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녀님, 수녀님! 마왕님 오셨어요!"


즐거운 듯 방방거리며 발을 구르는 아이를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쉬고 웃었다.

하지 말라 해도 결국에는 당당히 하고서야 마는 당찬 아이였다.


"하영아, 굳이 알리지는 말라고 했잖니."

"에이, 마왕님도 참. 저번에 수녀님이랑 친구 하시고 싶으시다고 하셨잖아요. 방문도 제대로 알리지 않는 친구가 세상에 어디 있어요?"


곱슬거리는 금발이 장난스러운 인상을 주는 아이가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설마 친구가 뭔지 잘 모르시는 거에요? 에이, 설마."


조금은 놀리는 듯한 말투.

제 이명인 구원의 마왕이 오글거린다며 놀렸을 때, 그때의 장난스러운 말투였다.


"하아... 당연히 알긴 알지."

"그러면 왜 그러시는 건데요? 한동안 잘 지내시다가 갑자기 어색해 하시고, 혹시 무슨 일 있었어요?"

"...그 무슨 일이 뭐라고 생각하는 데?"

"음.... 실수로 함께 넘어져서 어색한 자세로 있었다던가, 아니면 어른들의 비밀? 그 뭐 볼려고 하면 어른들의 비밀이라면서 끌고 가는 게 있잖아요. 사실 알 만한 거는 다 아는 데, 쳇."


"....하영아."


적당히 하자, 응?


조금은 살벌해 보이는, 그렇지만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서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몇가닥 붙잡고 잡아당겼다.

악감정을 담아 조금 세게, 그렇지만 다치지는 않을 정도로만.


앞의 예측은 일어날 법한, 아니 실제로 일어났던 것이지만, 뒤의 예측은 좀 너무한 게 아닌가.

족집게처럼 맞추는 탓에 흠칫거렸던 것은 잠시였고, 그저 우연히 맞춘 것이라 생각하며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그러면서도 그 한마디에 그 때에 보았던 붉어진 얼굴이 다시 떠올라 민망해졌다.

어느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지 말게 해달라고 마음 속으로 빌었다.


"아, 장난이에요, 장난!"


벗어나려 발버둥 치는 모습에 잡고 있던 머리카락을 다시 놓았다.

아프다고 구시렁거리면서도 작게 한숨을 내쉬자 눈치를 보는 모습은 익숙한 모습이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기다리던 사람이 보였다.

기다렸지만 조금은 어색한 사이가 된, 그런 사람이.


"어...아 벌써 오셨네요. 저번 주 주말에 마지막으로 오셨던 것 같은 데."

"아... 네. 그냥 뵙고 싶어서..."


조금은 어색한 기류가 둘을 맴돌았다.

끝없이 침묵만이 이어질 정도로.


한동안 잘 지내던 때에 편하게만 나왔던 말은 입안을 돌아다니다 사라질 뿐이었다.


"....거봐요, 수녀님이랑 마왕님 사이가 갑자기 어색해지셨다니까요! 친구 사이인데 일주일이 왜 벌써에요, 오랜만이지!"


답답하기만 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장하영이 가까이 다가서며 말했다.


"불편할 수도 있으니 저는 빠질 테니까 둘이서 대화 좀 잘해봐요. 진짜 보는 사람이 다 답답해 죽겠네!"


거 되게 눈치도 더럽게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장하영이 손을 잡아 끌더니 손들을 한 데 모아 쥐여주었다.

서로 손을 맞잡게 된 모양새를 바라본 장하영이 그게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떠나갔다.


"그러고도 어색하면 동네 뒷산에 올라가서 자기 이름이랑 나는 멍청이다 열 번 복창하고 와요!"


동네 뒷산이라고 해봤자 야트막한 동산에 불과할 뿐이지만 메아리가 잘 울리는 산이라 동네에 알릴 말이 있으면 그곳에서 외치기만 하면 될 정도다.

