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유상아 그녀가 딱 한 번 이성에게 호감을 느낀 적이 있었다.
부모에 의해 강제로 등록한 바이올린 학원에서 만난 남자 선배였는데 의외로 통하는 것도 많고 얼굴도 잘생긴데다가 성격도 좋아 친하게 지낸 선배였다.
그 선배도 자신이 마음에 들었는지 유독 아껴줬고 자신도 그와 있을 때 만큼은 지옥 같은 스케줄의 무더미에서 숨통이 트이는 듯해 자주 붙어다녔다.
물론 그로인해 둘이 사귀는 거 아니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지만 상아는 그때마다 평범한 오빠와 동생의 사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자각했을 때에는, 그 선배는 이미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그녀의 곁에 없었다.
***
“독자 형 안아줘요!”
“나도 나도!”
아침에 일어나 밖으로 나오면 이제는 익숙한 풍경이 된 유승이와 길영이가 독자 씨에게 어리광 부리는 모습이 보였다.
평범하지만 무척이나 행복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행복하다. 정말이지 행복하다.
다시 한 번 이런 풍경을 볼 수 있게 된 기적 같은 나날이 너무나 행복하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예상했겠지만, 시나리오는 끝이 났고 그 후로 1년하고도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우주의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독자 씨도 일행 모두의 노력 끝에 우리들의 곁으로 돌아왔고 안나 씨의 새로운 정책 덕에 휘청거리던 국가들도 점차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이제는 정말 많은 시설들이 다시 제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자식들아 이제 학교갈 준비나 해 늦겠다.”
“아아아- 아직 8시 45분이잖아요오- 어차피 바로 앞이 학굔데 그냥 조금만 놀아요.”
“응애 나 아기 길영! 안아주기 전까지 학교 안 갈거야 응애.”
“19살이나 먹은 시커먼 자식들이 애기는 무슨...”
“헐 아저씨 지금 저보고 시커멓다 한거에요? 완전 상처... 힝힝.”
“윽 시이발! 신유승 너 내가 애교하지 말랬지. 독자 형이니까 받아주는 거지 나 같았으면 뺨따구 한 대 갈겼다 진짜.”
“이길영 입 다물어라. 내가 니까짓 것한테 애교를 왜부리냐? 김칫국도 적당히지 븅신이.”
애들은... 입이 조금 험해졌지만 멀쩡하게 잘 커줬다.
시나리오로 인해 어린아이들이 감당할 수 없는 유년기를 보냈음에도 엇나가지 않고 잘 자라준 아이들이 너무나도 자랑스러웠다.
19살이라는 나이를 먹었음에도 여전히 독자 씨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모습을 보면 역시 애들은 애들인 것 같다.
정말 행복하다.
“이길영 신유승! 너희 내가 욕 좀 줄이랬지! 아무리 19살이어도 그렇지 너희 둘만 사는 집도 아닌데 그런 쌍욕을 하면 어떡해!”
“죄송해요오...”
“스미마셍.”
“독자 씨도! 그렇게 계속 받아주기만 하니까 애들이 선을 모르잖아요! 좀! 어른이면!! 응? 이렇게 다그칠 줄도 알아야지!!! 그렇게 실실 대면서 오냐오냐 해주면 어떡해요!!”
“죄, 죄송합니다...”
길영이와 유승이의 언어 수위가 높아지는가 싶으면 항상 희원 씨가 나타나서 중재한다. 물론 물리적으로.
딱 소리가 날만큼 세게 얻어맞은 아이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학교에 갈 채비를 했다. 독자 씨는... 상처 받았는지 구석에 쪼그려 앉아서 어두운 기운을 내뿜고 있다.
참 여전한 사람이다 라고 생각하며 그를 바라보고 있자 희원 씨가 밝게 미소 지으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상아 씨 좋은 아침이에요. 무슨 책 읽고 계세요?”
“아,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요. 한 번 읽어보고 싶었는데 시나리오 전에는 너무 바빠서 못 읽어봤거든요.”
“하핳. 상아 씨도 가만 보면 참 책 좋아하는 거 같아요. 분위기에 맞기도 하고 좋네요! 저 폐인처럼 심각한 책 중독도 아니시고.”
“이참에 희원 씨도 한 번 읽어 보는 게 어때요? 독서가 처음에는 힘들긴 해도 계속 하다보면 좋아지는데... 마침 저 거의 다 읽었으니까 2시간 쯤 뒤에...-”
“아아!!! 아아아!!! 맞다!! 해야할 일이 있었는데 깜빡했네!! 저 먼저 가볼게요!! 나중에 봬요 상아 씨이!!!!!”
