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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서린의 도시락은 오늘도 소박했다. 쌀밥 조금에 콩자반과 진미채가 전부. 한창 때 고등학생이 먹기엔 양도 질도 모자랐지만 서린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아.”

 “아.”


 서린이 내미는 도시락을 받아먹는다. 묶여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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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찐따처럼 도시락 처먹냐?”

 “응. 사 먹는 거 보다 싸거든.”


 시비가 걸리는데도 태연한 대답이었다. 서린을 둘러싼 무리는 오늘은 참지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시비 걸던 녀석이 눈짓하자 뒤에서 기다리던 한 명이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흙탕물을 끼얹는다. 

 서린은 더러운 물로 흠뻑 젖어버렸다. 도시락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언제나 처럼, 서린은 신경 쓰지 않고 식사를 계속했다. 


 “뭐 이딴 게 다 있어? 기분 나빠.”

 “우웩. 역겨운 년. 그걸 처먹어?”


 괴롭히던 여자들은 단순히 서린이 객기를 부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녀의 감정을 건드리려 해 봐도 서린이 반응할 리 없었다. 결국 한 명이 참지 못하고 서린의 멱살을 잡는다. 


 “썅년이! 사람이 말을 하면 들어!”

 “듣고 있는데?”


 자신을 괴롭히는 녀석들에게 보일만한 표정이 아니라 태연한 미소였다. 


 “나 한테 하고싶은 이야기라도 있어?”


 그리고, 정말로 이해하지 못한 의문이었다. 

 멱살 잡은 여자가 굳는다. 서린은 가볍게 고개를 기울인 다음 식사를 계속했다. 

 

 벌레가 씹히건 모래가 버석대건 상관없다. 

 서린은 감각을 느끼지 못하니까. 

 시비를 걸려도, 미움 받아도 상관없다. 

 서린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니까.


 녀석의 세계에 진실된 건 나 뿐이었다. 나머지 모든 것은 거짓말이고, 환상. 서린은 거짓과 환상에 신경 쓰지 않았다. 


 75일간 부친에게 학대 받던 그녀 나름의 자기보호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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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정물을 뒤집어 쓴 서린을 샤워실로 보내 씻게 시켰다. 체육복으로 갈아입길 기다린 뒤엔 간단히 주의를 준다. 


 “그래도 흙탕물은 먹지 마. 병 걸리면 어떻게 해.”

 “그런가?”


 신경도 안 쓰는 느낌이지만 저런 식으로 이야기해도 내 말은 듣는다. 앞으로 구정물을 마시거나 하지는 않으리라. 납득하거나 이해해서가 아니라 그냥 내가 시켰으니 따라주는 정도겠지만. 


 솔직히 말하면 걱정이었다. 서린은 타인의 악의를 감지하지 못한다. 위험도, 공포도 느끼지 못한다.

 뜨거움을 느끼지 못한다고 불 속에 손을 집어넣는 것과 같다. 오늘 사건으로 끝날 일도 아니겠지. 


 현실은 소설이 아니다. 문제를 해결할 멋진 방법은 없고, 서린은 평생 저렇게 살아가겠지. 

 현실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세계에서 유리돼 혼자 붕 뜬 채로. 


 긴 인생은 아니리라. 아직도 그녀는 내가 옆에 없으면 잠들지 못한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었다. 내가 옆에 없을 때, 서린은 잠을 자지 못한다. 내 삶이 길지 못한 이상 서린의 생명도 길진 못하다. 

 그렇다면. 


 적어도 살아있는 동안은 내가 돌봐 주면 될 문제였다. 


 “야. 너 내 여자친구 할래?”

 “응! 근데, 갑자기 무슨 일이야?”

 “그냥. 싫은 건 아니지?”

 “전혀! 여자친구 되면 뭘 해야 하지?”

 “글쎄. 키스?”


 서린은 뭔가 깨달은 듯 주먹으로 자기 손을 두드렸다. 


