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 남자가 있다.
그 인간 남성은, 특이한 이름에 특이한 외모를 지녔다. 흑발에 흑안. 그가 살던 고향에서는 굉장히 흔한 외모였지만, 이곳에선 그렇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검은 머리칼과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악마로 몰렸으며.
그와 눈을 마주친 사람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도망쳤다. 또 누구는 그를 살해하러 무기를 빼어들고 달려들기도 했다.
그 남자는 도망쳤다.
살기 위해 도둑질을 하고, 살기 위해 사람을 죽였다.
그는 계속해서 도망쳤다.
더 이상 '인간'들이 쫓아오지 못하도록 어느 숲 깊숙한 곳까지.
그 남자가 발을 들인 곳은 마물과 마족들이 들끓는 인외마경, 속칭 '마계'와 이어지는 곳이었고, 먼훗날 그는 그 마계의 지배자 중 하나가 된다.
그 과정에서 그가 흘린 피와 흐르게 한 피는 바다를 이루었다. 그의 행보를 본 존재들을 그를 흉악하고 혐오스런 존재라 말하지만...
그 모든 것은, 그 남자가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비명이자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그 시점에서, 그는 이미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슬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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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이미 그의 주위에는 수많은 시체들이 늘어져 있었다. 사인은 다양했다.
목이 잘려 죽거나, 심장이 꿰뚫려 죽거나, 상반신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시체도 있었다.
"끄륵....커헉...."
최후의 생존자 1명.
아니, 그의 상태를 보면 도저히 생존자라고 부를 수 없었다. 양팔은 으스러져 검을 잡을 수 없었고, 한쪽 다리가 잘려 일어설 수도 없었다.
한쪽 눈마저 잃어 세상의 반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세상의 반에,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동자를 지닌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넌...끄윽...넌 반드시 죽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주를 퍼붓는 만신창이의 남자.
남자는 저주 속에서도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런 말은 이미 수천번은 넘게도 들었습니다."
"용사...용사가...널 죽일 것이야..."
"저도 그정도는 압니다. 이 세계가, 저를 미워하고 있다는 걸요. 그러니 이제는 진짜 용사를 보내겠죠. 저를 죽일 진짜 용사. 그러니......"
남자가 손을 들어올리자 기사는 눈을 감았다.
곧, 기사는 축 늘어졌다.
남자는 고개를 들어 핏빛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은 화가 난 듯, 천둥번개가 치고 있었다.
"이제는 죽을 수 있겠지."
남자는 이내, 시체들 사이에서 사라졌다.
하늘에서 빛이 번쩍였다.
.
.
.
이름, 유상아.
나이, 26세.
출신, 대한민국.
여느때와 다름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하고 저녁 늦게 퇴근하는 사회 초년의 삶을 살고 있던 그녀.
자전거를 타고 귀가하다 술에 취한 채 운전을 하던 음주운전 차량에 뺑소니를 당했고 그만 사망했다.
20년 동안 노력해 입사한 직장, 그러나 1년도 채 되지않고 파릇파릇한 20대 중반의 나이에 죽었다.
그래, 분명 그때 자신은 죽었는데......
"용사님이 깨어나셨다!"
"와아아아아!"
굉장히 시끄럽다.
원래 사후세계란게 이렇게 시끄러웠던 건가?
그래도 죽어서도 끝이 아니란 것에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건가? 그래, 죽었는데 아무것도 없는 새카만 공간에서 눈을 뜨는 것보단 낳잖아......
라고 생각했던 자신이었다.
알고보니 이곳은 자신이 살던 대한민국이 아니었다.
아니, 대한민국이 뭔지는 알까? 아마 이곳은 지구도 아닐 것이다. 자신은 나름 한국사와 세계사에 관심이 많았다. 집안이 부유해 예술 작품을 보러 갔단 적이 많았고 나름 재미도 있어 기억에 담아뒀던 것들이 많았다.
그런데 지금 이곳의 건축물들은......도저히 자신의 머릿속에 것들과는 매치가 되지 않았다.
