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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없는 지금이 너무 슬프게 느껴져.
그리고, 그때의 네가 너무나 그리워.

너를 처음 만난 때는 중학교 2학년 때.

개학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때.

그때 널 처음 보았어.

전학 온 것은 아니지만 내가 너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때라 있는지도 몰랐지.
그리고 내 눈에 띄게 될 때가 그때였어.
출석번호대로 자리에 앉는 옛날 관습이 깔려있던 그때. 너는 내 옆자리에 앉았어. 160 정도였던 나보다 많이 작았던 키. 몸은 말랐지만, 어깨까지 내려오던 검은 머리. 얼굴에 젖살이 있어 동글동글한 것이 귀엽게 보였어. 물론, 나중에 물어보았을 땐 넌 귀엽게 보이기 싫다고 눈 화장을 짙게 했다고 했지. 근데, 목소리는 아주 걸걸해서 진짜 무섭더라.
주변에 흔히들 노는 애들과 같이 있는 모습을 보고 '쟤는 친하게 지내면 안되겠다.'하고 선을 그어버렸지.
그중에서도 제일 싫었던 것은 선생님께 예의 없이 행동하는 너를 보았기 때문이야.
그때의 나나 지금의 나나 예의 없는 사람은 정말 싫었거든.
그리고, 아주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지나 네가 나한테 말을 처음 건 날.
"나 책 안 가져왔는데 같이 보자."
이 말을 들을 당시에 난 너무 소심하고 겁이 많았던 때라, 중학생 때부터 짙게 화장을 하고 담배 피운다는 소문도 들린 넌 나에겐 무서운 존재였어. 마침 네 주변에도 노는 아이들이 많았고.
그래서, 같이 보기 싫었지만 그렇지 않으면 해코지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무 말 없이 보여주기로 하였지.
근데, 정말 이상했던 것은 너와 네 주변 친구들이 담배 피우는 것을 눈으로 보았는데도, 네 친구와 다르게 너에게선 그 냄새가 아닌 향기가 나더라. 싸구려 화장품 냄새였을 터라 기분 나쁘다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나에겐 처음 맡는 향기라 기분 좋았어. '아. 여자아이는 이런 향기가 나는구나.' 하고 말이야.
"야. 이거 왜 이런 거야."
수업 시간에 나랑 같이 책을 보던 네가 이해가 안 된다고 설명을 해달라고하던 때가 있었지. 나도 이제 배우는 입장이라 자세히는 모르지만, 선생님께서 교과서의 내용을 가르쳐주시는 것을 그대로 얘기해 주었어.
"그래. 그렇구나. 알았다."
어차피 방금 들은 말 그대로 해주는 것뿐인데 너는 그제야 이해가 된다고 하더라. 지금 와서는 이렇게 생각해. 이때 당시의 너도 아주 조금이지만... 나에게 관심이 있던 게 아닌가 하고 착각을 하던 때였어. 물론, 나중에 물어보니 그때의 넌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고 하더라.
어느 날은 학교에서 내준 숙제를 짝꿍이랑 2인 1조로 해야 했던 때가 있었지.
"어디선가 해야 하는데 어디서 해야 하지."
"너희 집."
"야. 왜 우리 집이야."
"우리 집은 안 돼."
"그래. 그럼 우리 집 가야겠네."
누가 듣기에 멍청한 놈 같다고 하겠지만, 누군가가 이러자고 하면 되냐 안 되냐 딱 둘만 생각하고 살던 때의 나라서. 네가 우리 집에서 숙제를 하자고 해서 집으로 데리고 갔었지.
"다녀왔습니다."
"어머나, 웬 여자애?"
"짝꿍. 학교 숙제하려고."
"안녕하세요."
내가 집으로 성별이 다른 친구를 데려온 것은 처음이었기에 엄마도 너를 반겼지. 너도 공손하게 인사를 했고.
난 그때 너무나 놀랐어. 학교 선생님들껜 '담탱이' '그 새끼'라고 나쁜 말만 골라 하던 네가 존댓말을 했기 때문이야.
'아. 얘도 기본적인 예의는 지키는구나.'
하고 너를 아주 조금은 다르게 보기도 했지. 하지만, 다른 사람의 집에 갔는데 부모님께 반말하는 그런 애는 없을 텐데 말이야.
그런 조그마한 것 하나마저 너를 좋게 생각하려고 노력했으니까.
물론, 내가 너와 대화를 하는 건 그저 수업 시간 때 빼곤 없었어.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엔 넌 네 친구와 있었으니까.
그래도 좋았어. 아주 잠깐이라도 너랑 같이 있을 수 있었으니까. 다른 아이들이 쉬는 시간, 점심시간, 하교 시간을 기다릴 때, 아마 나 혼자 정반대로 수업 시간을 기다렸을 테니까.
학교에서 내 옆자리에 앉았던 너를 보며 가슴이 콩닥거리던 난 학교 가는 것을 매우 좋아했어.
소심하고 시끄러운 것이 싫던 난 학교가 싫었거든. 공부? 흥미 없어서 하고 싶지도 않았지. 운동? 그저 먹는 것만 좋아하는 통통돼지가 잘 할리가 있겠어? 그 어떤 것이 되었든 잘하든 못하던 어느 것 하나 자신감 있게 하질 못했으니까.
그래서 네가 내 옆자리에 앉았을 때 곁눈질로 너를 보며 난 생각했어.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 하고 말이지.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들킬 정도로 봐서 기분 나빠했을 거 같아.
만약 그랬다면 내가 미안해. 매우 보고 싶어서 어쩔 수가 없었어.

