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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패배한 나라의 말로는 비참하다. 노비와 다름 없는 백성들, 처형 당하는 왕, 왕실과 귀족 가문에 팔려 가는 자들. 승자가 승리의 축배를 들 때 패자는 자신들의 안위를 걱정한다.


불행하게도 나는 후자에 속했다. 오른쪽 땅의 위대한 마왕 돌프, 그리고 그의 막내 아들이었던 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항상 최전선에서 인간들과 싸워 왔다.


우리는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워 인간들의 영토를 절반 정도 차지하고 놈들의 수도를 압박했다. 조금만 더 밀어 붙이면 우리가 이길 수 있었지만 문제는 내부에서 시작됐다.


카를, 그는 인간과 몰래 결탁한 우리 마족의 배신자였다. 아버지의 든든한 오른팔로서 좋은 대우를 받았음에도 우리 일족을 버리고 인간 놈들에게 귀화했다. 사랑 때문에 배신했다는 소문이 있지만 나로서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카를의 배신 이후로 전세는 조금씩 인간 측으로 기울었다. 보급로 차단, 야습, 고위 장교 암살 등 카를이 유출 시킨 정보를 토대로 인간들은 우리 군대를 조금씩 갉아 먹었고, 결국 우리는 다리 없는 의자처럼 무너지고 말았다.


나는 군대를 이끌고 수도 부근에서 맹렬히 저항했지만 결국 보급 부족으로 인간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처형 당한 아버지를 제외하면 내 형제들이 어떻게 됐는지는 모른다. 아마 나처럼 팔려 나갔거나 좋지 않은 꼴을 당했겠지. 나처럼.


"안톤~잘 잤어?"


지금 문을 열고 들어 오는 여자가 바로 나를 소유하고 있는 여자다. 듣기로는 둘째 공주라는 것 같은데 확실하지는 않다.


"오늘도 식사 남겼네? 남기지 말고 먹어 줘, 몸에 좋은 재료만 써서 만든 거란 말이야."


이 여자는 아직까지는 나에게 잘 해 주고 있다, 아직까지는. 방도 자신의 방을 쓰게 하고 식사도 자기가 가져다 주고 잠도 같이 잔다. 이렇게 보면 동등한 존재로서 대우해 주는 것 같지만 한 가지 제약이 있다.


마법과 물리적인 저항은 절대 금지다. 아랫배에 그려진 마법 차단 표식과 마력이 담긴 수갑 때문에 혹시라도 저항의 낌새가 보이면 초커가 목에 충격을 준다.


때문에 이 여자가 나를 희롱해도 나는 잠자코 당할 수밖에 없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 여자는 잘 때 나를 껴안는 것 빼고는 내 몸에 손을 대지는 않는다.


"안톤, 나 오늘 역사학이랑 경제학 만점 받았어. 잘 했지? 히히."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답답했는지 그녀가 내 손목을 붙잡고 말한다.


"안톤, 벌써 한 달째야. 물론 나를 비롯해서 모든 사람들이 증오스러운 건 이해해. 그치만 나에게만이라도 마음을 열어 주면 안 될까? 많을 걸 바라는 게 아니야. 그냥 내가 하는 말에 대꾸만 해 주면 안 되겠니? 제발..."


지랄, 잘도 그러겠다. 과연 본인이 내 입장이어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당연히 아닐 것이다.


"...이번에도 말이 없구나. 미안, 네 입장에서 생각했어야 했는데."


그녀는 내 손을 놓고 다시 어딘가로 나갈 준비를 한다.


"난 문학 수업 받으러 갈게."


문고리를 돌려 방을 나가려던 그녀는 다시 내 앞에 쭈그려 앉았다.


"안톤, 난 정말로 널 해칠 생각이 없어. 그저...그저 네가 마음을 열길 원할 뿐이야."


그녀는 다시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가며 말했다.


"내 진심이 조금이라도 전해졌으면 좋겠어. 그럼 다녀 올게."


그녀는 문을 열고 나갔다.


이 난리를 피운 게 벌써 한 달째이다. 그녀는 내가 말하기를 원하고 나는 항상 침묵한다. 이 팽팽한 대립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감이 잡히지를 않는다.


그래도 인간들이 영악할지언정 끈질긴 족속은 아니다. 내가 계속 이렇게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하면 언젠가 그녀도 나를 버릴 것이다. 그 때까지만, 그 때까지만 참으면 이 지옥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