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 추카!! 메리 클쓰마쓰.
"설화 팩 남은 것 없어요?!! 아… 설화 팩 좀 빨리 빨리 채워넣으라니까!!"
도깨비 왕들이 떠난 그 곳에서 공단의 병원까지 날아오기까지, 그 거리는 결코 짧지 않았다.
유중혁의 몸은 파들파들하게 떨렸고, 이내 창백한 빛을 띄었다.
원래라면 [회귀]가 발동되었을 시점이었다.
하지만 유중혁은 더 이상 회귀자가 아니었다.
"중혁 씨…!! 중혁 씨!!! 안 돼!!!"
"설화 씨, 들어오면 안 돼요!! 현성 씨, 설화 씨 좀 막아주세요!!"
이설화의 흐트러진 머릿결도, 정돈되지 않은 옷 매무새도,
이설화은 의선이 아닌 잔뜩 무너진 모습으로, 애타게 유중혁을 부르짖고 있었다.
온전히 멸망을 상정한 상황 속에서, 일행들의 얼굴은 모두 일그러져 있었다.
이현성이 이설화를 들어 병원 밖으로 데려가기까지, 그 상황은 계속되었다.
나는 999회차의 유중혁이 되길 원했다.
차라리 내 사지가 뒤틀리는 한이 있더라도, 동료들 만큼은 무사히 시나리오를 마치길 빌었다.
하지만 나는 그 회차 속 유중혁이 얼마나 무거운 이야기를 살아가고 있었던 것인지,
몇 번이고 그 이야기를 돌려보았지만 망각하고 있었다.
유중혁, 너는 대체 어떤 마음으로 그 회차를 살았던 거냐…
---
병원의 비어져 있는 한 병실 속, 우리는 진정된 이설화와 함께 유중혁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외부에서 간신히 공급 받은 설화 팩으로, 유중혁이 수술에 들어간 지 벌써 하루가 채 지난 시간이었다.
그 시간 우리는 불안감에 휩싸이지도, 이른 슬픔에 빠지지도 않았다.
그냥 현재 상황에 체념한 채, 사라져 갈 것만 같은 의식을 간신히 붙잡고 외로이 버티고 있었다.
이것은 이설화도 마찬가지였다.
드르륵-
이윽고 병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아일렌이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현재 유일하게 유중혁의 설화를 수선할 수 있는 사람, 아일렌의 얼굴은 피로에 찌들어 있었다.
"일단 수술은 잘 끝난 것 같아요. 다시 일어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하…."
유중혁이 살아는 있다는 말에, 일행들은 메마른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유중혁은 다시 일어날 것이다.
그 시간이 얼마가 됐든, 결국엔 우리의 곁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는 유중혁이니까.
일행들은 모두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고독하지만, 가장 강한 사람.
유중혁은 그런 사람이었다.
"설화 씨, 중혁 씨라면 분명히 돌아올 거예요. 꼭…."
정희원이 이설화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녀를 위로했다.
"네, 알아요…. 중혁 씨는 강한 사람이니까."
"…그럼 이제 알려주세요."
여리지만 단단한 목소리가 나에게로 다가왔다.
교복 차림이었던 유승이가 고개를 들고 걸어왔다.
비록 지금은 내가 그 관계를 가로채갔지만,
멸살법에서 유중혁과 가장 지독하게 인연이 얽혀 있던 것은 유승이였다.
믿고 따르는, 멸망한 세계 속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어른에서,
자신을 버린, 찢어 죽이고 싶은 원수가 되기까지,
그 모든 설화는 세계선의 흐름을 타고 우리의 세계에게 까지 닿았다.
유승이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아릿거렸다.
유승이에게, 그리고 다른 일행들에게 대채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의 고민에 대답이라도 하려는 듯, 곧 푸른색 시스템 창이 우리에게로 도착했다.
*
<특수 시나리오-도깨비 왕 저지>
분류: ???
난이도: 측정불가
클리어 조건: 가장 오래된 꿈의 힘을 흡수하려는 도깨비 왕과 대적해 세계의 멸망을 저지하십시오.
제한시간: 없음
보상: 없음
실패 시: 세계선 멸망
[시나리오의 난이도가 비약적으로 높습니다!]
[스타스트림 시스템이 임의적으로 시나리오의 난이도를 조정합니다!]
[클리어 조건이 변경됩니다!]
클리어 조건: 시나리오 속에서 부활한 성좌들과 힘을 합쳐, 가장 오래된 꿈의 힘을 흡수하려는 도깨비 왕과 대적해 세계의 멸망을 저지하십시오.
*
도깨비 왕들이 가장 오래된 꿈의 힘을 개연성을 통해 저지하려고 발행한 임시 시나리오.
그 시나리오가 성간의 핵심에 걸쳐 스타스트림을 통해 특수 시나리오로 정식 발행된 참이었다.
가장 오래된 꿈, 세계선의 멸망, 도깨비 왕과의 대적.
