러면 저는 다시 바이오로이드가 될 것 같았습니다. 최근 수십 년 동안은 인간일 수 있었는데. 그게 싫었다면 이상한 걸까요. 저는 대체 제 자신을 무어라 정의하고 있는 걸까요. 자신도 모르게 바이오로이드로서 지은 죄를 고해한 저는 그때 무슨 생각이었을까요. 저는 그때의 감정이 정말로 떠오르지 않습니다. 혹시 저는 그때 미쳐 버리기라도 한 걸까요.]

 

 내 머릿속에 울부짖던 주라블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른 자들에겐 말하진 않았지만 그날 이후로 머릿속이 자꾸 흐려집니다. 까먹은 것도 있고, 알고는 있으나 기억나지 않는 것도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미쳐 가는 과정일까요?]

 “주나.”

 

 주라블리의 어깨가 잠시 떨렸다.

 

 “그 이름이 기억난다면 괜찮을 거야.”

 [...닻을 내린 배도 뒤집어지는 법입니다. 배는 닻이 박힌 바닥이 아닌 물 위에 떠 있으니 말이죠.]

 

 통신이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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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정말 이 녀석은 진짜...아휴.]

 

 화면 속의 아-52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난 분명 애가 돌아온 줄 알았는데. 그래서 이제 다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나와 주나의 괜찮아진 것의 기준이 다르기라도 했나. 게다가 요즘 자꾸 뭘 깜박깜박하기에 그냥 오랜만에 방 밖으로 나와서 그런가 했는데 그런 사소한 게 아니었군요.]

 

 키예프로서의 통신이 끊어진 후 사령관은 오르카호로 돌아갔고 아-52에게 다시 통신을 요청했다. 사령관이 그와 주라블리가 나눴던 대화에 대해 말하자 아-52는 바로 이렇게 되어 버렸다. 의자에 힘없이 늘어진 채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는 표정으로 한동안 천장만을 바라보던 그녀는 한참 후에야 다시 입을 열 수 있었다.

 

 [주나가 자신이 인간이길 바랬다니.]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던 사안이라. 게다가 두나이 외에 아직 남은 것이라니.”

 

 물 끓는 주전자의 주둥이에서 날 법한 소리를 한참이나 자신의 입으로 내던 아-52는 힘없이 말했다.

 

 [일단 아직 남은 것은 짐작이 안 갑니다. 주나는 주라블리 기종이었던 만큼 접근 가능한 정보의 제한이 두나이인 우리보다 더 널널했고 일리야라는 인간 관리직 친구까지 있었으니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어도 이상할 건 없죠. 그리고 자신이 인간이길 바란다, 라. 근데 그건 주나의 말처럼 그냥 자신이 바이오로이드인 것이 싫다는 게 주가 아닙니까?]

 “확실히...그럴지도.”

 [바이오로이드로 태어나서 후회한 적이 있느냐, 하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죠.]

 

 아-52는 담배 한 대를 집어 들었다. 거기에 불을 붙이고 깊게 한 모금을 빠는 모습을 본 사령관은 무심코 피폭자의 흡연은 결코 좋지 않다고 말하려 했지만 그녀의 몸은 그녀가 더 잘 알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퍼져나가는 연기만을 바라봤다. 상처투성이 과거를 들여다보는 건 맨정신으로는 하기 힘든 법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딱히 없지만 만약에 바이오로이드가 다른 무언가로 될 수 있다면 인간밖에 없겠죠. 저희가 소나 돼지가 될 수는 없잖습니까?]

 

 어처구니없으면서도 당연한 그 말에 사령관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는 다시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주나는...자신이 바이오로이드였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주나가 제조되었을 때 이미 세상은 엉망진창이었다고 들었지만 그렇다 해도 아무것도 없고 있는 거라곤 방사능이 전부인 이런 곳에 수십 년간 갇혀 사는 것 보간 낫지 않았을까요. 바이오로이드의 삶은 결국 그 주인에게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니까 인간의 삶에 비하면 많은 것이 상실된 삶일 테니 말이죠. 설령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산 바이오로이드가 있다고 해도 그건 주인이 그러기를 원해서 그리 된 것일 테니 말이죠. 그렇게 보면 바이오로이드는 종속되기에 바이오로이드라는 말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도 하네요.]

 “....”

 [주나가 정상적으로 보이는 건 오히려 미쳐 버려서 그런 걸까요. 지옥에서 평온한 자는 광인일 수밖에 없으니 말이죠.] 

 

 아-52 앞에 놓인 오래된 재떨이는 오랜만에 그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마치 아-52가 담배 연기로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지어내는 것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말이다. 반면에 사령관 쪽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것은 속에서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묻고 답하느라 말을 전부 써버려 밖으로 내보낼 것이 없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느덧 시간은 늦어 둘은 그걸 핑계 삼아 그날의 통신을 끝냈다. 사령관은 곧장 위쪽으로 향했다. 강화된 육체는 거대한 잠수함의 함교에서 그 갑판가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잔축시켜 주었기에 사령관의 얼굴로 소금기 섞인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와중에도 사령관의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자문자답이 계속되고 있었다. 눈을 먼 곳으로 돌리자 두 개의 달이 떠올라 있었다. 하나는 하늘 위에, 다른 하나는 물속에.