 “앞으로 먹는 거 신경써야겠다. 키스할 때 냄새 나면 안 되잖아.” 

 “별로 상관 없는데.”

 “내가 싫어! 너한텐 예쁜 모습만 보여주고 싶단 말이야!”

 

 헤헤헤, 웃으며 서린은 반 바퀴 돌아 교실로 달려갔다. 서린에게 세계는 나 뿐. 그러니 자신이 내 여자친구가 된다면 자신의 몸을 돌볼 이유가 생기는 셈이었다. 

 갑자기 고등학교에 다시 다니게 됐을 때는 어떻게 되나 싶었는데, 이걸로 당분간은 괜찮겠지. 


 떠나려고 할 때, 뒤에서 모든 걸 지켜보던 보건 선생님이 한 마디 하셨다.


 “너도 만만치 않게 망가져 있구나.”

 “예, 예. 압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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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날, 서린을 괴롭히던 녀석들은 어디서 바퀴벌레를 구해왔다. 징그럽게 할 생각이었겠찌만 서린에게 통할 물건은 아니었다. 바닥을 돌아다니는 바퀴를 잘 모아서 손가락을 눌러 죽이는 그녀의 모습엔 일진들도 경악했다. 


 아, 실수. 저런 애들이 쉽게 포기할 리 없지. 힘으로 서린을 제압하고 입에 바퀴 시체를 집어넣으려는 모양이다. 


 “미안. 남자친구랑 이상한 거 안 먹기로 약속했거든.”

 “씨발, 들었어? 이년이 남자친구가 있대!”

 “또 어떤 병신이야? 정신나간 미친년 좋아하는 남자니까 싸이코패스인가? 미친년이니까 상상 남자친구 아냐?”

 “난데.”


 교실이 조용해진다. 그야 뭐, 나는 그럭저럭 교우관계가 훌륭하고 모두에게 인기있는 학생이란 설정이니까. 


 “농담하지 마.”

 “농담 아닌데?”


 증명하든 서린을 끌어안고 가볍게 입맞춘다. 


 “대담해! 기분 좋아!”

 “나중에 더 해 줄게.”

 “응!”


 서린은 방실방실 웃으며 행복해했고, 서린을 괴롭히던 여자들은 표정을 한껏 일그러뜨렸다. 


 “야, 장난은-.”

 “장난 아니라니까. 가능하면 조용히 있는 애 좀 건드리지 말아줘.”


 서린을 괴롭히던 긴 머리가 한발 물러난다. 


 “너, 이거 친구였어?”

 “친구가 아니라 남자친구.”

 “씨발. 꺼져, 기분 나쁘니까. 퉷. 내가 사람 잘못 봤네.”

 “마음대로 착각한 녀석이 잘못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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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분간 잠잠하다, 괴롭힘은 내게도 뻗쳤다. 노골적이지 않은 방식이었지만.

 다들 나와 단체활동을 피하고 은근히 날 멸시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딴게 왜 상처받는 지 잘 모르겠다. 지하실에서 가죽 벗겨지던 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말이야. 

 진짜 문제는 서린이었다. 


 “있지, 언제 호텔가서 같이 잘래?”

 “보통 그런 얘긴 학교에서 하면 안돼.”

 “그런 거야?”

 “응. 내가 곤란해져.”

 “우우, 미안해!”

 

 나와 연인관계가 됐다는 사실에 취해 서린은 주변을 둘러보지 못했다. 저런 발언은 문제가 없지만 공부를 안 하는 건 심각하다. 성적이 낮아지면 퇴학당해서 장학금도, 생활비도 지원받지 못하게 된다.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서린도 머리는 좋으니까, 계기만 마련해주면 충분했다. 


 “이번 시험에서 네가 나보다 성적 잘 나오면 호텔 어디로 갈 지 한 번 생각해 보자.”

 “와, 정말? 힘낼게!”

 “미친 연놈들.”


 형태는 일그러졌을지언정 우리의 위치와 생활방식은 서서히 반에 받아들여졌다. 무시하고, 신경쓰지 않고, 모른 척 하는 걸로. 