당연히. 시간이 멈춰버릴 일은 없었으니 학년은 올라갔고, 아쉽게도 같은 반이 되진 않았어.
그 이후론, 너도, 나도 각자의 반을 왔다 갔다 할 뿐. 아무런 연관 없이 학교에 다녔으니까.
너는 어떻게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네가 나를 제외한 다른 아이들과 노는 모습을 볼 때.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찌릿찌릿하더라. 남들 앞에선 밝히지 않았지만 난, 욕심쟁이였기에 네가 나만 봐주길 바랐는지도 모르지.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었을 땐, 둘 다 다른 학교에 다니기도 하였고 그땐 네 생각이 나지 않을 때라 시간만 축내면서 하루하루 살아갔어. 흥미 없이, 그저 미래를 보지 않고 하루하루의 쾌락에 빠져 원래 하지도 않았지만, 공부는 훨씬 뒷전이 되어버렸지. 당연히 살은 더 쪘어.
당연히 고등학교를 졸업할 땐 대학교도 가기 힘든 성적이었고 집안 형편도 많이 안 좋은 편이라 졸업하면 "아무 곳이나 들어가서 일이나 하자 라는 대책 없고 막연한 생각만 했었지." 그래. 미래는 뒷전이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산다는 생각 뿐이었어.
학교를 졸업하고 들어간 곳은 TM을 하는 곳이었지. 그나마 남아있는 건 소심하지만 말을 잘한다는 어른들의 칭찬 그거 하나만 가지고 그곳에서 일하기로 마음먹었어.
어투도, 목소리 톤도 바꾸고 매뉴얼에 정해진 대로 딱딱한 말을 하면 안 되고 유연하게 상대방이 상품을 사게끔 유도를 하는 대화법은 하나도 몰랐던지라 혼나기 일쑤였어. 그래. 너무너무 힘들었지. 실적도 낮았고 혼나지 않는 날이 없었어.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더 나아지면 되었던 건데 혼나는 것 자체가 너무나 싫더라. 주민등록증이 나올 정도의 나이가 되었지만 머릿속은 어린아이 였으니까.
이 일을 하면서 감사하게 생각하는 건 딱 하나야. 스트레스 때문에 식욕이 조금 줄어들어 살이 빠진 상태였으니까.
이게 왜 감사하냐고? 너를 만나게 될 때 뚱뚱한 몸이 아니라 통통한 몸으로 만났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배달이 안 되는 치킨을 형이 먹고 싶다고 생떼 부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가게 된 날이었어. 일이 끝난 뒤였고, 안 좋은 기분을 풀을 겸 밖으로 나간 것이었으니까. 여름치고 바람이 굉장히 세게 불던 탓에 반바지를 입고 오들오들 떨면서 그곳으로 걸어갔지.
치킨집에서 까만 운동복 세트에 그와 대칭되는 하얀색 MLB 모자를 쓴 여성 한 분을 보았어.
'나 말고 사람이 한 명 더 기다리고 있구나. 좀 늦게 받겠네. 에이. 짜증 나. 추운데.'
하며 생각하며 자리에 앉아 치킨을 기다리려고 했지.
그때, 정말 이상하게도. 여자 관심 하나도 없었던 때인데 너무나 얼굴이 보고 싶더라.
그래서 그 여성분 앞을 지나 앞 테이블에 앉아 몸을 돌려서 보았지.
진짜로...
지금도 그날을 잊지 못해. 한동안 만나지 못해 기억 속에서 잊어버렸던 네가 있는 거야.
예전보다 더 길어진 머리, 볼에 있던 젖살이 빠져 매끄러워진 볼. 학교 다닐 때의 네가 했던 무섭게 꾸민 아이섀도가 아니라서 인상도 많이 달라 보였지.
아주 약간의 가능성으로 닮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너인지 아닌지가 너무나 궁금해서 말을 걸었어.
그리고 너에게 걸어가 입을 떼기 전까지도 맞을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심장이 두근두근했지.
"저, 혹시 죄송합니다만, 미래중학교 다녔던 얀순이니?"
내 물음에 고개를 돌려 눈이 마주친 네가 입을 열기까지. 3초는 걸렸을까.
근데, 겨우 그 3초를 기다리는 내 마음은 미친 듯이 떨리더라. 맞으면 좋겠다. 제발... 너였으면 좋겠다고.
"어? 얀붕이?"
정말 다행으로 너였어. 그때의 모습은 아니지만, 내가 보고 싶어 했던 너였으니까.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중학교 때의 기억들이 생생히 살아나더라.
'와, 하나하나 다 생각나네.'
너무 반가운 마음에 입을 조잘거리며 네게 말했지.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 그 동안 무엇을 하였는지, 지금은 무엇을 하는지 등등 내가 모르는 너에 대해 조그마한 것 하나하나 다 알고 싶었어. 왜냐면, 내가 그때 당시 너무나 힘들 때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을 만나면 붙잡고 수다를 떨고 싶을 정도로 외로웠어. 어차피 친구도 많지 않았거든.
너의 이해심이 깊었는지, 아니면 너도 나를 만나서 반가웠는지는 몰라도, 나와 대화를 해주며 너도 내가 물어본 것처럼 똑같이 물어보면서 내 근황을 들으며 경청해주었지.
그러다가 치킨이 나와서 나와 넌 각자의 집으로 가야 할 때가 되었지. 난 이 만남이 더 오래 갔으면 싶어서 핸드폰 번호를 물었어.
네 핸드폰 번호를 저장하고 다음에 또 만나서 얘기하자고 말하고 헤어졌지.
멋지게 보이고 싶었던 걸까. 헤어졌던 자리에서 묵묵히 걸어가다가 네가 없어지자 치킨이 들어있던 봉지를 돌리면서 집으로 뛰어갔지. 너무나 기뻤기 때문에 그랬어.
집으로 들어와 식탁에 치킨 봉지를 풀어 형이랑 같이 먹을 준비를 했어.
그런데, 형 심부름으로 나가기 전까지 그렇게나 먹고 싶었던 것이 너를 만난 다음엔 먹고 싶지 않더라.
"안 먹을래."
"아이, 미친 새끼야. 너도 먹는다고 해서 2마리 사 오라고 했는데 안 먹으면 어떻게 하라는 거야."
"아 몰라 안 먹어."
고등학교 다닐 때와 다르게 뚱뚱한 몸매는 아니었지만 언제 어디서 너를 볼지 몰라 조금이라도 멋져 보이고 싶었던 것 때문일까. 살을 빼고 싶다는 생각이 아주 강하게 들더라.
그 뒤론 정말 좋아하는 기름진 음식도, 매우 매우 좋아하는 탄산음료도 줄여가면서 살을 조금씩 뺏어. 운동도 하고 싶었지만, 근성이 없어서 아주 약간만 하다가 손 놔버리고 음식을 적게 먹는 거로 빼기로 했지.
시간이 지날수록 배가 고파 짜증도 났고, 물을 먹으려고 냉장고 문을 열 때 보이는 음식들을 보며 미치도록 먹고 싶었지만 네 얼굴을 떠올리니 날 미치게 만들던 식욕도 이겨낼 수 있더라.
"내가 걔를 좋아하는구나. 몰랐네."
내가 너를 많이 좋아한다는 걸 자각했던 때였어.
 사실은... 이때가 아니라 학교 다닐 무렵. 아주 오래전부터 좋아했던 것인데 말이야.

