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장붕이들은 폴릭세네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트로이의 공주로, 그닥 비중은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인지도는 꽤 높은 편인데


그 무자비한 살육 머신인 아킬레우스가 한눈에 반한 미녀라는 설정이 따라붙어서 그렇다


폴릭세네 또한 늠름한 아킬레우스의 모습을 보고 반해 그와 혼인해서 전쟁을 끝낼 생각을 했다고 전해지는데


하필 둘의 밀회를 엿보았던 파리스가 몰래 독화살을 쏴서 아킬레우스를 죽였다는 게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전설


그런데 과연 이게 진실일까?



정확히 말하면 절반은 진실, 절반은 거짓이다


신화가 원래 다 그렇지만, 폴릭세네의 행보는 전승에 따라 극과 극으로 갈리기 때문


그렇다면 다른 전승의 폴릭세네는 어떤 모습을 보일까?


놀랍게도 파리스와 작당하고 아킬레우스를 속여 그를 죽음으로 내모는 복수귀 성향을 보이는 게 다른 전승의 모습이다



아킬레우스가 자신에게 반한 것을 안 폴릭세네는 곧장 파리스에게 달려가 암살 작전을 공모했고


아폴론 신전에서 그와 혼인하는 척하며 아킬레우스의 독살을 주도했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



사실 아킬레우스가 혈육들의 원수인 동시에 큰오빠 헥토르를 죽이고 시체마저 욕보인 장본인임을 생각하면 이쪽이 훨씬 개연성 있기는 하다


그 탓인지 트로이 전쟁 직후, 아킬레우스의 망령이 나타나 폴릭세네를 자신에게 산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했다는데


폴릭세네는 노예로 사느니 제물로 죽겠다며 품위 있게 최후를 맞았다고 전해진다



어떤가? 우리가 흔히 아는 사랑에 빠진 폴릭세네 전승과는 사뭇 다른 위엄이 느껴지지 않는가?


물론 그렇다고 순애 장붕이들이 실망해서 오열할 필요는 없다


아까 말했듯이, 폴릭세네 전승은 분명 여러가지로 나뉘는 게 사실이고


아킬레우스와 순애를 찍은 폴릭세네 전설 또한 틀림없는 메이저 전승이기 때문이다


허나 전설은 아무리 여러 갈래로 갈라져도 언제나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는 법


만약 이 두 전승이 모두 일부의 진실을 품고 있다면?



이 두 판이한 전설이 모두 사실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런 뒷사정을 추리해볼 수 있다


처음의 폴릭세네는 분명 오빠들의 원수인 아킬레우스를 증오하며 그를 함정에 빠뜨려 죽이려고 했다


그래서 파리스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몰래 암살을 꾀했겠지


하지만 아킬레우스와 몇 차례 더 만나고, 그녀의 아버지 프리아모스가 그랬듯 그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면서 생각이 조금씩 바뀐 게 아닐까?


자신이 이 전쟁에서 소중한 사람을 잃은 것처럼, 아킬레우스도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던 전우들을 잃었고


특히 그는 이 전쟁에서 반드시 전사한다는 예언을 받은만큼, 절대로 살아 돌아가서 부모님을 만날 수 없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을 테니까


이 과정에서 나름대로 측은지심과 동병상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 감정이 천천히 사랑으로 발전했을지도 모르고


더욱이 아킬레우스와의 혼인이 정말 전쟁을 끝낼 수 있는 단초가 된다면, 개인적인 복수심을 접고 트로이의 명운을 위해 그의 아내가 되는 선택을 하려고 했을 수도 있지


폴릭세네 또한 가족을 잃는 슬픔과 비극을 더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을 테니


허나 우리의 자타공인 찌질남 파리스는 이런 동생의 변심 따위 개의치 않았고


자칫 둘이 결혼해서 평화가 오면 헬레네를 뺏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암살을 속행한 게 아닐까?



어쩌면 아킬레우스의 망령이 나타나 그녀를 요구한 것은 복수가 아니라 연인에게 베푸는 마지막 호의였을지도 모른다


폴릭세네의 말마따나, 노예로 치욕스럽게 살지 않고 공주로서 떳떳하게 죽을 수 있도록 해준 셈이니까


막말로 거기서 안 죽었으면 폴릭세네 또한 카산드라나 안드로마케처럼 누군가의 첩으로 끌려가 강제로 그리스인의 아이를 낳았을 운명이었으니 말이다


결론은 참으로 씁쓸한 신화가 아닐 수 없다


파리스 개객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