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엄마는 믿어
네가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1. 이런 수칙서가 왜 있는 것인지, 누가 썼는지 의심하지 말 것.
아들, 네 누나를 보렴.
2. 이 칠흑같이 어두운 동굴에서 어떻게 수칙서를 읽을 수 있는지 의아해하지 말 것.
네 누나는 네 나이 때 이미 대기업에 다니고 있었지.
3. 당신은 자살한 적도, 살해당한 적도 없다는 것을 명심할 것.
너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고 했지.
4. 정신을 바짝 차리고 수칙서의 내용을 반드시 따를 것.
그 꿈을 두들겨 패서라도 말리지 못한 것이 엄마는 한스럽구나.
5. 당신의 기억은 모두 거짓이니 오직 탈출에만 전념할 것.
넌 아직도 네 앞가림을 하지 못하고 이 늙은 어미의 삶을 좀먹는구나.
6. 뒤에 보이는 환한 빛은 입구가 아니라 지옥의 불이니 앞의 어둠을 향해 달릴 것.
아들아, 너에게 해줄 수 있는 다정한 말이 단 한 마디도 생각나지 않는구나. 너는 평생 동안 내 속만 썩였지.
7. 그 어떤 속삭임에도 귀를 기울이지 말고 출구가 보일 때까지 달릴 것.
아가, 네가 아직 아기였을 때 이유식을 먹지 않아 이 어미의 속을 썩인 기억이 난다.
그랬던 네가 이제 다 자라서 밥을 참 잘도 먹더구나. 돼지고기 김치찌개, 계란말이, 제육볶음, 고등어 구이.
네가 알지 모르겠다. 그런 네 아가리에 계란말이를 썰던 칼을 그대로 쑤셔넣는 상상을 할 때마다 이 어미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진다는 걸.
8. 절대 현혹되지 말 것.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뒤를 돌아보지 말 것.
아들아,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너는 기생충이란다. 하수구의 바퀴벌레도 너보다는 성실하고 의연하게 살아갈 거야. 네 시신은 쓰레기통에 처박혀야 하고 너의 영혼은 지옥의 업화 속에 영원히 불타야 한단다.
아들아! 엄마는 믿는다. 네가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이 지상에는 너를 위한 자리가 없단다.
그러니 아가, 모든 희망을 버리렴. 더 이상 힘들게 달릴 필요 없단다. 그곳이 너의 새 보금자리란다. 옳지. 멈추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