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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세번째



(매움 주의)





* * *





마치 스테인드글라스같은, 세상을 분할된 화면으로 보고 있는 것만 같다. 


한쪽은 150년 전의 두번째 오르카가 담겨있고, 다른 한쪽에는 지금의 세번째 오르카가 담겨있다. 그 두 이미지가 교차하며 두번째 150년에 억눌린 기억들을 다시 끄집어낸다. 


듣자하니 기억 중에서도 장기 기억이란 것은 한번 뇌에 입력이 되면 사라지지 않는다는 듯하다. 기억 상실 증세를 겪거나 시간에 풍화되어도 그것은 떠올리지만 못하는 것이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물론 모든 기억을 생생히 기억하며 단 하나도 잊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기억이나 기억과 관련된 정보를 잊는다는 증거가 없을 뿐이다. 해당 기억과 관련된 정보를 접하면 아무리 오래된 기억이라도 금방 떠올리는 것이 바로 그 예이다. 예를 들어 특정 음악의 가사는 아는데 제목을 모르는 경우, 여러 음악의 제목들을 나열해 보여주면 바로 정답을 지목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나는 기억의 그런 특성에 기대어, 한동안은 틈만나면 오르카의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럴 때면 두번째 오르카와 현재 오르카의 이미지가 교차하여 잊어버리고 싶은 것과 잊어선 안되는 것과 반드시 떠올려야 하는 것, 그리고 꼭 해야만 하는 것들이 무작위로 떠올랐다.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 또 한 번의 150년이었으니까. 150년이란 그 시간을 고작 '150년'이란 네글자로 표현하기엔 부족하지만, 내 기억에 혼선을 주기에는 차고 넘쳤다. 간단하게 말해 두번째 오르카에서 어느 시점에 구체적으로 뭘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기억할만한 것은 다 기억하고 있고, 다시 떠올리기도 했다. 주방에서 소완의 기를 죽여버렸던 것이나 아자젤을 두 년이나 썰어버린 것, 폐하와 갑판에 몇 번 들르고 담배를 가르쳐드린 것 등등. 그런 자잘한 기억들이 간략한 에피소드 형태로 저장되어 있었다.


오르카의 모든 것이 연상시키는 기억들을 갈무리하여 필요한 것만 추출해내는 과정을 마쳤을 무렵에, 폐하는 새 몸을 얻으셨다. 나는 그런 폐하를 내 방으로 끌고 가서 '나의 폐하'인지 확인하는 것보다도 먼저, 사죄했다. 두번 다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나의 폐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피곤하느냐고 다정하게 웃어보이셨다. 기억하지 못하는게, 아니, 존재하지도 않는 기억인 게 당연하다. 폐하는 다시 태어났다. 나도 나대로 이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벽에 대고 하는 고해성사 같은 것이었다.


뭘 두번 다시인지는 명확하게 말하지 않았다. 어느 부분에서 그런 일이 없을 거라는 건지는 나 자신에게도 확실히 해야했지만, 일단은 그렇게 말해두었다. 그렇지 않으면 무엇도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그리 많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폐하는 콘스탄챠와 맺어졌다.


또 다시.


갑판에서 사랑을 맹세하는 둘을 보며 떠오른 것은, 그 남자와 크리스마스에 나눴던 대화였다. 


분명 나는 이렇게 호언장담했을 것이다.

'폐하의 사랑도, 목숨도 모두 지키고 가져보이겠다고.'


이거야 원. 또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폐하를 내 방에 들인 그 시점에서 사과를 할 게 아니라 고백을 했어야 했다고 나는 후회했…지만 바로 그 후회를 삼켰다. 그렇게나 곧바로 맺어질 정도의 사랑이라면 내가 고백했더라도 닿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끼어들 틈 따위는 전혀 없어보였다고 해야 할까, 그런 직감 같은게 있었다. 나를 거절하고 곧장 콘스탄챠에게 달려갔을 거란 직감.


그런 폐하를 보니 그런 장담을 한 내가 한심하기도 했으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가벼웠다. 더하여 두번째 오르카에서의 내 행동은 현명하다고까지 생각되었다. 못할 짓을 한 끝에 폐하께 그런 식으로 지껄인 게 나았다, 그럼으로써 폐하가 나를 미워하게 된 쪽이 나았다… 사랑을 고백하여 거절 당하는 것보다는. 


어느 한 쪽을 고르라면 역시 미움받는 쪽이 나은 것이다. 이 마음을 품어온지도 어언 300년이 넘었다. 300년 분이 응축된 마음. 그러한 크기의 감정이 단 몇 초 만에 거절 당한다면, 나는 두번 다시 재기가 불가능하리라. 


그래도 화는 나고, 짜증도 제대로 끓어올랐다. 폐하도 콘스탄챠도 아닌, 그 남자에게. 


떠올린 공원의 대화에서, 남자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이번에도 네 폐하는 콘스탄챠를 사랑할 것 같지 않아?'


말이 씨가 됐다고 남자를 저주했다.


어쨌든 마음을 차분히 먹기로 한다. 일단은 폐하가 내가 아닌 다른 이와 맺어진 것으로 하자. 나는 원죄를 품었고, 사랑을 속삭이는 것은 원죄를 씻은 뒤에 얼마든지 하면 된다.


폐하가 멀쩡하게만 살아 계신다면.


앞으로 2년 뒤, 콘스탄챠가 죽는다. 그리고 폐하도 죽거나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가 된다. 나는 그렇게 똑같이 반복될 것이라고 멸망 직후부터 생각했다. 남자의 말대로 그러는 편이 리스크 관리에 더 용이할 것이다. 오르카의 어디든 도저히 2년 뒤에 그런 꼴이 될 것이라곤 상상할 수도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지만, 분명 반복될 것이라고 되뇌였다.


어느 하루에 들른 함교는 왁자지껄했다. 폐하에게 안겨있는 어린 개체들이 내는 웃음 소리, 보호 본능이 강한 개체들의 흐뭇한 얼굴, 잡음 속에서 향후의 계획과 각종 보고를 읊는 책임감 있는 개체들. 평범하게 보면 절로 미소가 지어질 광경이지만 나는 두번째 오르카의 시체 썩는 냄새로 가득한 함교를 떠올리고,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아무 말도 하지 말자. 내가 미쳤던 것으로 하자. 그렇게 생각했다. 어찌됐든 그것은 존재하지 않게 된 것과 다름이 없기에 말해봐야 소용없다. 믿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고, 말할 생각도 필요도 없으며, 괜히 말한들 미친년 취급이나 당할 것이다.







* * *






오르카나 폐하는 달라진 것이 없지만, 정확히는 첫번째 오르카와 아주 비슷하지만, 나는 또 변했다. 그렇다고 눈에 확 띄는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 변한 것은 바깥이 아닌 안쪽이다.


먼저, 언니, 카페 매니저, 마틸다, 어머니…그녀들은 사라졌다. 따라서 발작을 일으키기라도 하면 누가 볼때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도 사라졌다. 


다만 증상이 다를뿐, 여전히 발작은 일으킨다. 새로운 증상은 플래시백. 발작하게 되면 정확히 어느 시점의 어느 부분인지는 모르겠는 특정한 에피소드들의 혼재된 이미지가, 눈앞을 빠르게 스쳐지나간다. 


강렬한 두통을 동반한 증상이기에 옛날이든 새로운 증상이든 고통스러운 건 똑같아도, 한 가지 다행인 점이 있다. 누군가가 옆에 있을 때 발작해도 그저 현기증이라고 무마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몸이 휘청거릴 정도의 두통이기에 나를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단순한 현기증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괜찮다고 밀어붙이면 별말 안 한다. 두번째 오르카 만큼은 아니어도, 이번에도 나는 꽤 강한 권력을 가지게 됐으니까.


하나 더. 가슴 한켠에 응어리 같은 공허함이 자리 잡았다는 것도 있다. 응어리와 공허함이 공존할 수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어딘가에 들러붙어있는 듯한 공허함이 내 안에 있다.


보통 공허함이라고 하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런 걸 가지게 된 원인도 잊게 되지만, 나는 그 원인을 알고 있다. 첫번째 150년에 취했어야 할 삶의 방식을, 두번째에서는 확실히 유지했기 때문이다. 


오직 폐하만을 마음에 품고 그저 시간이 어서 흘러가기만을 바라는 것. 첫번째는 끝없는 의심과 이런저런 사건들 때문에 나도 모르는 새에 쌓아올린 게 있었다면, 이번 150년에서는 정말로, 가능한 그 무엇도 삶이라는 틀에 쌓아올리지 않았다. 


위협이 찾아왔을 때에 한해서만 살아남는 것에 신경을 돌리기는 했다. 그것이 몇 가지 기억들을 기억 밑에 파묻어버리고 기억에 우선 순위를 새기게 만들긴 했어도, 정말 폐하만을 생각했다.


그렇기에 기억이라고 할 만한 기억은 없었다. 추억도 없었다. 


그런 걸 삶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살아왔다고 할 수 없다.


생각하지 말자.


아무리 살아남는 것에 집중해야만 했다한들, 기억에 우선 순위를 매겨버렸다는 것 또한 폐하께 죄를 지은 것과 다름없으니까.







* * *






나는 폐하께 사과했어도 바이오로이드들에게는 사과하지 않았다. 미안하고 죄송스러운 건 폐하에 한해서이지, 바이오로이드에게 미안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그렇기는커녕 두번째와 크게 다를 것 없이 역겹고 더럽게만 보였다. 


우선되는 것은 폐하이니 우려되는 2년 뒤를 대비하느라 두번째에 비해 얌전해졌을 뿐, 가만두면 안되겠다고 생각되면 얄짤없이 조진다. 나는 폐하를 사랑하니까. 폐하의 목숨이 우선인 것이지, 폐하에 대한 사랑을 접은 게 아니다. 경쟁자 견제는 폐하를 살리는 것과 병행한다. 


약물로 헛짓거리를 하려던 소완을 제외한다면, 그 첫번째 타겟은 홍련이었다. 


내가 몽구스 팀을 호출한 것은 사령관실에서의 일 때문이었다. 그날 나는 폐하께 보고 드릴 사항이 있어서 빠르게 사령관실을 들어갔다 용건만 보고 나올 셈이었는데, 폐하의 방에 들어선 순간 보고 말았다. 홍련이 폐하께 꼬리 치는 모습을. 육체적인 거리감이 상당히 좁혀져 있어서 꼬리를 쳤다는 표현은 모자라지만, 뭐, 대충은 파악했다. 뭘 구실로 삼았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보고 사항이나 애로 사항, 혹은 사생활을 들먹였기도 했겠지. 접근할 방법은 많다.


이 썅년. 폐하는 단 한명에게만 자신의 모든 걸 허락했다. 싸구려 술집에 기웃거리는 창녀가 쓸 법한 수를 쓴다고 해서 넘어오지 않는다. 폐하의 사랑에 끼어들어 더럽히는 짓은 절대로 두고 볼 수 없다. 


"우리 홍련씨는 뭐가 문제실까?"


내 방에서 나는 그렇게 운을 뗐다. 드라코 정도를 제외하면 몽구스 팀 전원은 내게 눈을 맞추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엄마라고 부르는 이년이 미울만도 할 텐데, 딸이라는 것들의 얼굴에 원망으로 지어진 주름은 보이지 않았다. 이래 봬도 가족이라 이건가. 아무리 바이오로이드라 가족이란 단어가 허락되지 않았었더래도 그렇지, 성인 수준의 육체와 정신을 가졌으면서 뭐하는 짓들일까?


"생긴대로 군다고 해야 할지. 꼭 그래야만 하나?"


대답이 없었다.


"묻잖아."


"죄송하지만, 참모님." 홍련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 일에 대한 것이라면 제 아이… 대원들은 복귀시켜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왜? 쪽팔려?"


"그런 게 아닙니다. 잘못한 건 저뿐이니 제 대원들은…"


나는 홍련의 말을 잘랐다.


"연대책임이야. 빠져나갈 구석은 없어. 그것도 그런데 한 팀을 맡고 있는 개체가 그 모양이니 아랫것들도 우려가 되는 게 당연하잖아?"


"알겠습니다."


"폐하가 좋지?"


"그게…"


"몸 좋아, 잘생겼어, 목소리도 좋고, 미소가 가진 파괴력은 상상초월. 순정만화의 주인공 같이 생겨서 보기만 해도 기분 좋지? 알아. 누군들 상상해보지 않았겠니. 근데, 상상을 망상으로 발전시킬 순 있어도 드러내선 안되거든. 너처럼."


책상 의자에 앉아 무시해도 좋을 서류더미들을 들춰보면서 말했다.


"야. 임자있는 남자한테 이 씨발년아, 그게 할 짓이야? 왜, 그대로 통했으면 골인 할 생각이었어?"


"아뇨… 결코 아닙니다."


"아니야? 네 입이 폐하 목에 닿을랑 말랑 하던데? 내가 잘못 본 거야?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거야?"


