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도 큰 의미는 없는 연극이지만 그래도 끝까지 해야겠지요. 좋습니다. 이제 모두 끝났습니다. 

지금부터 당신은 우리의 복지 대상자이며, 신청인에 대한 지원 사항을 집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지금부터는 평생 해 온 공무원 대신 다른 인생을 살아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날 가능성은 희박하거니와, 

시준이 임용되었던 시대와 그가 성인이 될 지금부터 2, 30년 뒤는 연금 혜택도 많은 차이가 난다.


시준은 약간의 긴장감으로 집행을 기다렸다. 이런 불확실성은 그의 삶에서 꽤 오래간만이다. 

다 잊어버린 줄 알았던 모험심이 재 아래의 숯불처럼 피어올랐다.


깊이 생각했음에도 그가 어쩔 수 없는 3차원상의 지성체이기 때문에 고려하지 못한 것은, 

‘무작위 배치’가 꼭 공간에 국한된 말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중략)


결국 우주의 법칙은 냉소적인 면에서는 꽤나 잘 맞아 들어간다. 

시준은 주로 동양적 설화로 들었던, 사후세계 관리자들의 유쾌한 실수가 자신에게 일어나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 환각과 몽상의 퍼레이드 속에서 자신에게 들린 말을 부정할 수도 없었다.


‘야. 삑사리났는데.’


‘상계(相計) 처리하자. 걔 저기로 보냈으니 한 놈 다시 여기로 끌어오면 되지. 숫자만 맞으면 위에서는 신경 안 써.’


시준이 상황을 빨리 파악한 것은 이것이 그도 해 본 실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민원인 상대로 전화를 끊지 않은 채 동료와 황급히 의견을 교환하는 듯한 상황이었다.

시준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은 지독한 동족 혐오였다.


“공무원 놈들, 일 이 따위로 할 거냐!”



공무원 욕하는 공무원의 이세계 전생 스타트








“그럼, 당연히 그자는 잡아왔겠지요? 들켰다는 것을 알면 내빼 버릴지도 모르니.”


“이를 말이겠는가. 우리 애들이 광에서 정양(靜養)시키고 있네. 

아, 그러고 보니 되놈들이 먹는 물건인지 뭔가 요상한 게 밭에 있기에 뽑아왔는데, 이게 그 저번에 서양인들이 갖고 온 그거 아닌가?”


시준은 크게 놀랐다. 홍총각이 들고 온 것은 감자였다.


하긴 몰래 월경해서 초막 사는 주제에 벼농사를 짓기는 힘들 거고, 

생육 기간이 벼보다 훨씬 짧은 감자는 비밀기지에서 기르기는 적합하다.


이런 용도로 더 적합한 순무 같은 것도 있기는 하나, 

그렇게 맛없는 것까지 씹어 가며 밀수상 정신을 불태울 자는 많이 없을 것이다. 그런 건 군인들이나 죽지 못해 먹는 거다.


“그 사람을 제가 한 번 보아야겠습니다. 되말 말고 중국말도 할 줄 알지요?”

“좀 타이르니까 조선말도 술술 하더라고.”

“역시 봉(棒, 몽둥이) 통사가 통사 중 제일이지요.”


물푸레나무 통사는 조정의 어지간한 역관보다 뛰어났다. 

이름을 진사뢰(秦士雷)라 하는 그 한인은 조선에 감자 농사법을 전파하고 씨감자 다량을 제공하는 대공을 세우고 다시 갇혔다.




몽둥이(棒) 통역관 특) 지구 어디에서든 안 통하는 곳이 없음









조선의 쌍검 '사대'와 '조공'은 항상 중국을 푹푹 찌르며 천자를 괴롭혀 왔다.

아무리 그래도 약자의 입장이니만큼 조선이 명보다 더 많은 이득을 취했다고 하면 과장이다. 

명의 시조가 도적 출신임을 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명나라 역시 만만찮게 골치를 앓았다.


벌써 춘추전국시대에 관중이 '그냥 걔네 거 팔아 줘야 쓸데없이 약탈하러 안 오니까 싸구려라도 좋게 쳐 줘라' 했기 때문에

그 말을 옳게 여긴 명나라도 받았을 뿐이다.

