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편: https://arca.live/b/reader/39219092?p=3
그 날부터, 김독자는 연구소에도 반 년 휴직을 내고 집에 틀어박혀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첫 문장은 뭘로 할까.
어떤 필체가 적당할까.
자신이 좋아하던 웹소설 사이트를 전부 뒤져봐도, 맘에 드는 것은 없었다.
"끄응.. 무슨 글 쓰는 게 수능 공부하는 것보다 더 어렵냐.."
비록 책은 많이 읽어왔고, 학교 공부도 잘하는 그였지만 아무것도 없는 0의 상태에서 1로 발을 내딛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였다.
피타고라스의 공식, 로그 공식, 오일러 공식.
자신이 아는 그 수많은 공식들은 이제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마치 새로운 책의 첫 번째 페이지를 펼쳤을 때처럼, 그는 이제 미지의 세계로 막 발을 내딛은 것이다.
"흐으음.."
수 많은 문장이 그의 머릿속에서 떠돌아다녔지만, 정작 마음에 드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소설의 첫 문장.
그 첫 문장부터 한수영의 지친 심신을 달래야 했기에.
그런 이유로, 그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어떤 문장으로 시작해야 그녀가 바로 웃음을 지을 수 있을까.
과연 어떤 문장을 써야 그녀를 달래줄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을 하자 불현듯, 그의 머릿속에서 한 문장이 떠올랐다.
"그래. 이거야.."
김독자는 희게 웃었다.
키보드를 두들기는 그의 손가락이 잠시 머뭇거렸지만, 그러나 주저하지는 않았다.
흰 종이.
그 공백에 검은 잉크로 된 글자가, 발자국이 찍히듯 새겨졌다.
그 귀여운 흔적들을 바라보며 김독자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푸우우우.."
이렇게나 행복해도 좋은 것일까.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던 자신이, 이렇게 갑자기 행복해도 정말 괜찮은 것일까.
그에 대한 답은 자신도 몰랐다.
하지만, 다신 오지 않을 이 기회를 잡아야만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
그렇게, 반 년이란 시간이 흐르고.
오로지 자신만의 힘으로 써내려간 글자의 수도 이미 100만자를 훌쩍 넘겼다.
힘들지는 않았다.
혼자서, 끔찍한 환영 속에서 버티던 한수영에 비하면 이깟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였다.
".. 후우.."
어쩌면 그녀가 그 세월을 버텨온 이유도 자신 때문이 아닐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보답해야만 했다.
기다려줘서 고맙다고.
다시 내게 와 줘서 고맙다고.
그러니 이제 내가 당신을 지키겠다고.
말로 하기에는 부끄러웠기에, 그는 그저 글을 썼다.
"이제 마지막 문장이네.. 뭘로 해야 할까."
마지막 문장.
홀로 달려온 그 반년의 시간을 끝맺어야 할 시간이, 이제 다가오고 있었다.
첫 문장을 썼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또 다시 고민에 빠졌다.
"흐으음.."
마지막 문장은, 여운을 줘야 한다.
내가 왜 이 이야기를 썼는가.
내가 어떤 생각으로 이 이야기를 썼는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김독자는 픽- 하고 웃음을 지었다.
"생각해보니까 쉬운 거였어."
내가 이 이야기를 쓴 이유?
그런 건 간단해도 너무 간단하잖아.
오직 한수영을 살리기 위해서.
나를 살리러 돌아온 당신을, 이번에는 내가 살리기 위해서.
*
김독자는, 오랜만에 집을 나섰다.
손에는 종이를 엮어 만든 조잡한 책 한 권을 들고 차에 올라탔다.
퀭한 눈으로 커피를 들이키는 김독자의 손이 무심하게 운전대를 잡고 툭툭 두들겼다.
곧, 차가 한수영이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도착하자 김독자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네, 접수하러 오셨어요?"
"아뇨, 병문안이요."
간호사의 말에 대답을 하고, 병문안 목록에 자신의 이름을 적은 김독자가 흘낏 그녀의 병문안 목록을 보았다.
가끔 들린 유상아와 한명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고마웠다.
입고 온 정장과 흰 코트의 매무새를 점검하고, 김독자는 한수영의 병실의 문을 열었다.
덜컥-
손에는 커피가 담긴 머그컵을 든 채, 한수영이 창문만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는 순간, 김독자는 울컥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제 병실에 들어온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눈물만을 흘리는 김독자를 한수영이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기억해요?"
아무런 두서 없이 내뱉은 말.
김독자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한수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 뭐, 당연히 그렇겠죠. 병실에서 심심하죠?"
한수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김독자가 말을 이었다.
"저도 그래요. 그럴 때 저는 주로 책을 읽는데.."
그러자 한수영은 김독자의 손에 들려 있는 원고 덩어리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뭐냐고 물어보는 듯한 한수영에게, 김독자는 그것을 내밀었다.
"이걸 보시면, 제가 누군지 기억이 날 거에요."
무기질적인 손으로 그것을 받아든 한수영은 머그컵을 기울여 내용물을 한 잔 마시며, 그것의 첫장을 펼쳤다.
그 소설의 첫 문장은 이런 것이었다.
「이것은, 단 한 사람의 독자를 위한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