"아닙니다."


"그럼 뭔데?"


"저기." 홍련이 대답을 머뭇거리는 중에 드라코가 끼어들었다.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왜 엄마가 참모한테 혼나고 있는 건데?"


"드라코! 조용히 있어요!"


홍련이 재빠르게 드라코의 입을 닫게 했지만, 늦었다.


"모르는 척?" 내가 말했다. "아니면 진짜 모르는 거?"


"모르겠어."


거짓말을 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래서 가르쳐주기로 했다.


"병신같은 년아. 느그 애미가 멸망 전 인간들한테 가르치던 걸 말하는 거잖아."


그렇게 말하니까 곧바로 알았는지, 드라코는 대뜸 내게 달려들었다. 웃긴 년이다. 두번째 오르카의 나였다면 바로 수복실로 직행시켰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러지 않는다. 바이오로이드를 위해서가 아니다. 폐하가 신경쓰실까 걱정 될 뿐.


드라코는 수복받지 않아도 될 선에서 정리했다. 


김이 샜다. 몽구스 팀은 돌려보내고, 대충 일과를 마친 뒤 갑판에서 담배를 태웠다. 그날이든 그 다음날이든 몇 주 뒤든, 폐하가 홍련과 있던 일로 나를 호출하는 일은 없었다. 두번째 오르카 때처럼 또 쉬쉬하는 것이다. 물론 나도 그럴 걸 알았기에 적당히 조진 것이고. 앞으로 홍련이 폐하께 다가갈 일은 없을 것이다. 


오르카는 무탈히 순항해갔다. 다시 참모라는 직위를 통해 폐하의 오른팔이 됐지만 앞에 나서는 일은 거의 없었다.


두번째 오르카에는 합류하지 못했던 백토나 요정 마을의 년들이 합류했다. 괌에서 오메가를 잡아 가지고 놀지도 않았다. 9월에는 발작이 심해졌고, 이미 나라는 아르망이 있기에 할로윈 무렵에 아르망 추기경이 복원되는 일은 없었고, 크리스마스에는 홀로 음악을 들으며 눈사람을 만들었고, 감히 리앤이 폐하와 술잔을 나눴고, 메리와 마키나의 머리가 내 손에 날아가는 일도 없었다. 알파는 내가 복원개체던 시절처럼 폐하의 비서노릇을 하고 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었다. 두번째 같은, 정상이라 볼 수 없는 궤도로 들어서는 것이, 철충이 바다에서 습격해오는 원인이 아닐까하는 생각. 


폐하께 뭣모르고 접근하는 년들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나도 조용히 지냈다. 두번째 오르카의 나는 폐하가 보기에도 나름의 매력이 있는 년이었다면, 지금의 나는 할 말만 하고 할 일만 하는, 애교라고는 조금도 없는 무뚝뚝한 년이었다. 


폐하의 행보는 두번째와 판박이었다. 모두에게 웃어보이시지만, 달리 말하면 웃는 얼굴만 보여준다. 


콘스탄챠 단 한 명만 빼고. 그녀만이 폐하의 모든 것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화난 얼굴, 짜증난 얼굴, 키스해달라 보채는 얼굴, 슬며시 미소짓는 얼굴, 애교부리는 얼굴, 아무 일도 없지만 콘스탄챠의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뭔가 심각한 일이 있다는 듯한 얼굴…… 봄이면 형형색색으로 우짖는 나무 같은 포근한 사랑을 속삭이고, 여름이면 소나기 같은 애정을 퍼붓고, 가을이면 단둘이 살랑거리는 갈대밭에라도 들어간 양 비밀스럽고 부드러운 스킨십이 잦아졌고, 겨울에는 둘이서 눈사람을 만들었다. 나는 그 모든 걸 옆에서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렇게 오르카는 안정된 상태였다. 가끔 드러나는 내 폭력성을 대놓고 걱정하는 것들이 있긴 했지만, 내게 감히 자중을 요청하는 년들은 없었다. 폐하의 오른팔로서 그 능력을 매번 입증해가니 그 정도 폭력성이야 괜찮지 않을까라는 판단도 있었을 것이다.


무뚝뚝하고 폭력적인 성향의 상관. 이런 년에게 친구라고 부를 만한 존재가 생길 리 없다. 나도 나대로 아무래도 좋았다. 이제 와서 친구 같은 걸 사귀어 봤자 감흥도 없을 것이고, 바이오로이드를 친구로 둘 리도 없거니와, 무엇보다도 지나온 300년이란 시간에게 면목이 서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길고양이처럼 굴 수는 있어도, 폐하를 제외하면 누구와도 거리감을 좁힐 수 없다. 이게 300년을 지나온 지금의 나다. 고양이 입장에선 멋대로 생각한다며 기분 나쁘다고 할 수도 있겠다.






* * *






폐하가 죽는다는 미래가 도저히 그려지지 않는 밝은 매일이 계속 된다. 철충 신호가 잡혀 대원들이 출격하는 걸 제외하면 21세기 초기와 다를 게 없을 정도다. 


적당한 위협. 터져버릴 것 같은 행복으로 부푼 오르카. 오르카는 오늘도 순항한다.


그런 나날들 속에서 하루는 폐하를 찾아가 물었다. 때는 히루메가 막 합류해서 폐하의 보살핌을 받던 무렵, 시간은 일과가 끝나 창 밖의 수평선에 진 노을이 오르카를 물들이기 시작한 저녁이었다.


"폐하. 요즘 하우스키퍼님과는 좀 어떠세요?"


폐하는 눈앞의 커피잔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계셨다. 세번째에서는 이게 처음으로 내려드린 커피였다.


"요즘?"


"섹스요."


한 입 머금은 커피를 입에서 뿜어내고 폐하가 기침했다. 나는 조용히 웃을 뿐, 뭘 건내거나 닦아드리거나 하지 않았다.


너무 직접적이었던 것 같다.


"성생활에 문제는 없으시냐고요."


"어…그럼. 문제 없지."


"다행이네요."


커피 참 맛있네, 라는 말로 폐하는 화제를 돌리려 했다. 나도 폐하의 성생활 자체가 궁금한 건 아니었어서 길게 물을 생각은 없었기에, 물을 것만 묻기로 했다.


"다른 개체들하고는 어떠세요? 하고 싶으세요?"


"저기, 아르망… 갑자기 찾아와서 커피를 내려준 건 고마운데, 왜 그런 걸 묻는 거야?"


"묻는 말에나 대답해주세요. 다른 개체들과 섹스하고 싶어요?"


"눈이 무서운데…꼭 대답해야 돼?"


"아뇨. 누구보다 오르카를 위해 고생하는 제게도 말하기 싫으시다면요."


폐하는 적당한 대답을 고르듯 음, 하면서 손바닥에 턱을 묻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럴 마음은…안드네."


라고 폐하가 대답한 건 유미가 막 사령관실로 들어선 때였다. 내 손에 걸려서 온갖 꼴은 다 당하고 자살했던 그 유미다.


눈치가 빠른 년이기에 들어오는 타이밍이 나빴다는 것 정도는 안 것 같았다. 그래도 폐하의 그 대답만으로는 대화의 주제와 맥락을 파악하기엔 부족할 것이다. 나는 마침 좋은 타이밍에 등장해준 유미를 한 번 쏘아보고, 그러세요. 라고 폐하께 대답한 뒤에 고개 숙여 인사하고 사령관실을 나섰다.


…똑같다.


그야말로 운명이란 단어가 딱 어울린다.


……품에서 이어폰만 꺼내고 cd플레이어를 재생했다. 건너편에서 다가오던 팬텀이 지나쳐가자 이어폰은 귀에 윤하의 사계를 흘려넣기 시작했다. 내가 축가로 불러드렸던 노래. 이번에도 결혼식은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시기에 열렸지만, 축가는 불러드리지 않았다. 이어폰을 나눠 끼는 일도 없었다. 세번째의 나는 공적인 부분 외에는, 폐하와의 접점이 전무했다.


두번째에선 노래방이었던 부품 재처리 시설을 지나쳐 갑판으로 나가 담배를 태우고, 영화관이었던 전력 생산실을 돌아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거기서 자기가 음료를 준비해주겠다는 바닐라를 치워버리고 직접 커피를 한잔 내려 마시다가, 갑자기 짜증이 치밀어 올라서 구석 자리에 앉아있던 레이스와 알프레드에게 욕을 한 바가지 쏟아냈다. 레이스는 레이스답게 대답다운 대답 한 번 못했고, 알프레드는 대가리에 달린 패널에 :( 나 X( 같은 이모티콘을 띄워댔다. 한 번만 더 말이 아니라 그 따위로 대답했다간 150년 전처럼 대가리를 날려버리겠다고 윽박을 질러…대다가 멈췄다. 지금은 세번째다.


"서요!"


다시 갑판으로 나오자마자 나를 불러 세우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만 듣고도 누군지 파악이 돼서, 나는 난간까지 다가가서야 뒤를 돌고 등을 기댄 다음 팔을 걸쳤다.


"당신! 도대체 뭐가 문제죠?"


웨이브가 과하게 들어간 금발이 후광처럼 둘린 년이라고 하면 샬럿 밖에 없다. 샬럿은 내 앞까지 성큼성큼 다가온 다음, 키 차이도 얼마 안나는데 어떻게든 내려다보려는 심산이었는지 거리를 과하게 좁혀왔다.


"문제?" 나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 척하며 담배를 찾았다. 수평선 쪽의 하늘이 노을로 변해가고 있었다. "내 앞에 있는 년 외에 아무 문제 없는데?"


"당신 정말! 다 봤어요! 볼 때마다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는데, 그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소문이야 당연히 돌았겠지. 두번째 만큼 독하게 굴지 않았어서 이번에는 수위가 꽤 강한 소문이 돈다는 것 정도는 따로 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기집년이 셋 이상 모이면 남의 험담을 하는 것 쯤이야 당연한 일인데, 오르카는 한명을 제외하면 모두 여자다. 공공의 적 같은 년이 어떤 취급일지는 안 봐도 뻔하다. 


다만 이번에는 나도 할 말이 있다. 두번째와 달리, 지금의 나는 절대 아무런 이유도 구실도 없이 당장이고 잡아죽이고 싶은 이 씨발년들을 험하게 다루지 않았다. 내가 그러는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샬럿이 내게 화를 내게 된 원인인 레이스도 일단은 욕 먹은 이유가 있었다. 얼마 전에 나간 탐색에서 실수한 탓에 불필요한 출격을 수차례 하게 만든 점, 그래서 쓸데없이 화력을 소진하게 만든 점, 따라서 레이스가 모아온 자원을 더해도 비축 자원이 기존량에서 마이너스가 된 점.


나는 샬럿이 묻기도 전에 레이스가 욕을 먹은 이유에 대해 말해주고, 물었다.


"들어볼까? 무슨 소문이 도는데?"


"당신이 아주 폭력적이라는 소문! 아르망 추기경! 아무리 레이스 양이 불필요한 행동을 하여 위험을 초래했다고한들, 당신에게 그렇게까지 모욕적인 언사를 당할 건 아니었어요!"


그야말로 열혈적인 선역에게 어울리는 당찬 목소리였다. 마음 같아선 기가 죽어주고 싶었지만, 나도 슬슬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참이었다.


"아하. 그년이 선배라고 부르는 년이랑 같이 쓸데없는 짓하다가 탐색조 하나가 전멸할 뻔했는데 말이야. 그냥 욕 좀 먹은 걸로 끝난 게 다행이라고는 생각 안 하는구나? 아니면, 그건가? 욕으로만 끝낼게 아니라 목을 잘라버려야 한다는 건가? 샬럿. 그런 거야?"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그리고, 지금 대화 중이에요. 담배 끄세요. 예의에 어긋나는 짓은 자중하세요!"


"아나 이 씨발년 진짜."


"뭐, 지금 뭐라고!?"


검지로 담배 대가리를 튕겨서 샬럿의 가슴팍에 맞추고 멱살을 잡았다.


"씨발년이라고 이 씨발년아. 야. 여기 2인자인 내가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욕 좀 한건데, 네가 뭔데 내 일에 이 씨발년아 이래라 저래라야? 왜, 마음에 안들어? 아무리 생각해봐도 잘못됐어? 정의감이 투철해서 도저히 보고 넘기지 못하겠어?"


"윽! 무슨 힘이! 이거 놓으세요!"


"암만 봐도 잘못된 것 같으면 네가 내 자리에 앉으시던가. 네 그 안쓰러운 수준의 대가리로 얼마나 폐하를 잘 보조할지는 모르겠는데, 이건 장담해. 네가 내 자리에 앉으면 한 분기도 못 넘기고 자원이 동날 거란 거. 어때. 자신 있어?"


꽉 문 입을 부르르 떨기만 하지, 샬럿은 입을 열지 못했다. 분명 잘못된 건 나고 자신의 의견이 지당하다 믿어 의심치 않는데, 나를 찍어누르기에 적당한 말은 못 찾는다. 대가리 수준의 차이… 아니, 브레이크의 유무 차이다.


