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다. 매우 덥다.

곧 열사병으로 쓰러져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덥다.

여름 날의 길거리에 서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할 법한 생각이었다.


불꽃 놀이가 있다던 날에 비 소식은 없었기에 다행이라며 기뻐했던 기억이 희미하게 일렁였지만, 과연 그게 다행이었는 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애초에 불꽃놀이를 마지막으로 하는 행사의 이름에 피서가 들어 있었다는 것부터 이 여름이 버틸 만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본디 비 오는 날에 습기와 더위의 환장의 콜라보레이션은 이보다 더 끔찍한 것이 없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녹아내릴 듯한 더위에는 습기의 자리를 땀이 대신하기 때문에 차라리 비 오는 날이 덜 끔찍하다는 생각이 든다.


덥다. 그 짧디 짧은 단어들만이 정신 사납게 떠돌아다니는 어지러운 머리를 이끌고 갈 만한 곳은 건물 안 쪽에 자리하고 있기만 하는 모든 곳이다. 남운은 가까운 곳의 한 카페를 발견하고서 옆을 돌아봤다.

땀에 젖어 흘러내리는 검은 묵빛 앞머리. 하얗지만 살짝 달아오른 뺨. 감길듯한 눈꺼풀에 가려진, 영롱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

확실히 아이돌 티가 나긴 하는.... 아니, 이게 아니라 확실히 더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하도 안쓰러워 보여서 별 도움은 되지 않겠나마는 손을 펴 손부채질을 해주었다.


"염룡아, 카페에서 뭐 좀 마실까? 가까운 데에 카페도 있는 데."

"...좋다."



-띠리링.


카페 문에 매달려 있던 종이 울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에어컨을 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서 오세요."

"아, 네."


전체적으로 하얀 분위기의 카페였다. 연한 아이보리색의 벽지로 둘러싸인 카페의 가운데에 자리하는 갈색의 카운터가 눈에 들어왔다. 책상에 남아있는 나뭇결을 보아 나무로 만든 책상 같았다.

고개를 올려 메뉴판을 바라봤다. 아메리카노나 라떼 종류는 알 법했지만 아포가토나 캐러멜 마키아토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카페에 왔던 것이 시나리오 전, 그것도 중학생 때의 일이니 모를법했다. 메뉴판도 대충 보고서 진한 에스프레소가 안 된다는 것에 아쉬워하며 그냥 주스나 시켰으니 당연한 일이다.

핸드폰으로 무슨 메뉴들인지 대충 찾아보고 아포가토를 골랐다. 처음 보는 메뉴를 먹어보고 싶기도 했고, 아이스크림에 아메리카노를 붓는 메뉴라면 시원하고 좋을 것 같았다.


"염룡아, 뭐 먹을 래?"

"난 에스프레소 더블샷 먹을 래."


아메리카노면 모를까 에스프레소 더블샷이면 너무 쓸 텐데. 흐르는 땀이 긴장 때문인지 아니면 아까 전의 더위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봐도 허세 같았다. 아메리카노도 구석에서 물 타서 먹던데 에스프레소 더블샷은 먹을 수나 있을 까.

에스프레소를 멋모르고 들이켰다가 써서 뱉을 뻔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더블 샷이면 더 진할 텐데 과연 괜찮을까.


"많이 쓸 텐데?"

"괜찮아."


아, 이거 허세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먹고 뱉지나 않으면 다행일 텐데.

허나 지금은 말릴 수 없었다.


"...그러면 에스프레소 더블샷이랑 아포가토 하나 주세요."

"알겠습니다."


-


-지잉 지이잉.


탁자에서 진동벨이 울렸다. 음료가 다 되었다는 신호이자 염룡을 어떻게든 말려야 한다는 신호였다.

염룡이 자리에서 일어섰고 남운도 따라 일어섰다.


"내가 갈게."

"아니, 괜찮아. 내가 들고 올게."


남운은 카운터에서 음료를 들고 탁자로 향했다. 쓰디 쓴 에스프레소의 향이 진하게 풍겨왔다. 불길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염룡아, 혹시 에스프레소는 내가 먹어도 될까? 내꺼 줄게."

"내 건데..."

"미안해. 딱 한 번만 들어주라, 응?

"알았어..."


시무룩한 모습을 보니 무언가 미안해졌지만, 마시고 뿜는 경험을 겪게 하는 것보다는 시무룩하고 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앞에 놓여진 음료를 맞바꿨다.

물씬 풍겨오는 쓴 향에 점점 불안해졌다. 염룡이가 먹는 것을 보는 것보다는 그냥 마시는 게 나았지만, 그렇다 해서 반길 수 있을 정도로 좋은 것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염룡이 아이스크림에 아메리카노를 붓고 숟가락으로 떠냈다. 그와 동시에 남운은 에스프레소가 담긴 잔을 들어 조심스럽게 마셨다.


