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오히려 더 여유로운 주말 늦은 가을 아침이었다.
고등학교 2학기 중간고사 성적표가 나온 이길영과 신유승은
유상아의 방에 불려가 면담을 받고 있었다.
" 음.. 유승이는 이번에.. 전교 1등이네? 유승이는 진짜 공부를 잘하는구나 "
신유승은 민망한 듯 볼을 살짝 붉히며 미소를 띄었다.
" 길영이는.. 그래.. 공부가 이 세상에 다는 아니야 길영아 "
이길영은 입을 앙 다문채 눈을 피하고 있었다.
두 장의 성적표를 고이 책상에 내려놓은 유상아는 이길영과 신유승을 보며 말했다.
" 너희도 이제 슬슬 진로에 대해서 고민할 때가 왔지? 혹시 둘이 생각해 놓은 꿈이있니? "
신유승은 당당하게 입을 뗐다.
" 언니, 저는 제 특성도 그렇고 제가 동물을 좋아하니까 수의사 쪽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
유상아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 그래, 유승이는 성적도 좋으니까, 뭐든 잘 할거야. "
" 근데 길영이는.. "
이길영은 당황한 듯 말을 얼버무렸다.
" 어.. 저.. 저는 딱히.. "
그때 신유승이 이길영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 벌레새끼가 벌레새끼하겠지 뭘 해 "
" 아니야! 내가 뭐 벌레좋아한다고 벌레냐?! "
" 그럼 아니냐 벌레새끼야? "
" 아 좀!! 벌레새끼라고 좀 하지마!!! "
사소한 언쟁에서 시작된 말싸움은 이내 감정의 골을 더 깊게 끌고갔다.
사건은 한수영이 밤샘작업을 마치고 큰소리에 이끌려 유상아의 방 앞에 도착했을 때 발생했다.
" 좀 적당히 하라고!!! "
이길영은 이내 방문을 박차고 현관으로 뛰어 나갔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의 잠금장치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눈 앞에서 쏜살같이 달려나가는 이길영을 본 한수영은 놀란 채 말했다.
" 저, 저 저새끼 왜 저래? "
" 유승이가 말실수를 좀.. "
한수영의 눈에 들어온 신유승은 당황한 듯 고개를 아래로 떨구고 있었다.
" 그러게 유승아, 왜 자꾸 벌레새끼라 그래. 내가 언젠간 일 터질 줄 알았다. "
" 아 쟤도 맨날 저보고 똥개라고 그러잖아요! "
" 시나리오 끝난 뒤에는 한번도 안그랬잖아. "
말을 끝마친 한수영은 레몬티를 한모금 홀짝거린 뒤 한숨을 푹 쉬고는 다시 말을 꺼냈다.
" 에휴 저거 또 어디서 찾냐.. "
" 독자씨에게 부탁해볼까요? "
" 독자 건강검진 때문에 공단갔어, 바뻐. "
방 안의 세 사람은 난감한 티를 역력히 내며 고민하고 있었다.
그 때 유상아의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 제닉스 편의점 1850원 일시불 결제 2XXX년 XX월 XX일 XX시 ]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했던 이길영과 신유승은 유상아에게로부터 용돈을 지급받아 생활하고 있었다.
유상아가 내민 핸드폰의 메시지를 본 한수영은 어이가 없는 듯 웃으며 말했다.
" 허, 이 새끼 지혜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건가? "
" 그래도 뭐, 덕분에 금방 찾겠네. "
유상아는 핸드폰을 다시 건네받곤 나갈 채비를 했다.
한수영은 나갈 채비를 하는 유상아를 가로막곤 말했다.
" 왜 너가 가? 유승이가 가야지. "
그 말을 듣곤 신유승이 고개를 들어 한수영을 바라보았다.
" 결자해지. 알지? 둘이 사이좋게 손 꼭잡고 들어와. 그럼 언니가 맛있는거 사줄게 "
신유승은 별 말 없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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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상으로는 가을이였지만 10월 마지막 주의 주말은 정오임에도 불구하고 기온이 한자릿 수 대로 떨어질 만큼 추웠다.
외투도 입지 않은 채 공원 벤치에 앉아 벌벌 떠는 이길영이었지만, 그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추운 가을 날씨에도 소년의 마음에 풀어지지 않은 상처는 왜 때문이었을까?