조금이라도 어색해 보이면 그냥 확 공개처형을 시켜버리겠다는 말이다.


"음... 일단 뭐라도 좀 말해야 하긴 하겠죠?"

"그래야 할 것 같네요. 어... 지금 좀 어색해진 게 그 저번 주에 있었던 일... 때문인 것 같은데요."

"아... 저번 주에는 죄송했습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닌 데 발이 꼬여서.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실수로 그런 것 같기는 했어요. 그리고 뭐 원래 그러시는 분이 아닌 것도 알고 있고요."


"...술이나 좀 마시고 갈래요? 포도주 좀 남은 게 있어서요. 뭐 친구끼리 어색해지면 같이 술 마시면 된다는 말도 있잖아요?"

"좋습니다."


-


술에 취하면 못할 말이 없어진다는 게 사실이었을까.

조금 전에 어색하던 분위기가 무안해질 정도로 말은 편하게 흘러 나올 뿐이었다.


몇분 전에는 입술조차 제대로 떼지 못할 정도였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숨이 막힐 듯 어색했던 분위기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전에는 마왕님도 인간이셨다고 하셨잖아요.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지내셨는 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냥 알고 싶어서요."


과연 말해도 될까.

들을 때마다 그저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던 질문이었지만, 술에 취한 탓에 굳어버린 머리는 이미 옛날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이미 빛바래버린 사진과도 비슷한, 잊혀져버린 옛날이야기를.


"처음에는 저도 평범하게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동네 친구들과 웃고 떠들면서 놀고, 그렇게 평범하게 살았었죠. 그런데 어느 날 악마들이 쳐들어왔습니다. 불 타는 마을 한복판에는 저 혼자 살아남아서 울고 있었고요.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 채로 말입니다. 그 후에는 수도로 갔던 걸로 기억합니다. 가진 것은 사지 멀쩡한 몸 밖에 없었지만 병사로 지원하려고요. 곧장 죽어버려도 상관없을 목숨이라면, 차라리 복수를 하고 싶어 했던 것 같습니다."


"흔한 군사용 칼을 들고 악마와의 전쟁터에 일개 잡졸로 나가 계속 싸웠던 걸로 기억합니다. 계속 죽이는 피비린내 나는 삶이었던 것 같습니다. 일개 병사 주제에 동료.....도 있었던 것 같지만 잘 기억나지 않는 걸 보니 먼 옛날에 죽었겠죠. 뭐 살아있었다 해도 지금쯤이면 죽었겠지만요."


"그렇게 계속 죽이면서 살다가 어느 날은 용사가 되었습니다. 100번도 넘게 전쟁에 나가서 살아남았다는 게 이유였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일개 병사한테 주는 것을 보니 나라에서는 최선을 다했다는 식으로 생색을 내려한 것 같습니다. 가족도 없어서 그냥 죽어도 상관없을 사람을 용사로 포장해서 보내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한 것처럼 보이지 않겠습니까? 나라는 최선을 다했지만 안타깝게도 실패하고 말았다, 이런 식으로 포장하려 했겠지요."


"용사가 되면서 새롭게 동료도 생겼습니다. 처음에는 정을 주고 싶지 않았지만 생각처럼 되지는 않더군요. 역사에 자기 이름이 기록될 것이라며 들떠했던 가벼운 성격의 동료도 있었고, 과묵하지만 의외로 다정했던 동료도 있었습니다. 조금 까칠한 성격의 동료와 싸우는 것은 잘하지만 둔감했던 동료도 있었고요. 저는 잘 모르겠지만 동료들만큼은 역사에 기록될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용감했고, 대단했죠.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했고요."