내 어깨를 밀어내려는 샬럿의 손이 이도저도 못하는 느낌으로 떨고 있었다. 폭력을 사용해야하나 말아야하나 아직도 재고 있다.


살짝 흥미가 생겨 자극해보기로 했다.


멱살을 잡아 당겨 입을 샬럿의 귀에 댔다.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난 원래 악역이야. 악역이 악하게 구는데에 이유가 필요해?"


함내로 향한다. 샬럿은 멱살 잡혔던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서요."

"끈질겨…"


고개를 반만 돌려 샬럿을 봤다.


"당신은…뭐죠."

"뭐?"

"당신은 정말로 아르망 추기경인가요."


샬럿은 계속해서 물었다. 당신은 아르망 추기경 같지 않다, 손에는 장서 대신 이상한 장갑을 끼고 다니고, 말씨는 저속하며 행동은 폭력적이기 그지없다, 아르망 추기경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 동떨어져 있다.


나는 물음에 물음으로 답했다.


"알려줘."

"먼저 물었어요."

"아르망 추기경다운 게 뭔데?"

"그건…"


"말해봐. 나다운 게 뭐야? 이젠 나도 모르겠거든. 알려주면 그렇게 행동할게. 제발, 응? 넌 알 거 아니야? 나는 네 아치 에너미같은 존재니까, 넌 분명 알 거야."


"지금 같지는… 않아요."


"몰라?"


샬럿은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도저히 보고 못 넘길 정도로 저속하고 못됐어? 야. 너도 나처럼 살아봐. 내 입장이 돼봐. 자랑할 거라곤 디룩디룩 찐 흉부 밖에 없는 년아. 너라고 다를 것 같아? 너는 뭐 변하지 않고 버틸 수 있을 것 같냐고. 너, 앞으로 내 눈에 띄지 마. 가서 그, 분홍머리 년. 네 급에 맞는 그런 년이랑 놀아. 한 번만 더 내 성질 건들면 네 대가리 물고기 밥으로 던져버릴 줄 알아."


멍청한 것에게 시간을 너무 썼다. 이런 년 때문에 금발에 가슴 큰 여성에게 편견이 생긴 것이라고 침을 뱉은 뒤 방으로 돌아갔다.







* * *






이어폰을 귀에 꽂고 공무를 본다. cd플레이어는 이바다의 파란꽃을 재생하고 있었다. 이 cd플레이어는 막 22세기가 됐을 무렵에 어렵게 구한 물건인데, 22세기 기념 에디션이란 이름으로 한정된 수량만 판매됐었다. 슬로건은 '과거를 100년의 미래에게 선물하세요.' 100년의 미래란 것은 선물받는 이의 건강을 빔과 동시에 제품의 뛰어난 내구성을 말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70년이 넘게 지났는데 멀쩡히 잘 작동한다. 타락으로 그득한 시대 치고는 이상하게 정직한 슬로건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건 그렇고 왜 '과거를 선물'일까. 다음 트랙인 제시제이의 Thunder를 들으며 생각해 본다. 21세기 말에 다다랐을 무렵에 cd플레이어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는, 21세기 초에도 유물 취급받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물건이었다. 그런 걸 굳이 22세기에 다다라서 부활시킨 이유가 뭘까. 어떻게 봐도 시대착오적인 물건인데, 왜 단시간에 완판된 걸까.


모두들 내심 과거를 그리워했던 거지, 라고 나는 혼잣말을 했다. 바이오로이드 따위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오직 인간만이 인간적인 가치를 두르고 세계를 물들였던 시대. 생각해 보면 이런 cd플레이어 같은 건 많았다. 마법 소녀들을 산 채로 갈라 죽이는 걸 프로그램이랍시고 tv에 아무 필터 없이 내보내면서, 바로 다음 채널에서는 바이오로이드로 펼치는 시대극이 방영된다던가. 바이오로이드 등장 이후엔 다들 오글거린다며 취급도 안하던 로맨스 드라마가 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다던가.


이상한 방향으로 뻗어가던 사고의 가지를 끊고 cd플레이어를 정지시켰다. 그냥 옛날에 쓰던 거랑 똑같은 디자인이길래 구했을 뿐이야, 라고 나에게 들려주듯 또 혼잣말을 했다. 그 아이의 집에서 찾았던 물건. 시간이 지나 폐하와 공유했던 음악. 


지금의 cd에 들어있는 음악만은 그때와 다르다. 플레이리스트는 세번째의 내가 모두 갱신했다.


쓸데없는 생각에 잠기고 나면 담배가 고파진다. 갑판으로 나가서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난간에 팔을 걸쳤다. 자정이 지난 시간이라 수평선과 바다와 하늘이 일체화 된 듯한 풍경이 눈앞에 있었다.


"또 담배 피우고 계시는군요. 아주 주인님이 싫어하는 것만 잔뜩."


한숨을 쉬었다. 요즘엔 담배만 피우려 하면 덜떨어진 것들이 꼬이는 것 같다. 


돌아보지 않고 계속 담배를 피웠다. 누군지는 안다. 보면 기분만 나빠지는 얼굴이다. 


"어디서 개씹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주인님 앞에선 그런 말씨 안쓰죠?"


뒤에서 코웃음을 쳐댄다. 


당연히 폐하 앞에서는 안 쓰지.


무시해도 돌아갈 것 같지 않아서 돌아봤다. 색깔이 노래서 더 재수없어 보이는 눈깔을 한 리리스가 배 앞에 공손히 손을 모으고 서있었다.


일단은 합격. 사람 열받게 하는 재주가 있다.


이 시간에 나를 찾은 이유… 이 시간이어야만 하는 이유는 알고 있다. 하치코다. 몇 일 전인가. 폐하 입에서도 성가시다는 ―진심이 아니시겠지만―소리가 나올 정도로 폐하를 귀찮게 하길래, 몇 대 갈긴 적이 있다. 


동생이 맞아서, 그래서 언니 노릇 하겠다고 리리스는 찾아온 거다.


"먼저 시작했으니까 예의 따위 집어치운다?" 리리스가 나를 내려다 보며 말했다. 더 재수없는 눈깔이 됐다. "야. 네가 뭔데 내 동생을 패?"


의도한 건지 말투가 좀 껄렁했다. 너무 어색해서 한바탕 비웃어주고 싶었다. 


이 오르카에서 나보다 저속한 년은 없다.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이런 개잡년을 봤나." 장갑 낀 손의 손가락을 까딱거리면서 다가갔다. "아무리 그래도 반말은 아니지."


"참모면 애들 막 패도 돼?"


"그게 어떻게 애야? 암캐지. 처맞아서 캥캥대는 소리 듣고 열받은 너도 암캐. 작은 암캐, 큰 암캐. ㅋㅋㅋ 컴패니언이 아니라 개집으로 이름을 바꿔야겠구만?"


리리스의 눈입꼬리가 경련하듯 실룩거리고 있다.


"이 오르카에 별것들이 다 모여 있긴 한데,  아르망 추기경. 넌 그중에서도 독보적이야."


"싸가지 없는 년. 끝까지 반말이네."


"겁대가리가 없어."


"아냐. 있어. 너한테 바짝 세울 겁대가리가 없는 거지."


"너도 맞아볼래?"


"내가? 너한테? 상상이 안 돼~"


"내가 누군지는 알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힘 좀 쓰는 년놈들일수록 내가 누군지 아냐는 대사는 삼가야 한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덕분에 원래도 없던 리리스의 위엄이 반감됐다.


"처맞는 건 너야." 나는 웃음기를 지웠다. "그리고 그런 대사는 그렇게 치는 거 아냐. 이렇게 치는 거지. …넌 내가 누군지 몰라."


적당히 목소리를 깔고 그렇게 말한 뒤, 어때? 괜찮았어? 라고 약올렸다. 반응은 괜찮았다. 간만에 연기용 개체라는 부분에서 보람을 느꼈다.


"비전투 개체 주제에 주먹이 근질근질하다는 것처럼 구는데." 라고 리리스가 코웃음 쳤다. "너 진짜 죽는 수가 있어. 적당히 까불어."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고는 미묘하게 공격성이 모자라 보이는데."


"확인시켜줘?"


"어머머."


멱살을 잡혔다. 뒤꿈치까지 끌어올려진다.


"배에 멍이 생겼더라. 그러니까 나도 똑같이 한다? 배에 힘 줘."


배 터진다! 라고 리리스가 경고하자마자 손목을 꺾어버렸다. 기술이 제대로 들어가서 뼈와 뼈가 엇나가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ㅋㅋ 아르망 득점~"


입꼬리 옆에 비스듬히 누운 V자를 만들어 보여줬다.


리리스는 V사인을 본 직후부터 괴성을 질러대며 주먹질 발길질 가리지 않고 나를 묵사발 내려 혼신을 다했다. 과연 블랙 리리스. 한방 한방이 일부러 맞아주기에는 너무나 강해서, 절대로 맞아주지 않았다. 맞아주고 싶어도 너무 정직하게 공격해와서 버릇처럼 피해버리고 만 것도 있었다.


"왜 맞지를 않는 거야!"


입에서 피가 흐르는 것도 모르고 소리쳐댄다. 동네 물고기 다 깰까 걱정스러웠다.


"다 읽혀. 한… 세 수 정도."

"아, 예지인가 뭔가 그거야?"


그거랑은 좀 다르지만, 친절히 차이점을 설명해줄 분위기가 아니었다.


리리스의 주먹을 받아 넘기면서 떠오른 게 있었다.


"들은 게 하나 있어. 블랙 리리스는 크게 두 가지 용도로 제작 됐다던데. 하나는 호위용, 하나는 살상용. 용도만 봐도 알겠지만, 강한 건 살상용 쪽. 둘은 구분하는 건 의료키트의 유무라나?"


나란 년이란. 다른 건 잘도 기억 못한 주제에 이런 건 또 기가 막히게 기억한다. 


"갑자기 뭔 소리야?"


"그거 치워."


"뭐?"


"몸에 매고 있는 거. 의료키트. 쓸 일도 없는 그거 치우라고. 흥미가 생겼거든. 오르카의 블랙 리리스가 진심을 내면 얼마나 강한지. 그, 옛날에 말이지. 한 번 붙어봤거든. 블랙 리리스랑. 근데 걔는 침을 줄줄 흘리느라 제대로 된 언어를 구사하지도 못하는, 말 그대로 네 발로 기어다니는 사냥개같은 년이었어. 그년이야 그랬으니 당연히 의료키트는 안매고 다녔는데, 상태가 메롱이라 블랙 리리스로서의 제대로 된 전투력을 알 수가 없더라고. 너무 쉬웠어. 그러니까 말이지."


"제대로 붙어보자? 죽일 생각으로 덤벼라?"


"응. 넌 좀 치니? 그러길 바라는데."


"진심이야?"


"진심이야."


리리스는 망설임 없이 의료키트에 손을 가져갔지만, 벗는 것에는 머뭇거렸다. 나와 보낼 시간이 거칠어질 거란 건 각오했어도 진짜 죽고 죽일 생각은 아닌듯 했다. 나도 그런 건 사양이지만, 상대가 원한다면 피하지 않는다.


나는 각오하고 있다. 이번에도 찾아올지도 모를 파멸을 넘기기 위해서라면, 얼마나 못돼쳐먹은 썅년이 되더라도 상관없다고.


폐하만 무사하면 된다. 나머지는 알 바 아니다.


"패러 온 게 아니라 처맞으러 온 거구나?"


"어떻게 너같은 게…"


한 대도 못 맞춘게 그렇게 충격인가.


"그렇지? 처맞으러 온 거지? 너 듣기로는 그런 취향이라던데? 그래서 그런가? 그런 소문도 있어. 얼마나 처맞는 게 좋으면 은근슬쩍 철충한테도 부상 당하려 한다고. 아하~ 그런 거구나? 그래서 수복실 실려가면 주인님이 찾아오실지도 모른다는, 그런 계산도 있는 거구나?"


"호, 혼자 뭘 멋대로 지껄이는 거야."


"얘. 속 다 보여. 너같은 변태 성욕자 년들이 다 그렇지 뭐. 그건 그렇고 궁금해. 진짜 처맞으면 흥분해? 뭐, 막 몸이 달아오르고 씹구녕이 절로 벌름 거려? 씹물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막 줄줄 나와? 한 번 확인해 봐도 돼?"


"시끄러워! 다, 다가오지 마!"