과거로 왔다면 비슷한 양식이라도 있어야 할텐데.....억지로 닮은 점을 찾자면 그리스 양식이었다.
아무튼, 중요한 건, 이곳은 지구가 아닌 다른 세계. 게임 회사에 다녔던 상아는 이곳이 이세계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이 그곳에 나오는 '용사'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
알고보니, 이 세상은 신의 존재를 믿고, 과거부터 이세계에서 용사를 불러 재앙이나 위기를 해결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세계에는 '정해진 틀'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곳에서 태어나는 사람들은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기 매우 힘들다고 한다. 일종의 '운명'과도 비슷한 개념.
그러나 이세계에서 온 사람들은 자신들의 세상의 정해진 틀에 얽매이지 않고 행동할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 그리고 무슨 이유에선지는 몰라도 배운적도 없는 이세계의 문자와 문법체계가 자연스레 완성되는 것. 사람들은 이것을 신의 축복이라 하던데... 아직 신의 존재를 믿지는 못하겠다.
그렇게 이세계에서 깨어난지 3일째 되던 날.
들어본적도 없는 이름의 종교 단체의 교황이라는 사람과 만나고, 자신이 머무르는 왕궁의 국왕과 그의 가족들을 만났다.
3일동안 놀기만 한 것도 아니다.
바로 자신의 적성을 찾은것.
이세계는 정말로 마법이 존재했는데 그것을 보고 흥미가 돋았다. 나름 자기관리를 잘해 체력에도 자신은 있었지만 자신보다 큰 대검을 휘두르는 건 차원이 다르다.
"먼저 마법의 개념을 이해하려면 M-언어를 아셔야 하는데......가장 기본적인 비드웰 방정식을 사용하려면......"
M-언어는 이곳에서 쓰는 C-언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았다. 수학 공식과도 비슷한 느낌이어서 공식을 외우고 그곳에 정확한 값을 대입해 마법진을 만들어낸다.
상아는 2시간만에 마법진을 만들어냈다.
죽었다 깨어나서 그런가? 뭔가 집중도 잘되고 머릿속이 깨끗한 느낌이다. 그리고, 날 가르치던 마법사가, 내가 2시간만에 마법진을 만들어냈다는 소식을 알렸고, 벌써 내가 현자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아직 화장실을 쓰는 건 좀 불편했지만......그래도 마법이란 것은 배우면 배울수록 신기하고 아름다웠다.
형형색색 빛나는 마법진이 자신의 손에서 회전하면서 뿜어져나오는 마법을 볼때마다 쾌감이 들었다.
그러나 막상......마왕이란 자를 잡으러 가야 한다니...좀 두려웠다. 게임을 만들기 위해 읽었던 판타지 소설에서 나왔던 여러가지 괴물들, 마왕을 숭배하는 잔인한 광신도들 같은게 생각났다.
'그래...세상은 이렇게 밝고 깨끗하지만은 않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자. 괴물도 죽여버릴 정도로 마법을 연습하면 되는 거야.'
스스로의 다짐을 끝낸 상아는 차분하게 마법을 연습해 나갔다.
그렇게 다음달로 계획된 용사 출정식은, 단 하루만에 무산되어버렸다.
그들의 앞에, '마왕'이란 자 존재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것도, 단신으로.
.
.
.
"멈춰라!"
호기롭게 검을 빼어든 늙은 기사.
마왕의 전후좌우에는 이미 수많은 병력이 그에게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노기사는 식은땀을 흘렸다.
마왕은 용사를 노리고 온 것이다. 용사가 성장하기 전에 미리 싹을 짓밟으려고 했던 모양. 이렇게 된 이상 용사라도 탈출시켜야 한다, 라고 생각하고 이를 꽉 깨물었다.
은퇴를 앞두고 있던 그는, 왕국에서 가장 노련하고 뛰어난 검사였다. 그러나, 그는 안다. 마왕에게 이런 일반 병력들은 아무런 흠집도 못낸다는 것을...
자신과 비슷한 급의 강자라면 모를까...