하하하... 참 빠르시네.
아무리 책이 싫으셔도 한 번 쯤은 읽어보는 게 좋은데.
나중에 한 번 날 잡고 독서 카페에 가야겠다. 안 간다하면 강제로라도 데려가야지.
이렇게 일행들과 어울리며 대화를 하는 시간도 너무나 행복하다.
정말 행복하다.
정말.
“흑... 상아 씨이... 방금 저 왜 혼난거에요? 아니 애들이랑 놀아준 게 그렇게 큰 죄인가요...?”
“아이들이랑 노는 건 좋지만 그래도 어른으로서 애들이 너무 심한 욕을 하면 뭐라 하긴 해야죠. 혼날만 했으니까 반성하세요.”
“상아 씨 마저...!”
희원 씨가 떠나자마자 거의 기어오다시피 이쪽으로 온 독자 씨가 허우적거리며 내게 하소연을 했다.
그 모습이 마치 오징어 같아서 조금 웃겼다.
괜히 놀려주고 싶은 마음에 아주 조금 혼내주었는데 고작 이 말 몇 마디에 크게 반응해서 풀이 죽는 그의 모습이 귀여웠다.
응...? 아니 귀엽다는 건 취소다. 진짜로...
진짜...
.......
...솔직히 말하면 진짜인지 아닌지 나도 잘 모르겠다.
요즘 들어 유독 김독자와 눈을 못 마주치겠다.
아니 요즘이라기에는 조금 오래전부터 이랬지만.
정확히는 환생하고 나서부터 였다.
처음에는 부정맥인줄 알았으나 그와 이야기 할 때마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고 그가 던지듯이 해주는 칭찬에도 얼굴이 터질 듯 빨개졌다.
무의식적으로 하는 그의 배려 하나하나가 너무도 기뻤고 그것이 자신에게 한정된 배려가 아님을 깨닫고 혼자서 멋대로 실망한다.
정말 미치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혹시 김독자를...
아니. 아닐거다. 아니여야만 한다.
늘 그랬듯이 자신을 숨겨라.
아무도 상처받지 않게, 이 평화가 깨지지 않게.
그래. 나는 지금 이대로 행복하다.
계속, 이렇게 행복할 줄 알았는데.
그녀의 다짐은 머지않아 산산조각 났다.
***
인생은 매일매일 갖은 모습으로 변해간다.
항상 행복하지는 않을뿐더러, 항상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지 않는 법이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렇지만.
인생이 나락의 끝으로 떨어지는 순간은.
정말 한순간이다.
***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평화로운 하루의 시작이었는데.
좋아하는 책의 결말을 본 날인데.
분명 자신은, 방에서 웹소설이나 읽고 있을 김독자에게 차를 내주려고 한 것일 뿐인데.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한수....영, 이제 슬슬...”
“으읏... 조금만 더...”
얇디 얇은 목재 문의 너머로 입술과 입술이 부딪히며 채액이 섞이는 소리가 들린다.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뭘 그렇게 놀라는 거야.
사실, 너도 알고 있었잖아.
“사랑해... 김독자 나 지금 정말 행복해.”
“...나도.”
애초에 너가 저 사이에 낄 틈은 없었다는 것을.
“오늘 밤은... 같이 있고 싶어...”
“응...”
사실 알고 있었잖아.
너가. 김독자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걸.
“으흑... 아흑.. 으흐흑...”
어째서인지 눈물이 나왔다.
“아아악...! 어째서...! 어째서어어!!!!!!!!!!”
흐르는 눈물이 멈춰지질 않았다.
“왜... 왜 나는... 으흐흑... 으흑...”
몸의 통제권을 잃어버린 느낌이다.
정말 한순간의 일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상쾌했던 기분은 어디가고 매스껍고 역겨운 기분만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가슴이 날카로운 칼에 의해 갈기갈기 찢기는 듯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다.
성좌들에게 복부를 꿰뚫렸을 때도 이정도로 아프지는 않았는데.
늘 괜찮았었잖아. 이런 일이 일어나도 항상 다시 일어날 수 있었잖아. 근데... 왜 지금은 그럴 수 없는거야?
왜 항상 나에게만....
왜.....
어디가 끝인지 조차 모르는 심연의 끝으로 추락하며 그녀는 나지막히 생각했다.
김독자에게 있어 자신은, 그렇게 까지 특별한 존재는 아니었다고.
.....