 대체로 평화롭게 일상이 이어지지만, 결국 사건은 언젠가 터지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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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린을 꼴보기 싫어하던 녀석들이 결국 선을 넘어버렸다. 내가 부른다는 이야기로 위장해 녀석들은 서린을 학교 뒤쪽 창고로 불러냈다. 그리고 거기엔 그린 듯한 양아치들이 서린을 겁탈하기 위해 대기하는 중이었다. 


 사실, 여기까진 별 문제 없었다. ‘고작’ 겁탈당하는 정도로 서린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녀석들은 결국 ‘내 이름을 꺼냈다’.


 네 그 잘난 남자친구도 부숴 주겠다고. 가지고 놀다, 두드려 팬 다음 뒷산에 묻을 거라고. 


 서린에게 그것은 그녀의 세계를 부수겠다는 이야기였다. 


 상처를 돌보지 않고 서린은 모든 것을 물어뜯었다. 손톱이이 부러져도 할퀴었고, 숨이 막혀도 물어뜯었다. 가녀린 소녀 한 명이 남자 둘과 여자 하나를 상대로 싸워 이긴 건 기적이었다. 


 그 직후에 날 납치한 것도 마찬가지로 기적이었다. 주변 모든 위험에서 나를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나는 그녀의 원룸에 갇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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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하여, 다시 현재. 나는 의자에 묶여 서린이 주는 음식을 받아먹는 신세였다. 식사도 소변도 세안도 서린이 처리해 주니 솔직히 편하지만, 이대로 있으면 곤란했다. 


 “시험공부 안 해도 돼?”

 “하고 있어! 맞다. 같이 공부할래?”

 “다행이다. 나한테 붙어있느라. 공부 안 하는 줄 알았거든.”

 “괜찮아! 아, 손목 마사지 해 줄까? 아프진 않아?”


 자신은 감각을 느끼지도 못하는 주제에 내 일엔 신경쓰는 게 모순적이었다. 그것도 귀여웠지만. 

 어쨌든, 이대로 있으면 시험을 못 본다. 나는 짐짓 근엄하게 목소리르 내리깔았다. 


 “한서린. 우리 약속 기억해?”

 “어떤 약속?”

 “나보다 시험 잘 치면 호텔 알아보기로 했잖아. 같이 자자고.”

 “아! 음…… 그러면, 넌 여기 묶여 있으니까…… 결국 시험은 내가 이긴 거네! 미리 호텔 알아볼까?”

 “서린.”

 “우우! 알겠어! 너도 시험 치면 되지?”


 서린이 뺨을 부풀렸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고민으로 가득해 보였다. 


 “근데, 여기서 나가면 내가 못 지켜주잖아. 누가 너 납치해 가면 어떻게 해?”


 적어도 이 학교 학생 중에서 너보다 납치 실력이 뛰어난 녀석은 없겠지만-. 


 “그때는 구하러 와 줘.”


 간단한 문제였다. 이런저런 설명을 한 다음 풀려나서, 잠깐 쇼핑을 하고, 어렵게 구한 얇은 gps를 내 피부 사이에 삽입했다. 이걸로 서린은 언제 어디서나 내 위치를 알 수 있었다. 휴대전화 도청 도촬 앱도 깔아줬으니 내 주변 상황도 파악할 수 잇겠지. 


 서린은 완전히 만족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대체로 좋아했다. 


 “이정도면 뭐.”

 “응. 뽀뽀.”

 “응!”


 가볍게 입맞추며, 나는 쓰러지는 서린을 받아냈다. 


 피로도 느끼지 못하기에 그녀는 언제 잠을 자야 할 지 모른다. 한계까지 자신을 몰아붙이다가 몸이 쓰러진 거겠지. 


 눈을 감기고 상처입은 곳에 반창고를 붙였다. 


 귀여운 여자친구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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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싶었던 장르. 생각보다 좀 안좋게 나왔지만 뭐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