"그러다가 마왕을 마주했습니다. 복수의 대상이었던 마왕을요. 눈이 뒤집혀 날뛰면서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르며 싸웠던 걸로 기억합니다. 복수에 눈이 멀어서 였을지도 모릅니다. 옆에서 이미 크게 다쳤다며 말리는 말을 듣고서도 무시하며 싸웠던 걸로 기억하니까요. 그게 눈이 먼 사람이 할 짓이 아니면 뭘까요? 정말 멍청했죠. 그런 저를 보호하려다 동료들이 죽은 걸 보고서야 정신을 차린 걸 보면 말입니다. 저는 사람 이끄는 것 하나 만큼은 더럽게 못하더라고요. 이끄는 사람 하나 못 지키고, 정말 바보 같지 않습니까?"


"이미 너무 늦어버렸을 때, 그때의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마왕을 죽이는 것. 적어도 그 죽음들이 개죽음 만큼은 되질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요. 저는 이번에도 누군가를 지킬 수 없더군요. 전보다 강해졌는 데도 말입니다. 그렇게 몸이 너덜너덜한 걸레짝이 되도록 싸우다가 결국은 마왕을 죽였습니다."


"싸움이 끝나자 몸 곳곳에 아이 머리만 한 구멍이 나고, 팔은 곧 떨어질 듯이 간신히 붙어있었습니다. 죽어버려도 상관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쓰러졌습니다. 다시 일어났을 때는 마왕이 되어있더라고요. 그 때 마왕이 무언가 중얼거리는 것을 보았었는 데, 아마도 그게 저주였나 봅니다."


"한 몇 십년쯤 지났을 때 였을 겁니다. 마계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고향 생각이 나서 한 번 가보았습니다. 원래 마왕을 끝끝내 쓰러트린 용사들의 이야기는 한 백 년쯤 화자되지 않습니까? 역사에 자기 이름이 기록될 것이라며 좋아하던 동료가 생각나서 가봤었는 데,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더라고요. 한 줄로도 남겨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저 어느 날 마왕이 끝끝내 사라졌다고 쓰여있었다면 다행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의 이름이 대신 쓰여있더라고요. 세상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았습니다. 그 동료도, 저도. 우리 모두를요. 솔직히 말하자면, 꽤나 씁쓸하더군요."


"그 후로는 계속 마계에서 지냈습니다. 지킬 사람들이 없어지니 남은 것은 복수뿐이더군요. 그래서 눈에 마왕이 보이기만 하면 죽여버렸습니다. 그렇게 계속 싸우고 싸우다가 천사들을 만났고, 그 후에는 알고 계시다시피 당신을 만나게 된 거죠."


이야기를 끝마치자 술에 취해 물러나 있던 두려움이 몰려들었다.

그의 피비린내나는 삶을 끔찍하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를 끔찍하게 여기면 어떻게 해야할까.


이래서 꺼내고 싶어하지 않던 이야기였다.

듣는 사람이 그를 끔찍하게 여길까봐. 그것이 두려워서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이야기를 제 안에 눌러 놓고서 곱씹고 곱씹기만을 반복했었다.

만약에, 이랬었다면. 죽어버려도 상관없는 목숨을 대가로 단 한 명이라도 살릴 수 있었다면. 그 때에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게 아니었다면.

그렇게 후회를 반복하면서 들릴 리 없는 사죄를 하고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한 남자가 자신을 위해 죽었던 사람에게 들리지 않을 사죄를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를 끔찍해 할까봐 그 이야기를 감춰왔던 자신을 역겨워했다.


"...많이 힘들었겠어요. 외로웠을 거고요."


그러나 다가온 시선은 혐오의 시선이 아니었다. 끔찍하다는 시선도 아니었다.

그저 걱정하는 시선일 뿐이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옛날 옛적에나 받아봤던, 한동안 잊고있었던 시선이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잘못한 것 없으니 맘 놓고 울어도 괜찮아요."


단 한마디에 불과할 뿐이었지만, 너무나도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 후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사람을 자애롭게 대하는 수녀에게 안겨 울고 울었던 것 만을 기억한다.


지치고 또 지친 이에게 드디어 찾아온 휴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