"음음. 그려지네. '철충에게 부상당해 수복실로 실려가면 주인님이 온다. 감추고 싶은 특이성향 때문에 몸은 준비된 상태. 부상을 걱정한 주인님이 찾아오면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주인님이 자지를 꺼내게 만들어서, 그대로 냄새 나는 씹구녕에 골인. 나는 거칠고 폭력적인 걸 좋아하니까 배려라곤 조금도 없는 무자비하고 일방적인 피스톤질을 당하길 원함. 아파요, 싫어요, 라고는 말하는데 입꼬리는 내려가질 않음. 주인님의 자지가 보지를 찌를때마다 씹물 냄새와 수복실 특유의 알코올 냄새가 더욱 몸을 흥분 시킴. 피스톤질은 너무 강해서 푹젖은 질벽에 상처가 날 정도. 주인님의 귀두가 상처에서 나온 피로 조금 붉어짐. 죄송해서 입으로 빨아드림. 그러는 와중에 눈으로 보챔. 자지를 목구멍 뒤까지 처박아 달라고. 숨이 안 쉬어짐. 실신함. 실신했는데도 폐하는 다시 내 씹구녕에…' "


"닥쳐!"


"상상했어? 너도 한 번 즈음 해봤던 상상이었겠지? 이미 짝을 이루시고 건전한 사랑을 나누시는 주인님을 상대로, 그런 몹쓸 상상, 해 본거지?"


"닥쳐! 닥쳐닥쳐!"


이런 타이밍에 화내면 맞다고 시인하는 꼴이다.


리리스는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바들바들 떨면서 아니라고 중얼거린다. 그런 망상을 했던 것에 제법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망상 자체는 문제가 없다. 누구나 망상은 한다. 드러나거나 들키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잘 보고 덤볐어야 했다. 리리스에게 잘못이 있다면 내게 덤볐다는 것이다. 동생이 처맞아서 화가 났든 내가 마음에 안들었든, 입 다물고 참았으면 이런 일도 없었다.


그래도 고마운 게 있어서 방으로 돌아가기 전에 리리스를 쓰다듬어줬다. 


두번째의 내가 얼마나 추했는지 다시금 알게 됐으니까.







* * *





시간은 착실하고도 무자비하게 흘러, 별밤의 무대가 펼쳐지는 밤이 찾아왔다. 나는 그 무대를 등지고 갑판의 난간에 기대어 빌리 아일리시의 All The Good Girls Go To Hell을 들었다. 난간 너머의 바다가 타르로 가득한 늪처럼 보였다. 


"신나는 이벤트보다 담배가 더 좋은가 보군."


"여기 난간 너머가 더 화려해 보여서." 뒤에서 다가온 칸이 옆에 나란히 서고 말했다. "시끄러운 건 질색이에요."


"그런가."


"당신도 싫어? 저 무대."


"아니. 이벤트 자체는 좋아. 취향이 아닐 뿐이지."


"싫은 거잖아요."


"사령관이 좋아하니까 아무렴 어떤가 싶은 거다."


"나도 시끄러운 것만 빼면 딱히 싫은 건 아니에요. 취향이 아니라서 그렇지."


"싫은 거잖나."


"폐하가 좋아하는데 아무렴 어때요."


칸은 피식 웃고 손을 내밀었다. 이어폰과 담배, 어느 쪽을 원하는 건지 몰랐어서 담배먼저 주고 오른쪽 이어폰을 빼서 건넸다.


"얼마나 대단한 취향을 가졌나 싶었는데, 나쁘진 않군."


칸의 입에서 연기가 한줄기 뿜어져 나왔다. 이어폰에서는 idontwannabeyouanymore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담배 피는 줄은 몰랐는데."

"안 피운다. 오늘만이야. 피워본 적은 있다."

"하긴 당신 부하들이 그러니까요."

"딱히 부하들 때문에는 아니다만."

"그래도 나쁘지 않네요. 담배 피는 모습."

"이건 누구 곡인가."

"빌리 아일리시."

"빌리 아일리시? 그 빌리 아일리시?"

"그 빌리 아일리시라니? 알아요?"

"알지. 노년의 중견가수였잖나. 처음 듣는 곡인데."

"어머."

"뭔가?"


"아뇨. 조금 놀라서. 빌리 아일리시를 아는 개체도 있구나 해서요. …이 곡은 그 가수가 젊은 시절에 부른 곡이에요."


"그런가. 내가 본 건 노년뿐이야. 헌데, 젊은 시절이라고 하면 꽤 옛날이 아닌가."


"응. 바이오로이드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

"그런 올드한 곡을 잘도 알고 있군."


"좋아하니까요. 당신은 어때요? 따로 좋아하는 음악이나 가수 있어요?"


"있지. 있는데, 빌리 아일리시 이상으로 올드해."


"누군데?"

"비틀즈."

"어머머…"

"또 뭔가."

"비틀즈도 아는구나 해서요. 그래서? 곡은?"


"비틀즈 정도는 아는데 말이지. 좋아하는 곡은 Let It Be다."


"이유는?"


"이유가 필요한가. 굳이 말하자면 질리지 않는다 정도겠군."


"진짜 신기하네요. 빌리든 비틀즈든 오늘날에 와서는 나만 아는 줄 알았어."


"인류가 펼친 어느 분야에서든, 시대를 초월하는 것은 있기 마련이잖나. 비틀즈같은 명밴드면 그러고도 남지."


오르카에 주제가 통하는 계집이 있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진짜 신기한 건 눈앞의 칸이었다. 두번째의 그녀는 나를 물어뜯었는데, 이번에는 칸이 먼저, 그것도 그녀의 성향을 고려해보면 제법 친근한 모양새로 접근해왔다. 두번째와 지금의 나의 차이점이라면 상대적으로 조용하다는 것 뿐인데, 무엇이 계기였던 걸까?


"참모. 신기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뭐 이런 걸 듣고 있으니까…"

"아니. 그거말고."

"그럼?"

"소문이랑은 다르게 얌전해서."

"아닌데. 나 자비없는 년이에요."


"자비가 없었다면 오르카가 이렇게까지 길항하진 못했을 거야."


"비행기 띄워도 떨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훌륭한 걸 훌륭하다 할 뿐이다. 넌 신뢰할 수 있어. 유능한 상관이야."


"...예쁘네."


나는 화제도 돌릴 겸, 칸에게 몸을 숙이고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워페인트라고 하나? 본판이 예쁜데 늘 그런 위장만 하고 다니는 거에요? 아까워. 폐하한테 다른 얼굴 보여주고 싶지 않아요?"


"딱히. 꾸밀 줄도 모른다. 그쪽 방면의 지식은 없어."


"그럼 배우면 되지. 다음에 시간 내봐요. 가르쳐 줄게. 본판이 괜찮으니까 어떤 화장이든 잘 먹힐 거야."


이후에 칸은 몇 곡 더 내게서 빌려듣고 먼저 들어가보겠다며 함내로 향했다. 그러는 칸은 살짝 웃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돌 공연은 이미 끝이 나 별밤의 무대는 정리 중에 있었다.


"여기서 뭐해?"


함교에 나밖에 없는 시간이 되자 또 목소리가 들렸다. 


"와아!"


뒤에서부터 놀래킬 목적으로 내 어깨를 잡아왔지만, 그 손에는 부드러운 다정함이 있었다. 금발인 것 치고는 똑똑이여서 이런 부분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어설픈 구석이 있었다.


옆에 서서 기지개를 편 뒤 난간에 몸을 기대고, 나를 관찰하듯 하르페이아가 고개를 내밀어왔다. 


"이럴 땐 놀라줘야 하는 거야."


"미안해요. 전혀 안놀랐어."


피이- 하고 하르페이아가 토라지듯 고개를 숙였다.


다시 하르페이아가 말했다.


"무대 괜찮았어?"


"괜찮았어요."


"정말?"


진심인지 아닌지가 중요하다는 듯 눈을 빛낸다. 

폐하한테나 묻지, 왜 이런 걸 나한테 묻는 걸까. 내 평가가 중요한가? 폐하 마음에 들었는지가 더 중요한 거 아닌가? 


"아르망은 노래 잘 부르잖아?"


나는 고개를 크게 갸웃거렸다.


"노래 부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아요?"


"가끔 혼자서 부를 때 있지 않았어? 멀리서 들어도 잘 부르던데? 보컬 연습은 아르망한테 부탁하자는 얘기가 나왔을 정도였어."


"잘못들은 거겠죠."


"그래…? 아닌데? 분명 부른 적이 있는데?"


없다. 내 기억에는. 폐하와 만나기 전부터 부르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이번 별밤의 무대에서도 폐하는 콘스탄챠에게 세레나데를 선물하셨다. 내 도움같은 건 하나도 없었는데 실력이나 선곡이나 흠잡을 데가 없었다. 어쩌면 두번째에서도, 내 도움은 필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내 가치가 수직하락한 기분이었다. 


나는 하르페이아와 눈을 맞추며 다시 생각한다. 


앞으로도, 언제 어디가 됐든 절대 노래하지 않겠다.


하르페이아는 분명 내 노래를 들었다며 기억을 떠올리려 밤하늘을 향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부른 적이 있다는 걸로 하자. 

나는 마지못해 부른 적이 있다고, 기억에도 없는 사실을 실토했다.


"그건 누구 노래야?"


기억에도 없는 걸 물어보니 대답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나는 침묵하고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눈매를 해 보였다.


하르페이아는 흠칫 몸을 떨며 고개를 뺐다. 손에는 공책이 한 권 들려있어서, 나는 그것을 가리켰다. 적당히 화제를 돌릴 수 있었다.


"아~ 이건 음… 감상문이라고 해야 하나? 작가 흉내를 내본 거라고 해야 하나? 감상문은 감상문인데, 독서 후의 감상을 재료로 시를 썼다고 해야 하나…? 그냥 감상만 적기엔 너무 딱딱하니까 한 번 다른 방식으로…"


하르페이아는 점점 횡설수설했다.


"여러 형태로 쓴 감상문이라는 거잖아요. 줘봐요."


"앗! 잠깐!"


공책을 펼치고 몇 분 뒤에 내가 가진 감상은, 그렇게 횡설수설 할 정도로 부끄러워 할 필요가 어디에 있었냐는 것이었다. 너무 훌륭하거나 너무 형편없을수록 평가는 짧아진다. 하르페이아는 전자였다. 잘 쓴다. 그 짧은 평가 외에 하르페이아의 글을 나타낼 수 있는 표현은 없었다.


굳이 하르페이아의 글이 어떤지를 말하자면, 시어들은 굉장히 치밀하게 짜여있으나, 시 전체적으로는 간결하고 절제되어 있다. 그런데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말하고자 하는 감상의 핵심만을 탄탄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저 감상문이라고 하기엔 아깝다. 멸망 전이었다면 어디가 됐든 작가로 등단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바이오로이드에게 질투심이 일었다.


계속 공책을 넘겨갔다. 푸시킨, 에밀리 디킨슨, 윌리엄 블레이크 등의 대문호들의 시 말고도 제인 오스틴이나 마크 트웨인 등의 소설들에 대한 감상문도 적혀 있었다. 


공책을 훑은 나는 푸시킨의 시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이 나한테 보낸 적이 있어요."


"응? 시를? 내가? 그렇게 부끄러운 짓을 했다고?"


"응."


"그, 그런 기억은 없는데…?"


"내가 노래 부른 건 잘도 기억하면서 그런 건 모르는 구나. 있어. 잘 생각해봐."


"음… 역시 그런 적은 없는데."


그렇겠지.


"하르페이아. 잘 쓰네요. 당신이 부러워요."


"에이~ 거짓말. 그냥 감상문인 걸."


"아냐. 잘 써. 진심이야. 나도 글을 써본 입장이라, 얼마나 잘 쓰는지 확 와닿을 정도로 잘 써요."


"그, 그래… 그 참모님의 칭찬이라니. 기쁜 것보다는 놀라운 걸… 그나저나, 아르망도 글을 써? 어떤 글이야? 보여주면 안 돼?"


"싫어."


"왜애~ 나도 보여줬잖아? 응? 보여주라."


"사라져서 보여줄 수가 없네. 있었어도 보여줄 생각은 없지만."


"사라졌어?"


"응. 수십 년을 투자해 쓴 글인데, 누구씨 덕에 저 바다 아래로 떨어졌어."


"어머! 못됐어! 누구야!?"


"당신이랑 가까운 개체."


"나랑? 누구지?"


"글쎄. 한 번 생각해 봐."







* * *






친구같은 건 생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친구라는 단어의 의미도 모르게 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일까. 역시 두번째와는 조금 다른 스탠스라는 게 계기가 된 걸까? 칸과 하르페이아를 시작으로 먼저 접근해 오는 년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블랙 하운드, 흐레스벨그, 샐러맨더, 퀵 카멜…… 그래 봐야 한 두년 정도다, 그 정도 밖에 안되는 년들이다, 라고 생각하는 나는 없었다.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는 나만이 있었다.


물론 나는 그녀들을 친구라 생각하지 않는다. 친구라는 걸 둘 심적 여유는 둘째치고 바이오로이드에 대한 근원적인 혐오감이 앞서기 때문이다. 두번째 150년에서도 어김없이 인간들을 타락시킨 년들. 그걸 위해서만 태어난 것처럼 보이던 년들. 탄생을 기점으로 인류사와 한 차례 단절시킨 듯한 시대를 열어버린 년들. 인간 개개인이 가졌던 역겨움과는 별개로, 그녀들이 타락의 중심이었다는 건 사실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바이오로이드가 접근해 오는 걸 막지 않았다. 