마셨던 에스프레소는 너무나 썼다. 순간적으로 뱉을 뻔 했던 남운은 입안에 머금은 커피를 빠르게 목으로 넘겼다.

요즘 재수에 옴 붙었나. 그냥 더블샷도 아니고 도피오네. 기억하는 것보다 두 배로 쓴 맛에 정수기에서 물을 떠와 마셨다. 추억보정의 효과 때문에 원래 보다 덜 쓰게 기억했는 지도 몰랐다. 설탕을 말 그대로 들이부어도 무용지물이고 아깝다고 다 마시는 건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그런 미친 짓을 하는 것은 김독자 컴퍼니의 사장으로부터 이어진 관습이다. 남운은 컵의 손잡이를 쥐고 한 번에 들이마셨다.

에스프레소는 입이 써서 죽겠다는 말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게 될 정도로 썼다. 물로 몇번을 헹궈내도 떫고 쓴 맛은 여전했다.


그래도 염룡이 먹는 것은 피했다며 안도감에 작게 웃었다. 염룡은 남운이 어째서 그러는 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


여름 날의 아침도 만만찮지는 않게 덥지만, 그와 궤를 달리하는 게 오후였다. 더욱 뜨거워진 햇살 아래에 있는 것은 자살시도라 불러도 무방했다.


남운과 염룡은 상가 건물의 실내에서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여러 상점들이 커다란 한 건물 안에 모여있는 형태의 상가건물이었다.


여러 상점들이 한 데 모여있어서 그런지 상가에는 간단하고 다양한 물건들을 파는 잡화점도 있었다. 소품용이나 장식품으로 자주 쓰이는 안대도 팔던 그런 가게가.

남운은 새까만 안대를 바라보았다. 까만 색의 안대가 염룡에게 제법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적안에 흑발이라면 검은 색 옷을 입는 게 멋지던데, 안대도 그렇지 않을까 싶었다.


"염룡아, 한 번 와봐. 이건 어때?"

"까만색 안대네? 꽤 괜찮긴 한데, 멋지고."

"그러면 커플 안대 할래?"

"어... 어?"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 하다 커플이라는 두 글자에 놀라 얼굴이 붉어지는 모습은 꽤 귀여웠다. 그냥 서로 같은 것을 하자는 의미보다는 커플이라는 단어 자체에 포함된 의미로 이해한 것 같았다.

반응이 하도 다채롭고 얼굴이 자주 빨개져서 그런지, 언제나 놀려먹기 딱 좋은 상대였다.


"뭐야,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길래 얼굴이 빨개진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원래 커플이라는 말은 사귈때 쓰는 거잖아!"

"뭐래, 그냥 같은 거로 맞추자는 거였거든? 커플룩도 봐라, 꼭 커플만 하디?"


염룡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 더욱 새빨개진 얼굴은 뜨거워보일 정도였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려 애쓰는 게 한 눈에 보였지만, 얼굴에서 다 드러나서 별로 소용없었다.


-


"김남운, 안대에 각인도 할까?"


잡화점에서는 하나의 행사가 있었다. 운이 좋게도 안대와 관련된 행사였는 데 안대를 사면 글자 각인을 무료로 해주는 행사였다.


"좋지. 우리 이니셜 한 글자씩 적을래? 너는 S로 하고 나는 N으로 하면 되겠네."

"그냥 둘다 적으면 안 되나? 같이 맞추는 거잖아."

"그래, 그러면 그렇게 하지 뭐."


남운은 각인을 해주는 장소 앞으로 걸어갔다. 각인을 하는 기계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글자를 새기고 있었다.


"저기 각인 좀 할려고 하는데요, S하고 마침표 찍고 N하고 마침표 써주실래요?"

"말해주실 필요는 없고 그냥 여기 있는 종이에 적어주시면 됩니다. 조금 있다가 해드릴게요."


남운은 직원이 가리킨 종이에 S.N.을 적었다. 그리고 남운을 따라서 염룡도 종이에 각인할 글자를 적었다.


"여기 있습니다."


염룡이 각인한 안대를 받아들었다. 남운은 자신의 안대를 들고 가까이 다가갔다.

염룡의 안대에는 N.S.가 적혀있었다. 상대의 이니셜이 앞에 오게 한 것은 저도 마찬가지라 이런 부분에서도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염룡아 안대 쓰고 같이 사진 찍을래?"

"그래, 좋다."


하나, 둘, 셋.

셋하는 소리와 함께 사진이 찍혔다.


당사자인 둘은 몰랐겠지만, 데이트 나온 커플처럼 보이는 사진이었다.


+더블샷을 자꾸 데블샷으로 오타를 내서 골치 아팠다. 서네번을 고쳐야 했음;

+다음편이 마지막 편.

+놀이공원 뒷부분 써주기로 한 거 아직 안 잊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