이길영은 다재다능한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을 보며 쉽사리 불안감에 빠져 지냈다.
시나리오때는 곤충과 교감해 여러 도움을 주었던 그였지만,
시나리오가 끝난 뒤에는 곤충과의 교감은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시나리오가 끝난 뒤에도 여전히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신유승을 보며
이길영은 항상 스스로 자책하며 자신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곤 했다.
더군다나 신유승에게 호감이 있었던 그였기에, 더욱 큰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 나쁜놈.. '
이길영은 벤치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얼어 죽지 않으려면 카페든 어디든 따뜻한 곳을 찾아가야했다.
그의 손에 쥐어있는 캔커피는 온기를 잃은 채 오래였다.
그 때 주변을 돌아보던 이길영은 자신을 찾으러 나온 신유승과 눈이 마주쳤다.
소년은 기겁하며 공원 반대 쪽으로 달렸다.
하지만 그가 간과한 점 한가지.
신유승이 전교 1등인 것은 공부 뿐만이 아니였다.
신유승의 50m 달리기는 능력치의 영향을 배제하고도 6초 초반대.
이길영은 스무걸음도 채 못 가 신유승에게 뒷덜미를 잡혔다.
신유승은 이길영의 뒷덜미를 잡고 끌고가 공원 벤치에 앉혔다.
그리곤 팔짱을 끼며 이길영을 무섭게 내려보았다.
이길영은 왠지 모르게 자신이 잘못한 듯 위축된 표정이었다.
" 너 어쩌려고 그래? 아무리 기분이 나쁘다 해도 그렇게 집을 나가?! "
" 넌 정말.. "
말 끝을 흐리는 신유승을 보고 이길영은 움찔했다.
" 야, 내가 잘못했냐? "
처음으로 진심으로 화난 채 자신을 쏘아보는 이길영의 모습을 보고 신유승은 아차 싶었다.
신유승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누구에게나 잘못한 것은 사과하고, 잘한 것은 칭찬해주고, 감정표현이 풍부한 신유승이었지만
이상하게 이길영 앞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사춘기 청소년 중에서 자기 감정에 솔직한 사람은 몇이나 될까.
신유승은 이길영 앞에서는 자기 감정에 솔직하지 못했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이쁘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외모를 가진 신유승이
같은 반, 옆 반, 다른 학년, 다른 학교 남학생들에게 수도없이 고백을 받아도
단칼에 거절하는 이유는 또 무엇이었을까.
그렇게 몇분이 지났고, 신유승은 이길영의 빨개진 귀를 보았다.
추운 듯 팔짱을 끼고 부들거리는 이길영을 보고는
신유승은 괜시리 마음이 아파왔다.
" 앞으론 벌레라고.. 안 부를게 "
신유승은 자신이 목도리를 풀러 이길영에게 둘러주었다.
" 그니까 미련하게 이러지 말고 집 가자. "
그녀의 한마디의 소년의 상처는 눈 녹듯 사라졌다.
자존심으로 단단히 잠긴 이길영의 문을 연 것은 신유승의 약속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의 목도리를 둘러주며 온기를 전하는 신유승의 모습을 보고
이길영의 심장은 조금, 겨우 스스로 느낄정도로 더 빠르게 뛰었다.
" 알았어.. "
자리에서 일어난 이길영은 신유승과 나란히 걸었다.
신유승의 키는 이길영의 어깨높이를 겨우 따라잡았다.
그런 신유승을 곁눈질로 보며 이길영은 왠지 모를 설렘을 느꼈다.
" 나 커피 사줘. "
" 아이씨 이게 진짜 "
" 에휴 가자 사줄게 "
카이제닉스 구의 고풍스러운 한 카페로 들어가는 그들의 주변은
늦가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따뜻한 기운으로 감싸여
마치 봄과 같은 기운을 자아냈다.
***
유상아의 부탁으로 몰래 그들을 따라간 비유는
이 순간을 놓치면 안되겠다 싶어 사이좋게 나란히 걸어가는 이길영과 신유승의
모습을 촬영해, 김독자 컴퍼니의 어른들만 있는 단톡방에 보냈다.
각자의 일터에서, 집에서, 거리에서 이길영과 신유승의 사진을 본 일행들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