내게도 외로움이란 건 있으니까. 밀어내기엔 너무나 지쳐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이용하자. 마음은 주지 않되, 순간의 외로움을 달랠 용도로 이용하자. 적절히 친구인 척 굴어서 이제는 잘 지어지지도 않는 웃는 얼굴을 지어보자.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다.







* * *







일일이 짜증나는 년들을 상대하는 것도 적당히 하고 싶지만, 매번 눈에 밟히거나 귀에 들어온다. 첫번째인 홍련부터해서 샬럿에 리제, 하치코, 리리스… 나도 자중하고는 싶은데 폐하가 곤란한 얼굴이라도 하시면 몸이 튀어나가고 만다. 


올해도 만들었던 눈사람이 죽어버리고 눈물같은 꽃잎들도 모두 떨어져버렸다. 여름의 열기가 세상 모든 것을 팽창시키는 시간이 왔다. 바벨이 무너졌고, 앤젤과 라미엘이 합류했다. 매번 내 손에 목이 달아난 년들을 볼때마다 묘한 기분이 든다.


다가올 미래에 집중한다. 누가 끼어들든 폐하의 사랑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밖에 보이지 않을만큼 둘의 사랑은 공고하다. 애초에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는 것처럼. 


앞으로 누가 꼬리치든, 나는 다가오리라 예상되는 파멸에만 시선을 주자.


틈틈히 시간이 날 때나 멸망 후부터 생각은 해왔다. 


바다를 피하는 철충이 어떻게 바다 속에서 습격할 수 있는지. 어떻게 레이더가 운반하는 스나이퍼 칙으로, 해상에서부터 저격이라는 변칙수를 쓸 수 있던 건지. 어떻게 폐하의 외출을 특정했고, 장소마저 특정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어째서 첫번째와 두번째 모두 똑같은 형태로 끝났던 건지.


마치 폐하가 결혼기념일에 소풍을 나가실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떠오른 모든 의문점에 대해 단 하나도 답을 내놓지 못했다. 답 자체는 내놓긴 했지만, 하나같이 나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답이 아니었다. 상식을 벗어난 과정으로 이루어진 파멸이다보니, 상식적이지 못한 답만 내놓고 있었다.


그렇다면 예지를 해보면 될 일이지만… 나는 예지할 수 없다. 능력을 잃었다. 왜 잃었는지 구체적인 이유는 모르고, 다시 보낸 150년 속에서 그 능력이 소생하는 일도 없었다. 혹시나 해서 몇 번이고 예지를 시도해 봐도 사고는 공전을 거듭했을 뿐, '예지했다.' 라고 하면 느껴졌던 그 특유의 감각이 뇌리를 타고 흐르는 일도 없었다. 


답 다운 답을 내놓지도 못하고 예지도 못하고 그 능력이 소생하는 일도 없었다. 이렇게만 말하면 두번째 150년도 무의미하게 보낸 것처럼 보이지만, 가능한 '피로 물들게 될 결혼 기념일.'이란 상황을 특정한 대비책은 생각해 왔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법. 가장 좋은 방법은 폐하께서 동산을 가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런 상황과 배경이 만들어질 가능성을 없앤다. 가장 확실하면서도 심플한 방법이다.


그렇다면 폐하가 동산에 가게 되시는 계기는 뭘까? 


"윽… 소첩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이옵니까…"


소완이다. 소완이었다. 지금 내게 목을 졸리는 이년이었다. 이년이 소풍을 가고싶다고 졸라서, 폐하는 마침 가까워져오는 결혼 기념일은 소풍으로 보내자고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나는 소완이 합류하자마자 조져버렸다. 이유는 당연히 소풍이란 가능성 자체를 막기 위해서였다. 두번째에서 조진 이유와는 엄연히 다르다. 


그런데, 그런데.


분명히 폐하께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했는데.


플래시백이 일어나고, 두통이 덮쳐온다.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나 해?"


주방에서, 소완의 목을 터뜨려버릴 기세로 쥐어뜯듯이 졸랐다. 손톱이 박힌 부분에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다시 말해봐. 내가 잘못 들었을 수도 있으니까. 폐하한테, 뭐?"


"가, 가을이 느껴지는 여름 공기를… 크윽… 마실 수 있는 나들이를 나가보고싶다… 라고 청해보았을 뿐이온데… 그것이 그리도… 중한 죄가 되는 것이온지… 소, 소첩은, 잘 모르겠사옵… 커흑…"


"내가… 내가… 분명히… 폐하한테 접근하지 말라고 했잖아. 아가리 뻥끗하지 말라고! 네 목에 네가 준비한 물약 처박고 경고했잖아! 씨발썅년아! 너같은 년이 무슨 폐하와 소풍이야! 너같은 년은 물약으로만 찾아갈 수 있는 요정과 딜도가 함께 뛰어노는 환상의 세계가 어울려! 그것도 몰라!? 네가 뭔데 주제도 모르고 내 경고도 무시하고서 폐하한테 접근했냔 말이야!"


으아아아아아악!


소완의 머리채를 잡고 식기세척기에 내동댕이 쳤다. 뭉텅이로 뜯겨나온 머리카락을 소완의 얼굴에 집어던지고, 온힘을 실은 발길질을 연달아 먹인 뒤 복도로 나왔다.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티타니아와 어깨를 부딪쳤다. 재수없는 눈깔로 노려보길래, 뺨을 후려갈기고 턱을 붙잡은 뒤 말했다. 설마 아직도 폐하 앞에서도 그 따위 눈깔을 하느냐고. 다음에 볼 때 또 그렇게 노려보면 산 채로 눈깔을 파버리겠다고 경고했다. 두번째의 내가 고개를 들려고 한다.


진정해라. 아직 시간은 있다. 9월 중순까지는 3주 이상이나 남았고, 소완이 소풍 얘기를 꺼냈다고 해서 이 시점의 폐하가 반드시 소풍을 가겠다 마음 먹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다음 달 중순 즈음에 하루 휴가 내려고. 왜? 아르망.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뇨."


…죽이겠다.


이번에도 똑같이 끝난다면, 내 손으로 소완을 죽이겠다. 자살하게 두지 않겠다.






* * *






초조함으로 터져버릴 것 같은 머리를 어떻게든 굴려본다. 그래. 폐하의 소풍을 막을 방법은 아직 있다. 나가더라도 동산의 상황을 상정한 대비책도 그려놨다. 


우선 가장 좋은 방법 쪽을 계속 시도해 본다. 이번에는 상대적으로 얌전히 지낸 이유를 꺼내든다. 


이제부터 나 혼자는 무리다. 도움을 구해야 한다.


수복실과 접한 의료실에 들어서자 닥터와 잡담을 나누던 다프네가 있었다. 


"다프네. 너는 상담을 잘 해주기로 유명하다지? 할 말이 있어."


처음부터 모든 걸 말해 버리면 경계만 살 것이니 다소의 친근함을 가장하여 접근한다. 나는 사연이 많은 년이라 너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식으로 대화를 이어가다가, 서로 적당히는 웃을 수 있을 때가 되어서 에둘러 본론을 말한다.


"네. 말씀하세요."


다프네는 약품 냄새로 가득한 의료실에서 내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었다. 


"요즘 좀 힘들어."

"무엇이 힘드시죠?"


"악몽을, 너무 자주 꿔. 똑같은 내용의 악몽만 계속 꾸고 있어."


"그러시군요. 으음… 괜찮으시면 어떤 악몽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어디까지나 참고 목적이니까, 불편하시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 악몽은… 나와 폐하가 갑자기 150년 전으로 떨어지는 걸로 시작해. 그 시대에는 바이오로이드는 하나도 없어. 그런데도 바이오로이드 탄생 이후보다 끔찍한 구석이 있어서, 도저히 적응이 안 돼. 폐하는 내가 모르는... 이유로 자살 하시고, 나는 다시 폐하가 나타나실 150년을 홀로 보내게 되지. 그렇게 폐하를 만나."


"그렇군요."


"그리고 다시 150년 전으로 떨어져."


"반복…인 건가요."


"응. 무서운 꿈이야."


"그렇네요. 주인님이 자살하신다니. 게다가 150년인가요. 참모님의 악몽에서 그 150년은 어떻게 다가오는 150년인가요?"


"너무 생생히, 정말로 실감되는 150년이야."

"엄청나게 긴 꿈이네요..."


"그래. 정말로."


"참모님은 그 150년을 어떻게 보내시죠?"


"살지. 여러 모습으로. 인간에게 있어 150년이란 일생이라 부를 수 있는 그 이상의 시간이야. 나는 폐하를 그리지만, 삶이라 부를 수 있는 시간을 보내. 그러다 보니 폐하를 잊어버리기도 해. 반대로 폐하만을 바라 보느라 삶이라 부를 수 없는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


"삶이라 부를 수 없는 시간이라는 건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 너라면 그렇게 말할 것 같았어. 어쨌든 꿈 속의 이야기야."


"그렇죠. 꿈이죠."


"그래서 말인데, 넌 어떻게 생각해?"


"어떤 걸 말이죠?"


"네가 삶이라 부르는 시간이 구축한 가치관과 철학, 추억과 경험이 하루 아침에 모두 없었던 것과 다름없게 된다면, 너와 시간을 보낸 이들이 너를 모르게 되지만 너만은 기억하고 있다면, 어떨 것 같아?"


"끔찍...하네요."


대화 중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목소리도 말씨도 눈매도 모두 나긋해서 마주한 이로 하여금 경계심을 지우게 만드는 다프네가 상대인 탓도 있었겠지만, 혹시 이 녀석이라면 모든 걸 털어놓아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녀석이면서 종종 속마음을 꿰뚫어보는 눈을 하기도 하는 녀석이니 알아주지 않을까.


유혹같은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엔 입술은 이미 미혹된 뒤였다. 내 입은 방금 말한 꿈의 내용은 모두 사실이며, 너와 몇몇 년들 외에 다른 덜떨어진 년들에겐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몇 일 후, 나는 내가 얼마나 어리석고 무른 짓을 했는지 이 판단을 통해 깨닫게 된다. 


내 이야기라는 것을 밝힌다? 진지하게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줄 년들이 있다? 외출하면 위험하다고 함께 폐하를 말려줄 년들이 있다? 이제 친구니까? 나는 내가 처한 상황이 얼마나 비정상적이고 비현실적인지를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초조함에 잊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아무리 폐하와 저항군의 파멸을 막을 여러 대비책을 생각해왔다한들, 결국에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 뿐이다. 한 가지 행동 밖에 못한다. 그래서 신중해야 했는데, 나는 그 중에서도 최악의 수를 선택하고 만다.







* * *






"갑자기 참모님이 이런 시간에 불러서 놀랐어… 무슨 일인데?"


"칸, 하르페이아, 닥터에 리앤, 사디어스…다 모였군요."


"…"


"다프네. 표정이 어두운데. 참모한테 혼났냐?"


"아뇨…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다들 앉아요."


"괴담이라도 할 분위기로군. 불 좀 키지."


"안 돼. 발칙한 것들이 와서 엿들을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당신이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에요. 괴담같은 이야기거든."


"오오. 그런 계절이긴 하지. 기대되는데."


"으…"


"괜찮아? 어디 아파?"


"괜찮으니까 이제 어깨 좀 놔줘요 하르페이아."


"…저기, 참모 언니. 자주 그러지 않아? 만성적인 두통에 시달리고 있는 거 아냐?"


"신경쓰지 마. 그건 전에도 말했으니까 그냥 넘어가. 어쨌든… 다들 모였죠?"


"참모가 호출한 개체들은 모두 모였다."


"그래요… 그럼, 사디어스가 기대한 괴담같은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려고 하는데 말이죠."


"그게 호출한 까닭인가?"


"칸, 그런 거 싫어해요? 의외로 무서운 거에 내성이 없나? 그렇게 무서운 이야기는 아닌데, 싫으면 돌아가도 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됐다. 들어보지."


"여러분."


"참모님. 잠시만요."


"다프네, 왜?"


"한명 더 불러도 될까요?"


"누구?"


"엔젤. 참고할 부분이 있어서요."


"그래. 네가 그리 말한다면야."





"부르셨어요? 어라? 왠지 분위기가 무서운데요…"


"빨리 앉아라. 괴담 이야기 모임이다."


"그런 모임이 있었나요!?"


"그래. 방금 만들어진 모임이지. 영광으로 알아. 초대 멤버가 된 거니까."


"영광으로 삼을 정도인가요…"


"합류한지 얼마 안되서 아직 아르망을 잘 모르나본데. 충분히 영광이다."


"네, 네에…"


"엔젤. 여기 내 옆에 앉아요."


"네네. 그, 성함? 개체명이 어떻게 되셨죠?"


"다프네에요. 지금부터 당신은 말하지 말고 내가 시키는 거에 집중해요. 귀 좀 빌려줄래요?"