아니.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으드득-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눈물이 멈추고, 그녀의 마음 속 어딘가에서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이미 금은 오래전에 그어져 있었을 지도 모른다.
나는 행복해야만 해.
그도 그럴것이.
나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잖아.
늘 잃고만 살아왔어. 지금껏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으니까...
제발. 이 세상을 만든 신이 있다면 이렇게 간절하게 부탁할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 모든 것을 바쳐서 부탁할게.
제발.
김독자와 한수영이 행복하지 않게 해줘.
내가 느끼고 있는 고통의 10분의 1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나보다 행복하지 않게 해줘.
그리고.... 그리고.....
언젠가 지친 김독자가.... 자신을 봐주기를....
그녀의 마음 속에 검은색 잉크 덩어리 하나가 떨어졌다.
독자 씨... 제가 언젠가 말했었죠?
저는... 그리 착한 사람이 아니라고. 당신이 생각하는 것 만큼 착한 사람이... 아니라고.
미안해요. 그냥... 그냥 이게 나에요.
당신은 나의 본모습을 보고 어떻게 반응 할까.
경멸 어린 시선으로 나를 밀쳐 버릴까?
동정의 시선을 보내며 나를 위로할까?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도망칠까?
아하하.
기대되네.
괜찮아요. 과정이 어떻든 간에 우리들의 끝은 반드시 해피엔딩일 테니까.
나는 항상 행복하니까. 끝에도 그럴 거야.
반드시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마지막에는... 행복해질거야.
으스러지듯 쥐어말은 주먹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붉은 피가 흐르는 손을 꽉 잡으며
그녀는 자리를 떠났다.
오늘도 나는 정말 행복하다.
***
“빌어먹을.”
상습적으로 자신의 코트를 훔쳐입는 이지혜를 응징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유중혁은 시린 손을 비비며 하늘을 올려다 봤다.
벌써 겨울이다.
하늘에서는 새하얀 눈이 춤을 추듯 떨어지며 딱딱하게 굳은 콘크리트 위에 쌓여갔다.
시나리오 때만 해도 이정도 추위는 느껴지지 조차 않았지만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오고 자신의 신체도 일반인과 같아지자 이제는 제대로 껴입지 않으면 이런 날에는 정말 감기라도 걸릴 것 같았다.
오랜만이었다.
여유롭게 거리를 걸으며 사색에 잠기는 것도.
집으로 돌아가면 자신을 반겨주는 누군가가 있는 것도.
모든 것이 낯설기만한 세상이다.
“...나쁘지 않군.”
요즘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는 일이 많아졌다.
분명 웃는 법조차 기억나지 않았는데.
마치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하듯 정신을 차리고 나서는 이미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요즘들어 살아가는 매일매일이 행복하다.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 고기파티를 해야겠어. 마당도 있으니 야외에서 고기도 먹고... 이야기도 하다가 잠에 들면 완벽하겠군.”
옛날의 자신이라면 상상도 못할 계획을 세우며 기쁜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유중혁의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
한 여성이 맨발로 거리를 걷고 있었다.
이렇게 추운날에 외투도 없이 맨발로 걸어다니는 여성을 미친년 보듯 시선을 흘리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홀린 듯이 앞으로 향했다.
터벅터벅.
앞으로 나아가면 갈수록.
터벅터벅.
여성의 얼굴이 선명해진다.
터벅터벅.
......
터벅터벅터벅터벅
아니겠지.
타박타박타박타박
......
탁탁탁탁!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자신은 달리고 있었다.
한곳에 몰린 인파들 사이를 가르며 여성에게 달려갔다.
“유상아.”
대체 저기서 뭘 하고 있는거지.
“유상아!!!!”
꽁꽁 얼어서 새빨개진 발로 힘 없이 거리를 걷던 여성. 유상아의 어깨를 있는 힘껏 당겼다.
그녀의 머리가 천천히 돌더니 자신의 시선과 그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비켜요.”
“말해.”
“비키라고.”
너무나도 처참한 그녀의 몰골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항상 보석처럼 빛나던 눈동자의 샘물은 매말랐고.
입술은 추위로 인해 파래진데다가.
머리카락은 얼마나 쥐어 뜯은 건지 고운 머릿결이 흉측하게 상해있었다.
가장 심각한 것은
“너 손이...!”
새빨간 선혈이 그녀의 손을 타고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붉은 피가 바닥에 떨어져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당장 따라와라.”
“흐흫.”
뭐가 그리 웃긴지 지친 웃음 소리를 내는 그녀를 무시하고 유중혁은 유상아를 들쳐 업어 집으로 뛰어갔다.