 문자도 조금씩 주고받고, 전화도 하면서, 너와의 시간을 늘려가고 있었어.
그러다가 밥 약속도 잡고, 술도 마시기도 하고, 아주아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생각했지.
그때와 다른 얼굴이지만 매우 이뻤고, 털털한 네 모습이 너무나 좋았어.
키가 작아 싫다고 뾰로통하게 삐쭉 입을 내민 것도 귀여웠지. 이전처럼 마른 몸이어서 옷맵시가 이쁜 것도 좋았어.
넌 너 자신이 볼륨감이 없기 때문에 밋밋한 몸매가 싫다고 했지만. 난 네가 어떤 모습이든 너라서 좋아했거든.
근데, 볼 때마다 기분은 좋은데 무언가 너무나 답답한 거야. 아마 그것 때문인 것 같아. 이 사람이 매우 매우 좋은데 내 것이 아니라는 거니까.
그렇다고 내 맘대로 휘두르고 싶다는 게 아니라,
그냥. 그냥, 아주 조금 더.
가까이 있고 싶었어.
해답을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형한테 물어봤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말이야.
"이 새끼 치킨 안 먹더니만 다 이유가 있었네. 고백해 병신아. 안 하고 아픈 병신 말고 하고 까인 병신이 더 좋다."
내가 실패하길 바라서 하는 말은 아니겠지만, 말이 조금 심했던 형의 대답대로 하기로 마음먹고 술 냄새조차 하나도 맡지 않은 맨정신으로 너에게 고백하기 위해 마음먹고 약속을 잡았어.
중요하게 할 말 있는데 시간 내줄 수 있냐고.

너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을지 알고 왔던 걸까.
평상시처럼 운동복 차림이 아닌 깔끔하게 꾸민, 평상시에 자주 쓰던 모자는 쓰지도 않고 화장도 전처럼 살짝 한 게 아니라 빛날 정도로 꾸미고 왔었지.
그런 너를 보고 엄청 이뻐서 얼어붙기도 했지만, 용기를 내고 한 걸음 나아갔어.
좋아한다고.
너를 좋아한다고.
자각하게 된 것은 나이 먹고 깨닫게 되었지만 아마 학교 다닐 때부터 좋아했던 것 같다고,
너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살도 많이 뺐다고 어필도 했지.
말을 다 하고 나니 시원하기도 했지만 내 심장은 치킨집에서 너를 보았을 때보다 더 강하게 뛰었어. 주변에 차가 지나가는데도 엔진소리, 바퀴 소리 하나도 나지 않고 내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밖에 안 들리더라.
그리고 너의 그 조그마한 입이 열렸어.
"그래."
너의 외마디에 난 손으로 입을 가렸지.
세상을 다 가진 것만큼 기뻤고, 이 기분으로 점프하면 저 하늘을 뚫어 깜깜한 우주로 날아갈 만큼 신났으니까.
"와 아악!!!!!"
"시끄러워. 미쳤어?"
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소리 질렀는지 나도 몰라. 그러고 싶었어. 부끄러워하는 너를 보며 나도 모르게 와락 껴안아 버렸고 몸과 몸이 닿으니 네 심장도 거세게 뛰고 있다는 걸 알고 나니 매우 기분 좋았어.
아 다행이다. 정말로 다행이다.
차이지 않아서 다행이야.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이어서 다행이야.
"고마워. 정말 정말 고마워."
"아으 야! 닭살 돋아 떨어져."
싫다면서 나를 미는 너의 힘은 말과는 다르게 아주 살며시 힘만 주었지.
"아으. 정말 좋아. 너무 좋아. 엄청 좋아. 끅. 고마워. 사랑해."
긴장이 풀려서였을까. 훌쩍거리며 눈물 흘리고 나보다 작은 너를 그대로 꼭 안았어.

머릿속으로 상상만 하던 하고 싶었던 것들.
그냥 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너랑 꼭 같이하고 싶었던 것들.
그것들을 다른 누구도 아닌 너와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매우 기뻤으니까.

밥도 같이 먹어보고, 둘이서 영화도 보고, 손을 잡고 공원에 가서 수다를 떨어보기도 했지.
내가 차가 없어서 지하철을 타고 왔다 갔다 했던 것 때문에 다리가 아프다는 너에게 차가 없어서 미안하다고 시무룩해지면.
"그 말이 듣고 싶은 게 아니라 집에 가서 주물러 달라고."
이런 식으로 내 속을 어루만져 주는 네가 엄청 좋았어.
또 어느 때는 너와 데이트를 하다가 네가 피는 담배 냄새를 맡고 콜록거리는 모습을 보더니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열더라.
"담배 냄새. 싫어?"
"음... 좋아하진 않아. 그건 왜?"
"그냥 물어봤어."
기관지가 안 좋아서 기침을 심하게 한 내가 걱정되었던 걸까.
그날 이후로 넌 내게 담배 피우는 모습을 하나도 안 보여주더라. 약간 신경질 낼 때도 있었지만, 절대로 나에게 화만큼은 내지 않았어.
나를 위해 그러는 너를 보면서 너무나 어른스럽고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서 네가 나를 보면서 조금 실망스러워하거나 기분 나빠했던 것이 무엇이 있었는지 곰곰이 생각하고 조금씩 고쳐나가기로 했어.
네가 나를 위해서 해주는데 나라고 하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그러다가 너와 더 자주, 오래 있고 싶어서 집을 나와 자취를 하게 되었지.
그러다 보니, 소비가 늘어 전에 하던 아르바이트로는 생활비가 해결이 안 되더라.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공장으로 취직했지. 대학교를 졸업하거나 어떤 자격증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나였기에 이것 말고는 열심히 생각해보아도 이길 밖에 없더라.
이전보다 몸이 더 피곤하긴 했지만 내 주제에 통장에 찍히는 금액의 숫자가 달라지니 후일을 생각하면서 참을 수 있었어.
당연히 너와 단둘이 있게 될 만한 장소가 생기고 오붓하게 붙어 있을 때가 많아지기도 했어.
물론, 얘기하긴 많이 부끄러운 것이지만 너와 단둘이 그렇고 그렇게 되던 때도 있었지.
처음이라 긴장되어서 제대로 못 할 때. 너무나 미안해서 울어버리고 말았어.
너처럼 이렇게 이쁜 사람을 두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나 자신에게 너무나 화가 났어.
그런데 넌, 그런 조그마한 몸으로 너보다 많이 큰 나를 안아주며 넌 말했지.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래. 다음엔 안 그러면 되잖아? 천천히 나아가자."
넌 언제나 내 마음을 신경 써주었지.
넌 나에게 있어서 단순히 좋아하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서
내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등을 기대고 힘을 낼 수 있게 기를 복돋아 주는
네 실제 체형과 다른, 나에게 있어선 기둥이자 내가 갈 길을 비춰주는 등대 같은 사람이었어.