"흐앗!?"


"으…의외로 박력있는 여자였구나, 다프네 언니..."


"귀! 귀 간지러워요! 히익! 지금 혀 닿은 거에요!?"


"시끄러워…"





"얘기 다 끝났어요? 그러면 괴담, 시작할게요."


"다들 조용히."


"오르카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어요."


"…"


"범인은 나였죠."


"시작부터 센데…"


"그런 적이 있었나?"


"괴담이에요."


"으응…"


"그리고 당신들이 날 잡으려 했고요. 하르페이아는 폐하를 호위했고, 엔젤은 내 손에 목이 날아갔어요. 그 바벨 밑에서. 당신 언니는 가랑이부터 이마까지 갈라 죽여버렸죠."


"어, 어느 부분이 괴담이란 건지…"


"괴담이에요."


"그래… 일단 들어보자."


"당신들은 말이죠. 꽤 유능했어요. 하지만 범인을 특정하는 수사 자체는 훌륭했는데, 역시 시대가 시대여서였을까요. 아니면 오르카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였을까요. 능력이 좀 무뎌진 건지 어딘가 어색한 구석이 있었어요. 나는 나대로 어설픈 구석이 있었고요."


"그, 그래서?"


"결국에는 잡혔어요."


"휴우… 그렇구나."


"여러분이 능력을 발휘해서 잡은게 아니라, 내가 실수해서 잡혔죠."


"어… 웬만한 수사기법은 다 알고 있으니까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래요. 좀 더 시간이 있었으면 그랬겠죠. 어쨌든 내가 실수를 저지른 게 먼저였어요. …괴담은 지금부터야."


"듣고 있어."


"전부 실제있었던 일이라고 하면, 믿을 수 있겠어?"


"어, 아니."


"나는 타임 루프를 하고 있고, 이번이 세번째 오르카고, 지금 말한 겅 두번째 오르카에서 일어났고, 내가 저지른 사건 외에서도 죽어나간 년들이 아주 많다고 한다면, 믿겠어?"







* * *






"나는 타임 루프를 하고 있어. 확실하게 타임 루프라 말할 수 있는 현상인지는 모르겠지만, 같은 시간을 반복해서 살고 있어."







* * *







"두번째 오르카는 모든게 이상했어. 꼭, 뭐랄까. 다양한 장르를 짜집기해서 편집한 저급한 영화같다고 해야 하나. 로맨스인데 로맨스가 아니고, 슬래셔인데 슬래셔가 아니고, 수사물인데 어색하고, 스릴러인데 스릴이라곤 조금도 없었어."







* * *







"그렇게 이상했던 건 나부터가 이상했기 때문이었지. 다프네, 너는 말했어. 자아가 옅을수록 문제가 되는 행동을 일삼게 된다고. 결여된 부분을 대체하기 위한 걸 정할 땐 신중해야 된다고. 네 말은 정답이었어. 나는 내 안의 상실을 영화와 음악으로 채웠으니까. 그래서 그런, 어딘가 나사빠진 영화같은 일들이 일어난 거겠지. 나 자신이 느끼기에도, 그런 영화가 재생 중인 비디오 플레이어 속에 있는 듯한 감각이었어."








* * *







"어쨌든 내 얘기는 여기까지만. 중요한 건 따로 있거든."







* * *







"그 영화의 결말은, 갑작스럽게 저항군이 궤멸한다는 내용이야. 너희는 모두 죽고, 폐하도 죽게 돼."








* * *







"이번에도, 똑같을 거야. 그러니까 너희의 도움이 필요해."







* * *








"내 말이 사실이라고 증명할 방법은 없어."







* * *







"그래도 믿어줘."








* * *






발신자:다프네

제목:정신감정서 32호


현실 검증력이라는 말을 알고 있는가? 내적 현실과 외적 현실을 비교하고, 외적 현실에 근거해 내적 현실을 수정하는 능력을 현실 검증력이라고 한다. 분별력과는 조금 뉘앙스가 다르다. 현실 검증력이 없다면 분별력이 없다고 보는 시선이 있고, 현실 검증력을 분별력의 한 갈래로 보는 시선도 있다. 


나는 전자를 따른다. 현실 검증력은 현실 속에서 우리 자신을 지탱캐 해주는 마음의 힘이다. 이것의 결여는 많은 정신적 병증을 야기하며 심각한 경우, 다른 이들과는 다른 현실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될 것이다. 오르카의 모두는 동일한 현실을 누리고 있다. 우리는 현실의 매순간을 자연스럽게 검증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신경적으로는 전력 달리기를 하고 있다고 말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아르망 추기경에게는 이것이 없다. 몇 일 전 듣게 된 그녀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충격적이라 처음에는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없었지만, 곧 그녀의 이야기는 현실 검증력이 결여되면 곧잘 일어나는 망상증에 불과하다고 나는 판단할 수 있었다.


주인님이 죽는다? 그런 외적인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어디에도 없는데 그녀의 내면에서는 반드시 주인님이 죽는다는 이야기가 소용돌이 치고 있다. 외적인 현실이 내면에 전혀 수정을 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과 자신을 괴리시키는 수준의 중증 망상이다.


문제는 이 망상이 아주 폭력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녀가 가진 성향에도 일부 기인할 것이다. 그녀에 대한 폭력성의 자료는 따로 첨부한다.― 임상적으로 봤을때, 망상은 정도의 차이 보다도 그 망상의 성격이 어떠하느냐가 더 중요한 경우가 있다. 


그녀의 망상은 폭력적,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소견을 내린다.


조속히 격리감호를 처방할 것을 권함.


P.S.


아르망 추기경이 참모로서 보인 일련의 행보는 언뜻 정상적인 것으로도 보이지만, 이것은 참모라는 직위에 걸맞는 자기 자신, 즉, 참모로서의 마땅한 행보를 위한 대안 현실을 구축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누구나 자신은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현재의 자신에 걸맞는 현실을 만들고, 조작한다.


이런 정신적 행위를 하는 이들로는 정신분열증 환자 및 중증 우울증 환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녀가 정신적으로 환자라는 것은 동석했던 엔젤의 소견이 뒷받침한다. 지독한 우울감과 공허함을 느꼈다고 앤젤은 밝혔다.






* * *






"야 이 씨발년아!"


"…아르망."


"죄송해요 폐하. 제가 사실 입이 거칠어요. 아니 근데 폐하, 갑자기 이게 뭐야? 응? 날 격리하겠다고? 왜!? 저년이 작성한 그 소견서를 읽어서!?"


"그렇게 됐어… 미안해. 그래도 긴 시간 격리하겠다는 건 아니니까, 일단 천천히 치료받으면서…"


"하루 아침에 이 씨발새끼야! 그게 말이 돼!? 나보다 저 풀냄새 풀풀나는 년이 더 믿음이 간다 이거야!?"


"난 너와 다프네 모두 신임해왔어. 치료에 한해서 다프네 만큼 유능한 아이는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런 거야. 다프네가 그래. 네가 아픈 건 분명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서일 거라고. 멸망 전 개체니까 사연이 있었을 거래. 그럼… 치료해야지."


"폐하. 욕한 건 미안해요. 그러니까 이년들 치워. 응?"


"안 돼."


"내 어깨 잡는 순간 어떤 년이든 대가리 180도 돌아간다. 말했다."


"아르망. 진정해. 나쁜 게 아냐."


"내가 나쁜 건 상관없어! 저년 말대로 난 정신병 환자야! 씨발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너 뒤진단 말이야! 네 와이프 죽으면 너도 죽는다고!"


"참모님! 이제 그만 따라오시지 말임다!"


"두번째도 첫번째도 똑같았다고! 왜 믿지를 않는 거야!"


"저항 마시고 사령관님 지시 좀 따라 주시지 말임다…!"


"씨발…씨발년들… 내가 잘못 생각했어… 후회할 거다. 너희 전부! 싹 다 뒈질 거야!"


…포기 안 해.


"앗! 참모님!"


"아르망! 명령이야! 거기 서!"


싫어.


"싫어."







* * *






오르카를 탈출한다. 

복도를 뛴다.

어둠이 가득한 복도의 창 너머에, 빛이 한방울 있었다.

방문자다.

초롱아귀.

또다.

그때와 똑같은 놈이다.

그놈과 눈이 맞는다.


오르카는 이번에도 침몰할 것이다.








* * *







오르카를 탈출해 해상을 그리폰으로 비행하여 만들어둔 거점에 도착했다. 날은 슬슬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콘스탄챠가 어느 동산에서 죽는지는 특정해뒀다. 폐하가 결혼식을 올릴 때 배경으로 삼았던 섬, 계절에서 벗어난 듯 온갖 꽃이 피어있던 섬. 두번째 때는 확인하지 못했고, 첫번째는 너무 오래되서 기억이 안나지만, 나는 확신한다. 폐하가 찾아가실 곳이라면 그곳 밖에 없다. 그 섬의 동산에서 콘스탄챠는 죽는다. 


멸망 후에 만들어둔 여러 거점 중, 내가 도착한 거점은 그 섬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섬에 있었다. 여기라면, 폐하가 끝내 동산으로 가셔도 먼저 조치를 취해둘 수 있다. 

덕아웃 형태로 만들어둔 4평 크기의 거점에는 단파 무전기를 구비해뒀다. 현재 오르카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를 찾기 위해 가까이 다가오고 있으리라 예상된다. 그러니 적당히 송신해도 오르카는 해당 전파를 수신할 수 있을 것이다.


'오르카를 정박시켜라.'


'아무도 유성 곁을 떠나지 마라.'


모스 부호로 반복 전파를 무전기에 설정해두고,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거점을 나섰다.


"아르망 추기경."


"칸."


감이 좋은 것들 중에 따라붙을 년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했다. 그게 칸같은 년은 아니길 바랐는데.


실력은 내가 낫지만, 칸 같이 똑부러지는 구석이 있는 년들은 상대하기 거북하다.


"잠깐. 아니야. 무기 내려." 칸이 내 손에 들린 팬텀을 보고 말했다. "널 잡으러 온 게 아니야."


"그럼 뭐야?"


"난 널 믿는다."


"그럼 왜 날 변호해주지 않았는데?"


"다른 눈에겐 너는 영락없는 정신병자였으니까. 널 변호했다한들 변하는 건 없었어."


"포기가 빠르네."


"흐름을 읽을 줄 안다고 말해주면 기쁘겠는데. 어쨌든, 난 믿는다. 완전히 믿는 것도 아니지만, 너 정도 되는 개체가 갑자기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할 거라곤 생각 안 해. 그래서 페더를 시켜서 네 뒤를 밟았고, 찾아온 거야."


"이야기는 빠르면 좋아. 전파는 수신했어?"


"방금 전에. 페더가 너라고 추정되는 전파를 수신했다는군. 모스 부호로, 누구도 오르카를 떠나지 말라고. 미안하지만 이미 떠나오게 됐군."


"오르카는?"


"가까운 곳에 있으니 수신했을 거다. 네 말을 들을지는 의문이다만."


"가서 전해. 농담 아니라고. 내 눈에 띄는 년들이 있으면 다 쓸어버리겠다고 해. 폐하를 지켜. 폐하 곁을 떠나지 마. 이건 상관으로서의 지시야."


"지시가 아니어도 들을 생각이다. 잠깐. 페더다."


"뭐래?"


"몽구스 팀이 어느 시내에서 미식별 개체와 대치 중이라는군. 신경 쓸 것 없다."


그리폰을 꺼내 비행을 준비했다.


"그 단검도 그렇고, 어디서 그런 장비들을 꺼내는 건가."


"넌 몰라도 돼. 돌아가서 내 지시나 다시 전파해."







* * *






막을 수 있다.


"꺄하하하! 다 죽어!"


날 믿어주는 녀석이 있다.


"다 죽어버려!"


폐하를 살릴 수 있다.


"야."


"전부 죽…어?"


"왜 말하다 말아."


"윽…켁…"


"아, 이거 때문에 그래? 빼줄게."


장화의 목에 박은 팬텀을 빼자 맥박에 맞춰 피가 솟구친다. 


흘러나오는 게 아니다. 죽죽 솟구친다.


"폭탄 터트린다고 신이 나서는. 누가 뒤에서 오는지도 모르고."


"켁… 커흑… 너, 너, 누구…"


대답해 줄 의리는 없었으므로 정수리에 다시 팬텀을 박고, 목에 칼을 가져갔다.


마무리를 했을 무렵에는 몽구스 팀이 접근해왔다. 접근해왔는데, 녀석들이 찾는 장화는 없다. 


꺄아아악, 내 손에 들린 것을 보고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미호였다. 나머지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눈치라, 나는 손에 들린 걸 녀석들 앞에 던져줬다.


"장화…?"


홍련이 본인의 무장을 손에서 떨어트림과 동시에 무릎 꿇고 주저앉았다.


"돌아가." 나는 무심하게 말했다. "돌아가서 폐하 곁을 떠나지 마. 지시야."