회귀군주 정통제가 왜 잡혀가서 전무후무한 2회차 황제를 했는가. 오이라트가 조공 바치겠다는데 거부해서 그렇다.


조선의 경우 절대 힘이 없어서는 아니고 도덕국가를 표방하는 만큼 군대 몰고 명에 쳐들어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저런 별 필요 없는 물건들을 조공이랍시고 갖고 와서 '돈 줘'를 시전하는 꼴은 오이라트보다 더했다.


오이라트는 값이 폭리였어도 어쨌든 전략자원인 군마였기나 했지, 

돗자리 들고 와서 비단 내놓으라니 손님 맞을래요 소리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먹고사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국방은(명나라 기준에서) 내다 버리고 있다가 왜적이 쳐들어오니까

'군대 줘' '밥 줘' 까지 거리낌없이 남발했다.


여기에서 뽑기 잘못해서 호구군주 만력제 같은 거 나오면 그대로 나라 망하는 것이다.

그리고 명은 실제로 그렇게 망했다.




유서깊은 해줘메타의 전통과 나라 망한다!(진짜 망함)의 고려천자 만력제...








“순교자를 남겨둘 수는 없지.”

시준은 이제 주인이 죄다 끌려 나간 비변사에서 보고를 받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말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했지만, 이어진 주석의 지시는 모두가 알아들었다.


“김이익을 비롯하여, 마지막까지 패악을 부리다 자결한 반동 놈들이 행여 순절하였다거나 하는 반혁명적 언사가 나와서는 아니 되오.

그들은 전부 ‘종적을 찾을 수 없게’ 된 거요. 아시겠소?”


그 지위에도 불구하고 여태 좀 소외되어 있었던 혁명무력국장 차형기는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라면 지금까지 전쟁을 끌어왔던 엘리트 인텔리들과 달리 차형기가 전문가다.


“어김없이 시행하겠소이다. 주석 동지.”


한강은 옛날 만상이 경쟁자를 실종 처리하던 압록강보다 훨씬 크다. 빠뜨리는 보람이 있을 것이다. 


차형기는 즉시 큰 독과 ‘쎄맨’을 준비하라고 일러두었다.





평안도 상인 특) 귀찮은 놈들 강바닥에 공구리쳐서 가라앉힘










허나 남한산성의 경우처럼 이번에도 대장은 재빠르게 튀었다. 

이 북한산성의 총융청을 지휘하던 총융사 이당은 분루를 삼키며 장돌뱅이로 변장한 다음 송파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애초에 남한산성이 떨어진 시점에서 북한산성도 오래 못 버틸 것쯤 자명했기 때문에 그의 계획은 빈틈없었고 실행은 신속했다. 

총융청의 어떤 인간도 그가 도망칠 줄은 알지 못했다.


이당은, 그와 마찬가지로 강철군주 이공 최후의 삼대장이었던 어영대장 이해우나 수어사 한용탁보다도 한 수 위였다.


그는 바로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이초(李岹, 선조의 친부)의 자손으로서, 

임진년의 의주대로 최속전설 선조와 조상을 공유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똑같이 덕흥대원군의 자손인 인조의 실수는 반복하지 않을 만큼 역사의 전범도 배웠다.

힘 빠진 조정 토벌군 따위가 이당을 잡을 수 있을 리 없으니, 이로써 선비에게 가문의 근본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잘 알 수 있었다.





'최속의 군주', 찰나를 지배하는 자 선조 이연








임진년과 정유년 왜군을 막은 것은 아무리 인색하게 쳐도 반은 명나라 만력제의 공이요, 

병자년의 여진족 군대를 물러가게 한 것도 군병이 아니라 인조의 유연한 척추 및 경추였지만, 

아무튼 저리 표현해 놓으니 김조순도 스스로 설득되는 기분이 들었다.


김조순은 즉시 왕과 대면했다. 이공 또한 지금 사태가 사태이니만큼 사감은 잠시 접어 두었으며, 

김조순 역시 왕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훈련도감 군사를 움직이자는 말은 꺼내지도 않았다.

그 협의의 결과는 곧 얼마 전 복직한 총융사(摠戎使) 이인수(李仁秀)가 입시하는 것이었다. 

이공은 자기도 믿지 않는 말로 유시했다.