그래. 그것도 있었다.
어느 날, 무섭게 생긴 아저씨랑 그 아저씨를 닮은 무섭게 생긴 형님 한 명이 내 앞에 나타났지.
"네가 얀순이 남자친구냐."
어깨 딱 벌어지는 풍채에 무언가에 베인 듯한 상처가 얼굴과 손에도 보이는 두 사람 앞에 주눅이 들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어.
"예? 네, 맞는데요?"
잘 못 말하면 한 대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렇게 말했지. 근데, 그럴 수밖에 없던 게 한 대라도 맞으면 진짜 죽을지도 몰라서 그랬거든.
그것도 있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것보단 "넌 너무 설쳤어."하면서 품 안에서 칼이나 총이 나올까 봐 무서웠거든.
"그러냐. 저 앞에 가게에 가서 얘기 좀 하자."
두 분이 나를 사이에 두고 어깨동무하시면서 가시는데 너무나 무서웠지. 나중에 이것도 형님께 여쭤보니 그게 아저씨의 친근하게 지내고 싶다는 표시라네.
커피숍을 가리키시면서 말씀하시니 난 그대로 따르기로 했지.
의자에 앉은 두 분의 모습을 보니 의자가 너무나 작아 보이더라.
음료를 한 잔씩 시키고 입을 한 번도 열지 않으시다가 홀짝 한 번 마시고 나서 입을 여시더라.
"둘이 어떻게 하다가 만났냐."
누구시냐고 여쭤보진 않았지만, 내가 학교 다닐 때 처음 얀순이를 보았고 그때부터 지금까지의 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해드렸어. 둘이 같이 잤던 거 빼고.
고개를 살짝 끄덕이시면서 "흠." 하시면서 경청하시더라.
"실은 동생이 너를 만나면서 학교 다닐 때부터 피우던 담배도 끊고 아버지랑 우리 형제들 얘기도 잘 듣길래 어떤 놈이랑 사귀길래 이리 변했나 싶어서 보고 싶어서 그랬다."
라고 무섭게 생긴 형님분이 말씀하셨지.
전에 내가 얘기하였듯이 예의를 많이 중시하거든.
종종, 얀순이의 버릇없는 행동이 눈에 거슬려 얀순이에게 이것만큼은 고쳐줬으면 좋겠다고. 너의 행동, 성격 다 좋은데 가까운 어른분들께 예의 바르게 행동했으면 좋겠다고. 아버지가 자기를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게 하셔서 짜증 난다고 그럴 때마다 내가 그랬거든.
"네가 매우 이뻐서. 밖에 내놓기 너무 아까워서 조심히 하시는 거야. 아버지시니까 그런 말씀 하셔도 화를 내기보단 차분히 설명해 드리고 얘기하도록 해. 그러다가 나처럼 돌아가시게 되면 잘해드리고 싶어도 잘해드리지 못할 수도 있어. 지금이라도 좋으니까 그렇게 하자. 응?"
라고 말했었지.
그 무섭게 생긴 아저씨는 두꺼비 같은 손으로 내 손을 꼭 잡고 말씀하셨어.
"내가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다 보니 그것 때문에 아내를 잃고 나서 그 아이를 많이, 아주 자유롭지 못하게 키웠다. 그리고 딱 하나뿐인 딸이라 오냐오냐 키워서 버릇없어도 그냥 내버려 뒀단다. 나 때문에 아이들 엄마를 잃게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라서. 너무나 지키고 싶었거든. 그런데, 남자친구를 사귀더니 애가 많이 변해서 놀랐다."
"고맙다."
나보다 훨씬 연상인 두 분이 고개를 숙이시니 어쩔 도리를 모르고 손을 저으며 입을 열었지.
"아니에요. 저야말로, 얀순이를 태어나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만날 수 있게, 해주셨잖아요? 저도 얀순이 때문에 이전과 다른, 정말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진짜, 정말로 감사해요. 태어나게 해주셔서."
우리 3명은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연신 고개를 숙였지. 외형과 다르게 따뜻한 분들이라 놀랍기도 했고.
띠링!
핸드폰이 울려서 확인해 보니 너의 문자였어.
'너 어디야. 뭐 하길래 안 와.'
원래 너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는데 두 분이 나를 부르셔서 대화하느라 너와 만나기로 한 약속장소에 시간에 맞춰 가지 못했으니까.
네가 찾는 것도 당연한 것이었지.
그리고, 너의 문자를 보고 어떻게 해야 할지 두 분께 보여드리면서 여쭤보았지.
"만나 뵙고 간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 절대로. 그런 말 하지 마라. 우리 집에서 뒤진다. 쪽팔리게 했다고."
연신 고개를 흔드시며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하시는 두 분께서 오늘 만난 건 비밀로 해달라고하시면서 자리를 뜰 때 난 생각했어.
물론, 대신 변명하느라 엄청나게 혼났지만 말이야.
그래도 그분들을 생각하면, 네가 이렇게 사랑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나한테도 이렇게 큰 사랑을 주는 것이구나...
하고 말이야.
이런 사랑이 정말 오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렇게 기도하였고.

하지만,
네가 달라졌다고 느껴졌던 때가 있었어. 그래. 아마 이때부터 였다고 생각해.
어느 날, 집에서 기르던 강아지 얀돌이가 이전과 다르게 힘이 너무나 없다고 해서 너의 집에 갔었지.
나이가 많았던 아이이지만 굉장히 건강했기 때문에 설마, 헤어져야 할 때가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 한 체 키웠으니까. 적어도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했었어.
너도 나도.
하지만, 보통 아픈 것과 다르게 헉헉거리는 신음도 심했고, 무엇보다 강아지가 너무나 안 움직였어. 그래서 우린 강아지를 데리고 동물병원으로 갔지.
검사를 받으러 가니 구강암이라고 했었어. 생각지도 못했거든.
이렇게 튼튼한 아이가 암이라고? 어째서?
그리곤 넌 울며불며 수의사 선생님께 여쭤보았지. 수술하면 확실하게 낫는 거냐고.
선생님께서도 말씀하셨지.
그렇다고 했어. 아주 약간의 재발 확률이 있지만, 수술하면 나을거라고.
그 말씀 믿고 강아지를 동물병원에 맡기고 너의 집으로 돌아갔어.
"오늘 자고 가면 안 돼?"
평소에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던 네가 그러는 것을 보고 야간 공장도 빠지고 네 곁에 머물렀어. 나도 그 아이가 많이 걱정되었고 무엇보다 눈물 보인 적 없던 네가 그러는 것을 보고 이번엔 내가 너를 감싸줄 차례라고. 그렇게 생각했었어.
그래서 같이 누워 있던 이불에 내 팔로 감싸 나보다 작은 나를 내 안으로 품었어. 훌쩍 거리며 내 가슴팍에서 울던 너를 보며 너의 강아지가 낫기를. 그래야 너도 활기찬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거라고. 네 강아지가 제발 낫기를 간절히 빌었어.

