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트를 비집고 들어오는 날카로운 바람,
곳곳에 보이는 다정한 연인들,
길가의 한편에서 들려오는 캐롤까지.
주위의 모든 풍경들은 오늘이 크리스마스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정신없이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는 한 여성.
추운 날씨 탓에 그녀의 모든 숨결이 하얀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무한 차원의 아공간 코트]는 김독자보다 작은 그녀의 체형에 맞게끔 조금 아담해져 있었다.
한참 동안이나 숨을 고르던 그녀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핸드폰을 꺼냈다.
[11:57]
"헉... 헉... 하마터면 늦을 뻔했네. 이제 거의 다 왔으니 조금은 천천히 가도 되겠지?"
제 호흡을 되찾은 그녀의 눈앞에 보이는 건 높은 건물들과 화려한 장식, 그리고 웃고 떠드는 가족과 연인들이었다.
'방에 처박혀서 글만 쓸 때는 잘 몰랐는데...'
그녀가 [전지적 독자 시점]을 쓰는 동안 시간은 꽤나 흘러있었고, 어느새 다음 해가 다가오고 있었다.
집단 회귀를 마치고 온 지도 벌써 3년이 다 되었지만, 여전히 이런 풍경을 볼 때면 김독자가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후..."
뜨거워 지려는 눈을 애써 식혀보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보았던 풍경, 사람들,
그리고 그녀가 지금 올려다보고 있는 이 하늘까지.
모든 게 김독자가 지켜낸 것이었다.
김독자.
그 세 글자는 그녀를 잠시 멈춰세우기에 충분했다.
이 세계를 지켜보아야 했던 [가장 오래된 꿈].
그녀가 구해내지 못한 그는 이제 파편이 되어 곳곳으로 흩어져 있었다.
잠시 벤치에 걸터 앉은 그녀의 생각은 점점 더 복잡해져가고 있었다.
아직도 세계선을 떠돌고 있는 유중혁, 그리고 돌아올 수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은 김독자.
모두와 함께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고자 했던 그녀의 계획은 성공보다는 실패에 가까워져가고 있었다.
그 계획이 오히려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그녀는 조금씩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흑... 흐윽..."
집단 회귀를 거치고도 그를 돌려받지 못한 데에 대한 서러움일까.
'시나리오 때는 웬만해서는 우는 일이 없었는데...'
슬픈 일에도 항상 담담했던 그녀는 이곳으로 돌아온 뒤 부쩍 눈물이 많아졌다.
"씨이... 이게 다 김독자 너 때문이잖아..."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무뎌진 시간의 틈새로 흘러나온 추억은 아직도 이따금씩 그녀를 슬픔에 잠기게끔 했다.
그날, 그 지하철에서 그냥 내리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너를 잃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 생각의 끝에 오는 건 항상 후회와 절망감.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너를 다시 볼 수는 없을까......"
그녀의 눈빛이 서서히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아니, 차라리 내가 멸살법을 쓰지 않았었더라면..."
무수히 많은 가정을 해보며 멍하니 바닥만 바라보고 있던 그때, 그녀의 손위에 하얀 꽃 한 송이가 살포시 내려앉았다.
"눈..."
고개를 들자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 눈이야!"
주변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눈까지 내린 오늘이 저 사람들에게는 아마도 완벽한 크리스마스로 남을 것이다.
크리스마스에 분위기를 더해주는 이 눈이, 그녀에게는 김독자의 대답처럼 느껴졌다.
이제 자신을 포기해도 괜찮다고, 자신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차가운 공기를 속에서 어렴풋이 들리는 것 같은 그의 목소리.
그녀의 기억 속에 있던, 그와 맺었던 약속이 또 한 번 떠올랐다.
「 "언젠가."
"언젠가 이 모든 시나리오가 끝나면, 다시 소설을 쓰고 싶어질지도 몰라."
"그때, 내 소설을 읽어줘."
"네 소설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일 먼저 읽을 기회를 주는 거야."
"난 그렇게 좋은 독자는 아닌데."
"토 달지 말고 읽으라면 읽어."
"알았어. 읽을게."
생각보다 흔쾌히 제안을 수락하는 김독자.
한수영은 그런 그의 반응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재차 물었었다.
"······진짜로?"
"진짜로."
"어쩌면 3천 편 넘을지도 몰라."
"딱 내 취향이겠네."
"재미없을지도 몰라."
"네가 쓰는데 재미가 없겠냐?"
"무슨 장르로 쓸 건데?"
"그건 그때 봐서······."
"로맨스는 어때?"
"······로맨스를 어떻게 3천 편이나 쓰냐?" 」
너에게 전하지 못한 말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3천 편짜리 로맨스도 그중 하나였다.
언젠가, 모든 시나리오가 끝났을 때,
너에게 말하고 싶었다.
너와 같이 로맨스를 써 내려가고 싶다고.
하지만 김독자는 언제나 같이 그녀를 떠나간 지 오래였다.
벤치에서 일어난 그녀는 얼마 남지 않은 약속시간을 확인하고는 다시 바쁘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딘가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김독자를 상상하며 그녀는 소원 하나를 빌었다.
만약 네가 정말로 그곳에 있다면,
그리고 네가 여기로 돌아오지 않을 거라면,
내가 너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해줘.
그러나 한수영이 김독자를 너무나 사랑하고 있기에,
그러면서도 여전히 김독자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기에
그녀의 소원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녀도 그것을 아는지 또 다른 소원을 빌었다.
이 이야기가 너를 살릴 수 있기를.
그리고 네가, 다시 한번 나를 기억해 주기를.
아직 그녀의 작품은 끝나지 않았고 희망은 미약하게나마 남아있었다.
'다음 크리스마스 때에는 혼자가 아니었으면 좋겠어.'
그녀의 작은 소망을 남겨둔 채 그녀는 눈이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조금씩 내리던 눈은 이제 세상을 조금씩 하얗게 덮어가고 있었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멀리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수영 언니!"
"수영 씨!"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들의 형상이 조금씩 더 뚜렷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김독자는 없었지만, 그가 남긴 사람들은 여기에 있었다.
그들 덕분에, 그녀는 혼자가 아닐 수 있었다.
"빨리 와!"
다음 크리스마스 때에는 너도 이곳에서 우리와 연말을 함께할 수 있을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추측들이 머리를 스쳐갔지만 지금의 그녀가 알 수 있는 건 오직 한 가지였다.
네가 돌아오는 그 날까지, 우리 모두는 계속 이곳에 남아 너를 기다릴 거라는 것을.
그날이 올 때까지, [김독자 컴퍼니]의 모두는 서로를 의지할 것이다.
어느새 그녀는 일행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김독자의 능글맞던 웃음을 따라 해보려 애쓰며, 그녀는 마치 김독자 처럼 말했다.
"나 왔어! 좀 늦었지?"
이제 누군가 독수 데이트를 써오겠지
일주일전에 쓰던거 급하게 제물로 투척
600 축전도 이걸로 때울게