세가지 키워드가 유승이의 질문에 답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시나리오의 악몽.
모두가 그 끔찍한 기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때였다.
"근데 시나리오가 사람들에게 퍼지면… 좀 위험한 것 아니에요?"
유상아 씨의 질문은 옳았다.
비록 마지막 시나리오를 클리어 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고 하더라도, 아직까지도 시나리오의 화신들과 그때의 악몽을 겪었던 사람들의 다수가 세상에 남아있었다.
또 세상은 그때의 비극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시나리오의 역사를 그 어떤 설화보다 자세히 교육했다.
이 세상에서 시나리오는, 그 모든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만약 우리에게 시나리오가 발송된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도 시나리오가 도착했다면…
나는 유상아 씨의 질문에 말을 잇지 못했다.
김독자 컴퍼니의 회장, 세상을 지켜낸 구원의 마왕, 그리고 세계의 가장 오래된 꿈.
그 막중한 책임감을 지고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때 병실의 허공에서 작은 스파크가 일었다.
타닥타닥 거리는 노란색 스파크.
그리고 곧, 그 스파크 속에서 생명체 하나가 나왔다.
[…아버지.]
상아 색 외뿔과 부들거리는 흰 털.
세상에 마지막 남은 우리 세계선의 도깨비 왕, 비유였다.
"비유야, 마침 잘 왔어. 그 시나리오 좀…!!"
[걱정 마. 성좌랑 몇 명 화신들에게만 메시지가 가도록 조치해 놨으니까.]
정희원을 향해 대답하는 비유의 목소리는, 어딘가 피로에 물들어 있었다.
솜털 사이로 가려진 굵직굵직한 상처들,
안정되지 않고 허공으로 곳곳이 퍼지는 도깨비 왕의 격.
그리고, 한번도 본 적 없는 잔뜩 일그러진 비유의 얼굴.
[…대장은… 대장은 무사해?]
비유가 물었다.
하지만 우리들 중 아무도 비유의 물음에 답하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떨어지는 눈물을 흘려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우리들의 침묵에 비유가 답했다.
[…집으로 갈게. 다들 집으로 와.]
이윽고 전류가 튀는 소리와 함께 또 다시 허공에서 노란 스파크가 튀었다.
비유는 그렇게 사라졌다.
병실 천장에 거대한 균열을 남겨 두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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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비유 넌 꼴이 왜 그래? 어딜 갔다 온 거야?"
공단에 위치한 큰 집.
일행들, 그리고 시나리오를 받고 급하게 달려온 안나 크로프트까지, 모두가 식탁 앞으로 모였다.
비유는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식탁에 팔을 기댄 채 희원 씨의 질문에 답했다.
[모든 세계선의 도깨비 왕들은 서로 다른 존재야. 각 세계선 마다 도깨비 왕들은 서로 성격도, 설화도, 그 힘도 모두 다르지. 걔네들이 처음 도착했을 때, 난 분명히 느꼈어. 내가 시간 단층에 굴러 먹다 왔어도 절대로 이기지 못 할 놈들이라고….]
"그래서 어딜 갔다 온건데?"
한수영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물었다.
[신격의 왕들을 찾으러.]
"뭐?"
나와 일행들은 모두 비유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위대한 이계의 신격.
이계의 신격의 왕.
그리고 999회차의 유중혁의 동료들.
살아있는 불꽃, 가라앉은 섬의 주인, 은빛 심장의 왕, 위대한 심연의 군주.
그 존재 하나하나 만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성좌의 절반을 쓸어버릴 수 있을 뿐더러,
세계선의 멸망을 주도할 수 있는 말 그대로 재앙들.
그들이 아무리 이야기의 왕, 도깨비들의 왕이라고 하더라도,
4명의 위대한 신격들을 이길 리는 없었다.
더군다나 은밀한 모략가까지.
그들을 데려온다면, 분명히 승산은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래서, 오신답니까?"
이현성이 물었다.
그 물음에 우리는 숨을 참았다.
마치 세상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아니.]
비유의 말에, 우리는 모두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만나지도 못했어. 시스템이 미치는 곳 경계까지 모두 돌아봤지만, 그 어디에도 신격들의 설화가 남아있는 곳은 없었어.]
사실 당연한 것이었다.
그토록 스타스트림 시스템에 농락 당해온 그들이,
세계에 의해 운명을 강제 당하고, 비극을 갈무리해야만 했던 그들이,
다시 성류 속으로 돌아와 시스템 아래에서 살아갈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회귀자. 에덴의 수호자. 대해의 군주. 강철검제. 망상악귀.
그들은 그 모든 칭호를, 그들의 삶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설화를 저버리고, 다시 일상 속으로, 더는 화신이 아닌 사람으로써, 늙어가고 노후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행복이고, 결말이었다.
우리가 그것을 마음대로 빼앗을 권리는 없었다.
한수영이 얼굴을 감쌌다.