수술이 성공적으로 되었다고 연락받고 네 강아지를 집으로 데려왔을 땐 예전의 너로 돌아간 것 같아 난 매우 기뻤어.
수술이 성공이어서 다행이라고, 널 잃어버릴까 봐 엄청나게 울었다고
넌 네 강아지에게 그렇게 말했지.
이대로 다시 원래 너로 돌아가 행복한 날만 기다릴 줄 알았어.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
얼마 지나지 않아 똑같이 시름시름 앓았어. 설마설마하고 동물병원에 데려가니
암이 재발했다고 하더라. 더 손 쓸 수 없는 상황이라고.
시름시름 앓는 네 강아지를 보며 힘이 없던 너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곁에 있어 주는 것밖에 없었어.
너와 나, 네 가족분과 여러 가지 상의를 했을 때 나온 답은 하나였어.


안락사.


떠나보내기 싫었던 아이지만 계속 이대로 있다간 아픔만 계속 느낄 테니 차라리 편하게 해주자고 했지.
너도 체념한 듯 알았다고 했지만, 집으로 돌아와서는 펑펑 울었어.
계속 옆에 있어 줄것만 같았던 아이가 네 곁에서 떠난다고 하니까.
너를 안아주며 등을 토닥토닥 두들겼지.

얀돌이의 장례를 치르고 반려동물 납골당에 안치해 놓았어.
너무 울어 핼쑥해진 너의 모습을 보니 너무나 마음이 아프더라. 무엇인가를 해줘서 네 슬픔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으니까. 

얀돌이가 세상을 떠난 기점으로 너는 많이 약해졌어.
각자의 집에서 살며 선은 확실히 지키자고 했던 네가,
조금이라도 보지 않으면 불안해 미칠 것 같다며 내 집에서 동거하겠다고 했지.
난 너희 아버지랑 형님들께서 허락하시면 그렇게 하겠다고 했지.
네 입으로는 그렇게 해도 된다고 허락하셔서 같이 살 수 있다고 했지만, 진짜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는 잘 모르겠다.
너에게 의지하며 살아가던 나에게도
네가 나를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울 때가 왔다고.
이제 내가 너의 남자친구, 연인으로서 제대로 된 할 일을 할 때가 온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전보다 더 널 아끼고 보살폈어. 

그러던 어느 날이었지.
"일 가지 말고 내 곁에 있어 줘."
네 강아지의 유골을 납골당에 안장 이후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에, 네 곁에서 하루를 꼬박 새운 그다음 날.
넌 계속 자기 곁에 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어.
하지만, 네가 너무 힘들어해서 빠졌던 공장업무를 이번에도 빠지게 되면 내 생활비, 너와 같이 살 때를 대비한 적금 등이 굉장히 위험했기에 이번만큼은 안 된다고 하였어. 이번엔 가야 한다고. 갔다가 일만 끝내고 금방 돌아오겠다고.
"가지 말고 내 옆에 있으라고 했잖아!"
네가 손바닥으로 내 얼굴을 강하게 쓸어버렸지. 아무리 화가 나도 손을 올리지 않고 대화로 해결하려 했던 네가 그러니 너무 놀라 맞은 부위를 손으로 감싸면서 너를 쳐다보았어. 눈물이 핑 고이더라.
"너, 왜 그래, 무섭게..."
"미, 미안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절대로, 어, 어떻게... 아, 아아... 내가 미쳤나 봐... 너를, 어떻게 때릴 수가 있는 거지..."
원래의 너라면 내 상처 괜찮냐며 어루만졌을 네가
나를 때린 손을 다른 손으로 가리며 부르르 떨던 너였어.
물리적으로 아파서 놀랐던 것이 아니야. 앙상하고 나보다 키 작고 빼빼 마른 네가 때린다고 해봤자 얼마나 아프겠어. 그것 때문에 아픈 게 아니니까.
절대로 그러지 않을 네가 그랬기에 내 마음이 너무나 아팠어.
네가 그동안 너무나 힘들었구나.
내가 네게 큰 힘이 되지 못했던 것이 너무나 미안했으니까.
나 자신에게 너무나 속상해서 잘하지도 못하는 욕도 했어.
쓰레기 같은 새끼라고.
위로 제대로 하나 못 해줘서 이렇게 불안하게 만들었냐고.
똑바로 못하냐고.
그렇게 욕했어.

