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안 관련으로 떡밥이 생겨서 글 올려보는 건데, 사실 삼각함수를 단위원과 같은 도형을 통해 정의하는 것은 현대 수학을 이루는 기반, 즉 집합론의 관점에서 봤을 때 그렇게 자연스럽거나 간단한 방식이 아님.
결국 집합론 상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2차원 도형이라는 것은 실수 2개를 가진 순서쌍들의 집합으로 정의될 뿐임.
그러한 집합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하고 직관적인 그림으로서 받아들이기 힘든 것 또한 사실이고.
그런데 거기에 길이나 각도와 같이 형식적으로 구성하기 상당히 까다로운 개념을 먼저 들고 온 후, 삼각함수를 정의하겠다는 건 주객전도가 되지 않겠음?
집합론적으로 엄밀하게 길이를 정의하려면 측도론이라는 이론을 따로 들고 와야 하고, 이 이론은 집합론상의 본질적인 연산(무한한 합집합 등)들로부터 공리적으로 비롯되기 때문에 단순히 계산을 위한 삼각함수를 정의하기 위해 이들을 끌어다 쓰는 것은 벼룩 잡자고 초가삼간 불태우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임.
각도 또한 마찬가지라고 보면 됨.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두 집합을 생각해보자.
A = { (x, y) | 2 x + y = 1 }
B = { (x, y) | 5 x - 2 y = 3 }
위 두 집합, 즉 직선은 서로 같지도, 평행하지도 않기에 어떠한 각도를 형성한다고 볼 수 있음.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저 두 집합으로부터 구체적인 각도를 구하냐는 것임.
당연히 방법은 있겠지만, 적어도 일정 수준의 노가다 없이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을 만한 방식은 아님.
더 나아가 직선과 곡선, 혹은 곡선과 곡선 간의 각이라면 복잡함이 훨씬 증가하리라는 건 당연한 거고.
"기하학 자체를 공리화시킬 수도 있지 않나?"라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이미 집합론을 통해 우리가 수학에서 다루는 대상을 거의 모두 정의할 수 있는데 굳이 다른 공리 체계를 추가시켜서 복잡도를 늘릴 이유가 있을까?
그러면 도대체 삼각함수를 어떤 식으로 정의하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사실 이는 단위원을 사용하지 않고도 어렵지 않게 가능함.
필요한 개념은 그저 극한과 급수, 그리고 복소수 정도에 불과함.
먼저 복소수에 대한 지수함수를 정의하자면 다음과 같음:
exp(z) := sigma(n = 0 to inf) [ repeatMult(z, n) / n! ]
이때 repeatMult(z, n) := if n = 0: 1, else: z repeatMult(z, n - 1) 정도로 정의할 수 있음. 단순히 곱셈의 반복(=자연수 지수)이라고 생각하면 됨.
*물론 위 형태는 무한급수이기 때문에 모든 복소수에 대한 수렴성을 먼저 증명해야 하기는 함.
이렇게 지수함수를 정의했으면 삼각함수는 다음과 같이 유도하여 정의할 수 있음:
cos(z) := [exp(z i) + exp(- z i)] / 2
sin(z) := [exp(z i) - exp(- z i)] / (2 i)
*이때 i는 허수단위임.
혹은 복소수 없이 더 단순하게 정의하고 싶다면 해당 삼각함수들도 급수의 형태로 정의할 수 있음:
cos(z) := sigma(n = 0 to inf) [ repeatMult(- 1, n) repeatMult(z, 2 n) / (2 n)! ]
sin(z) := sigma(n = 0 to inf) [ repeatMult(- 1, n) repeatMult(z, 2 n + 1) / (2 n + 1)! ]
*마찬가지로 급수의 수렴성을 먼저 증명할 필요는 있음.
이후 저렇게 복소수, 혹은 실수에 대한 삼각함수를 먼저 정의한 다음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여러 기하적인 성질들을 증명해나가는 것임.