그 막막한 심정을, 일행들 모두가 공유했다.
"그럼 이제 어떡해? 김독자 얘는 힘도 제대로 못 쓰는데."
집단회귀를 거치고, 신화급 성좌들 사이에서도 격을 달리하는 우리엘, 제천대성.
그리고 이젠 당당히 신화급의 자리를 차지하는 흑염룡까지,
어쩌면 이 세계의 최강이라고 할 수 있는 별들이 그들에게 무참히 짓밟혔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일행들이 나를 바라보았다.
-"김독자, 기회는 한 번 뿐이다."
-"내겐 늘 한 번 뿐이었어."
시나리오 속에서 기회는 언제나 한 번 뿐이었고, 일행들은 그 귀중한 기회 속에서 모두 내게 답을 갈구했다.
나는 이 세계의 끝을 알고 있는, 단 하나의 독자이다.
나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지도, 비범한 전투력을 가지지도, 강력한 성흔을 가지지도 못했다.
나는 그저 독자(讀者)였다.
그것이, 내가 언제나 답을 찾아낼 수 있었던 방법이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이야기가 끝난 지금에서, 나는 무엇일까.
내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시나리오를 맞이하는 것이 이런 기분이었구나.
어쩌면, 나는 내 일행들을 농락한 것이 아닐까.
"독자 씨…."
상아 씨가 내 이름을 불렀다.
일행들은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물음에 답해야 한다.
이 세상의 유일한 독자(獨子)로써.
나는 독자다, 나는 독자다.
이 세상의 유일한 독자(讀者)로써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이야기 속에 있었다.
[특정 구간에 대한 기억력이 상승합니다!]
「유중혁은 그에게 흑천마도를 들이밀었다.
그리곤,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래…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사내여, 그리 궁금해 하니 말해주마.]
오래된 성좌의 진언에, 밤하늘의 별들이 귀를 기울였다.
그 이야기는 마치 동화처럼, 또 매력적인 설화처럼 세상에 존재감을 과시했다.
[아주 오래 전, 멸망이 시작되고, 설화의 주신들 조차 시나리오에 매진하고 있었을 적에, 성좌들이 힘을 합세 해 도깨비 왕에게 대적한 적이 있었지….]
"그 성좌들이 누구였지?"
[지금의 명계와 대적했던, 동양 지옥설화의 성운 '저승', 그리고 '수메르', 성운 '베다'와 설화의 저작권을 두고 경쟁을 벌였던, 성운 '야자타'와 '다에바', 현재에도 잔존하는 '올림포스'의 일부 성좌들과, '황제'의 성좌들까지. 지금은 설화조차 전승되지 않는, 그 당시에는 거대한 성운이었던 그들이 이야기의 왕에게 전투를 벌였지.
유중혁은 검을 거두었다. 그리곤 가차 없이 뒤를 돌아, 새 시나리오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 주위에는 이지혜도, 이현성도, 김남운도 없었다. 이번 회차에서 그는 오로지 혼자였다. 어쩌면, 앞으로의 모든 회차에서도 그는 혼자일 수도 있었다. 1000번을 넘어서는 삶 속에서,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큭큭… 그래 다음 이야기는 들을 필요도 없었겠지. '저승', '수메르', '야자타', '다에바'. 그 거대 성운들이 지금은 설화조차 전승되지 않은 채 사라진 이유. 그날 밤, 여명 속 세상의 모든 별자리 중 1/3이 대지로 추락했다. 하지만 아무런 이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어. 세계의 신이라던, 그 이야기 왕에게 치명상을 입혔으니…. 회귀자여, 너의 이야기를 존중하는 존재로써, 너의 회귀가 이 곳에서 멈추기를 바란다. 어쩌면, 네가 이야기의 왕을 이길 수 있는 회차는 오로지 지금일 것이다.]」
멸살법에서도 극히 드물었던 도깨비 왕에 대한 묘사,
그럼에도 그들의 강함은 분명히 직감할 수 있었다.
세계의 모든 성좌들의 1/3을 혼자 휩쓸어버릴 수 있는 강함.
최후의 벽에서라면, 위대한 신격들과 은밀한 모략가의 공세에도 합을 겨룰 수 있는 강함.
그들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지금 당장 찾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로, 가장 강력한 방법으로.
도깨비 왕을 저지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
"…그들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단 하나 있습니다."
어쩌면 너무 무식하고, 우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강력했다.
나는 푸른색 시스템 창을 띄워, 시나리오 메시지를 가리켰다.
시나리오의 클리어 조건 중 일부.
스타스트림 시스템이 난이도를 조정하기 위해 우리에게 부여한 핸디캡.
그 가치는 분명히 성간의 핵심을 통과했다.
[ …시나리오 속에서 부활한 성좌들과 힘을 합쳐…… ]
"유상아 씨, 정희원 씨, 이현성 씨. 이동할 준비 좀 해주십시오. 안나 씨, 저희는 아스가르드로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