"이…"


"뭐야?"


"이 나쁜 년!"


이 이상 썰어버릴 생각은 없었는데, 드라코가 다짜고짜 덤벼들어 어쩔 수 없었다. 


드라코의 목이 날아가 장화 옆에 떨어졌다. 


내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온다. 죽이고 싶지 않았어서가 아닌, 이제 이년들이 내 말을 듣지 않을 거라는 예감에 의한 탄식.


"그거 참 감동적이야. 저 폭탄마 년이나 그게 죽었다고 덤벼든 덜떨어진 년이나. 우리 홍련씨는 이번엔 뭐가 문제일까? 설마 이런 신파를 찍겠다고 시내에서 폭탄 파티를 벌인 건 아닐 것이고."


"네가… 내 동생을…"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끌어올리는 듯한 원망스러운 말투였다.


"어라. 신파였구나."


"너도… 죽어." 홍련이 중얼거리며 다가온다. "너도 지금 죽어!"


빨리 빨리 움직여주면 나도 좋았다. 장화라는 년이 폭탄으로도 죽이지 못한 년들을, 나는 십 초도 안되서 정리했다. 

직후 찾아온 폐하의 지휘용 드론도 박살냈다. 

이런 건 안보는 게 낫다.








* * *







거점으로 돌아오고 일주일 뒤, 칸이 다시 찾아왔다.


"그런 거친 방법은 좋지 않아. 널 치료해야 한다는 사령관이 이제는 잡아야 한다고 말하게 됐다는 점에선 최악의 수였어."


"장화만 족쳐서 겁박하면 바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그렇게 됐네. 설마 반대로 날 죽이려 달려들 줄은 몰랐어. 나도 그런 수 밖에 몰랐고. 장화나 그년들이나 서로 언제봤다고 씨발 지랄들인지…"


"네가 지시한 대로 준비는 하고 있다."


"내 말을 믿는 녀석들은 얼마나 돼?"


"네가 몽구스 팀을 작살내놓은 덕에 얼마 되지는 않아. 일단 호드는 모두 널 믿고, 그 외엔 개개인으로 한 두명씩 믿는 편이다. 한 소속 전체가 믿는 경우는 없어."


"그래도 너 정도면… 따로 여러 년 움직여 볼 수는 있는 위치잖아."


"네 능력을 강조한다면 말이지. 아르망 추기경의 예지가 그렇다고 말한다 하니, 따라본대도 손해는 없을 거다… 라고 하면 제법 많이들 움직여주겠지."


"좋아. 지금은 그걸로 됐어."


"해볼 수 있는 최선을 다 할 거니까 걱정은 마라."


"고마워. 그리고, 칸."


"뭐냐."


"너한테만 말해둘게. 사실 나, 예지를 못해."


"…그런가."


"그래도, 그래도 폐하가 위험하다는 건 알아. 미안해. 예지를 못하니까, 결국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현장에서 대처한다는 수 밖에 없는 것 같아. 폐하가 나타나기 전부터 아무리 예지해봐도 예지가 안되고, 생각해봐도 사전에 막는다는 그림이 잘 그려지지가 않았어. 시도해본 건…전부 무의미했고. 소완이나 너희들."


"충분하잖나. 미래를 알고 있다고 해서 다 막고 다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야. 너 정도 되니까, 널 믿고 움직이는 녀석들이 있는 거야. 날 포함해서."


"고마워."


"감사 표시는 한 번만 하는 거다. 두 번 이상이면 얕보여."


"그래. 어서 돌아가서 마저 준비해 줘."


"아마 다음 주 즈음이 될 거다. 네가 그런 짓을 해서, 더더욱 소풍을 나가야겠다고 사령관은 생각하는 것 같아. 이른 바 멘탈캐어라는 거지."


"만약… 내가 없었다면."


"시끄러워. 이제와서 뭘 하는 건가."


"미안…"


"됐다. 연락하지. 페더가 너한테 오면, 그날이 사령관의 소풍 날이라고 알아라."







* * *







일주일 뒤.


"참모님. 칸 대장님이 보내서 왔어요. 오늘이에요."


페더가 왔다.








* * *







"폐하!" "사령관!"


"아르망?! 네가 어떻게 여기에? 칸은 왜 같이 있는 거야!?"


동산의 경사진 곳을 성큼성큼 올라 폐하 앞에 섰다. 그것으로 오늘 하루를 넘기기 위한, '유성 보존' 작전은 시작됐다. 쓸데없이 작전명은 칸이 붙였다. 내가 아니다.


어쨌든 작전이라해도 별 거 없다. 그냥 폐하를 이 자리에 묶고 사방을 감싼 뒤, 밤까지 자리를 지킨다는 심플한 내용이다.


"주인님. 죄송해요."


리리스가 먼저 사과하고 폐하의 등을 감싸듯 뒤에 위치했다. 폐하가 내게 소리치며 리리스에게 게 무슨 짓이냐 물어도, 콘스탄챠가 만류하려 들어도,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는다. 모두 내 말을 믿거나 칸의 말을 믿는 녀석들만 있으니까. 


그래도 설마 리리스가 믿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한테 한 번 처맞은 년이라 틀림없이 개소리로 치부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칸이 진지하게 사령관의 목숨이 위험하다고 하니 따라나왔다고 한다. 그게 아니어도 컴패니언은 폐하의 외출이라면 어디든 동석하지만, 이런 식으로 폐하의 움직임을 봉쇄해주는 걸 보면 내 말을 믿는 게 맞다.


해의 위치가 꽤 바뀌었다. 몇 시간이 지났다. 아머드 메이든과 컴패니언, 호드와 실험 개체들로 이루어진 방벽 속에서 나는 폐하의 옆에 있다. 폐하는 아직도 리리스를 떼어내려 하면서 내게 무어라 소리치고 계셨지만, 나는 듣지 않았다. 오늘 하루만 무사히 지나면 얼마든지 들어드릴 수 있으니까. 그때는 얼마든지 정신병자 취급해도 된다. 그 이상의 취급을 해도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나저나 혐오스럽기만 하던 바이오로이드가 이렇게 믿음직스럽다니, 바이오로이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어쩌면 내가 오르카에 합류하기 전에 바이오로이드에 대한 혐오감을 모두 씻어냈다면 오늘의 광경이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달랐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말하면 칸은 또 뭐라 한마디 했겠지. 


지금은 그녀들을 믿자.


"8시 방향!"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블러디 팬서가 그렇게 외쳤다. 직후, 그녀의 방패에서 충격음과 작은 불꽃이 동시에 일어났고, 1초 즈음 지나서 해상으로부터 메아리같은 발포음이 들려왔다.


"진짜였어…"


탈론 페더가 혼이 나간 목소리로 말했다. 이 자리의 모두는 하고 싶은 말을 탈론 페더가 대신해줬다는 듯, 굳은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폐하는 잠잠해지셨다. 콘스탄챠 또한 말이 없어졌다.


역시… 똑같이 저격해왔다.


그리고 막아냈다.


하지만 방심할 수 없다. 한 번 저격해왔다면 또 다시 저격해 올 것이 분명하다. 나는 무전을 통해 출격 중이라는 스카이나이츠, 하르페이아에게 레이더의 위치를 알렸다. 칸의 말에 따르면 스카이나이츠가 움직여 준 것은, 내 말을 믿은 하르페이아 덕이라는 듯 했다.


"목표 제거. 더 이상 눈에 보이는 위협은 없어. 스나이퍼 칙을 든 레이더라니… 상상도 못했어. 역시 아르망 추기경이구나."


"정말로…"


정말로 해낸 건가.


"마음 놓기엔 이르다. 다른 레이더가 있을 가능성은 높아. 지시한다. 스카이나이츠는 섬을 중심으로 반경을 넓혀 계속 수색할 것, 호위조는 이대로 대열을 유지하며 숲까지 이동한다. 이동."


그래. 마음을 놓는 건 폐하를 숨긴 후라도 늦지 않다. 


나는 가슴 속에서 터질 듯한 기쁨을 억누르며, 폐하를 한 번 보고 먼저 숲쪽으로 걸어나갔다. 저쪽으로만 가면 끝난다. 아무리 기계라 바이오로이드 보다 정교한 저격이 가능하다 해도, 숲에 몸을 숨기면 어쩔 도리가 없어진다.


끝난다. 이긴다. 해냈다. 300년을 보낸 끝에 드디어 계속 살아계시고 살아가실 폐하를 볼 수 있게 된다. 이제부터는 나도 다시 복원 개체 시절의 아르망을 되찾아 조심조심 폐하께 사랑을 노래하며 300년 분의 매력을 어필할…


"꺄아아악!"


?


"위, 위다!"


위?


위를 본다.


내리쬐는 직사광 너머에 가려졌어도, 하늘이 푸르러 그 검은 실루엣은 도드라져 보였다.


칸의 말대로 레이더가 또 있는 건 이상한 게 아니다. 위협 요소가 더 있는 건 이상한 게 아니다.


이상한 건 위치다.


콘스탄챠의 바로 위.


"직각에서… 수직으로 쐈어?"


그런 곡예같은 짓이 가능하다고?


콘스탄챠를 본다. 아니 정확히는, 콘스탄챠가 있었을 장소를 본다. 


그곳에 콘스탄챠는 없었다. 콘스탄챠였던 것들이 여러 조각이 되어 사방을 붉게 물들였을 뿐이다.


바로 이해했다. 정수리부터 꿰뚫은 것이다.

스나이퍼 칙이 사용하는 대구경이라면, 콘스탄챠 정도는 맞추는 각도에 따라 완전히 터트리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어째서.


"으아아악! 콘스탄챠!"


그런 일이 어째서 오늘 일어나야만 하는 건데?


해상에서 저격가능한 각도를 모두 막았더니, 이제는 높디높은 상공이야?


그것도 직각에서 수직으로 쏴?


"큭… 히히… 히히히…"


어이가 없다.


"추가 목표 제거! 지상! 안전해!? 레이더가 발포하긴 했는데 잘 막은 거지!?"


"…내려와 이 씨발년들아."







* * *







3일 뒤에 오르카로 돌아왔다.


아무도 나를 정신병자 취급하고 격리하려 들지 않았다.


그 정신병자가 맞았으니까. 


어떨까? 정신병자의 말이 맞았다는 걸 알게 된 녀석들의 기분은.


궁금하지도 않다.


"왔군."


함교로 들어가자 조종석에 걸터앉은 칸이 힘없이 맞이했다. 그녀야 원래 무표정이라 얼굴로는 어떤지 알 수 없다. 힘이 없는 건 목소리였다.


"아아악! 사령관! 잘못했어! 꺄아악!"


"이건 무슨 소리야?"


함내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를 가리키며 내가 물었다. 비명의 주인은, 아마도 메이다.


"작은 통제구역에서 들려오는 소리지."


"통제구역?"


"사령관의 지시였거든. 너희 같이 쓸모없는 년들은 이제 그런 식으로 쓰는 것 외에 용도가 없다나. 사령관실이 있는 층의 벽을 모두 뚫어서, 해당 층을 통제구역처럼 꾸며놨어."


"아하. 신나게 고문 중이시구나."


"고문이 아니야. 놀이다. 일단 사령관은 그렇게 말하고 있어. 뭐, 틀린 말은 아니지. 고문도 목적이 있어야 하는 거니까."


"얼마나 죽었어?"


"최소 오십. 이제 메이가 죽으면 둠브링어는 몰살이다. 아마도 다음은 발할라겠지. 레오나는 이미 수차례 강간 당했어. 지금은 제대로 말도 못해. 그 레오나가 맞나 싶을 정도야."


"왜 그 둘이야?"


"널 가장 정신병자 취급한 녀석들이니까. 네가 도망치고 가졌던 회의에서, 사령관에게 강하게 피력했거든. 널 당장 잡아 격리처분해야 한다고. 어지간히도 네가 마음에 안들었던 모양이야."


"그랬었지."


"덕분에 나나 호드는 무사하다. 입 닫고 널 믿기만 했을 뿐인데…"


"…"


"아르망."


"응."


"앞으로 어쩔 거냐."


"뭘 어째."


"저항군은 끝났다."


"…그렇네."


"윽… 케흑… 켁…"


"아가리 똑바로 처벌려! 관이 안들어가잖아!"


"관이라. 메이에게 뭘 넣고 계신 걸까? 우리 폐하는."


"메이에게서 나온 것들을 도로 집어넣고 있겠지. 단숨에 유명해졌다. 관은 그런 용도로 쓰인다고."


"wow."


"사령관이야 미쳐버렸다지만, 너도 정상은 아니군. 아, 원래 정상이 아니었나."


"넌 어쩔래?"


"메이…! 네가 싸갈긴 것들은 네가 똑바로 처리해야지!? 아앙!? 하도 안삼키니까 이렇게 밖에 못먹이잖냐아!"


"샤령…간…미아내…이제…그만…"


"글쎄. 떠날까 싶기도 한데, 실패하면 안되는 일을 실패했으니 업보는 달게 받아야 한다는 생각도 들고. 그런데 사령관은 나를 건드리진 않고. 어렵군."