그날을 기점으로 네가 힘을 쓰는 것을 서슴지 않던 것이었지.
대화하면서도 툭툭 치기도 하고
조금 언성이 높아질 땐 바로 손을 올리며 나를 때렸지.
"미안해. 정말 미안해. 네가, 네가 그런 식으로 나한테 멀어질지도 몰라서. 아... 미안해. 내가 너무 미안해."
화가 나기도 하고 속상해하며 얘가 왜 이럴까 했지만, 그 아이를 화장하고 보냈던 슬픔이 너무 컸으니까 그랬을 거라고.
점차 시간이 지나면 나을 거라고. 굳게 믿으면서 참았어.
하지만, 내 마음속 기도와는 다르게 넌. 더 심해지더라.
그중에서도 가장 심했던 것은 네가 나를 때리다가 안경이 땅바닥으로 떨어져 박살 났기에 렌즈를 끼고 다닐 때였어.
"야. 확실하게 말해. 어떤 년이냐? 어떤 년이 시켰길래 안경 벗고 다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해 이전보다 더 빼빼 마른 얼굴에 충혈된 눈을 시뻘겋게 뜨고 목소리는 내리깔아버리고 말하는 너에게 나는 말했어.
"그때, 안경 박살 났잖아. 새로 맞추기엔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소프트렌즈라도 끼고 있으려고 한 거야. 진짜야."
최대한 부드럽게, 너를 진정시키기 위해 내 목소리 톤을 낮추고 천천히 말했어.
주간업무였다면 일 끝나고 곧바로 안경집 가서 맞췄겠지만, 야간에 업무 수행하는 것 때문에 집에 들어가면 잠자기 일쑤였던지라 난시 교정도 안 된 적당히 보일락 말락 한 정도의 렌즈로 생활하고 다닐 때였으니까.
"내가 너 민얼굴로 밖에 다니지 말라 했잖아! 딴 년들이 쳐다보는 거 싫다고! 왜 내 말 무시하는 거야!"
이젠 발길질까지 하더라. 당연히, 손바닥이 아니라 주먹이 날아오기도 했고. 얼굴과 목을 제외한 모든 부위를 때리던 너였어. 아마, 거기에 멍이나 상처가 난 것을 다른 사람이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교묘하게 그곳이 아닌 다른 곳만 노렸던 것 같아.
"왜 이래. 너 원래 안 이랬잖아."
"네가 딴 년한테 멋지게 보이면 안 되니까 그런 거 아니야!"
"난 너 말고 다른 사람 생각도 안 해봤어. 진짜야. 내가 너를 내버려 두고 어떻게 다른 사람을 만나. 난 너밖에 모르는데."
"너를 못 믿는 게 아니야. 나와 너를 제외한 그것들을 못 믿는 거지."
나와 너는 대화가 맞지 않았어. 나는 끝까지 A라고 말하지만 넌 B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난 너만 보는데."
"네가 다른 사람 때문에 날 떠날까 봐 무서워. 제발 부탁이야. 나만 봐줘. 내 곁에만 있어 줘..."
왜 이렇게 집착이 심해진 것일까. 울면서 내 바짓가랑이를 잡는 너를 보면서 네가 너무 약해졌다고 했었지.
이전보다 더 작고 가녀린 너를 안고 굳게 다짐했어.
돌려놓겠다고.
내가 알던 원래의 그 모습.
그때로 돌려놓겠다고.
내가 힘들 때 나를 보살펴 주던 네가 생각났고, 그때 너의 상냥함과 친절함에 힘이 났던 나였기에, 네게 느꼈던 사랑을 너에게도 느끼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이번에도 내 간절한 기도가 무색하게 너에겐 아무런 효과가 없더라. 오히려, 더 심해질 뿐이었지.
"얀순아. 제발 그만해. 나 너무 아파."
물방울이 돌을 뚫는다고 하듯, 아무리 힘이 약한 너에게라도 계속 맞다 보면 내 몸도 견디기 힘드니까.
네 주먹질, 발길질에 몸의 멍이 너무 심해 남들 반바지 입는 한여름에 꼭 긴 바지를 입어야 했고, 긴 팔 티를 입기엔 날씨가 너무 더웠기에 반소매 티를 입고 항상 토시를 착용해 멍을 가리고 다닐 때였으니까.
온몸이 너무 아프고 이전과 다른 너에게 너무 힘들었지만,
그래도 가족을 제외하고 다른 누구를 사랑해본 적 없는 나였기에, 너와 헤어지기 싫었어. 어떻게든 원래대로 돌려놓고 싶었으니까.
"내가 가지 말라고 했잖아. 돈은 아빠랑 오빠한테 손 빌리면 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네가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으니까 나가지 말라고 해도 왜 내 말 안 듣는 건데!!!"
아무리 가난해도 남의 손을 빌려 가면서 살고 싶지 않았어. 내 손으로 번 돈으로 너랑 오순도순 연애하고 같이 사는 것이 내 목표였으니까.
넌 내 마음은 생각해주지도 않고 그저 옆에만 있으라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지.
그런 너를 보면서 내 의지도 석공이 상을 조각하듯 조금씩, 조금씩 깎여나가더라. 

이전과 다르게 신체와 신체가 닿는 것도 더욱더 원하였지.
처음엔 그저 손만이라도 잡고 있으려고 했는데, 나중에 가서는 내 무릎 위로 올라타고 내게 안겨야 마음이 안정된다고 그렇게 있어 달라고 했지.
조금만 멀어져도 안 된다고. 꼭 붙어 있으라며 울며불며 난리 치던 너였지.
"가지 마. 제발 가지 마."
잠자리 횟수도 이전보다 훨씬 많아졌어. 네가 원하였기에 어떻게든 맞춰주고 싶었고 피곤해도 참았어.
둘이 발가벗은 체 이불에 누워 있게 되면 넌 내 몸을 꽉 붙잡고 놔주질 않았어.
"어디 가려고?"
예전엔 잠 눈도 밝지 않아서 볼살을 톡톡 눌러도 아무렇지 않던 너였는데.
이젠 화장실 가고 싶어 잠깐 팔을 풀고 움직이려고 하면 금방 깨어나 나를 붙잡았지.
"화장실만 갔다 올게. 어디 가는 거 아니야."
그렇게 얘기하고 가려고 하면 화장실 앞까지 따라왔지.
"진짜 여기 있을 거야? 볼일만 보고 바로 들어갈 거야."
"못 기다려... 너 나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
그렇게 얘기하고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나왔는데,
그 잠깐 사이에 넌,
문 옆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울고 있었어.
"왜 울어. 화장실만 갔다 온다고 했잖아."
"겨우 문 하나 때문에 네가 안 보이는 건데. 겨우 그것 때문인데 잠깐 안 보이니까 너무 무서워. 미칠 것 같아. 나 너무 춥고 무서워. 안아줘."
그렇게 말하며 꺼이꺼이 우는 너를 안고 이불 안으로 들어가 천천히 달랬어.
"내가 너를 두고 어디를 가니. 가봤자 너랑 살려고 일하러 가는 거 말곤 없어. 내가 이렇게 강인해진 게 누구 때문인데. 너 안 만났으면 나 평생 동자승이라니까? 막 마법 쓰고 날아다녔을걸?"
"훌쩍."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장난도 쳐보고 나름 가방끈 짧은 지식을 짜내어 너를 웃게 하려고 농담도 해보았지만,
넌 내가 옆에 있느냐 없느냐 말고는 딱히 관심이 없는 것 같았지.
한 번은 너에게 권해보았어.
네가 너무 아파해서.
나도 너무나 아파서.
"우리 순이야."
"응? 왜?"
"우리 병원 가볼래?"
"왜? 왜 밖으로 나가야 해?"
"네가 너무 아프니까. 얀돌이 잃고 난 다음에 네가 너무 아파하는 것 같아서... 밖에서 여러 가지 알아보니까 우리, 같이 병원에 가보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밖에 나가기 싫어."
이불을 뒤집어쓰고 나를 꽉 껴안는 너였지.
이때 화를 내서라도 병원에 데리고 가서 너를 치료하던가, 너희 아버지와 형님들께 말씀드려서 설득하게 도와 달라고 해야 했는데.
너무 나 혼자 해결하려고 했었어.
같이 뭉쳐서 살기 위해 있는 게 가족인데,
난 그 가족들한테 너의 증상을 알리지도 않았어.
조금 더 현명하게 행동 할 수 있었는데 왜 그랬던 걸까.
혼날까 봐 무서웠던 걸까. 아니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니 내가 직접 해결하고 싶었던 고집이 너무나 심했던 걸까. 