***
“손은 좀 어떻지?”
“별거 아니라니까... 그냥 종이에 베인거일 뿐이에요오...”
“네놈은 그게 종이에 베여서 생길 상처로 보이나?”
“에에? 생각해보니까 그렇네에? 흐흐흐흐흫.”
맛이 갔군.
이런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돌아온 집에는 모두가 자리를 비워 썰렁한 상태였다.
즉, 이 넓은 집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정신이 나간 유상아와 자신 뿐.
정말 미칠 노릇이다.
아무래도 김독자에게 연락을 해야겠다 생각해 휴대폰을 들어 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하지마요.”
“이게 뭐하는 짓이지? 당장 내놔라.”
“전화. 걸지마요.”
순식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자신에게 뛰어든 유상아가 재빠르게 자신의 휴대폰을 낚아챘다.
솔직히 방금은 자신도 조금 소름 돋았다.
유상아의 표정이 당장 사람 하나 죽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으니까.
“있잖아 중혁 씨. 중혁 씨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아무도 없는 집에 나를 데려온 걸 까나?”
“그럼 그 상처를 계속 그 꼴로 방치해 두라는 건가? 애초에 여기는 너도 살고 있는 집인데 누가 들으면 내가 강제로 아무도 없는 자취방에 끌고 온 건 줄 알겠군.”
“중혁 씨. 나 예뻐?”
“헛소리 그만하고 잠이나 자라. 휴대폰은 돌려주고.”
“나 예쁘냐니까?”
“하아... 지금 내놓지 않으면 힘으로라도 뺏겠다.”
“예쁘냐고. 그거 대답하면 돌려줄게.”
“예쁘다. 예쁘니 어서 돌려줘라.”
“으흐흥. 그렇지? 나 예쁘지?”
유상아는 어딘가 많이 망가진 사람처럼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비틀린 미소를 짓고 미친 듯이 웃어댔다.
“아하핰 아하핳하하하핰!!! 그래 그런거였어!”
“....”
“있잖아아... 중혁 씨도 내가 예쁘다 하는데 김독자 씨는 어째서 나에게 관심도 없는걸까.”
“...뭐?”
“정말 오래전부터 좋아했는데... 그런 버러지 같은 년보다 훨씬 잘해줄 자신 있는데. 평생 보필하며 살아갈 자신 있는데.”
“....”
“도대체 어쩌다가... 어쩌다가....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
대충 상황이 파악되기 시작했다.
상황이 파악되자, 표정이 굳어갔고.
지금 유상아의 태도를 보자 알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머리는 싸늘하게 식어갔고,
불편한 상황에 갈곳을 잃었던 눈동자는 유상아에게 고정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들어도 싸늘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말했다.
“한심하군.”
“......”
유상아는 어쩌면 위로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지금 상황에서 탈출구를 찾기 위해 자신에게 의지하려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웃기지마라.
나는 그런 짓에 어울려줄 생각
조금도 없으니까.
“하하하. 하하하하하. 그래. 겨우 너같은거에 이딴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내가 미친년이지.”
“잘 아는군.”
“아가리 닥쳐 역겨우니까.”
“역겨운 건 네년 아닌가? 너도 알고 있었을텐데? 김독자와 한수ㅇ...”
“닥치라고오오오!!!!!!!”
콰드득-
부서진 휴대폰의 파편이 뺨을 스쳤다.
얼마나 세게 던진 것인지 신형으로 나온 휴대폰이 완전히 박살났다.
“당신도 결국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고작 당신 같은 인간도...!! 나를... 그렇게 역겹고 구역질나고 병신 같은 실패자라고 생각하는구나아...! 응? 그런거지? 유중혁.”
“그렇게까지 생각한 적은 없-”
“했잖아.”
“......”
유상아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감정이 완전히 죽은 듯한 소름 끼치는 표정을 한 그녀를 보며 유중혁은 하던 말을 멈추고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가”
-쾅-
“그런”
-쾅-
“생각을 했으니까”
-콰직-
“그런말을”
-콰자자작-
“할 수 있는거잖아!!!!!”
-...투둑...-
그녀가 내려친 책상은 산산 조각이 났고 그녀의 손은 박힌 나무조각으로 찢어진 부위에서 흐르는 피로 검붉게 물들었다.
"그런 짓을 한다 한들 무언가가 바뀌나?"
"...시끄러워."
사랑을 하는 인간은 너무나도 어리석다.