"그래. 네 마음대로 해. 웬만하면 폐하께는 가지 마. 몸이 성해야 뭘 해도 똑바로 하지."


"그래서, 넌 어쩔 거냐니까."


"당분간은 방에 있을래."


"그런가. 그럼 나도 이만 돌아가지. 종종 방에서 나오라고. 뭐, 사령관은 너도 건드리지 않을 거니까. 분명."


"칸. 잠깐."


"뭐냐."


"폐하가 왜 저러는지, 넌 이해할 수 있어?"


"그래."


"솔직하게. 정말로?"


"…마냥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지."


"그래. 그렇지. 칸."


"왜. 또 뭐냐."


"난 알아. 폐하가 어떤 기분일지만은, 아주 잘 알겠어."


"그래… 뭐냐. 도대체."


"세계의 종말을 맞이한 기분일 거야."








* * *







3일 내내 방에 처박혀 있었다.


수많은 년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노움, 베라, 샌드걸, 그렘린. 알비스에 안드바리까지. 성숙하고 어린 것들 가림없이, 공평하게 모두가 비명을 질렀다.


페어리 년들의 비명 소리가 지나가서야, 나는 샤워하고 방에서 나왔다. 다프네 그년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네, 라고 중얼거리면서 나는 갑판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저기… 참모님."


등 뒤에서 나를 부른 건 LRL이었다. 진조로서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사령관님이 찾으세요."


"알았어. 들어가서 조용히 있으렴. 엘라가 많이 무서워 하니까 같이 있어주면 좋을 거야."


LRL은 고개를 끄덕이고 위태로운 종종걸음으로 돌아갔다.


"우리 아르망 왔구나."


각오하고 들어선 사령관실은 악취로 가득했다. 익숙하지만 도저히 적응이 안되는 냄새, 다양한 것이 썩어가는 냄새다.


"폐하. 식사는 하시고 계세요?"


이 무렵의 두번째 폐하는 내게 안겨 콘스탄챠를 찾았는데, 이번에는 그러기도 어려웠다. 만면에 어그러진 미소를 띄우신 폐하가 콘스탄챠의 안경을 찾을 틈도 안주신 것이다. 아마도 폐하가 챙기셨을 그 안경을.


"밥은 챙겨 먹지." 내 머리칼을 쓰다듬고 넘기면서 폐하는 말했다. "씻었어? 좋은 냄새 나네."


"죄송해요. 폐하."


"응? 뭐가?"


"실패해서요. 이번에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나름 준비도 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온전히 폐하께 집중할 수 없어서였을까요. 폐하한테 꼬리치는 년들을 쓸데없이 견제하느라 시간을 낭비한 게 화근이었을까요."


"으음. 무슨 소린지."


"아니면 예지를 더 이상 할 수 없어서 인 걸까요."


"그런 게 중요하니? 다 끝났는데. 그보다 아르망. 옷 벗어볼래?"


"네?"


머리카락 냄새를 맡던 폐하가 내 가슴께에 손을 댔다. 


"하자."


"하자…니요?"


"뭘 모른 척해? 섹스 하자고. 빨리 벗어."


"잠깐, 폐하. 잠시만요."


"아, 그런 거야? 벗겨주길 바라는 거구나? 말을 하지. 있어봐."


폐하는 그렇게 말했지만 벗긴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내 옷은 뜯기듯 폐하의 손에 의해 찢겨나가기 시작했다.


"살이 뽀얗네. 이런 걸 백옥같다고 하는구나. 부드러워. 냄새도 좋아."


목에 닿는 숨결이 간지러워서 머리고 몸이고 오싹거렸다. 


이런 건 이상하다. 폐하를 떨어트려놔야 한다.


"가만 있어 봐."


"앗. 폐하… 읏…"


비부에, 폐하의 손이 닿았다. 난생 처음 그곳에 닿은 다른 이의 손가락은 이내 속옷 안쪽으로 파고 들었다.


폐하의 손가락에는 자비도 애정도 없었다. 어서 빨리 자신의 물건을 받아들일 준비만 되길 바라듯, 겉이든 안이든 거칠기 짝이 없게 훑어갔다. 자위라면 기분이 좋기라도 하지, 이런 건 아프기만 했다.


"아! 폐하! 아파요! 잠깐, 그만!"


"어어, 조금만 참아."


"폐, 폐하! 앗!"


아랫도리에서 나는 소리가 살짝 변했다. 속옷이 조금 축축해졌고 가랑이 전반에 옅은 습기가 느껴졌다.


털썩하고 나는 피에 젖은 폐하의 침대에 밀려 쓰러졌다. 폐하의 얼굴은 내 가랑이에 파묻혀 있다. 혀라고 생각되는 것이 속옷 너머로 비부를 핥고 있었다. 손가락보다는, 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손가락보다는 아프지 않네. 아니, 슬슬 기분 좋다는 감각이 뇌내에 퍼져간다. 자위할 때와 엇비슷한 오싹함이 하복부까지 치고 올라온다.


폐하를 떼어내야한다. 그렇게 생각은 하는데, 하체가 말을 안 듣는다.


"평소에 관리를 잘했나 보네. 아랫도리 냄새도 좋아. 어려서 보들보들한 게 또 기가 막히게 맛있네."


폐하. 당신, 그런 말도 하실 줄 알았나요.


"폐…하… 그만…"


"응. 이제 이건 그만할 거야. 슬슬 다른 걸 시작해야지."


속옷이 벗겨졌다. 


뭔가가 닿는다.


"어…? 어?"


"넣는다?"


잠깐. 안 돼.


이렇게? 이런 식으로?


"앗! 아파! 폐하! 그, 그만!"


"애무는 충분히 한 것 같은데 잘 안들어가네. 역시 어린 몸이라 이건가. 아르망. 처음이야?"


나는 대답 대신 발을 버둥거렸다.


"처음이구나. 그럼 좀 아플 거거든? 그래도 참아? 일단 들어가면 한 번에 쑥 넣는다?"


"하지…마세요… 싫어…"


"읏…차. 아 씨발 좀 들어가라."


"싫어…"


"어, 들어간다. 아르망. 이제 많이 아프다? 참아야 돼?"


싫어.


"하나, 둘…!"


"싫어!"


하체가 가벼워지고, 무언가가 날아가 부딪히면 날 법한 굉음이 울렸다. 몸을 일으켜, 날아간 것은 폐하란 것과 폐하를 그렇게 만든 건 손에 장착한 네오딤인 걸 알았다. 


나는 폐하께 무기를 사용했다.


"아… 폐하. 그게, 그러려던 게…"


"씨발년. 존나게 째네."


"네…?"


입가를 슥 닦고 폐하는 눈을 부라리며 나를 쏘아봤다.


"너도 씨발년아, 속으론 나랑 하길 바랐잖아. 아니냐? 다른 년들이랑 똑같이, 너도 나 언제 따먹을까 호시탐탐 노리지 않았냐? 내가 몰랐을 것 같아? 눈깔 흘깃 거리면서 나 뜯어보듯 요목조목 살핀 거 내가 진짜 눈치 못챘을 것 같냐? 개걸레 씹걸레같은 년들아. 니들이 그렇게 나 따먹고 싶어하길래 이번에 놀아주겠다는데, 왜, 정작 그럴 상황이 오니까 싫냐? 메이든 레오나든 씨발년들이 박아달라 온몸으로 말 할 땐 언제고. 앙!? 아니냐고 이 개좆같은 년들아!"


"…아. 아하."


맞는 말만 하시네.


바라왔던 거잖아.


욕 처먹을 바엔 그냥 해버리지 그랬어.


한 번 따먹힌 척하다가 따먹어 버리지 그랬어.


"닥쳐!"


이년들이! 사라진 것처럼 여태 조용하더니 이제와서…!


"폐하! 아니에요. 이건 폐하께 한 말이 아니라…!"


폐하는 몸에 박힌 유리조각을 털어내며 일어서고 말했다.


"나가. 넌 안죽일 거야. 그 대신, 내 눈에 두 번 다시 띄지 마. 띄면 죽인다."


"폐하."


"나가. 나가고, 가서 레오나 그년 살아있으면 데려오라고 해. 그리고 어린 년 중에 하나 골라서 추가로 데려와. 아, 아니다. 그냥 네이쳐 그년들 싹 다 데려와. 그게 좋겠네."








* * *







만약에, 아르망 추기경을 새로이 복원했다면, 파멸을 막을 수 있었을까. 


"폐하. 저기까지만 가면 돼요."


내가 더 이상 하지 못하는 예지를 대신 하게 해서, 파멸을 피할 수 있었을까.


"아르망!"


"칸!"


"어서 가라! 빨리!"


아니. 불가능했다. 예지가 가능한 아르망을 새로 만들었어도, 파멸은 피할 수 없었다.


"참모님!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비켜 이 썅년들아!"


예지는 재료, 그것도 상당한 수의 질좋은 재료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내가 맞닥드린 파멸을 피하기 위한 재료는 아주 적고, 질도 낮다. 레이더와 스나이퍼 칙, 9월, 콘스탄챠는 저격에 의해 동산에서 죽는다, 일주일 뒤에 철충이 바다 속에서 습격한다…… 이런 걸로 무슨 예지가 가능하다는 건가. 한 때는 예지가 가능했던 내가 가늠하건대, 새로 아르망을 복원했다더라도 예지는 불가능하다. 나와 다를게 없다. 아무 쓸모없다. 예지가 불가능하지만 전투력만은 뛰어난 내가 그나마 더 뛰어난 구석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그런 아르망을 용납할 리 없다. 나는 불가능한 게 가능한 아르망. 오르카에서 복원되는 아르망. 300년이란 시간만 제외한다면 완전히 나다. 나와 똑같은 년이다. 그런 걸 복원해서 눈앞에 둔다니, 상상도 하기 싫다.


예지가 불가능한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건 현장에서의 대처 뿐이었다. 그 부분에서 나름 최선을 다했다 생각했는데, 실패했다.


결국 내가 이 파멸을 막기 위해 뭘 할 수 있는 걸까?


오르카가 터져나가는 마당에 소용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마땅히 떠오르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하고 나는 바란다.

이번에는 정말로 죽을 수 있기를.

다시 150년 전으로 떨어지지 않기를.


폐하를 품고 달린다. 감압실까지 간다. 폐하는 아무것도 못보고 계시지만, 나는 폐하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무것도 보여드릴 생각이 없다. 


무능해서 죄송하다 중얼거리는 입도,

사랑한다 속삭이는 눈도,

내가 우는 얼굴도.


감압실에 들어서서 오르카로부터 차단시키고, 폐하 옆에 앉는다. 살고 싶어서 발광하는 년들이 감압실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게 씨발년들, 내 말을 들었어야지. 그래도 나는 저년들이 부럽다. 내가 발작만 하면 나타나는 물귀신이 돼서, 괴롭히는 입장에 설 수 있으니까. 나는 앞으로도 발작의 증세가 플래시백이기만을 간절히 빌며 눈을 감는다.


감압실 한 귀퉁이가 뜯기듯 떨어져나간다. 호흡이 어려워지고, 나는 두번째에선 하지 않았던 절규를 내지른다.


그리고 다시, 빌었지만 허락할 수 없다는 듯, 한 번 느껴봤던 감각이 느껴진다. 나 자신이 회화나 동화, 비디오 플레이어 속에 있는 듯한 착각에 휩싸인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착각이 아니라고, 나는 기포가 된 절규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비디오 플레이어의 화면 같은 바다 속은 또 다시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려, 바다와는 아무 상관없는 풍경을 비추고 있다. 나는 그곳이 어디인지 잘 알고 있다. 이제 클릭 한 번으로 재생 중인 영화의 타임라인을 옮겨버리면, 나는 다시 150년 전의 공원으로 떨어질 것이다. 


다시 시작하게 된다.


미안. 폐하.


아무래도 우리, 다시 떨어지려나 봐요.


그러면 폐하, 이번에는요.


절 두고 콘스탄챠에게 떠나지 말아주세요.


딱 한 번만, 제 곁에 있어주세요.


폐하.


지금은 주무세요.


안녕.


자고 일어나면, 우리 그때 다시 봐요.







* * *







20xx년. ?월 ??일.


공기를 찢는 버저 소리에 눈을 떴다.


'Happy Halloween! 본 할로윈 테마관을 찾아주신 귀빈 여러분, 환영합니다. 본일 진행되는 행사는 할로윈 한정 이벤트로, 사전에 초청 받으신 귀빈 여러분 외에는 즐기실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자리가 되겠습니다. 준비해드린 카탈로그를 통해 주의사항은 모두 숙지하셨으리라 짐작 되는 바, 조속히 할로윈 이벤트의 룰에 대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 * *



반갑습니다. 글싸개입니다.


재밌게 읽으셨으면 기쁘겠습니다.


오탈자가 있는 경우엔 댓글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