그러다가 너무 지쳐서.
어떻게 해도 해결이 전혀 안 되는 이 상황이 너무나도 싫어서
영원히 같이 가자고 말했던 너에게 제일 하기 싫었던 말을 하게 된 날도 오게 되었지.
어떻게든 끝까지 손잡고 가고 싶었던 너에게 마지막을 고하고자 딱 한 번만 더 만나기로 했던 때였어.
아침에 퇴근하고 집으로 들어갔지.
"어서 와.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얼마나 기다렸는데."
피골이 상접하고 머리카락의 윤기가 없는 너를 보면서 잔인한 말을 해야 하는 이 상황이 너무나 싫었어.
하지만 해야 했어.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
내 손을 잡고 네 방으로 끌고 가는 너를 멈춰 세우고 난 얘기 했어.
"순아. 헤어지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조금 전까지도 계속 웃던 넌 정색하면서 나에게 물었어. 네가 너무 무서워서 가까이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다고 싶어서 입을 열었지.
"나 너무 힘들어. 예전과 다르게 때리는 너도 싫고 자꾸 멍이 생겨서 몸도 아파. 구속하는 것도 싫어. 자유롭게 일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너무 싫어."
"나가지 말라고 했는데 네가 나가서 그렇잖아. 돈 안 벌어도 먹고 살 방법이 있는데 왜 굳이 나가서 일하는 건데."
"내 손으로 번 돈으로 너랑 밥 먹고 살고 싶으니까 그렇지. 너랑 사귀면서 생긴 꿈이 뭔 지 알아? 너랑 살면서 꼭 내 손으로 직접 번 돈으로 너랑 함께 사는 거니까!"
"그딴 거 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하냐고!"
아, 지금의 너는 내 꿈도 그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구나.
예전의 너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말인데.
언제나 나를 존중해주던 네가 절대로 할 말이 아닌데.
난 너와 그 꿈, 효도 딱 3가지만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너에겐 그딴 것이었구나.
"아무튼 난, 말했어. 짐 정리하고 나가 줘."
후~ 하고 바람 불면 날아갈 것만 같은 연약한 너에게.
난 너무나 잔인한 말을 하였어.
참기 힘들었어. 너의 집착이 심해짐에 따라 나도 약해졌으니까.
"뭐야. 왜, 왜 그러는데... 내가 못나서 그러는 거야? 아, 얄팍해서 그러는구나. 하긴 예전에 네가 가진 잡지 보니까 가슴 큰 여자들 많이 나오던데 난 많이 얄팍했지. 그래서 그런 거지? 그런 거지? 그런 거라면 수술해서라도 키울게."
"그런 게 아니야."
가슴 큰 것을 좋아하는 것은 맞지만 내가 널 좋아한 건 외형 때문이 아니야.
"아, 알았다. 내가 다른 애들보다 얼굴이 못나서 그런 거지? 맞아. 네 주변에 있던 여자애들보다 내가 못생겼었어. 그래서 그런 거지?"
"절대로, 아니야."
내가 그런 것에 홀리는 인간이었으면, 너 없었으면 평생 동자승으로 살 거라는 말 절대로 안 했어.
"아니야? 그, 그럼 말해 줘. 내가 어떻게든 네가 원하는 대로 바꿀게. 어떻게든 바꿀 테니까. 제발 나를 떠나지 말아줘. 빌게. 이렇게 빌게. 네 곁에서 떠나 달라는 말 빼곤 다 들어줄게. 제발. 제발. 제발..."
후줄근한 옷으로 무릎을 꿇으며 손바닥이 닳도록 싹싹 비는 너였어.
"얀순아... 훌쩍... 너, 잘못 없어. 자책 하지 마. 네가 문제가 아니야. 내가 문제야. 도대체 왜 울어. 너 잘못 없다고... 내가 나쁜 놈이라고. 그러니까 우리 좀... 멀어지자고 말하는 거야."
네가 말을 할 때마다 내 눈에선 눈물이 계속 떨어진다. 그런 게 아닌데. 내가 겨우 그런 것 때문에 너랑 헤어지자고 하겠냐고.
우리 둘이 계속 다른 얘기만 하니까 그런 거잖아. 예전과 다르게 서로 이해를 해 줄 수 없는 상황이 오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
나도 힘들고 너도 힘들잖아.
그러니까. 잠깐만 시간을 가지자고.
아마도 우리 너무 붙어있어서 그런 것 같으니까.
잠깐만 떨어져서 회복할 시간을 두고 나중에 건강해지면 다시 만나자고. 그러려고 그런 말을 한 건데.
"미안해. 정리하고 나가줘."
그렇게 말하고, 난 내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잠가버렸지.
쿵! 쿵! 쿵!
"얀붕아! 얀붕아! 제발 문 좀 열어 봐. 훌쩍. 어떻게 하면 되는 건데? 어떻게 하면 나랑 헤어지자고 안 할 건데...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고 묻잖아. 제발 대답해줘. 말해주지 않으면 모른단 말이야. 붕아. 얀붕아..."
내 방문을 두들기는 너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가슴이 찢어졌어.
와 나 진짜 나쁜 새끼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진짜 사람새끼 아니네.
얘한테 받은 사랑이 얼마나 큰데 난 이렇게 쉽게 포기하는 거지?
왜 더 참지 못했던 걸까?
나 자신에게 전보다 더 심한 욕을 했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였냐고.
또 다른 생각으로는
우리 왜 이렇게 된 거지.
무엇이 잘못되었길래 이렇게 된 걸까?
어디서 조치를 잘못 취했길래 너도, 나도, 이렇게 망가진 걸까.
한 뼘도 안 되는 문을 두고 너와 난 거리를 두고 울었어. 문을 계속 두들기며 우는 너를 위로 할 힘도 없던 난 가만히 울었어.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몰라. 생각도 안 해봤거든.
네가 문을 두들기지 않고 내 이름만 부르면서 울고 있더라.
울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지금이라도 당장 문 열고 너를 안아주고 싶은데.
그러지 못했어.
그렇게 해줘도 이게 해결될 것 같지 않았거든.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네가 조용히 걸어가더니 네 방에서 훌쩍거리며 자크 소리가 나더라.
아, 정리하는구나. 했지.
너도 그렇게 하기로 했다고.
"내가 나쁜 새끼라 미안해. 이런 선택밖에 할 줄 몰라서 미안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소리 죽여 울었어.