겨우 감정 중 하나일 뿐인데, 거기에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하고, 그것으로 먹고 살며, 고민하고, 괴로워한다. 여차하면 다른 사람과 싸우는 것도 일정 마다하지 않는다.
혼자 끙끙 앓고 울며 때로는 그리워하고 그러다가 지쳐간다.
지금 보고 있는 유상아의 모습은.
쓰러져있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지쳐 보였다.
"너는 아마 좋아하는 사람을 붙잡지 못해서 그러고 있는 거겠지."
"시끄럽다고..."
"나는 그걸로 괜찮다고 생각한다."
"......뭐?"
그럼에도 인간이 사랑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적이 있다. 그것도 눈앞에서."
"뭘 말하고 싶은 거야."
"아무리 너가 김독자를 사랑해도 녀석은 그 마음을 받아줄 수 없다. 그것은 일방적인 사랑이니까."
"......"
"그렇게 혼자 힘들어하고 혼자 괴로워해서 도대체 무엇이 남는거지?"
".....겨우 그런 소리을 하려고-"
"지금 고개를 돌아서 네 모습을 봐라."
천천히 그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자 네모낳게 생긴 거울이 자신을 비추고 있었다.
그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아............"
흉측했다.
"나는 너의 매력이 미소라고 생각한다."
"......"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가볍지만 푸근한 너의 미소가 너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내가 너에게 반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고."
"..........잠깐, 뭐?"
"......? 몰랐던 건가?"
"지금 무슨 말을......"
"처음에는 그저 호기심이었다."
"........."
"어떻게 저렇게 긍정적일 수 있는 것일까. 시나리오가 시작되고 말 그대로 지옥이 된 세상에서 어떻게 개인의 이익이 아닌 생판 처음 보는 남을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인가."
"......그만."
"그러다가 처음으로 내게 농담을 건냈을 때, 나는 네가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딱봐도 재밌는 반응을 얻지 못할 상대에게 굳이 농담을 건내는 뻔뻔함. 무시 당했음에도 불편한 기색을 보이기는 커녕 멋쩍게 웃으며 사과를 하는 모습.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만해요."
"그러다가 점점 너와 있는 시간이 즐거워졌다. 가식 하나 섞이지 않은 순수한 목소리와 표정으로 재잘재잘 거리는 모습이 귀여웠다. 보는 사람마저 기분 좋게 만드는 미소가 좋았다."
".....흑...으흑..."
"지금 네 모습을 봐라. 지금 네게 미소가 조금이라도 남아있는가?"
사실, 나도 알고 있었어.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쯤은.
"어째서.... 흐윽..! 어째서 내게 이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그냥 무시해도 되잖아.... 흐윽! 그냥 미친년이라 생각하고 지나쳤어도 되는 거잖아아...!"
"별다른 이유는 없다."
"그냥"
"너의 표정이 언젠가 거울로 보았던 내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있어서."
"그래서 짜증이 났다. 어째서 이런 여자가 이렇게 돼야만 했는지."
"아......아아아아..... 흐으으으윽.....!"
맞아.
"묻겠다 유상아."
나는...
"너는 지금 행복한가?"
그렇지 않아...
전혀 행복하지 않아...
"으으윽.... 아아아악....!! 흐으윽..."
대답하고 싶은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냥 김독자가 나쁜 새끼라고 생각해라. 자신의 마음을 몰라준 김독자가 무조건 빌어먹을 새끼라고 생각하라는 거다. 그럼 조금 나아질지도 모르지."
언젠가 누군가에게 꼭 듣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만약 내가 쓰러져, 마지막 남은 힘으로 구원의 손길을 뻗는다면...
"너는 조금도 잘못하지 않았으니까."
"아............"
별거 없는 말이었다.
거창한 뜻이 담기지도 않았고,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 만큼 좋은 말도 아니었지만.
"아.... 아아아......."
지금의 유상아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이었다.
"흐아아아아앙...!! 흐아앙... 아아아아악....."
"젠장. 상처가 벌어졌잖나. 치료를 해야하니 가까이 와라."
사랑을 하는 인간은 어리석다.
하지만, 사랑을 하는 인간은 위대하다.
있는 힘껏 껴안은 유중혁의 품에서 그의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항상 텅텅 비어있던 마음의 한켠이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김독자가 살면서 쭉 한 여자의 곁에 있기로 했다면────
나는 앞으로 쭉, 영원히, 한 남자의 곁에 있자.
우습게도, 평생을 멈춰 있던 그녀의 시간은, 반복되는 시간에서 빠져나가려 했던 남자에 의해서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