특히 삼각함수의 덧셈정리나 lim(x -> 0) [ sin(x) / x ] = 1과 같은 식을 상당히 간단하게 증명할 수 있기도 함.
단순히 급수 식을 대입하면 그만이니까.
이제 삼각함수의 여러 성질들을 증명했다면? 기존의 방식과는 정반대로, 우리가 지금까지 배웠던 기하학적인 행위들, 예를 들어 점을 회전시키거나 원의 방정식을 삼각함수와 실수 하나만으로 나타내는 것들을 정의해나갈 수 있게 됨.
초등적인 기하학을 공리로써 받아들이고, 삼각함수를 정의하며 그것들의 성질을 증명하는 것이 아님.
오히려 그 반대로, 삼각함수를 보다 순수한 방식으로 정의하고, 성질을 증명해가며 우리가 알고 있던 초등적인 기하학을 구축하는 것이야말로 훨씬 본질에 가까운 순서라는 것임.
그리고 이런 과정에 있어서 각도나 라디안, 측정 단위처럼 혼동의 여지를 줄 수 있는 개념들은 끼어들 틈이 없다고 보면 됨.
그저 순수한 방식으로 삼각함수를 정의하면, 그러한 부수 개념 없이도 삼각함수 하나만을 이용해 다양한 계산을 할 수 있으니 삼각함수의 변수가 실수여야 하는지 라디안이어야 하는지의 논쟁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음.
엄밀히 말해서 정의역은 복소수 집합이 될 수도 있고, 혹은 그 이외의 대수적인 성질을 갖는 집합이 될 수도 있으니까.
여기서 라디안이라는 개념은 전혀 필요하지 않음.
앞서 길이나 각도 등에 대해 형식적으로 정의하는 것이 복잡하다고 했는데, 이 방식 또한 극한이니 급수의 수렴성이니 하는 것들을 이용하므로 결국 난이도는 거기서 거기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음.
물론 그 생각이 맞다고 봄. 하지만 중요한 문제는:
라디안이나 60분법 등의 단위, 측정 개념으로부터 비롯되는 게 아닌, 그저 삼각함수 그 자체의 계산과 정의역만을 파고들 경우 위처럼 급수를 통해 정의하는 컴팩트(compact)한 방식이 더 효율적이라는 사실임.
그저 삼각함수의 정의역이 어떠해야 하는지 하나를 논하기 위해 측도론 같은 멋들어진(fancy 한) 이론을 도입해서, 초등 기하학을 구축하고 각도의 단위까지 정의한다? 앞서 말한 벼룩 잡자고 초가삼간 불태우는 행위와 다를 게 없다는 것임.
결론을 말하자면:
0. 라디안에 대한 고찰은 당연히 중요한 내용이며, 한 번쯤은 엄밀하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는 전적으로 동의함.
1. 하지만 삼각함수의 변수가 실수나 라디안 중 무엇이어야 하는지는 큰 의미가 없는 공허한 질문이며, 본질적으로는 그저 복소수나 그와 비슷한 대수적 대상이 변수이기만 하면 될 뿐임.
2. 그리고 이를 위해, 우리는 급수를 활용하여 각도라는 개념과는 독립적으로 삼각함수를 정의할 수 있음.
3. 이후 삼각함수의 정의로부터 여러 성질들을 증명하며, 최종적으로 초등 기하학에 쓰일 회전과 같은 개념을 기하학적 공리(=공준)에 의존하지 않은 채로 구축할 수 있고, 추가로 측도론이나 각도와 같은 개념까지 형식적으로 도입하여 완전한 기하학을 집합론의 언어만으로 서술하는 과정을 거칠 수 있다고 보면 됨.
마지막으로, 우리가 그저 직관적으로만 사용해왔던 삼각형, 곡선, 원 등의 도형이나, 이들에 대한 각종 연산과 성질들에 대한 증명은 사실 우리 생각보다 훨씬 난해하고 어려운 기하 체계 구성이었다는 말을 끝으로 글을 마치도록 하겠음.
반박이나 오류 지적 등은 언제나 환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