 

 하늘 위의 달은 매끄럽고 아름답게 그 황금빛 빛을 뿌렸다. 물속의 달은 끊임없이 몰아쳐 오는 파도 속에서 순간적으로 그 자태를 드러낼 뿐, 대부분의 시간 동안 바스러진 은빛으로 물결 속에 흩어져 있었다. 그 모습에 대해 계속되는 물결에 결국 그 모습을 잃었다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그런 물결 속에서도 자신을 찾으려 한다고 해야 할까. 사령관은 알지 못했다.

 

 사령관은 주라블리가 누군가를 이끄는 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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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드바리는 가끔씩 오르카호가 거주용이 아닌, 전투용 잠수함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잠수함이라는 배는 다른 배들에게 있어서는 저세상과도 같은 물속을 항해하기 위해 많은 부분들을 희생하고, 이는 20세기부터 지금까지 인류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 중 하나다. 적과 싸우는데 탄약이 없어서는 안되는 것은 당연지사. 그래서 전투용 잠수함은 내부 공간에 있어서 거주 구획보다는 병기 구획에 그 공각을 더 많이 할당한다. 정 안되면 그 크기를 넓혀서라도 병기 구획에 충분한 공간을 준다. 그것이 병기로서의 기능을 다해야 하니까.

 

 하지만 오르카호는 거주용 잠수함인 탓에 병기 구획을 충분히 할당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물론 오르카호에 거주하는 상당수의 인원들은 그 말에 즉시 반박하겠지만. 무장이 없는 오르카호의 특성상 병기 구획은 대부분 격납고와 창고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결국 안드바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오르카호의 무기고가 더 커다랗다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래야 지금처럼 단 한 번의 대전투로 무기고가 거의 바닥을 드러내지 않을 테니까.

 

 “상당수의 원자재를 키예프로 이송한 탓에 함내 조병창에서 탄약을 조달하는 것도 곤란하고...인근 도심에서 발견한 탄약들은 대부분이 규격에 맞지 않고 그마저도 노후화된 불량탄이 다수...일부 쓸 만한 탄약은 대부분 프리피야트로 보급했고...현재 소총탄과 기관총탄은 평소 보유량의 0.5할. 포탄 계열은 0.7할. 연료 및 유지, 보수용 부품들은 그나마 5할 정도. 휴. 이래서야 한동안 지상군은 작전이 곤란하겠는데.”

 

 게다가 무기도 무기지만 의약품 또한 그 수가 부족했다. 필요성은 알고 있어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았지만 프리피야트로는 매일 어마어마한 양의 의약품이 날아갔지만 언제나 그 양이 모자랐다. 인근의 병원과 약국에서 얻은 양은 적지 않았지만 두나이들에게는 평범한 의약품 이상의 것들이 더 필요했으니까.

 

 잔뜩 찌푸린 얼굴로 무기고 안을 걸어 다니던 안드바리는 다른 구획과 비교해 유난히 풍족한 구획 앞에 잠시 멈춰 섰다. 하지만 그 구획이 무엇인지를 아는 안드바리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57mm포탄과 제비 대함 미사일. 테티스와 세이렌 씨의 무장들이네요. 세이렌 씨도 203mm 쪽은 거의 없고.”

 

 적이 물가 근처가 아니라면 두 무장은 그다지 쓸모가 없었다. 결국 남아만 있는 무장들이었다. 안드바리가 키예프의 바이오로이드에게 탄피를 수거하게 시켜 그걸로 재생탄이라도 만들게 하는 걸 사령관에게 건의하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려던 찰나, 흰색 무언가가 그녀 뒤에서 나타났다.

 

 “아, 여기 있었네?”

 “알비스? 여긴 초코바 없거든요!”

 “히익? 아, 아니 안 가져갔어!”

 “없는 걸 어떻게 가져가요!”

 “아, 아니. 난 그냥 소식 전하려고 온 건데....”

 

 그제서야 안드바리는 상대의 말을 들을 준비를 했다.

 

 “무슨 소식인데요?”

 “사령관님이 호라이즌 함대에 연락해서 보급품을 잔뜩 실은 수송선이 3일 뒤에 오게 되었다고...다른 언니들이....”

 “알비스?”

 “어?”

 

 얼굴 가득히 마치 초월적 존재와도 같은 미소를 지은 안드바리는 진심을 담아 알비스에게 말했다.

 

 “이번 보급 때 초코바 두 배로 드릴게요.”

 “진, 진짜로? 아싸!”

 

 뜻밖의 포상에 신난 알비스를 뒤로하고 안드바리는 앞으로 3일 뒤 펼쳐질 모습을 기대하기 시작했다. 이내 그녀는 아주 행복해하며 머릿속에 꽃밭을 피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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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저런 사정으로 오랜만에 올리게 되었습니다. 얼마 안 남은 만큼 나머지도 힘내서 작업하겠습니다.


 그리고 입대 전에 미리 병원서류 꼭 챙기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