'유연함의 군주' 인조 이종










결국 그렇게 또 사흘이 지나갔다. 정예한 훈국 병사들도 이제 자신의 소임을 깨달았다. 적어도 당장은 전투할 일이 없는 것이다.


물리적 관측으로서 간섭하지 않으면 조선군의 운동량과 위치는 확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병사들이 조선군의 장기를 발휘하여 하나둘 양자 확률 구름 속으로 사라질 채비를 마쳤을 때쯤이었다.


(중략)


결국 황해 병영은 여기저기 동가식서가숙한 끝에 최종적으로 (원래 있던) 황주 읍성에 정착했다. 

실록에 따르면 정방산성은 영조 초기의 기록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수리 논의조차 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대체 지키지도 못할 성을 왜 쌓았느냐며 욕할지도 모르겠으나, 

그건 인조 더 워로드의 선견지명과 조선군의 고차원적 물리학을 깊이 알지 못하는 사람의 말이다.


황주 읍성이 함락된 지금, 양자 얽힘이 풀려 파동함수가 붕괴된 정방산성은 드디어 거시적 물질계에 현현했다. 

실제 위치와 운동량을 관측 가능한 존재로 바뀌어 혁명군을 가로막은 것이다.





조선군 특) 관찰하지 않으면 불확정성의 상태로 돌아가는 슈뢰딩거의 군대임









이제초는 눈을 부릅뜨며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이제 경애하는 주석 동지, 정시준 진인께서 하늘에 서리라!”


엄청난 함성과 함께 꽹과리와 징이 다시 요란하게 울렸다. 선비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자리에 털썩털썩 주저앉았다.

전쟁을 빨리 끝낼 수만 있다면 사이비 교주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시준의 각오는 보통이 아니었다.


시준은 자기를 의심스럽게 쳐다보는 정약전과 남공철에게 모든 것은 이제초의 독단이라는 꼬리 자르기식 표정을 돌려주었다. 

혁명막부 정치국은 누가 더 낯짝에 철판 깔았는지 겨루는 대결의 장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철판 밑에는 수치심이 아직 남아 있다. 시준은 더 부끄러워 죽기 전에 재빨리 지시를 내렸다.

시준은 말보다 설득력 있는 것을 준비했다.

혁명군이 의주천(캔버스 천)을 벗기자 곧 녹이려고 했던 16리브르 함포가 그 거체를 드러냈다.


여기 있는 대부분의 조선 사람은 저놈들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단숨에 알아챘다.

대포는 본래 왕실과 조정도 애용했던 조선의 유서 깊은 퇴마 도구다. 일반적으로 크고 시끄러울수록 더 귀신을 잘 쫓는다.

대포가 나왔다면 속세의 일. 혁명무력국장 차형기가 나서서 선언했다.


“이 포에 불을 댕기는 자에게는 백미 한 섬을 주겠소! 

위대한 혁명의 길에 함께하여 이씨 귀신을 쫓아버릴 붉은 용사는 여기에 없는가!”


사실 시준은 여기까지 와서도 나설 자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미리 ‘붉은 용사’ 역할 할 바람잡이를 숨겨 두었다. 

누가 봐도 용사 같은 전위대장 홍총각은 대본 읊을 준비 만반으로 백성들 사이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건 시준의 오산이었다. 

홍총각은 배우 데뷔의 기회를 잠시 미뤄야 했다. 추운 건 어찌 참아도 굶주림은 그게 안 된다. 

쌀? 조나 콩도 아니고 흰쌀 한 섬? 진짜야? 하는 수군거림이 오가고 나서 어떤 느릿해 보이는 젊은이가 나섰다.






대포 특) 유서깊은 조선의 전통 퇴마도구임







정조 시대 조선 평안도에 떨어져서 장사꾼 집 하인으로 자라다가 자기 보신만 하려고 했는데 얼떨결에 '혁명' 해버리는 공무원,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추라이 추라이


초반에 주인공 신분 낮을 때에도 필력으로 다 패버리는 1티어 작가라서 크게 지루하지도 않음


매 화마다 작가후기에 배경설명도 써주니까 역사 잘 몰라도 볼만함


게다가 무려 소꿉친구 히로인이 정실배틀에서 승리하고, 서브 히로인은 남장하고 총 쏘는 포수 톰보이라는 꼴잘알 배치까지 완벽


제발 혁내취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