똑똑
"나갈 준비 다 했어. 잠깐 얼굴 좀 보자."
네가 내 방문을 두들기고 그렇게 말하길래 문을 열고 너를 보았어.

진짜 너무나 말라서, 손가락으로 조금만 힘주어도 바로 부러질 것만 같은 지푸라기 같은 몸으로.
영양분이 모자라서 윤기 없어진 머리는 산발이 되었고.
그 이쁘던 눈도 얼마나 울어서 그렇게 된 걸까. 눈두덩이가 너무나 부어있더라.
볼에는 눈물 자국이 새겨져 있었지.
그런 너는 나를 보면서 입을 열었어.
"너도 그런 상태면서 왜 그런 말한 거야?"
"이거 말곤 방법이 없는 거 같아서 그래."
너는 팔을 내밀어 말라비틀어진 송장처럼 얇은 그 손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었지.
"그러면 마지막으로 밥 한 번만 해먹이게 해줄래? 그러면 정리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럴까. 배도 고픈데, 얻어먹어도 되나."

너무 울어서 새빨갛게 충혈된 눈의 너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어.
"그래. 그러자."

거실에 앞치마를 두른 체 아무 말 없이 재료를 손질하는 너를 보며
예전에 너랑 함께했던 모든 것들이 하나둘 생각나더라.
학교 졸업한 뒤에 치킨집에서 너를 다시 보게 된 날.
네가 매우 좋아서 사귀자고 고백했던 날.
우리 손 잡고 영화 보러 갔던 날.
담배 끊기 전에 담배 냄새 맡게 하기 싫다고 나를 만날 땐 담배 피지 않았던 날.
우리 첫날 밤. 내가 제대로 하지 못해서 네가 더 속상할 텐데 괜찮다고 나를 위로해준 날.
얀돌이가 아플 때 나에게 안겨서 울던 날.

하나하나다... 생각나더라.

그런데 왜, 앙상한 너만 남았을까.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아주 간단한 식사가 나왔어.
예전에 홈쇼핑에서 샀던 김치랑 네가 만든 빨간 콩나물국.
나는 싫어했지만, 건강해야 한다고 만들어주는 잡곡밥이었지.
조촐하지만 이제 그걸 먹지 못한다는 것 때문인지 또 눈물이 나더라.
천천히 수저로 국을 먼저 퍼먹었어.
"훌쩍... 맛있어?"
너도 요리하면서 울었는지 방금 닦았던 눈물 자국이 다시 생겨 있더라.
"응. 엄마가 밥해주던 것보다 더 맛있어."
집에서 먹던 콩나물국보다 더 매운 콩나물국. 근데, 오늘은 좀 짜네. 소금이 좀 많이 들어갔나 봐. 너. 콩나물국 해줄 때 소금 안 쓰는 거 아는데 말이야.
"밥은?"
"훌쩍... 기다려 봐."
휴지로 망가진 얼굴을 정리하고 다시 수저를 들고 밥을 퍼먹었어.
"물 잘 맞췄다. 내가 좋아하는 진밥이네. 떡 먹는 것 같은 쫀득함이 엄청 좋아."
"너 진밥 좋아해서, 그렇게 만들었어."
넌 된밥을 좋아했고, 난 진밥을 좋아했는데 내가 좋아한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네가 먹고 싶어 했던 된밥 포기하고 진밥 해 먹었지.
근데, 난 병신같이 내가 밥하는 날은 너에게 진밥을 해줬어.
"밥이 그렇게 맛있어? 왜 그렇게 울어?"
"맛있잖아. 엄청 맛있거든."
코 찔찔거리며 억지로 넉살 부리고 너에게 말했지.
"그렇게 좋으면서 왜 헤어지려고 그래. 너무하잖아."
"그러게. 내가 나쁜 새끼네..." 

그런데,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묵묵히 식사하던 나에게 도중에 네가 입을 열더라고.

"붕아."
"어. 할 말 있어?"
"근데 말이야. 난 널 못 놔줘."

네가 그 말을 끝내자 힘이 떨어지면서 수저를 놓아버렸어. 그 뒤엔 참기 힘들 정도로 눈꺼풀이 무거웠어.
"순아, 나 몸이 이상해. 많이 졸려."
"미안해.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어.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너를 영원히 보지 못하게 될까 봐... 헤어지지 않으려면 이러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아서 그랬어."
무덤덤하게 말하는 너의 얼굴을 보았어.
"난 너 못 놔줘. 내 처음 다 준 너를 놔줄 수 없어. 넌 나한테서 못 떠나. 난 너랑 평생 살 거야."
너의 그 말을 끝으로 내 눈은 감겼어.



그리고,
지금은
침대 하나만 있는 이곳에 팔다리가 묶인 체
살며시 웃으며 오는, 발가벗은 몸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너를 닮은 누군가를 보며 눈물 흘리며 체념했어.

'후후. 사랑해.'

이전의 너처럼 나 자신도 사랑하며 너 자신도 사랑해달라며, 상냥하면서 굳세고,
네가 하고 싶었던 것, 먹고 싶은 것도 포기하면서까지 나를 위해주고, 사랑해주던 너는 없고.

"이히히. 사랑해."

그때의 너와 다른, 나를 압박하고 오로지 자신만을 보라고.
내가 어디에도 가지 못하게 구속하고 그러다가 마음에 안 들면 폭행하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되지 않으면 화부터 내는
너를 꼭 닮은 사람밖에 없어.

그 시절의 아름다운 너는 어디에 가고
너를 닮은 저 무서운 사람만 있는 거니.

내가 정말 사랑하는 너는 이제 만날 수 없는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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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 출품작 아닙니다.

+ 9월 27일 오타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