그러나 마왕이 공격해오리란 예상과는 달리, 그는 병력들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자신 너머에 있는 왕성.
그곳에 머무르는 용사의 위치를 가늠하고 있는 것 같았다.
까드득...
무시당한 것이다.
왕국의 전력 앞에 태연히 서 있다는 것. 이 왕국의 모든 것과 자신의 실력을 무시하는 것이다.
안다. 마왕에겐 자신들은 아무것도 아니란 것.
그러나 흥분해선 안된다.
"......마법 부대들은, 합체 마법이 완성되는 즉시 시전하도록."
"예!"
아직, 그가 방심하고 있을 때.
왕국의 모든 마법사들의 합체 마법을 발동해 발을 묶는다.
잠시 뒤, 합체 마법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에 노기사가 검을 치켜들었고.
레인저들의 마나가 담긴 화살이, 기사들의 마나가 실린 검기가, 마지막으로 마법 부대의 합체 마법이 펼쳐졌다.
[홍염의 바다!!]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아려올 정도의 홍염, 모든 걸 녹여버릴 기세의 홍염의 기둥들이 자신을 덮쳐올 때, 마왕은 그제서야 움직였다.
검은 깃털 날개가 펼쳐지고, 뿔이 솟아났다.
그가 내뿜은 격만으로 화살과 검기가 흩어졌다.
홍염을 피해가며 마법진을 파훼했다.
[혹한의 폭풍!!]
"냉기저항."
숨을 내쉬는 것만으로 폐가 얼것만 같은 마법.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만으로 그는 마법을 견뎠다.
그는 계속해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 용사가 있었다.
.
.
.
상아는 눈을 끔뻑였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굉음과 시시각각 바뀌는 기운. 기운은 붉은색으로 변했다가 시리도록 차가은 하얀색으로 변했다.
마왕이라니...
생각해보니 멍청했다.
어떤 멍청이가 자신을 죽이려 오는 사람을 가만히 놔두고 있을까?
이세계는 강함에 생명이 좌지우지되는 세계. 마왕이란 자가 자신을 죽이는데는 3초도 안 걸릴 것이다.
수많은 기사들과 영웅들을 죽인 악마. 그것도 곱게 죽이는 것도 아닌, 참혹하게. 피에 미친 학살광. 자신을 건드리려 한 자들을 한명도 살려보내지 않았다.
이것들은 마왕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두려웠다. 그런 존재가, 지금 자신을 잡아죽이려고 쳐들어오고 있다. 상아는 도망쳐야했다.
그녀를 호위해주는 근위 기사들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근위 기사들은 말했다, 저곳에 있는 모두가 이미 자신의 끝을 각오했다고.
그러나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억지로라도 발을 떼려던 그때.
"단장님....."
"알고 있다...."
더 이상 굉음이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그말이 의미하는 것.
왕국군이 전멸했거나, 혹은 마왕이 물러갔다거나.
당연히 후자에 희망을 거는 그들이었지만....
"제기랄......"
어느새 자신들의 앞에 나타나있는 마왕을 보곤 욕설을 내뱉었다. 마왕은, 고개를 돌려 용사를 바라보았다.
용사, 상아는 마왕과 눈을 마주쳤다. 그는 흑발에 흑안을 하고 있었다. 마치 고향 사람들처럼.
마왕은 웃고 있었다. 그 존재를 마주한 순간...상아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익숙한 기분.
"당신이군요."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고향의 언어. 한국어를 들었을 때, 상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왕은 그 반응이 마음에 들었던 것인지, 국왕 내외를 감싸고 있던 근위 기사들과 모두를 기절시켰다.
마왕은 용사를 들쳐업고 사라졌다.
그리고 상아가 다시 정신을 차리기 까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녀가 눈을 뜬 곳은, 마왕성이었다.
그것도, 지하감옥이나 고문실 같은 곳이 아닌...푹신한 침대 위.
아직 어린 용사는 그저 눈을 끔뻑일 수 밖에 없었다.
다음에 계속
ㅡㅡㅡㅡㅡ
새로운 시리즈 독상 용사마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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